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
“엄마도 먹어.”
“먹고 있어.”
“더.”
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
▷
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
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
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많이 남았어요?”
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
“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
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
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
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
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
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 있어?”
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오늘 하원만.”
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
“할게.”
“4시 반. 모과 어린이집.”
“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
“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
“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철구한테 맡기면 돼.”
“네 가게도 토요일이잖아.”
“그 시간은 비울 수 있어.”
이든의 말은 짧았다. 윤슬은 열린 부엌 쪽을 보았다. 아직 사람이 앉아 있는 식탁이 있었다.
“데려오고 바로 여기로 와.”
“알았어.”
“뭘 사 준다고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로 올게.”
윤슬이 돌아서자 이든도 길을 건넜다. 가게로 들어가 주문서를 철구 앞에 놓는 모습이 보였다.
윤슬은 손을 씻고 다시 손님 뒤에 섰다. 머리카락을 가르는 손은 평소처럼 움직였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횟수만 늘었다.
▷
하원 시간을 조금 앞두고 파마 손님이 나갔다.
윤슬은 다음 손님에게 앉으라고 하고 미용실 문 앞에서 어린이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민 선생님에게 이든이 간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데리러 오는 사람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진이든이요. 우주도 아는 사람이에요.”
통화를 마치려는데 이든이 가게 문을 잠깐 열었다. 철구가 안에서 손을 들었다.
“셰프님, 다녀오세요!”
“뜨거운 접시는 안쪽에 놔.”
“네!”
카운터에는 늦은 점심 손님이 앉아 있었다. 이든은 열린 부엌을 한 번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윤슬은 아직 연결된 전화를 이든 쪽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지금 출발해.”
이든은 휴대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우주 엄마 친구입니다.”
윤슬은 미용실 문을 잡은 채 서 있었다.
“네. 진이든입니다. 곧 갈게요.”
이든이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윤슬은 마지막으로 선생님에게 부탁하고 통화를 끝냈다.
“우주가 먼저 뛰어 나오면 문 안에서 기다리라고 해.”
“응.”
“가방은 잘 두고 나와. 자기 그림 들고 나오면 가방은 잊어.”
이든은 말을 듣고 어린이집 쪽으로 걸었다.
윤슬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손님의 목에 수건을 둘렀다. 빗으로 머리를 나누고 가위를 들었다.
“오늘은 조금 짧게 할까요?”
손님이 거울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은 머리카락 끝을 잘랐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다가, 거울에 비친 골목을 한 번 확인했다.
▷
우주가 미용실에 들어온 것은 마지막 손님이 머리를 말릴 때였다.
윤슬은 드라이어를 끄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주는 파란 운동화를 나란히 벗으려다,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 발을 다시 넣었다.
“엄마!”
“왔어?”
“아저씨 엄마도 밥 하는 사람이래.”
윤슬의 손이 드라이어 손잡이에 멈췄다.
뒤따라 들어온 이든은 우주의 가방을 작은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어깨끈이 바닥에 끌리지 않게 책상 모서리에 걸었다.
“어린이집에서 잘 나왔어?”
“응. 가방도 가져왔어.”
우주가 자랑하듯 가방을 두드렸다.
“선생님한테 인사도 했고?”
“했어. 아저씨도 했어.”
“잘했네.”
윤슬은 다시 드라이어를 켰다. 손님 머리를 마저 말리고 목에 붙은 짧은 머리카락을 털어 주었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나가자 우주가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엄마, 아저씨도 아빠 없어.”
이번에는 빗을 내려놓았다.
이든은 아이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윤슬을 보다가 우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얘기는 왜 했어?”
윤슬이 물었다.
“내가 물었어.”
“뭐라고?”
우주는 두 손을 무릎에 올렸다. 어린이집에서 무언가를 발표할 때처럼 등을 잠깐 폈다.
“아저씨는 아빠 없어?”
이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윤슬이 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손을 바지 옆에 가볍게 문질렀다.
“없어. 엄마가 혼자 키웠어. 급식실에서 일하셨어.”
우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까도 그렇게 말했어.”
윤슬은 이든을 보았다. 함께 있을 때도 이든은 어머니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밥을 잘하고, 일을 오래 했다는 말 정도였다.
