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축사라는 걸 평생 해본 적이 없어서, 거짓말은 못 하겠습니다."
태경이 마이크를 가볍게 톡톡 치며, 아주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상 아래에 선 김 실장은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여기 서 있는 신랑, 김민준 실장. 이 녀석은 내 밑에서 무려 20년 넘게 굴렀습니다."
태경의 칠흑 같은 동공이 김 실장을 향해 서늘하게 꽂혔다.
"내가 서류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결재판을 던지면 제 머리로 받아냈고, 내가 아내에게 미쳐서 회사 일을 내팽개치려 할 때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렸던 놈입니다."
"푸흡……!"
태경의 그 노골적이고 뻔뻔한 셀프 디스에, 잔뜩 얼어붙어 있던 하객석 곳곳에서 참지 못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자 가장 큰 시련이라고들 떠
"잠깐만요. 젤라토 하나 먹고 가요."연우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태경의 소매를 잡아끌었다.하지만 태경은 낡은 가게의 외관을 스윽 훑어보더니, 습관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운 사업가의 눈빛을 번뜩였다."저런 위생 상태도 알 수 없는 노점상에서 음식을 드시겠다고요? 당장 저 가게의 식자재 유통 경로와 보건증부터 확인해야…….""차태경 씨."연우의 서릿발 같은 경고에 태경이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당장 피렌체 최고급 호텔의 디저트 셰프를 이 골목으로 대령하겠다는 소리 할 거면, 당신은 기차역으로 돌아가서 혼자 스텔라 타워로 가세요.""……젤라토가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요. 당장 사 오겠습니다."생존 본능이 극도로 발달한 폭군은, 아내의 매서운 눈빛 한 번에 즉시 꼬리를 내리고 얌전한 지갑꾼으로 변신했다.잠시 후.태경은 작은 종이컵에 피스타치오와 딸기맛 젤라토를 듬뿍 담아 들고,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연우의 곁으로 돌아왔다."자, 여기 있습니다. 나의 여왕님.""고마워요. 같이 먹어요."연우가 벤치에 앉아 젤라토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뜨거운 햇살 아래서 걷느라 지쳤던 탓인지, 달콤하고 시원한 젤라토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자 연우의 얼굴에 아주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당신도 아 해봐요. 진짜 맛있어요."연우가 스푼을 떠서 태경의 입가로 내밀었다.하지만 태경은 젤라토 따위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젤라토를 먹고 있는 연우의 붉은 입술만을 짐승처럼 짙은 시선으로 뚫어지라 응시할 뿐이었다."아, 차태경 씨. 안 먹을 거면…… 앗."연우가 스푼을 거두려던 순간, 뜨거운 날씨 탓에 녹아내린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스위스의 어느 한적한 산골 마을.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가 그림처럼 펼쳐진 언덕길을, 두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차태경 씨. 우리가 무슨 에베레스트 정복하러 온 셰르파입니까?"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서연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당장 무장 공비라도 때려잡을 듯한 살벌한 피지컬로 거대한 등산용 배낭을 메고 있는 차태경이 서 있었다.분명 두 사람은 모든 신분을 숨기고 '배낭여행'을 떠나온 참이었다.하지만 연우의 등에는 물병 하나 들어갈 법한 아주 작고 귀여운 미니 백팩이 매달려 있었고, 부부의 진짜 짐은 모조리 태경의 거대한 배낭 안에 쑤셔 박혀 있었다."당신은 이 무자비한 사냥개의 체력을 아직도 모르는군요."태경이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아주 거만하게 콧방귀를 꼈다."이 정도 배낭은 솜털이나 다름없습니다. 내 우주의 여왕님께서 평범한 관광객 코스프레를 원하신다기에 기꺼이 짐꾼을 자처한 것뿐이지요.""짐꾼이라기엔 가방 크기가 너무 비정상적이잖아요. 도대체 안에 뭘 그렇게 집어넣은 거예요?"연우가 미간을 좁히며 태경의 배낭을 톡톡 두드렸다."별거 없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위성 전화기 두 대, 당신이 고산병에 걸릴까 봐 준비한 휴대용 산소호흡기, 그리고 스위스 물이 안 맞을까 봐 챙겨온 최고급 에비앙 생수 열 병 정도…….""이리 내놔요."연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아주 맑은 폭소를 터뜨리며 배낭의 지퍼를 열려 하자, 태경이 짐승처럼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안 됩니다! 내 아내의 고결한 어깨를 고작 짐 가방 따위로 짓누를 수는 없단 말입니다!""배낭여행이라면서요! 평범한 관광객
