LOGIN오후 8시 15분.
H건설 신사업팀.
세이 앞에 나타난 서하강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길인지 재킷 단추는 풀려 있었고, 넥타이도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세이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
“이제 가려고요.”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세이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하강은 돌아가지 않았다.
모니터를 내려다봤다.
“오늘 현장 검토자료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존에 담당하던 공사비 산출 자료입니다.”
“아직 안 끝났어요?”
“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하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덟 시 넘었는데.”
“네.”
“내일 하셔도 되잖습니까.”
세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너무도 쉽게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내일 오전에 관련 부서로 넘겨야 해서요.”
“그럼 오 팀장에게 일정 조정하라고 하죠.”
“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마무리하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습니까?”
세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오늘 하루 종일 눌러 두었던 피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사님.”
“네.”
“제가 오늘 오전에 이 업무를 끝냈어야 했습니다.”
하강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데 하루 종일 이사님 일정에 동행하느라 제 업무를 하나도 못 했습니다.”
세이는 말을 멈췄다.
너무 많이 말했나 싶었다.
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지시가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
“다만 제게는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사님께서는 하루 일정을 마치셨지만, 저는 이제 제 업무를 시작한 셈이라서요.”
하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이는 그의 침묵에 뒤늦게 긴장했다.
“앞으로도 외근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동행하겠습니다. 대신 가능하면 일정만 조금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다시 공손해졌다.
하강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화를 낼 줄 알았다.
자신에게 감히 업무 지시를 따지느냐고.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오늘 저녁은 먹었습니까?”
“……네?”
“식사요.”
세이가 눈을 깜빡였다.
“아직 못 먹었습니다.”
“왜요?”
순간 세이는 할 말을 잃었다.
‘왜냐고?’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닌 사람이 그걸 묻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일이 남아서요. 마무리하고 먹으려고 했습니다.”
하강은 그녀의 책상에 놓인 식은 커피를 보았다.
“그렇군요.”
짧은 대답이었다.
세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저는 마무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강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알겠습니다. 진 대리도 수고해요.”
“감사합니다.”
그는 더 붙잡지 않았다.
돌아서 복도로 걸어가던 하강이 잠시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세이는 이미 모니터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 거기 서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강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강은 곧바로 구본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 실장.”
“네, 이사님.”
“지금 바로 일식 도시락 하나 포장해서 진세이 대리에게 전달하세요.”
망설임 없는 명령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이사님께서 보내셨다고 말씀드릴까요?”
“그냥 야근 직원 식사 지원이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하강은 전화를 끊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깨에 맞춘 수트도, 반듯한 넥타이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조금 우스웠다.
하루 종일 일을 시켜 놓고, 저녁은 챙겨 먹으라고 도시락을 보낸다.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여자가 자신 때문에 저녁까지 굶었다는 사실이 거슬렸을 뿐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
밤 9시.
에이치호텔 20층 루프탑 바의 구석 자리.
박도현은 맞은편에 앉은 하강을 보며 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먼저 보자고 하는 날도 다 있네.”
“물어볼 게 있어.”
“의사로서? 친구로서?”
“둘 다.”
도현이 웃었다.
“그럼 진료비 두 배로 받아야겠는데.”
하강은 웃지 않았다.
도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무슨 일인데.”
하강은 잠시 잔을 내려다봤다.
얼음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내 몸 말이야.”
도현의 손이 멈췄다.
“왜.”
“반응했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뭐?”
“네가 들은 그대로.”
“언제?”
“어젯밤.”
“약은?”
“안 먹었어.”
“다른 치료는?”
“없었고.”
도현은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럼 갑자기?”
하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자 하나가 우연히 닿았어.”
“그래서?”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지. 그런데 조금 뒤에 다시 닿았을 때도 같았어.”
도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오랫동안 하강을 진료해 온 사람이었다. 그의 몸이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말이야?”
“이런 걸로 농담할 이유가 있겠냐.”
