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민 회장님 말이에요, 정직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어머, 최 사장님을 속이려다 들키니까 했던 말을 번복하시려는 거예요? 만약 최 사장님께서 속임수인 줄 모르셨다면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잖아요!”“최 사장님더러 한 대표님의 세컨드라는 걸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도 부도덕한 일이에요.”“우리가 연예계 전문 기자이기는 하지만,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기사를 쓰는 건 아니잖아요? 민 회장님, 노망이라도 나신 거 아니에요?” “마음껏 떠들어보라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쓸 데 없는 말들일 뿐이니까!”화가 난 민진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민진현은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들이 거북한 듯했다. “여기 있네!”민진현이 백옥 반지를 손가락에서 힘껏 책상 위에 내려놓으려다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하연의 손가락에 살짝 끼워 넣었다.민진현의 말투는 위협으로 가득 차 있었다.“잘 보관해두게, 곧 다시 찾으러 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죠.”하연이 돌아가자는 의미로 여은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최 사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그 백옥 반지를 보관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를 구해드리겠습니다.”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웨이터가 하연의 타짜다운 면모에 탄복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 비닐봉지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거기 담아 가면 될 것 같은데.” 하연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무렇게나 놓아 둘 물건입니다. 소중히 다뤄주실 필요 없어요.” 다시 한번 모두가 깜짝 놀랐다.백옥 반지는 감히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국보급 문물과도 같은 것으로, 민진현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중한 반지를 비닐봉지 따위에 담아 가려 하다니! 하연의 말을 들은 민진현은 분노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하연의 손에 들어간 백옥 반지를 돌려받을 방법은 없었다. 민진현이 온 힘을 다해 의자를 걷어찬 후, 자리를 떠났다. “민 회장님
이때, 어디선가 최고급 스포츠카 엔진의 굉음이 들려왔다. 선이 유려한 보라색 스포츠카 한 대가 수많은 최고급 차량의 사이를 지나 하연과 여은의 앞에 멈춰 섰다.오른손에 깁스를 한 하성이 차량의 조수석에서 내렸다. “하연아, 오빠 왔다!”하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성의 오른손에 있는 깁스를 바라보았다.“다 낫지도 않았으면서 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예요?” 사실, 하연은 하성이 F국에서 잘 휴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몰래 귀국한 것이었다. 하성이 자신을 따라 귀국할 것이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보고 싶었어!”“그리고, 다 낫지 않아도 당연히 널 데리러 와야지.”하성이 서준을 힐끗 쳐다본 후, 주권을 선포하기라도 하는 듯 운전기사를 향해 하연에게 차 키를 건네주라고 지시했다.“오늘은 네가 운전해.”“날 믿을 수 있겠어요?”차 키를 받아든 하연의 눈동자에 한 가닥의 불안감이 스쳤다. 사고를 당한 후, 하연은 며칠간 악몽에 시달렸다. 하연은 꿈에서 하성이 죽는 것을 보았고,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공포에 질려 잠에서 깨곤 했다. 이 모든 것은 혜경이 벌인 교통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었다.“그럼, 당연하지.”하성이 하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다 지나간 일이잖아.”“그럼, 오빠의 새 차 좀 운전해 볼까요?” 하연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오빠 말이 맞아. 다 지나간 일이야. 민혜경도 또 그런 짓을 벌이지는 않을 거야.’‘내 운명은 내가 정해. 트라우마 따위에 질 수 없어.’파티장을 떠나기 전, 하성이 대단히 매섭고 차가운 눈초리로 서준을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의 세컨드, 잘 관리하는 게 좋을 거야. 교통사고 건도, 우리 하연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우리 쪽은 민혜경을 사적으로 처리했을 텐데! 우리 쪽은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어!”울적함이 파도가 되어 서준의 가슴을 덮쳤다. 서준이 하연을 향해 소리쳤다.“나, 아이가 태어나기만 하면... 혜경이랑 갈
하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아직 내가 시킨 대로 사죄하지도 않았으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혜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너 같은 X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이게 미쳤나 진짜?!” 혜경은 하연의 거만한 표정이 너무도 거슬렸다. ‘그때 확실히 죽여버렸어야 했는데.’“무릎? 안 꿇어도 돼. 곧 태어날 아이도 너랑 같이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 난, 네가 스스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기를 기다릴 거야.”하연이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설령 내가 감옥에 간다 하더라도, 나한테는 서준 씨와 맺은 사랑의 결실이라는 게 있어.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거야.” 혜경이 하연의 말에 반격하고 나섰다.“난, 너랑 달라. 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애 하나 갖지 못한 너 같은 X이랑은 다르다고!”순식간에 하연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아이, 이것은 풀지 못한 하연의 한이었다. 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하연이 가장 많이 들었던 모욕 역시 이것이었다.