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
“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
“괜찮아.”
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부터 듣고 싶어?”
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
“언제 알았어.”
“네가 떠나고, 다음 달.”
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
“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
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
“혼자 갔어?”
“응.”
“그때도 혼자 살았잖아.”
“살고 있었지.”
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
“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
이든이 윤슬을 보았다.
“안 했어.”
“왜.”
“말하면 돌아올 거잖아.”
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
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
“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
“알아.”
“그래도 알았어야 했어.”
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
“응. 그건 알아.”
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
“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
“했지.”
“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
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
“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
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
“골목에 왔어?”
“세 번.”
짧게 답하자 이든의 고개가 조금 내려갔다.
“겨울 내내 거기 서 있었던 건 아니야. 일도 했고, 우주도 봐야 했으니까.”
“윤슬.”
“기다리기만 한 사람처럼 보지 마.”
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윤슬은 수건을 옆 의자에 놓았다. 손바닥에 천의 자국이 남았다.
“4년째부터는 그만뒀어. 날짜 안 세고, 겨울이라고 골목 나가지도 않고.”
우주에게 맞는 신발을 사고, 예약을 받고, 밀린 수건을 빨았다. 할 일은 늘 있었다. 그 말을 전부 꺼내지는 않았다.
“우주 키우는 것만 했어.”
이든은 의자를 당기지도, 윤슬에게 손을 뻗지도 않았다. 무릎 위에 올린 손으로 바지 끝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내가 안 왔으니까.”
“응.”
미용실 안에는 염색약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저녁에 창을 열어 두지 않은 탓이었다. 윤슬은 일어나 안쪽 작은 창을 벌렸다.
바깥에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이든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앉아 있어.”
윤슬의 말에 이든이 다시 등을 세웠다. 윤슬은 창을 조금만 열어 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 네 얘기 해.”
▷
이든은 앞치마 끈을 풀지 않았다. 무릎 아래로 늘어진 천을 가지런히 옮겨 놓고 입을 열었다.
“3년째 겨울에 수셰프가 됐어.”
윤슬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을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겨울이라는 말에 손목시계를 만지게 됐다.
“돌아갈 때가 된 건 알았어. 그런데 자리가 생겼고, 1년만 더 있으면 뭘 좀 해낼 것 같았어.”
“그래서 1년?”
“그다음에도 그 말을 했어.”
이든이 손을 펴서 무릎에 놓았다.
“1년만 더. 그걸 네 번.”
윤슬은 시계에서 손을 뗐다.
“그동안 전화는.”
“안 했어.”
“바빴다는 말은 하지 마.”
“그 말 안 할게.”
이든의 대답은 느렸다. 윤슬은 기다렸다. 가게 안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없으면 유난히 크게 들리던 소리였다.
“약속한 3년을 어겼는데,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
윤슬은 입술을 다물었다.
“더 잘해서 돌아가면 된다고. 그러면 늦은 것도 설명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뭘 하면 됐는데.”
이든이 윤슬을 보았다.
“네가 잘하고 돌아올 때까지?”
“아니.”
“연락도 없는데?”
“그러면 안 됐어.”
이든은 무릎 위 손을 내려다봤다.
“내가 어긴 약속인데, 연락할 자신이 없다는 걸 이유로 삼았어.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물을 생각보다 돌아가서 뭘 보여 줄지부터 생각했어.”
윤슬은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붙였다.
“비겁했어.”
이든이 말했다.
윤슬은 그 말을 고쳐 주지 않았다.
열어 둔 창으로 골목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어왔다. 누군가 신발을 끌며 지나갔다. 두 사람은 그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왔을 때는.”
윤슬이 물었다.
“나 찾으려고 했어?”
“전에 살던 데를 가 봤어. 없었어.”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응.”
“그래서 이 골목에 가게 열면 만나겠거니 했어?”
“아니. 네가 여기 사는 건 몰랐어.”
윤슬은 이든의 얼굴을 보았다. 그날 유리문 안에서 아이 뒤에 서 있던 자신을 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가게 문 열고 네가 들어왔을 때 알았어.”
“나는 네가 나 보러 온 줄 알았어.”
이든은 입술을 눌렀다가 놓았다.
“먼저 왔어야 했어.”
윤슬은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의 닳은 부분을 문질렀다. 오랫동안 손님들이 손을 올려 두었던 자리였다.
“우주한테 아빠가 있냐고 묻진 않았지?”