“대체 누군데?”
하강은 잠시 침묵했다.
“회사 직원.”
“……회사 직원?”
도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야, 서하강. 너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냐?”
“아무 짓도 안 했어.”
“근데 직원이랑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겨?”
“회식 자리에서 넘어졌어. 내 쪽으로.”
도현은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지금 그 여자는?”
“회사에 있지.”
“네가 찾아봤어?”
하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아봤네.”
“일 때문에.”
“뭔 일.”
“프로젝트.”
“그래. 프로젝트.”
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설마 그 여자랑 뭘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
하강이 고개를 들었다.
“하면 안 되냐?”
“아이고, 서하강.”
도현이 이마를 짚었다.
“내가 의사로서 얘기할게.”
“해.”
“실제로 신체 반응이 있었는지, 그게 일시적인 건지부터 확인해야 해. 심인성 문제라고 해도 사람 하나 만났다고 갑자기 완치되는 건 아니니까.”
“그건 나도 알아.”
“알면 환자답게 굴어. 네 멋대로 회사 직원 붙잡아 놓고 실험하지 말고.”
“실험이라니.”
하강이 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 여자한테 네 권력부터 들이밀진 마.”
도현이 말을 이었다.
“넌 부탁이라고 생각해도, 그 여자한텐 명령일 수 있으니까.”
하강은 얼음이 녹아가는 잔을 바라봤다.
“나도 알아.”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근데 12년 만이야.”
하강이 잔을 내려놓았다.
“나도 혼란스럽다고. 그렇다고 당장 그 여자한테 들이댈 수도 없잖아.”
도현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서하강이 자신의 혼란을 인정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연애를 해보든가.”
하강이 피식 웃었다.
“연애? 미친놈.”
“왜? 그 여자 별로냐?”
“아니 뭐…… 그냥…… 평범해.”
도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서하강 이 새끼, 싫진 않은가 보다?”
하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여자부터 알아봐. 네 몸 말고.”
“알아보고 있거든.”
“회삿일 시켜 가면서?”
“…….”
“야, 그건 연애가 아니라 업무 지시야.”
하강은 대꾸하지 않았다.
도현이 잔을 들어 올렸다.
“사람을 병명으로만 보면, 나중에는 사람을 잃어도 왜 잃었는지 모르게 돼.”
하강은 잔을 쥔 손끝에 힘을 주었다.
*
밤 9시 20분.
H건설 신사업팀.
세이는 막 마지막 파일을 저장하고 있었다.
그때 책상 옆에 놓인 종이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 구본 실장이 보내왔다는 도시락이었다.
고급 일식집 이름이 적힌 두툼한 종이봉투 안에는 정갈한 도시락과 국이 들어 있었다.
[야근 직원 식사 지원]
비서실에서 전해준 말은 그것뿐이었다.
세이는 뚜껑을 열었다.
은은한 음식 냄새가 올라왔다. 하루 종일 식은 커피로 버틴 속이 그제야 허기를 알아차렸다.
세이는 젓가락을 들었다.
누가 보냈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사실 구본 실장이 신사업팀 대리 하나의 저녁 식사까지 챙길 이유는 없었으니까.
참 이상한 분이야.
낮에는 사람을 하루 종일 끌고 다니더니, 밤에는 밥을 보내준다.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세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막상 도시락을 한 입 먹자 든든한 음식이 빈속을 채웠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저녁이었다.
세이는 잠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낮 동안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진 대리.
진세이 대리.
보고할 때마다 안경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
그리고 밤늦게 사무실까지 내려와 식사는 했느냐고 묻던 얼굴.
그는 분명히 이상했다.
업무에 지나치게 집요했고,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또 이런 식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이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내일은 제발 안 부르셨으면.
그것이 오늘 밤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
도현과 헤어진 하강은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짙게 선팅된 차창 위로 흐르고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구본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세이 대리 식사 전달 완료했습니다.]