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켜 나를 해친 것도 모자라, 고작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의 심판을 피하고, 내 앞에서 큰소리까지 치고 있다니...’하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하연이 혜경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혜경이 몸이 종잇장처럼 뒤로 젖혀졌다. “다시 지껄여봐!”하연 보다 키가 작았던 혜경은 뒤꿈치가 땅에서 떨어져 공중에서 버둥댈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하연이 혜경의 멱살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놓는다면, 혜경은 그 즉시 땅바닥에 널브러질 것이었다. 혜경은 출산을 앞둔 임산부였다. 바닥에 널브러진다면 틀림없이 사고가 날 것이었다. 순간적인 공포를 느낀 혜경이 애원하기 시작했다.”나, 나, 난 임산부야. 그만해!”“너, 여태 잘만 까불었잖아?”하연이 차갑게 웃었다.“갑자기 두려워지기라도 한 거야?”혜경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혜경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한밤중이었던 탓인지 자신을 도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매장의 입구에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하연에게 아주 익숙한 사람, 한서준과 민혜경이었다.하연은 B시라는 곳이 너무 좁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혜경과 서준이 손을 잡은 채 매장으로 들어섰다. 마치 가족이 된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하연의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시림이 엄습해왔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의 약혼 소식을 듣자마자 두 사람이 약혼반지를 고르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3년간의 결혼 기간 동안 서준이 하연에게 준 선물은 결혼반지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준은 치수를 재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서준이 잠든 틈을 타서 하연이 몰래 서준의 치수를 측정했어야 했다. 그랬던 서준이 지금은 직접 VERE매장에 나타나 혜경과 함께 결혼반지를 고르려 하다니.하연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연은 서준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고, 진심을 다하여 서준을 대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연이 어깨를 짓누르는 비참함을 느끼던 바로 그때, 뒤에서 하성이 나타났다. 하성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힘겹게 푸른색 다이아몬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내 안목, 어때?”실의에서 벗어난 하연이 하성이 건네는 반지를 받아 들고는 옅게 웃었다.“예뻐요, 제가 직접 디자인한 스타일을 골랐네요?” “그래? 그럼 나랑 마음이 통한 거네? 기분이다! 오빠가 이 다이아몬드 선물로 사줄게, 어때?”하성이 하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과 큰 몸으로 하연이 서준과 혜경을 볼 수 없도록 하연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괜찮아요. 또 인터넷에 이야기가 어떻게 퍼질지 모르잖아요.”하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하성이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연에게 건
“민씨 가문 아가씨의 약혼자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 하연이 붉은 입술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아니면, 제 전 남편의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까?”“생각해 보시죠, 대체 어떤 신분으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서준은 멍해졌다.‘내가 선을 넘었구나.‘이 세상에서 가장 물어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바로... 나야.’‘나 역시 다른 사람과 낄 결혼반지를 고르고 있었잖아. 난, 최하연의 일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어.’서준이 혜경을 향해 긴 다리를 내디뎠다. “이제 그만 가자.”혜경의 눈동자에 이상한 기운이 반짝였다. “하지만 서준 씨, 우리, 아직 반지를 고르지 않았잖아!” “다른 데서 고르자.”혜경이 서준의 뒤를 쫓았다. 혜경이 아담한 몸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서준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잠깐 기다려봐!”두 사람이 매장을 떠난 뒤에도 하연은 웃음을 되찾지 못했다. 하성이 조각 같은 얼굴로 하연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아직도 괴로운 거야?”“뭐라고요?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빠가 나를 괴롭힌다고 큰오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 하연이 하성을 위협했다.하성이 계속해서 하연을 달랬다.“그러지 마, 큰 형이 나한테 너를 돌보라고 시킨 건데, 네가 나를 큰 형한테 일러바치면 어떡해, 나, 분명 좋은 꼴은 못 보게 될 거야.”잠시 후, 최씨 저택.한참 동안 거실에 앉아 하연과 하성을 기다리던 운석이 두 사람의 손에 들린 큰 쇼핑백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신님, 왜 하성이 녀석이랑 쇼핑을 하면서 저는 부르지 않으신 겁니까?” 하성과 운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성이 운석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이었다.운석이 하연이 못생겼다고 소문을 낸 바 있었기 때문에 하성은 어릴 적부터 운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하연은 못생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름다웠