“안 물었어.”
“어디 사냐고도?”
“응.”
“잘했어.”
그 말에 이든의 손이 멎었다.
윤슬은 시선을 내려놓았다.
“우주가 먼저 말할 때가 있어. 누구네는 아빠가 데리러 왔다고. 그럴 때 어디 있는지, 왜 없는지까지 한꺼번에 물으면 대답 못 해.”
“알았어.”
“모르는 건 나한테 물어.”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은 의자에서 일어나 예약 장부를 덮었다. 펜이 중간에 끼어 책등이 벌어져 있었다. 펜을 빼서 통에 넣었다.
“미안해.”
등 뒤에서 이든이 말했다.
윤슬은 펜 통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넘기지 않을게. 뭐든 할게.”
윤슬은 펜 통을 거울 옆으로 밀었다.
“뭐든은 너무 커.”
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럼 필요한 것부터.”
윤슬은 거울에 비친 이든을 보았다.
“지금은 앉아. 아직 할 말 남았어.”
“알았어.”
이든이 다시 앉았다. 윤슬도 장부에서 손을 떼고 돌아왔다.
▷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탁 할머니가 보낸 짧은 글이었다. 우주가 잠들었고, 아침에 와도 된다는 말이었다.
윤슬은 답을 보내고 화면을 이든 쪽으로 돌렸다.
“잤대.”
이든이 화면을 내려다봤다.
“안 깨도 되겠네.”
“자다 깨면 엄마 찾기는 해. 할머니가 물 주면 다시 자고.”
“물.”
이든이 낮게 되풀이했다.
윤슬은 휴대전화를 선반에 놓았다.
“우주한테는 아직 말하지 마.”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남을 사람인지 우주가 알아야 해.”
“알았어.”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게 먼저가 아니야. 내일도 있고, 그다음 날도 있는 사람이 돼야 해.”
이든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기다렸다. 윤슬이 말을 마쳤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숨기는 건 할게. 거짓말은 안 해.”
“나도 거짓말해 달라는 건 아니야.”
“우주가 바로 물으면?”
윤슬은 입술 안쪽을 눌렀다. 아이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말을 다시 물었다. 왜냐고 묻고, 답을 듣고도 왜냐고 했다.
“그때는 나랑 같이 얘기해. 혼자 정하지 말고.”
“그럴게.”
“네가 아저씨인 줄 알고 좋아한 거야.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면 놀랄 수도 있어.”
“지금처럼 있을게.”
윤슬은 바닥에 놓인 우주의 실내화를 보았다. 크기가 작은 신발 한 짝이 책상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발끝으로 끌어내려다가 몸을 숙여 바로 놓았다.
이든도 그쪽을 보았다.
“우주는 뭘 조심해야 해.”
“뜨거운 건 앞에 바로 놓지 마. 먼저 먹겠다고 손부터 대.”
“식혀서 줄게.”
“가게 갈 땐 나한테 말하라고 해. 네가 받아 주면 그냥 가도 되는 줄 아니까.”
“알았어.”
“엄마가 바쁘면 여기에서 기다려도 되냐고 물어봐. 길 건너는 건 혼자 두지 말고.”
이든이 의자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할게.”
윤슬은 우주 책상에 놓인 크레파스 통을 손끝으로 밀었다. 아이가 쓰기 편하게 왼쪽 끝에 붙여 놓았다가, 너무 가까워 떨어질까 봐 안으로 조금 옮겼다.
“알아야 할 게 많아.”
“하나씩 말해 줘.”
“나도 한 번에 다 못 말해.”
“그럼 다음에 또 듣고.”
윤슬은 크레파스 통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다음이라는 말은 저녁에도, 내일 아침에도 쉽게 쓸 수 있었다. 이든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믿을 수는 없었다. 윤슬은 뚜껑이 닫혔는지 누르고 돌아섰다.
“듣고 안 잊어버려야 해.”
“안 잊게 할게.”
▷
밤이 깊자 윤슬은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서 꺼냈다.
미용실에서 쓰는 건조대는 가게 안쪽에 접혀 있었다. 꺼내려고 손을 뻗자 이든이 먼저 끝을 잡았다.
“어디에 펴.”
“샴푸대 옆. 통로 막지 말고.”
이든이 건조대를 옮겼다. 윤슬은 수건을 한 장씩 털어 건넸다. 이든이 반으로 접어 걸자 윤슬이 끝을 잡아 폈다.