하강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
[수고했어요.]
화면이 꺼졌다.
그런데도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오늘 하루가 이상했다.
현장에서 도면을 펼쳐 들고 조목조목 설명하던 여자.
자신의 지시를 거절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업무 일정을 지키려 애쓰던 여자.
그리고 밤늦게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여자.
하강은 미간을 좁혔다.
박도현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여자한테 네 권력부터 들이밀진 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하강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저 우연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여자에게만 반응하는 것인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강은 구본이 보내온 다음 날 일정표를 열었다.
오전 10시. H-스테이 코어 공사비 검토.
담당자란은 비어 있었다.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담당자 이름을 입력했다.
진세이.
그 시각, 세이는 도시락을 다 먹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만큼은 그 남자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서하강의 다음 날 일정표에는 이미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오후 8시 15분.H건설 신사업팀.세이 앞에 나타난 서하강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퇴근하려던 길인지 재킷 단추는 풀려 있었고, 넥타이도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세이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이사님.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까?”“이제 가려고요.”“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세이는 허리를 숙이고 다시 자리에 앉으려 했다.그러나 하강은 돌아가지 않았다.모니터를 내려다봤다.“오늘 현장 검토자료 아닙니까?”“아닙니다. 기존에 담당하던 공사비 산출 자료입니다.”“아직 안 끝났어요?”“네.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하강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여덟 시 넘었는데.”“네.”“내일 하셔도 되잖습니까.”세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그가 너무도 쉽게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내일 오전에 관련 부서로 넘겨야 해서요.”“그럼 오 팀장에게 일정 조정하라고 하죠.”“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마무리하면 됩니다.”“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습니까?”세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오늘 하루 종일 눌러 두었던 피로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이사님.”“네.”“제가 오늘 오전에 이 업무를 끝냈어야 했습니다.”하강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런데 하루 종일 이사님 일정에 동행하느라 제 업무를 하나도 못 했습니다.”세이는 말을 멈췄다.너무 많이 말했나 싶었다.그러나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죄송합니다. 이사님 지시가 불필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다만 제게는 오늘 끝내야 하는 일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사님께서는 하루 일정을 마치셨지만, 저는 이제 제 업무를 시작한 셈이라서요.”하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이는 그의 침묵에 뒤늦게 긴장했다.“앞으로도 외근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동행하겠습니다. 대신 가능하면 일정만 조금 미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마지막 말은 다시 공손해졌다.하강은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화를 낼 줄 알았다.자신에게 감히 업무 지시를 따지느냐고.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다음 날 오전 8시 30분.H건설 신사업팀.진세이는 출근하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지만, 오전 중으로 끝내야 할 공사비 검토 자료가 남아 있었다.진한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 도면을 확대하던 순간, 내선전화가 울렸다.“신사업팀 진세이 대리입니다.”“이사실 구본입니다.”세이의 손이 멈췄다.“아, 네. 실장님.”“오늘 오전 H-스테이 코어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에 동행하시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9시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네? 제가요?”“서 이사님께서 직접 지명하셨습니다.”세이는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계를 확인했다.8시 32분.“실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오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현장 실사는 사업개발파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이사님께서 진 대리의 실무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 하십니다.”“아…….”“일정 조정이 어려우십니까?”어젯밤 검은 세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아닙니다.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내려가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업무 지시였다. 