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은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교수님께서 어떤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으실 거란 말씀이죠? 제가 여자한테 눈이 멀어 이성도 잃고, 옳고 그름도 구분 못 하게 됐다는 말이 하고 싶으신 건가요?”‘아주 잘 알고 있네!’염성민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하지만 김태훈은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근데 말이죠, 제가 보기엔 그렇게 이성 잃고 분별 못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염성민이 반박할 틈도 없이, 김태훈은 곧바로 말을
아직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염용석이 먼저 말을 잘랐다.“그래서 또 김태훈 대표가 연미혜 편 들어서, 임지유를 괴롭혔다는 거냐?”너무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에 염성민은 순간 놀라서 되물었다.“아버지, 어떻게 아셨어요? 무슨 얘기 들으신 거예요?”“들은 건 없어. 그냥 짐작한 거다.”염용석은 해탈한 듯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잘 생각해 봐라. 너랑 연미혜, 김태훈은 나 때문에 어렵게 얼굴 맞대고 일하는 사이인데, 서로 대놓고 엇나갈 일이 뭐 있겠냐. 네가 일로 문제를 일으킬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괜히 너만 콕 집
염용석이 도와줄 생각이 없자, 염성민은 직접 유명욱에게 연락하려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에겐 유명욱의 연락처가 없었다.결국 염용석에게 연락처를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돌아온 답장은 단 두 글자였다.[꿈 깨.]반응할 틈도 없이, 염용석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철호 아저씨 쪽에도 내가 이미 얘기해 뒀으니까, 괜히 힘 빼지 마.]염성민은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곧장 전화를 걸었지만, 염용석은 더 이상 받지 않았다.‘아버지도, 철호 아저씨도 이 일을 도울 수 없다면 누구를 찾아야
지현승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염성민이 다시 물었다.“성민아, 철호 아저씨나 아버지 말고, 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유명욱 교수님 연락처 아는 사람 또 없어?”“없는 것 같아.”지현승이 대답했다.그렇게 말한 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너 전에 임지유 씨가 유명욱 교수님을 만난 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지유 씨는 교수님이 연락처를 갖고 있을 것 같은데? 교수님한테 직접 연락해서 해결될 일이라면, 임지유 씨가 알아서 연락하지 않았을까?”염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도
임지유는 며칠은 기다려야 소식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경민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 왔다.“김 회장님이랑 사모님께서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하신대. 우리도 같이 가보자.”그 말에 임지유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좋아.”다음 날 저녁, 경매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은 임지유를 데리고 곧장 김태훈의 부모님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접 임지유를 두 사람에게 소개했다.김태훈의 부모는 이미 경민준과 연미혜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은
김태훈의 부모님이 자리를 뜬 뒤, 경민준이 물었다.“사모님이랑 얘긴 잘했어?”임지유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런 것 같아. 고마워.”임지유는 속으론 생각했다.‘방금 사모님 얼굴 보니까 연미혜에 대한 불만이 점점 커지는 것 같던데....’사실 세인티와 넥스 그룹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연도 이미 알고 있었다. 김태훈이 미리 설명을 해뒀기 때문이었다.조금 전 임지유와 이야기를 나눌 때 울린 전화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대화를 미리 녹음해 두고, 자리를 비켜선 후 멀리서 경민준과 임지유 쪽을 슬쩍
다음 날 아침, 경민준은 임지유, 경다솜과 함께 일찍부터 경기장에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하승태와 수연도 도착했다.경다솜이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승태 삼촌, 안녕하세요!”“수연아, 와줘서 고마워!”수연이 경다솜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이제 곧 경기 시작되잖아. 다솜아, 많이 긴장돼?”경다솜은 고개를 저으며 또렷하게 말했다.“긴장되긴, 당연히 긴장 안 되지!”하승태는 다른 일정이 있어 경기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수연이를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것이었다.경민준이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말했다.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