“그 부분은 제가 외부에 분명히 설명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친 서준이 곧바로 몸을 돌려 회장실을 떠나자, 민진현이 서준이 나간 문을 향해 찻잔을 던졌다. 산산조각 나버린 찻잔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졌다.분노를 가라앉힌 민진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날 좀 도와줘야겠어. 깨끗하게 처리해 주게.”“최하연...”민진현의 어두운 얼굴에 음흉함이 가득해졌다.“우리 민씨 가문이 어느 정도인지, 똑똑히 보여줘야겠어.”...일주일 후.드디어 기항 그룹과 기술 업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밝았다. 하연과 정기태가 함께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기항 그룹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는 다른 그룹의 임원들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진보한 기술 혁신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하연이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재와 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하연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임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성재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띠던 성재의 총명한 눈동자에는 뚜렷한 조의만이 가득했다.성재가 우지나를 향해 말했다.“우 상무님, 지금 상황에 대해 최 사장님께 보고드리세요.”“최 사장님, 한 시간 전, 다크 웹에 대량의 나노로봇의 핵심 암호화 파일이 생겨났습니다. 다행히 아직 그 안의 소스 코드를 돌파한 사람은 없는 걸로 보이지만, 곧 돌파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우지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이 소스 코드 말입니다. 불과 이틀 전에 DS그룹에 공유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하필 오늘 정보가 누설된 걸까요?”“그러니까, 지금 우 상무님 말씀은... 우리 DS그룹이 정보를 누설했다는 겁니까?”하연은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DS 그룹에 정보를 공유한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의심을 거둘
성재 역시 우지나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최 사장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해커들은 암호를 해독하고 있을 거예요.”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하연이 자신만만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정기태에게 물었다.“오고 있습니까?”정기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10분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하연이 가볍게 웃으며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실 분이 한 분 더 계십니다. 모두 저와 함께 내려가 맞이해주시죠.”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심지어는 하연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다 같이 한 사람을 마중 나가자는 겁니까? “최 사장님, 아직도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답답합니다, 정말!”하연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지 않는 듯했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중에 저를 따라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나 하지 마십시오.”서준이 하연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저는 최 사장님과 함께 가겠습니다.”성재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두 명의 대주주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세 명의 고위 임원들이 회의실을 떠난 상황에서, 어찌 한낱 주주들 따위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다른 방법이 없던 주주들 역시 하나둘씩 하연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하연을 선두로 한 강대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후, 노란색 택시 한 대가 기항그룹의 입구에 멈춰 섰다.모두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누구야?”“거물 급 인사인가 봐.” 곧이어 190이라는 큰 키에 온화한 외모를 가진 한 남성이 차량에서 내렸다. 그 남성은 검은색 사복을 입고 있었으며 절제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왔구나!”하연이 빠르게 달려가 최하경을 끌어안은 후, 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부탁 좀 할게요!”“응, 별거 아니더라.”하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죠, 우 상무님?”하연이 우지나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고는 싱겁다는 듯 웃었다. 갑자기 우지나가 호명되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어색하게 웃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말씀은...”하연이 손가락에 끼워진 푸른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화살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지나를 쏘아보며 말했다.“우 상무님, 왜 마지막으로 올라오신 겁니까?” “저요?”우지나가 스스로를 가리켰다.“그저,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입니다.”“최 사장님, 정말 열심이시군요. 부하 직원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까지도 관리하시니 말입니다.”“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 여쭙는 겁니다.”하연이 정기태로부터 받은 자료를 우지나의 앞에 내팽개쳤다.“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빨리 손을 떼라고 전하러 갔던 거 아닙니까?” 