명분도 충분했다. 다만 왜 하필 자신이어야 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뭐? 이사님이 너를 직접 불렀다고?”오현수 팀장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네에. 후속 사업지 현장 실사라고 하십니다.”“이상하네. 그거 사업개발 쪽에서 담당자 정해졌을 텐데.”“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뭐, 황태자님이 친히 찾으시는데 어쩌겠냐. 다녀와.”“팀장님, 오전에 공사비 검토 자료 넘겨야 하는데요. 오후엔 인허가 일정도 있고요.”“그럼 내가 일단 일정 좀 조정해 볼게.”세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회사에서 일정을 조정한다는 말은 대개 일이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마감 시간만 뒤로 밀린다는 뜻이었다.“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세이는 노트북과 도면 파일을 챙겼다.*오전 9시.지하 주차장에는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뒷문이 열리자 익숙
그때 식당 문이 열리고, 가방을 챙겨 나온 세이가 검은 세단 쪽으로 걸어왔다. 아직 얼굴에는 술기운이 남아있었다. 수치심도 함께.하강은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타세요.”“네.”세이는 짧게 대답하고 앞좌석 문을 열려 했다.하강의 시선이 그 손끝에 멈췄다.“이쪽으로 타시죠.”그가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세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거절하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뒷좌석 안으로 발을 들였다.몸을 최대한 문 쪽에 붙인 채 움츠리는 자세가 하강의 시선에 걸렸다.차 안은 조용했다.김 기사는 룸미러 한 번 보지 않고 앞만 보고 있었다. 세이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아 쥔 채 숨소리까지 줄였다.하강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했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개를 숙인 옆얼굴.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 팔뚝에 남아 있을 자신의 손자국. 방금 자신이 붙잡아 세운 자리.하강은 그 모든 것을 관찰했다.감정이 아니었다.확인에 가까웠다.“집 주소 말해요.”세이가 잠시 망설였다.“아…… 북창의료원 앞으로 가주세요.”하강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집이 아니라 병원.묻고 싶은 말이 생겼지만, 그는 삼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녀의 사정이 아니었다. 원인이었다.하강은 감정을 지운 목소리로 앞쪽에 지시했다.“김 기사님, 들었죠.”“네, 이사님.”검은 세단은 조용히 도로로 빠져나갔다.늦은 밤의 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차 안을 스쳤다. 빛이 세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더 작아 보였다.하강이 먼저 침묵을 깼다.“진 대리.”“네.”“신사업팀 몇 년 차죠.”“4년 차입니다.”“처음부터 신사업팀이었습니까.”“네. 전공이 건축공학이라, 신규 사업지 검토 쪽 일을 맡았습니다.”“도면도 봅니까.”“기본 계획안이랑 공사비 자료는 같이 봅니다.”세이의 대답은 생각보다 또렷했다.취했지만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민망한 일을 겪었고, 불편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업무 질문에는 바로
한 달 전. ‘살살 녹는 투뿔한우’ 식당H건설 신사업팀 회식 자리였다.대형 룸 한가운데서 오현수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소주병과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댕, 댕, 댕, 댕.술기운 오른 박자가 룸 안을 울렸다.“자, 이번 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주신 서하강 이사님. 한 말씀 해주시죠!”박수와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서하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H그룹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후계자이자, 회장의 양아들인 H건설 이사.그 이름 앞에 붙은 직함들은 모두 비쌌다.190센티미터의 거대한 체구에 박제하듯 맞춘 네이비 수트, 반듯하게 넘긴 머리와 얇은 은색테 안경. 손목 위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까지. 서하강이라는 존재 자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교하게 가공된 최고급 권력의 결정판이었다.서울대와 하버드를 거쳐 뉴욕에서 건물을 짓는 법보다 도시의 가격을 정하는 법을 먼저 배운 남자. 사람들은 그를 완벽하다고 불렀고, 하강은 그 단어가 얼마나 얇은 포장지인지 알고 있었다.국내 재계 서열 8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집을 지은 회사를 발판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남자가 지금, 이 룸 안에 서 있었다.그가 잔을 들었다.차가운 인상과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회식자리에서 필요한 만큼만 친절한 얼굴이었다.“H-스테이 코어 프로젝트는 이번 그룹에서 중요한 사업입니다. 핵심 인재인 여러분과 좋은 결과를 내게 되어 기쁩니다.”말은 반듯했고, 온도는 낮았다.하강은 안주머니에서 블랙카드를 꺼내 들었다.검은 카드 한 장이 룸 안의 공기를 바꿨다.“오늘 결제는 이 카드가 합니다. 한도 걱정은 하지 마시고 즐기십시오.”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도미노처럼 번졌다. 오현수 팀장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고, 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돈은 늘 가장 빠르게 사람의 호감을 샀고, 서하강은 그 권력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여직원들의 목소리가 불판의 열기 사이로 매달렸다.“어머, 이사님 진짜 멋지시다.