‘교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애초에 김태훈과 임지유 사이엔 교류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김태훈 입장에선 굳이 마우재 교수와 얼굴을 붉힐 이유도 없었다.‘어차피 서로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하니...’“앞으로는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그저 적당히 웃어넘기며 대답한 김태훈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마우재 교수는 국내 AI 분야에서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인물이었다.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역시, 임지유가 캐벳 스미스 교수의 박사과정 제자라는 이유로 김태훈이 그녀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현승이 반응할 틈도 없이 연미혜의 통신기에 알림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그녀는 짧게 ‘데이터센터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볼게요’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연미혜는 예정대로 기술 센터를 떠났다.다음 날 하루는 집에서 휴식을 취했고, 이어지는 그다음 날은 넥스 그룹으로 복귀했다.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업은 이제 공식적으로 시작된 상태였다.마침 그녀가 복귀한 날, 김태훈은 경문 그룹과의 협의 미팅에 참석할 예정이었다.이전처럼 단순한 계약 조율이라면 김태훈이
연미혜는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현승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오늘은 같이 식사 못 할 것 같네요...”지현승은 부드럽게 대답했다.“괜찮아요. 다음에 함께해요.”연미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고, 지현승은 그녀가 유명욱과 함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홀로 식당으로 향했다.그는 꽤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였다.연미혜를 본 지 이틀 뒤부터, 마침내 정식 휴가가 시작됐다.하지만 휴가가 시작되기 전인 이틀 동안 그는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집에 돌아와 보니, 가족들도 모두 각자 바쁜 듯 아무도
일요일은 어버이날이었지만, 경다솜은 하루 먼저 토요일에 연씨 가문을 찾았다.경민준의 운전기사가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경다솜이 준비한 어버이날 선물은 손수 만든 카드 한 장이었다.카드에는 ‘어버이날 축하해요’라는 여섯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예쁘죠? 선생님이 아빠랑 같이 만들어도 된다고 하셨는데요. 아빠가 요즘 너무 바쁘셔서... 도안이나 그림을 그린 것부터, 하트 붙이는 것까지 전부 제가 혼자 했어요.”연미혜는 경다솜이 과제를 하는 모습을 본 지 꽤 되었는데, 그새 글씨가 부쩍 또렷하고 단정해졌다는 걸 느꼈다.
양주시에서 온 이들은 허미숙을 알아보긴 했지만, 임씨 가문과 손씨 가문 쪽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바로 눈치를 챘다.임씨 가문 쪽에서 예전 연씨 가문과의 일들이 이 자리에서 거론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그렇게 분위기를 읽은 이들은 허미숙을 분명히 알아보면서도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오히려 몇몇은 시선을 임지유와 임지후 쪽으로 돌리더니, 연미혜와 허미숙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이금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어르신, 두 손주분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인물도 그렇고 기품도 그렇고, 어르신 복
“그러게 말이에요.”염성민과 정범규도 현장에 있었다.그들 역시 연미혜와 임씨 가문, 손씨 가문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에, 이금자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한 말에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다.임해철과 임혜민 역시 그랬다. 누구 하나 나서서 연미혜를 두둔하거나, 그녀를 향해 인사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손아림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반면, 강혜원은 속으로는 연미혜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
국제 인공지능 콘퍼런스를 마친 지 이틀, 아니 사흘쯤 지난 어느 저녁, 연미혜는 퇴근 후 외삼촌 쪽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찾았다.호텔에 도착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문이 닫히려던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잠깐만요!”같은 순간, 손이 쑥 들어와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고개를 돌린 연미혜는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사람은 임지후였다.두 사람은 그동안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마주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후는 그녀
캐벳 스미스가 말한 ‘깊이 있는 대화’라는 건 결국 김태훈에게서 Infinite-CM의 핵심 기술을 조금이라도 캐내 보겠다는 속내였다.그러나 김태훈은 그와 악수하며 한 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말투로 받아넘겼다.“스미스 교수님, 과찬이십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순환신경망과 어텐션 메커니즘 관련 논문, 열 번도 넘게 읽었습니다. 저한텐 정말 큰 자극이 됐어요. 이렇게 직접 뵙고 말씀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제게 큰 영광입니다.”캐벳 스미스는 당연히 더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개막식이 임박한 터라 두 사람은 주최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