우주가 의자 끝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그럼 아저씨도 나랑 같네.”
이든이 가만히 서 있었다.
윤슬은 아이 가방에 끼어 있는 종이를 빼냈다. 접힌 귀퉁이를 펴는 데 손이 조금 더 걸렸다.
“아까 길에서도 그렇게 말했어?”
“응.”
“아저씨는?”
“멈췄어.”
우주는 운동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돌 밟았나 봐.”
이든이 낮게 답했다.
“잠깐 멈췄다가 걸었어.”
윤슬은 종이를 우주 책상 위에 놓았다. 아이가 그린 모과나무였다. 줄기 옆으로 사람 발 두 개가 크게 나와 있었다.
“급식실이면 어린이들이 먹는 밥이네.”
윤슬의 말에 우주가 눈을 들었다.
“진짜?”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먹는 밥을 만들었어.”
“많이?”
“많이.”
“숟가락도 많이?”
“숟가락은 아이들이 하나씩 들고 왔어.”
우주는 그 대답을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 있던 숟가락을 꺼내 보였다.
“나는 이거.”
“알아.”
이든은 아이가 든 숟가락을 보고 답했다.
윤슬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우주에게 주었다. 우주가 컵을 두 손으로 잡고 마시는 동안 이든은 비뚤어진 책상 의자를 바로 놓았다.
“고마워.”
윤슬이 말했다.
이든은 의자에서 손을 뗐다.
“다음에도 필요하면 말해.”
윤슬은 손님 자리의 수건을 걷었다. 세탁 바구니에 넣고, 우주 쪽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잘 데려왔네.”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다른 약속을 보태지 않았다.
▷
미용실을 닫기 전, 우주는 맞은편 창을 보며 물었다.
“엄마, 오늘 아저씨한테 가도 돼?”
윤슬은 예약 장부를 덮었다.
“엄마랑 같이.”
“지금?”
“바닥부터 쓸고.”
우주는 작은 빗자루를 집었다. 책상 아래에 들어간 크레파스 한 개를 먼저 꺼내고, 자기 자리 주변을 쓸었다. 머리카락보다 종이 조각이 더 많았다.
윤슬이 모은 머리카락 쪽으로 빗자루를 밀자 우주는 얼른 손을 뗐다.
“이건 엄마 거.”
“다 같은 바닥인데.”
“내 건 조금이야.”
윤슬은 웃으며 쓰레받기를 가져왔다. 우주가 모은 것까지 담아 버리고 미용실 등을 껐다.
접시 하나에서는 이든이 빵을 자르고 있었다. 칼이 도마에 닿을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났다. 잘린 빵을 팬에 놓자 녹은 버터가 가장자리로 번졌다.
철구는 식탁을 닦다가 우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주 왔네.”
“철구이 형, 나 오늘 안 뛰었어.”
“어디서?”
“어린이집부터.”
“끝까지?”
우주가 입을 다물었다. 이든이 팬을 움직이며 대신 답했다.
“모과나무 앞에서는 조금 뛰었어.”
“조금만.”
우주가 손가락 사이를 좁게 벌렸다.
윤슬은 아이를 카운터 끝에 앉혔다. 이든이 구운 빵을 작은 접시에 나누고, 양파 수프를 그 옆에 놓았다. 김이 빠지도록 수프를 한 번 저은 뒤 아이 앞으로 밀었다.
“조금 기다렸다가 먹어.”
“엄마 것도?”
“옆에 있어.”
윤슬 앞에도 접시가 놓였다. 윤슬은 식사 값을 내려는데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내가 부탁한 건데.”
윤슬이 먼저 말했다.
“밥값은 내.”
이든은 잠깐 윤슬을 보다가 계산대 쪽으로 손을 뻗었다. 돈을 받고 거스름돈과 영수증을 나란히 놓았다.
윤슬은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우주는 그동안 빵을 수프에 넣어도 되는지 묻고 있었다.
“넣어도 돼?”
“응.”
“다?”
“먹을 만큼.”
우주는 빵 한 조각을 담갔다 꺼냈다. 끝이 부드러워졌는지 숟가락으로 받쳐 입에 넣었다.