"나와 네 엄마는 오늘부로 세상에서 완벽하게 증발할 예정이다. 태성그룹의 주가가 반토막이 나든, 스텔라 타워에 운석이 떨어지든 내 프라이빗 회선으로 연락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걱정 마십시오, 아버지."도윤이 뿔테 안경을 매만지며,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건조하고 팩트 넘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아버지가 떠나시자마자 태성의 메인 서버 비밀번호부터 모조리 바꿨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권한이 없어서 회장실 시스템에 접속조차 하실 수 없습니다.""……뭐야?""저희가 알아서 완벽하게 통치할 테니, 두 분은 그저 다치시지 않게 몸이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도윤이 아주 쿨하고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아비의 그 살벌한 협박을 타격감 제로로 튕겨내며 오히려 방어막을 쳐버리는 아들의 모습에, 태경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맞아, 아빠. 엄마 옆에서 주책 좀 적당히 떨어."이번에는 시아가 팔짱을 낀 채 도도한 목소리로 거들었다."날씨 좋다고 길 가다 말고 남의 나라 휴양지 성을 통째로 사버린다거나 하는 무식한 짓은 금지야. 우리 엄마 예쁜 사진이나 많이 찍어주면서 조용히 다녀오시라고.""형이랑 누나 말이 다 맞아! 두 분 다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 올 때 내 그림에 쓸 희귀한 안료들 좀 잔뜩 사다 주고!"막내 은우까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부모님의 등을 마구 떠밀기 시작했다."이것들이 진짜……."태경이 미간을 구기며 으르렁거렸지만, 연우는 그저 맑은 폭소를 터뜨리며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보통의 가정이라면 눈물 콧물을 빼며 애틋한 이별을 나누었겠지만.이 제국의 2세들은 눈물 따위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부모의 완벽한 은퇴와 자유를 진심으로
스텔라 시티 최상층 펜트하우스.거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대형 세계 지도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자, 나의 여왕님. 이 넓고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가장 먼저 정복하고 싶은 곳이 어디입니까."수십 년간 몸에 박제하다시피 했던 답답한 수트와 넥타이를 완벽하게 벗어던진 차태경이, 아주 가벼운 캐주얼 셔츠 차림으로 지도 앞을 서성거렸다.세상의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비로소 완벽한 자유를 쟁취한 지옥의 폭군은, 마치 내일 당장 소풍을 떠나는 열 살짜리 꼬마처럼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정복이라니요. 우리는 지금 기업 사냥을 떠나는 게 아니라 여행을 계획하는 중이잖아요."연우가 갓 내린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다가와, 나른한 눈웃음으로 태경을 타박했다."나한테는 똑같습니다. 당신과 함께 발을 들이는 그 모든 낯선 땅이, 곧 내가 당신을 위해 바칠 새로운 낙원이 될 테니까요."태경이 자연스럽게 연우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감싸 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낮게 으르렁거렸다."일단 지중해를 통째로 빌려서 요트를 띄울까요? 아니면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 위에 당신만을 위한 프라이빗 유리 성을 지어줄까요. 말만 하십시오.""차태경 씨."연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맑은 폭소를 터뜨리며 태경의 단단한 가슴을 찰싹 때렸다."전 세계에 수십만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다닐 때의 그 무식한 스케일은 이제 스텔라 타워에 두고 오기로 했잖아요. 나는 그런 뻔하고 사치스러운 휴양지 호캉스를 하려고 은퇴한 게 아니에요.""그럼 대체 어떤 여행을 원하신단 말입니까.""진짜 여행이요."연우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홀로그램 세계 지도를 향해 아주 눈부시고도 열정적으로 반짝였다."우리는 각