“다 펴야 말라.”
이든은 다음 수건부터 길게 걸었다.
젖은 천에서 세제 냄새가 났다. 윤슬은 빈 세탁 바구니를 내려놓고 손바닥을 바지에 닦았다.
“배 안 고파?”
이든이 물었다.
“지금은.”
“물은 마셔.”
이든이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을 꺼냈다. 윤슬 쪽으로 내밀기 전에 뜨거운 물이 아닌지 손가락으로 컵 옆을 짚었다.
윤슬은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말을 더 이어 간 것은 윤슬이었다. 우주가 어린이집에 처음 갔을 때 한동안 문 앞에서 신발을 벗지 않았던 일, 파란 크레파스만 먼저 짧아지는 일, 자다가 이불을 발로 밀어내는 일.
이든은 묻고 들었다. 우주가 잘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도 웃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윤슬이 말을 마친 뒤에야 입가가 조금 풀렸다.
“그림은 매일 그려?”
“응. 공책 사 줬더니 매일 하겠대.”
“글도 혼자 써?”
“모르는 건 물어봐. 아는 건 그냥 쓰고.”
이든이 비어 있는 우주 의자를 보았다.
“나한테도 보여 줬어.”
“빵 그린 거?”
“응. 접시보다 크게.”
윤슬의 입에서도 짧게 웃음이 났다.
“좋아하는 건 크게 그려.”
말이 끝나자 웃음도 그쳤다. 윤슬은 비어 있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컵 입구가 손가락에 눌려 조금 찌그러졌다.
이든은 웃음을 붙잡으려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창밖이 옅어질 무렵, 윤슬이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우주 데려와야 해.”
이든도 일어났다.
“밥은.”
“집에 가서 먹이면 돼.”
“내가 할게.”
윤슬은 시계를 보았다. 아직 아이가 일어날 시간은 아니었다.
“조금 있다가 와. 할머니 집에서 더 자고 있을 수도 있어.”
“문 열어 둘까.”
“내가 열게.”
이든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셔터를 들어 올리자 바닥 가까이부터 골목빛이 들어왔다.
윤슬은 이든이 맞은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보고 문을 닫았다.
손등으로 눈 밑을 눌렀다. 참던 숨이 한 번 새어 나왔다. 윤슬은 고개를 숙이고 잠깐 그대로 서 있었다.
곧 세면대 앞으로 갔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깨끗한 수건을 꺼냈다. 눈가를 문지르지 않고 눌러 닦았다.
수건을 내려놓은 뒤 우주 가방에 넣을 물통부터 씻었다.
▷
윤슬은 가방을 챙겨 골목으로 나왔다.
접시 하나의 열린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든이 팬에 버터를 녹이고 있었다. 윤슬이 문 앞을 지나자 고개를 들었다.
“우주 데리러 가?”
“응.”
“금방 돼.”
팬 가장자리로 달걀이 얇게 굳었다. 이든은 주걱으로 끝을 떼어 안쪽으로 접었다. 도마에는 구운 빵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열린 문 앞에서 그 손을 잠깐 보았다. 오믈렛을 나누어 빵 사이에 넣고, 너무 두껍게 포개진 곳은 다시 고르게 폈다. 옆 냄비에서 양파 수프가 낮게 끓었다.
“많이 주지 마. 아침엔 조금 먹어.”
“알았어.”
“빵은 작게.”
이든은 빵을 다시 도마에 놓았다. 칼로 나누고 잘린 쪽이 벌어지지 않게 눌러 담았다.
윤슬은 더 서 있지 않고 빌라로 걸어갔다.
탁 할머니 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우주 목소리가 났다.
“엄마야?”
“응.”
문이 열렸다. 잠옷 바지를 입은 우주가 문 안쪽에 서 있었다. 머리 한쪽이 눌려 납작해져 있었다.
“엄마, 끝났어?”
“끝났어.”
“문도 닫았어?”
“닫고 왔지.”
탁 할머니가 아이 점퍼를 들고 나왔다.
“조금 전에 일어났어. 물만 마셨고.”
“아침은 제가 먹일게요.”
“그래, 그래. 너도 먹고.”
윤슬은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윤슬 얼굴을 잠깐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점퍼 소매 안에 말려 들어간 안감을 손가락으로 빼 주었다.
우주는 윤슬 손을 잡고 신발을 신었다.
“할머니 코가 기차였어.”
“큰 기차였어?”