이든은 주문서 묶음에서 한 장을 뺐다. 앞면을 확인하고 뒤집었다.
“우주, 좋아하는 색이 뭐야?”
“파랑.”
이든이 적었다.
“싫어하는 건?”
“당근.”
“그건 기억해.”
“그럼 왜 물어?”
“다른 것도 있는지.”
우주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머리 깎기.”
윤슬이 아이를 보았다.
“지난번엔 잘 깎았잖아.”
“아저씨가 있었잖아.”
이든의 펜이 잠깐 멎었다. 종이 아래쪽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그거 왜 적어?”
“까먹으면 안 되니까.”
우주는 빵을 씹으며 종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윤슬이 수프 그릇을 안쪽으로 옮겼다.
“먹고 봐. 옷에 쏟는다.”
이든이 윤슬에게 물었다.
“먹으면 안 되는 건 없어?”
“알레르기는 없어. 아직은.”
이든은 종이에 적고 다시 우주를 보았다.
“신발은 얼마나 커?”
우주가 발을 들었다. 카운터 아래에서 운동화 앞코만 보였다.
“이만큼.”
“그건 엄마한테 물어야겠다.”
윤슬이 답했다.
“180.”
이든은 숫자를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우주는 신발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내 발에 숫자 있어?”
“신발 안쪽에.”
“진짜?”
우주가 곧바로 신발을 벗으려 하자 윤슬이 말렸다.
“밥 먹고.”
아이는 발을 내려놓았다. 대신 마지막 빵 조각을 들어 이든 쪽으로 보여 주었다.
“이거 다 먹었어.”
“봤어.”
이든은 접시를 바로 가져가지 않았다. 우주가 숟가락까지 내려놓은 뒤에야 빈 그릇을 들었다.
▷
가게를 나왔는데 우주가 갑자기 미용실 문을 가리켰다.
“엄마, 그릇.”
윤슬은 아침에 씻어 놓고 돌려주지 못한 수프 그릇을 떠올렸다. 이든이 미용실에 왔을 때도 손님을 보느라 잊었다.
“맞다. 가져와야지.”
우주는 다시 식당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우리 또 와.”
윤슬은 미용실 문을 열어 그릇을 꺼냈다. 마른 행주로 물기가 남았는지 확인하고, 우주에게 문을 잡아 달라고 했다.
아이는 문을 활짝 밀었다. 윤슬이 나오자 이번에는 닫히는 문을 끝까지 따라 밀었다.
“안 세게 했어.”
“잘했어.”
맞은편으로 건너가니 철구가 빈 식탁의 의자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든은 윤슬이 내민 그릇을 받았다.
“잘 먹었어.”
“우주도 잘 먹었네.”
우주는 빈손을 뒤집어 보였다.
“다 먹어서 없어.”
윤슬은 카운터 옆에 놓인 가방을 우주 어깨에 걸어 주었다. 아까 앉으면서 벗어 둔 것을 두고 갈 뻔했다. 끈 길이를 맞추는데 카운터 뒤 못에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앞면은 주문서였다. 뒤집어 꽂아 놓아서 적힌 글이 그대로 읽혔다.
『우주. 9월 12일. 왼손. 당근 싫음. 파랑. 머리 깎을 때 손 잡아 주면 안 움.』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가 이어져 있었다.
『알레르기 없음. 신발 180.』
윤슬은 가방 끈을 잡은 손을 놓았다. 주문서 모서리에는 못이 들어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손이 젖어도 글이 지워지지 않게 물통과 떨어진 곳에 걸어 두었다.
“오늘 들은 거 다 적었네.”
“더 있으면 말해 줘.”
이든이 받았던 그릇을 안쪽 선반에 올렸다.
우주는 카운터 아래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 이름 있어?”
이든이 종이를 잠깐 내려 주었다. 우주는 자기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고 나머지 글을 천천히 읽었다. 신발 숫자에서는 윤슬을 돌아봤다.
“내 발도 적었네.”
“신발.”
윤슬이 고쳐 주자 우주는 종이를 이든에게 돌려주었다.
“이거 안 버려?”
“안 버려.”