하연이 내팽개친 자료를 훑어본 성재가 하연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연의 목소리가 광풍과 폭우 전의 고요함과 같이 낮게 깔렸다. “우 상무님,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우지나는 자신의 앞에 내팽개쳐진 자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우지나의 얼굴은 창백하여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식은땀까지 흘리며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최대한 은밀히 진행한다고 한 건데, 이 여자한테 들켜버리다니!”하연이 웃기 시작했다.“제가 모은 증거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우리 DS그룹과 정보를 공유할 때, 고의적으로 나노로봇에 대한 소스코드를 주식 시장에 유출한 후, 주식투자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여 주식을 헐값에 팔아 치우게 하고, 어부지리로 더 많은 기항그룹의 주식을 손에 넣으신 거 아닙니까?” “임 대표님, 우 상무님께서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으실 생각이 없으신가 봅니다.”“임 대표님, 제가 사람을 시켜 기항그룹의 주식을 사들이라고 한 건, 그저 주식이 외부인의 손에 넘어갈까 걱정됐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말이지 다른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마음을 다 잡은 우지나가 분주하게 변
상혁은 말없이 부동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으로 한 파래임 한 파래임 스쳐 지나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상혁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알겠습니다.” 부남준 사건은 예정대로 재판이 열렸다. 부씨 가문은 변호사를 통해 대응했지만, 형사 사건인 만큼 얽히고설킨 진실을 밝히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DL 그룹, 최상층 대표실.상혁은 혼자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거대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곧 원신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표님, 재판 끝났습니다.” 상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판결 나왔어?” “예상대로입니다. 다시는 못 일어날 겁니다.” 원신민의 말은 고요했던 상혁의 마음에 작은 돌을 던진 것처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의 목숨과 확실한 증거. 이미 알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상혁도 묘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부 회장님도 알고 계시나?” “예,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기절하셨지만, 다행히 지금은 안정을 되찾으셨고요.” 원신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송 여사는 재판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판결 듣자마자 바로 떠났어요.”부동건에게 쫓겨난 후, 송혜선은 과거의 화려함을 모두 잃었다. 부동건은 그녀에게 줬던 모든 부동산을 회수했고, 카드 계좌까지 정지시켰다. 이제 송혜선에게는 남은 보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을 뿐. 상혁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재판에 온 건 놀랍지 않지만...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로 상혁은 차갑게 말했다. “송혜선 감시 붙여. 또 무슨 일 일으키기 전에.” 원신민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어둡고 습
비틀거리던 부동건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이 순간만은 피하지 말자.’ 그는 느릿한 걸음으로 상혁 쪽으로 다가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 마침내 눈앞에 다다라 멈춰 섰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부동건은 말하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막상 눈을 마주하니,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부동건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상혁아. 그동안, 너랑 너희 어머니한테 내가 너무 못했다.”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그날, 그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을 무너뜨린 거야.’ 사실, 부동건은 이혼하던 날부터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그 후로의 모든 시간은, 그저 체면과 자존심을 위한 연기였을 뿐이다. 지금 이 꼴이 된 건... 결국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자업자득이야. 이 모든 건 내가 자초한 거니까.’ 상혁은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엔 적당한 거리감과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이제 와서 중요하진 않아요. 저도,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마음 정리했어요.” 그 말에 부동건은 눈을 감았다.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는 걸 애써 참았다. “그래. 마음 내려놨다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잠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부동건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곧장 상혁에게 건넸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고, 더는 회사를 끌고 나갈 힘이 없다. DL그룹은 내가 처음부터 세운 회사다.”“내 모든 시간과 인생이 들어간 곳이지. 하지만 이제는 놓아야 할 때가 왔다.” 상혁은 망설이듯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런 상혁의 손에 부동건은 서류를 억지로 쥐여주며 아들의 손등을 두드렸다. “앞으로는... 네가 이끌어가야 한다.” 그 손길엔 조용한 무게와 책임, 그리고 사죄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던 부동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