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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락희
그 말에 정다슬은 머리가 윙 했다.

평소 내성적인 온채아가 그런 말을 내뱉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주율천 그 나쁜 놈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모욕했다는 점이었다.

정다슬은 욕설을 내뱉은 다음 계속 말했다.

“퀵서비스 말고 직접 가져다줄게. 가져다주고 와서 야근할 거야.”

두 바퀴보다 네 바퀴가 더 빠르지 않겠는가?

전화를 끊은 후 온채아마저도 자신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이 답답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쭉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몸도 마음도 시원한 데가 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밤 클럽에서 주율천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그녀는 여전히 처녀였다.

처음에는 주율천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주율천이 서재에서 앨범을 들여다보며 낮게 신음하면서 자기 위안을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온채아는 자존심이 철저히 짓밟히는 것만 같았다.

한번은 그녀가 보고 있는 걸 주율천이 알아챘는데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변명했다.

“미안해. 그런 걸 하면 널 다치게 할까 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그래서 네 사진을 보면서...”

그런데 웃긴 건 온채아가 그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얼굴까지 빨개졌었다.

그러다가 밤새 경성으로 돌아온 그날 밤에 해열제를 먹고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서재에 들어가 그가 늘 잠가 놓던 캐비닛을 열어 앨범을 꺼냈다.

앨범에 있던 사진은 전부 심서정의 생기 넘치고 매혹적인 사진들이었다.

주율천은 심서정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순간 온채아는 자신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 주율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따라다닌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온채아의 오빠가 늘 그와 붙어있었으니까.

자주 보다 보니 나중에 그와 결혼하면 참 좋을 것 같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주율천의 성격이 참 좋았다. 인내심 많고 다정했고 오빠를 만나러 올 때면 늘 그녀의 선물을 챙겨왔다.

오빠의 친구들 중에 주율천이 가장 점잖은 신사였다.

그런 신사가 형수를 보면서 자기 위안을 하고 정작 옆에 있는 아내에게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정다슬의 일 처리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온채아도 몰랐다.

일어나 세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가정 법원 직원들이 퇴근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그녀와 주율천을 데리고 가서 이혼시킬 기세였다.

온채아가 이혼 합의서를 받고 마음이 조금 안정된 그때 위층에서 갑자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경애가 놀란 얼굴로 뛰어 내려오더니 머뭇거렸다.

“작은 사모님...”

“무슨 일이에요?”

“작은 사모님이 침실에 걸어두셨던 가족사진... 시윤 도련님이 망가뜨렸어요.”

온채아는 처음에는 단순히 액자가 깨진 줄 알았다. 하지만 오경애가 내민 사진 조각을 본 순간 온채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다섯 살 때 온채아의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 가족사진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추억이었다.

온채아는 갈기갈기 찢긴 사진을 들고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마침 심서정이 아들을 안고 그녀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온채아가 심서정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형님, 여긴 제 방인데요?”

“삼촌이 앞으로 여긴 시윤이 집이라고 했어.”

주시윤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아빠처럼 시윤이랑 엄마를 돌봐주겠다고도 했어.”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혼낼 생각이 전혀 없는 심서정의 모습에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시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인데 산타클로스가 너한테 뭘 할지 알아?”

주시윤이 턱을 치켜들었다.

“캔디를 아주 많이 줄 거야.”

“아니.”

온채아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 사진을 망가뜨린 네 두 손을 잘라 오븐에 구운 다음 괴물한테 줄 거야.”

“엉엉...”

역시 애는 애였다. 주시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심서정을 꽉 안고 목청이 터지도록 울었다.

심서정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온채아를 쳐다봤다.

“아직 애인데 이렇게까지 겁줄 필요는 없잖아요.”

“애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니까 그러죠. 형님은 익스트림 스포츠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요?”

온채아는 이 말을 던진 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늦은 밤 검은색 마이바흐가 마당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통유리 앞에 서 있던 온채아는 주율천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시윤이 심서정을 끌고 달려가는 모습을 봤다.

그들이야말로 단란한 세 식구 같았다.

한참 뒤 방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주율천이 흰 셔츠 차림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시윤이한테 겁줬다면서?”

“네.”

온채아가 침대 머리맡 서랍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시윤이가 내 가족사진을 찢어버렸어요.”

순간 멈칫한 주율천은 한참이 지나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팔을 내밀어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녀가 피하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줄 알고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시윤이 대신 사과할게. 보상해줄 테니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온채아가 피식 웃었다.

“뭐든지 다 해줄 거예요?”

주율천은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원하는 게 두 가지가 있어요.”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주율천은 부동산 계약서임을 확인하고 바로 서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서류도 아예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돈에 관한 거라면 항상 통쾌했다.

서명을 마친 그는 안도하면서 온채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채아야, 네 오빠는 어떻게 널 이렇게 이해심이 많고 착한 사람으로 키웠을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온채아가 그를 밀어내려는데 누군가 반쯤 열린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 선 사람을 보자마자 주율천은 무의식적으로 온채아를 밀어냈다. 온채아는 흠칫 놀랐다가 바로 깨달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3년간 아내와 잠자리하지 않았다. 이제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당연히 더욱 잘 보여야겠지.

심서정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율천아, 시윤이가 너랑 자고 싶다고 떼를 써.”

“지금 갈게.”

주율천은 대답을 마치고 온채아를 쳐다봤다.

“화 안 났지?”

“네.”

그가 등을 돌린 후 온채아는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혼 합의서였다.

주율천의 말대로 그녀는 참 이해심이 많고 착했다. 이혼할 때마저 스스로 합의서를 준비해 그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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