세이는 그 떨림을 들었다.자신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남자에게도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균열이 있다는 것을, 세이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침대 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방 안에 남아 있던 물기는 서서히 말라 갔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소파에 앉혀졌을 때도 하강은 좀처럼 그녀를 놓지 못했다.넓은 거실의 통유리 너머로 서울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불빛이 건물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풍경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둔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이는 하강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이미 두 번이나 긴 밤을 견딘 뒤였다. 손끝에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어깨를 바로 세우기도 어려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흐트러졌다.“……아, 잠깐만…….”“아직 못 끝내.”낮은 대답이 돌아왔다.세이는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절박함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되찾았는지 믿을 수 없어서, 눈앞에 있는 것을 계속 붙잡으려는 사람 같았다.열두 해였다.그토록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몸이 진세이 앞에서만 깨어났다.세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고, 고르지 못한 숨 때문에 눈앞의 불빛마저 흐릿하게 번졌다.하강의 움직임이 멎었다.그가 세이의 얼굴을 살폈다.“……괜찮아?”물음은 짧았다.세이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에 힘은 없었지만, 쉽게 놓지도 못했다.하강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이윽고 세이의 등을 받쳐 조금 더 편하게 기대게 했다. 그의 팔 안으로 몸의 무게가 옮겨지자 세이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그 배려는 오래가지 않았다.“말해. 못 버티겠으면.”세이는 숨만 삼켰다.그리고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손끝 아래로 빠른 맥박이 느껴졌다.그렇게 차갑고 완벽해 보이던 남자의 심장이 믿기 어려울 만큼 거칠게 뛰고 있었다.세이는 그 박동을 한동안
한남동 펜트하우스 A동 501호.욕실 문이 열리며 따뜻한 수증기가 먼저 흘러나왔다. 천장에 매립된 조명 아래로 희뿌연 물안개가 번지고, 그 사이에서 서하강이 모습을 드러냈다.하반신에는 흰 수건 한 장만 걸쳐져 있었다. 젖은 머리칼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단단한 가슴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복근 사이를 타고 내려온 물줄기가 수건의 경계에서 멈췄다.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수건 하나가 감추고 있는 것은 살이 아니라, 이 남자의 유일한 결함이었다.세이는 현관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정확히 7시.계약서에 적힌 시간이었다.아직 코트 단추도 풀지 못한 채였다. 구두는 벗었지만 슬리퍼는 신지 않았다. 맨발에 닿는 대리석의 서늘함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고급 호텔처럼 넓고 정돈된 집이었지만, 세이가 마음 놓고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이 집에서 편해지는 것은 계약 조항 어디에도 없었다.하강이 다가왔다.젖은 발이 대리석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넓은 거실을 채우고 있던 적막이 그의 발걸음에 조금씩 밀려났다. 세이는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다.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도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하강의 손등이 세이의 오른쪽 뺨에 닿았다.바깥바람에 식었던 피부 위로 따뜻한 손길이 스며들었다. 엄지가 턱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고, 세이는 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젖은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볼 수 있었다.이상한 남자였다.회의실에서는 수백억 원의 공사비를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만큼은 세이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지나치게 집중했다.그의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이사…….”끝까지 부르지 못한 직함이 입술 사이에서 흩어졌다.하강이 입을 맞췄다.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한 입맞춤이었다. 세이는 놀라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하강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서로의 숨이 뒤섞이고 젖은 머리칼이 뺨을 스칠 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