이든이 주문서를 다시 못에 꽂았다. 우주는 제대로 걸렸는지 보고 나서야 문 쪽으로 갔다.
윤슬도 뒤따르다 카운터를 돌아봤다. 손님이 부르자 이든은 주문서를 한 번 확인하고 열린 부엌으로 들어갔다. 우주 이름이 적힌 뒷면은 윤슬이 선 자리에서도 보였다.
우주가 유리문을 잡고 물었다.
“엄마, 내일도 아저씨 있어?”
윤슬은 카운터 뒤에 걸린 종이에서 눈을 떼고 문으로 갔다.
“가게 열면 있지.”
“그럼 내일 보자.”
우주가 안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든이 칼을 도마에 내려놓고 손을 들었다.
『아저씨는 아빠가 없다. 나랑 같다. 그래서 친구다.』
(10화 끝)
우주는 사진이 없는 장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여기는 나중에 넣어?”“응. 또 찍으면.”“나 안 잘 때 찍어.”윤슬은 아이 손 밑에서 투명한 주머니를 펴 주었다. 우주는 빈 칸을 하나씩 짚다가 앨범을 덮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도 의자는 식탁 끝에 그대로 두었다.윤슬은 의자를 안으로 밀려다 멈췄다. 두 사람이 앉아 쓰던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우주 가방을 놓거나 빨래를 잠깐 걸쳐 두던 자리였다.의자에 걸린 수건만 걷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4월 25일 토요일 아침, 우주는 미용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파란 챙을 눈썹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윤슬이 가방에 물병을 넣는 동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엄마, 나 안 보여?”“다 보여.”“눈은?”“챙 때문에 조금.”우주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거울 속에서 눈이 다 보이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윤슬은 예약 장부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예약 두 칸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마지막 손님의 파마가 끝나는 시간을 손목시계로 세어 본 뒤 장부를 덮었다.“엄마는 조금 늦게 가. 아저씨랑 먼저 가 있어.”“얼마나?”“점심 먹기 전에는 갈 거야.”“그럼 빵 남길게.”“네 것은 다 먹어.”“엄마는?”“엄마 것도 있어.”말을 마치자 유리문 밖으로 이든이 보였다. 앞치마 대신 얇
우주는 유리문을 놓고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든이 다시 칼을 든 것을 보고서야 윤슬 옆으로 붙었다.“엄마, 아저씨는 맨날 저기서 자?”“가게 뒤에 방이 있어.”“빵 옆에서?”“빵은 부엌에 있고.”우주는 가방 끈을 끌어 올렸다. 윤슬은 아이 어깨에서 뒤집힌 끈을 펴 주고 빌라 쪽으로 걸었다. 우주는 모과나무를 지날 때까지 식당 창을 두 번 더 봤다.▷4월 18일 토요일, 윤슬은 마지막 손님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었다.거울 아래에는 우주가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다. 파란 지붕 밑에 네모난 창이 세 개였다. 실제 집에는 없는 큰 창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이건 어디야?”손님이 나간 뒤 윤슬이 물었다.“우리 집.”“창이 이렇게 많아?”“내 방에 하나 더.”“왜?”“아저씨네 보게.”윤슬은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다가 손을 멈췄다. 빌라에서는 맞은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창을 하나 더 그렸다.“집에서는 잘 자면 돼.”“나 잘 자.”“아침에는 누가 깨워도 눈 안 뜨잖아.”“눈도 자는 거야.”윤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주는 대답을 잘했다고 여겼는지 종이 아래에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미용실 바닥을 쓸고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담았을 때, 맞은편에서 철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주가 문 앞으로 달려갔다가 윤슬을 돌아봤다.