"건방지게 내 아내의 마지막 퇴근길을 막아 세우다니."태경이 광장을 둘러보며 아주 오만하고도 서늘한 콧방귀를 꼈다.하지만 그의 칠흑 같은 동공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찬란한 만족감으로 타오르고 있었다."하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용서해 주도록 하지."스르륵.태경의 커다란 손이 연우의 좁은 어깨를 아주 단단하고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당신이 구원해 낸 세상이, 기어이 당신의 발밑에 엎드려 찬사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태경이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 짐승처럼 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마음껏 누리십시오, 나의 여왕님. 이 압도적인 박수 갈채는 전부 오직 당신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찬란한 전리품이니까요."그의 낮고 묵직한 속삭임에, 연우의 시야가 아주 옅게 흔들렸다.과거, 강씨 가문의 차가운 대저택에서 숨죽여 눈치만 보던 며느리.남편의 외도와 시어머니의 멸시 속에서 홀로 피눈물을 삼키며 쫓겨났던,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비참했던 여자.세상은 그녀가 그저 차태경이라는 무자비한 짐승에게 잡아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비웃었지만.'나는 보란 듯이 이겨냈어.'연우의 맑은 눈동자 위로 기어이 붉은 핏발이 섰다.그녀는 세상의 조롱을 완벽한 성과로 짓밟았고, 차태경이라는 맹수를 완벽하게 조련했으며, 마침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제국의 정점에서 가장 명예롭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고마워요."연우의 붉은 입술 사이로 아주 벅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가 천천히 손을 들어, 광장을 가득 채운 수만 명의 임직원들을 향해 아주 우아하고도 품격 있게 손을 흔들었다."와아아아아아-!"연우가 손을 흔들자, 광장의 환호성은 텔레비전 중계 화면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하게 폭발했다
스텔라 시티 메인 타워 최상층, 서연우의 프라이빗 집무실.지난 10년간 전 세계 금융 시장의 심장부로 군림했던 공간의 책상 위가, 오늘따라 거짓말처럼 텅 비어 있었다."아직도 챙길 게 남았습니까, 연우야."소파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차태경이,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우리의 두 번째 신혼여행을 책임질 전용기가 벌써 두 시간째 격납고에서 대기 중입니다. 이 칙칙한 사무실에 미련이라도 남은 겁니까.""미련이라니요. 그냥, 내가 제국의 마지막 10년을 고스란히 쏟아부은 곳이니까 1분 정도는 감상할 시간을 달라는 거죠."연우가 텅 빈 마호가니 책상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나른하게 웃었다.과거, 강씨 가문에서 맨몸으로 쫓겨나 차태경이라는 무자비한 짐승의 손을 잡았던 날.복수와 생존을 위해 피 튀기게 싸우며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제국의 꼭대기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부로 그녀를 짓누르던 그 무거운 왕관은 완벽하게 벗겨졌다."자, 이제 그만 내려가죠. 나의 여왕님."태경이 다가와 연우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그의 칠흑 같은 동공에는 오직 짐을 내려놓은 아내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과, 빨리 둘만의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어 안달 난 집착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똑똑.그때,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대표님, 회장님. 에스코트를 위해 모시러 왔습니다."단정한 수트 차림의 김민준 실장과 윤지수 팀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너희 부부도 이제 도윤이 녀석의 살벌한 시집살이를 견뎌야 할 텐데, 벌써부터 표정이 어둡군."태경이 짐승처럼 짙은 눈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새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