“응. 나는 안 탔어.”
탁 할머니가 웃으며 문을 잡아 주었다. 윤슬은 우주의 가방 끈을 어깨에 올리고 골목으로 나왔다.
미용실 문 앞에 종이봉투가 놓여 있었다.
윤슬은 우주 손을 잡은 채 몸을 굽혔다. 봉투 안의 용기는 아직 따뜻했다. 빵이 담긴 통 옆으로 영수증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뒤집으니 짧은 글이 보였다.
『우주 아침. 당근 없음.』
우주가 봉투 위로 코를 내밀었다.
“내 거야?”
“응.”
“엄마 것도 있어?”
윤슬은 수프 용기와 빵을 보았다.
“같이 먹으면 돼.”
아이를 먼저 들여보내고 문을 열어 고정했다. 우주는 자기 책상 의자를 당겼다. 윤슬은 봉투에서 통을 꺼내고 수프 뚜껑을 조금 열어 김을 뺐다.
영수증은 버리지 않았다. 예약 장부 옆에 글이 보이게 놓았다.
우주가 빵을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윤슬 얼굴을 올려다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눈이 왜 부었어?”
윤슬은 수프를 저어 식혔다.
“양파.”
“또?”
『엄마 눈이 부었다. 양파가 또 그랬다. 양파는 나쁘다.』
(9화 끝)
우주는 사진이 없는 장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여기는 나중에 넣어?”“응. 또 찍으면.”“나 안 잘 때 찍어.”윤슬은 아이 손 밑에서 투명한 주머니를 펴 주었다. 우주는 빈 칸을 하나씩 짚다가 앨범을 덮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도 의자는 식탁 끝에 그대로 두었다.윤슬은 의자를 안으로 밀려다 멈췄다. 두 사람이 앉아 쓰던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우주 가방을 놓거나 빨래를 잠깐 걸쳐 두던 자리였다.의자에 걸린 수건만 걷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4월 25일 토요일 아침, 우주는 미용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파란 챙을 눈썹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윤슬이 가방에 물병을 넣는 동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엄마, 나 안 보여?”“다 보여.”“눈은?”“챙 때문에 조금.”우주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거울 속에서 눈이 다 보이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윤슬은 예약 장부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예약 두 칸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마지막 손님의 파마가 끝나는 시간을 손목시계로 세어 본 뒤 장부를 덮었다.“엄마는 조금 늦게 가. 아저씨랑 먼저 가 있어.”“얼마나?”“점심 먹기 전에는 갈 거야.”“그럼 빵 남길게.”“네 것은 다 먹어.”“엄마는?”“엄마 것도 있어.”말을 마치자 유리문 밖으로 이든이 보였다. 앞치마 대신 얇
우주는 유리문을 놓고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든이 다시 칼을 든 것을 보고서야 윤슬 옆으로 붙었다.“엄마, 아저씨는 맨날 저기서 자?”“가게 뒤에 방이 있어.”“빵 옆에서?”“빵은 부엌에 있고.”우주는 가방 끈을 끌어 올렸다. 윤슬은 아이 어깨에서 뒤집힌 끈을 펴 주고 빌라 쪽으로 걸었다. 우주는 모과나무를 지날 때까지 식당 창을 두 번 더 봤다.▷4월 18일 토요일, 윤슬은 마지막 손님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었다.거울 아래에는 우주가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다. 파란 지붕 밑에 네모난 창이 세 개였다. 실제 집에는 없는 큰 창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이건 어디야?”손님이 나간 뒤 윤슬이 물었다.“우리 집.”“창이 이렇게 많아?”“내 방에 하나 더.”“왜?”“아저씨네 보게.”윤슬은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다가 손을 멈췄다. 빌라에서는 맞은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창을 하나 더 그렸다.“집에서는 잘 자면 돼.”“나 잘 자.”“아침에는 누가 깨워도 눈 안 뜨잖아.”“눈도 자는 거야.”윤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주는 대답을 잘했다고 여겼는지 종이 아래에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미용실 바닥을 쓸고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담았을 때, 맞은편에서 철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주가 문 앞으로 달려갔다가 윤슬을 돌아봤다.