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엄마도 먹어.”“먹고 있어.”“더.”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많이 남았어요?”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 있어?”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오늘 하원만.”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할게.”“4시 반. 모과 어린이집.”“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괜찮아.”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뭐부터 듣고 싶어?”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언제 알았어.”“네가 떠나고, 다음 달.”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혼자 갔어?”“응.”“그때도 혼자 살았잖아.”“살고 있었지.”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이든이 윤슬을 보았다.“안 했어.”“왜.”“말하면 돌아올 거잖아.”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알아.”“그래도 알았어야 했어.”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응. 그건 알아.”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했지.”“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골목에 왔어?”“세 번.”짧게 답하자
우주가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손을 당겼다.“엄마, 여기 밝은 데.”빌라 입구의 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는 불빛 아래로 먼저 발을 넣고 새로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윤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우주가 양손을 폈다.“아저씨는 뭘 기다려?”윤슬은 아이 점퍼의 지퍼를 내려 주었다.“언제?”“아까. 가게 앞에서.”점퍼 안쪽에 머리카락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슬은 손톱으로 집어 떼고 옷을 걸었다.“가게 문 닫고 있었겠지.”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발판을 당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 뒤에도 윤슬은 현관에 서 있었다.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우가 보내 준 사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똑같아진 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윤슬은 화면을 끄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4월 8일 수요일 아침, 우주는 빌라 계단을 내려오며 가방 끈을 고쳐 멨다.“엄마, 이쪽.”아이가 모과나무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골목 바깥쪽을 가리켰다.“오늘은 저쪽으로 가자.”“또?”우주가 멈춰 섰다.그 길로 가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접시 하나 앞을 지나게 됐다. 유리문 안에서 빵을 자르는 손이나 카운터를 닦는 이든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윤슬은 요 며칠 골목 어귀를 돌아서 다녔다.“여기도 길 있잖아.”“아저씨 집 앞에도 있어.”“알아.”“엄마는 왜 저 집 앞만 돌아가?”윤슬은 아이 가방에서 한쪽으로 기운 물통을 바로 넣었다.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엄마가 생각할 게 있어서.”우주가 윤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걸으면서?”“응.”“그럼 천천히 가.”아이는 먼저 달려가지 않았다. 윤슬 옆에 붙어 작은 걸음으로 걸었다. 파란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금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고리가 흔들렸다.윤슬은 아이 손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우주는 빨리 가도 돼.”“손 잡았잖아.”우주가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윤슬은
윤슬은 공책을 덮어 가방 옆에 놓았다. 예약 장부에는 다음 토요일 오후가 한 칸 비어 있었다. 우주 머리를 깎으려고 남겨 둔 자리였다.방 안에서 이불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장부를 닫고 아이 곁으로 갔다. 베개 아래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 주자 우주가 잠결에 고개를 돌렸다. 귀를 덮은 머리끝이 손등을 간질였다.▷4월 4일 토요일, 우주는 미용실 의자 앞에서 두 발을 붙이고 섰다.“다음에.”윤슬은 아이 목에 두를 작은 수건을 펴 들었다.“오늘 하기로 했잖아.”“내일.”“내일도 머리는 깎아야지.”우주는 귀를 양손으로 덮었다. 머리카락까지 눌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윤슬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귀 안 자르는 거 알지?”“아는데.”“그럼 앉자.”“싫은 건 알아도 싫어.”윤슬은 펴 놓은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손님이 늦는다는 연락을 해 와서 잠깐 틈이 났다. 그사이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우주는 의자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다.“머리가 눈 찌르잖아.”“눈 감으면 돼.”우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만 살짝 뜨고 윤슬의 손을 살폈다.가위는 아직 허리 가위집에 있었다.“엄마, 조금만 잘라.”“응. 조금만.”“조금보다 더 조금.”“먼저 앉아 봐.”윤슬은 아이를 안아 의자 위에 놓았다. 높이를 맞추려고 받침을 올리고 덮개를 펼치자 우주의 턱이 벌써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지난번에도 이 자리에서 울었다. 목에 머리카락이 붙는다고 울고, 털어 주려고 덮개를 풀면 아직 안 끝났느냐고 울었다. 윤슬은 오늘 쓸 수건을 두 장 준비해 두었다.“목에 안 들어가게 할게.”우주는 수건을 두른 목을 만졌다.“여기 다 막아.”“막았어.”“뒤도.”윤슬은 목덜미 쪽을 한 번 더 접었다. 우주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덮개를 여미고 빗을 꺼냈다.빗살이 앞머리를 지나기도 전에 아이의 어깨가 올라갔다.“아직 안 잘랐어.”“지금 자르잖아.”“빗는 거야.”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꺼내려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