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엄마도 먹어.”“먹고 있어.”“더.”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많이 남았어요?”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 있어?”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오늘 하원만.”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할게.”“4시 반. 모과 어린이집.”“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괜찮아.”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뭐부터 듣고 싶어?”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언제 알았어.”“네가 떠나고, 다음 달.”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혼자 갔어?”“응.”“그때도 혼자 살았잖아.”“살고 있었지.”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이든이 윤슬을 보았다.“안 했어.”“왜.”“말하면 돌아올 거잖아.”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알아.”“그래도 알았어야 했어.”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응. 그건 알아.”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했지.”“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골목에 왔어?”“세 번.”짧게 답하자
우주가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손을 당겼다.“엄마, 여기 밝은 데.”빌라 입구의 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는 불빛 아래로 먼저 발을 넣고 새로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윤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우주가 양손을 폈다.“아저씨는 뭘 기다려?”윤슬은 아이 점퍼의 지퍼를 내려 주었다.“언제?”“아까. 가게 앞에서.”점퍼 안쪽에 머리카락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슬은 손톱으로 집어 떼고 옷을 걸었다.“가게 문 닫고 있었겠지.”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발판을 당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 뒤에도 윤슬은 현관에 서 있었다.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우가 보내 준 사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똑같아진 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윤슬은 화면을 끄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4월 8일 수요일 아침, 우주는 빌라 계단을 내려오며 가방 끈을 고쳐 멨다.“엄마, 이쪽.”아이가 모과나무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골목 바깥쪽을 가리켰다.“오늘은 저쪽으로 가자.”“또?”우주가 멈춰 섰다.그 길로 가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접시 하나 앞을 지나게 됐다. 유리문 안에서 빵을 자르는 손이나 카운터를 닦는 이든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윤슬은 요 며칠 골목 어귀를 돌아서 다녔다.“여기도 길 있잖아.”“아저씨 집 앞에도 있어.”“알아.”“엄마는 왜 저 집 앞만 돌아가?”윤슬은 아이 가방에서 한쪽으로 기운 물통을 바로 넣었다.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엄마가 생각할 게 있어서.”우주가 윤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걸으면서?”“응.”“그럼 천천히 가.”아이는 먼저 달려가지 않았다. 윤슬 옆에 붙어 작은 걸음으로 걸었다. 파란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금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고리가 흔들렸다.윤슬은 아이 손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우주는 빨리 가도 돼.”“손 잡았잖아.”우주가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윤슬은
윤슬은 공책을 덮어 가방 옆에 놓았다. 예약 장부에는 다음 토요일 오후가 한 칸 비어 있었다. 우주 머리를 깎으려고 남겨 둔 자리였다.방 안에서 이불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장부를 닫고 아이 곁으로 갔다. 베개 아래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 주자 우주가 잠결에 고개를 돌렸다. 귀를 덮은 머리끝이 손등을 간질였다.▷4월 4일 토요일, 우주는 미용실 의자 앞에서 두 발을 붙이고 섰다.“다음에.”윤슬은 아이 목에 두를 작은 수건을 펴 들었다.“오늘 하기로 했잖아.”“내일.”“내일도 머리는 깎아야지.”우주는 귀를 양손으로 덮었다. 머리카락까지 눌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윤슬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귀 안 자르는 거 알지?”“아는데.”“그럼 앉자.”“싫은 건 알아도 싫어.”윤슬은 펴 놓은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손님이 늦는다는 연락을 해 와서 잠깐 틈이 났다. 그사이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우주는 의자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다.“머리가 눈 찌르잖아.”“눈 감으면 돼.”우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만 살짝 뜨고 윤슬의 손을 살폈다.가위는 아직 허리 가위집에 있었다.“엄마, 조금만 잘라.”“응. 조금만.”“조금보다 더 조금.”“먼저 앉아 봐.”윤슬은 아이를 안아 의자 위에 놓았다. 높이를 맞추려고 받침을 올리고 덮개를 펼치자 우주의 턱이 벌써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지난번에도 이 자리에서 울었다. 목에 머리카락이 붙는다고 울고, 털어 주려고 덮개를 풀면 아직 안 끝났느냐고 울었다. 윤슬은 오늘 쓸 수건을 두 장 준비해 두었다.“목에 안 들어가게 할게.”우주는 수건을 두른 목을 만졌다.“여기 다 막아.”“막았어.”“뒤도.”윤슬은 목덜미 쪽을 한 번 더 접었다. 우주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덮개를 여미고 빗을 꺼냈다.빗살이 앞머리를 지나기도 전에 아이의 어깨가 올라갔다.“아직 안 잘랐어.”“지금 자르잖아.”“빗는 거야.”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꺼내려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