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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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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잔혹한 왕비

[제1화] 깨어진 화관과 서늘한 밤의 그림자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6 10:26:28

2026년, 대한제국 황궁

 

​세상의 모든 빛과 부귀를 긁어모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제국의 심장부였지만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황궁의 밤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서늘하고 기괴했다.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된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빗방울은 마치 누군가의 한 맺힌 눈물처럼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려댔다.

 

 

​황후전의 내실 대한제국 재계 서열 1위 민석그룹의 고명딸이자 제국의 유일무이한 국모인 민시은은 거울 앞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목을 짓누르는 화려한 가채와 겹겹이 두른 붉은 적의는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화려한 구속구와 다름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27세의 황후는 얼음조각처럼 차갑고 완벽하게 아름다웠지만 텅 빈 눈동자 속에는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 시은마마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차라도 한잔 드시지요 "

 

​어린 시절부터 시은의 곁을 지켜온 유모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국화차를 내려놓았다. 

 

주름진 유모의 눈가에는 언제나 시은을 향한 깊은 안타까움이 고여 있었다. 

 

시은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시선은 찻잔에 떠 있는 가엾은 국화잎에 머물러있었다.

 

뜨거운 물에 속절없이 휩쓸려 향기를 빼앗기는 저 꽃잎이 꼭 자신의 처지 같았다.

 

 

​ " 유모 "

 

​"예~ 시은 마마 "

 

 

​"비가 오니 그날이 생각나네 내가 처음 이 숨 막히는 붉은 옷을 입었던 날 말이야."

 

 

​시은의 읊조림에 유모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13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희망차게만 보이던 나이였던시은은 민석그룹 민현석 회장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였다.

 

시은은 어린 시절 황실 연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다정한 소년 황태자 유종석을 깊이 연모했다. 

 

그 순수했던 짝사랑은 어른들의 철저한 정치적 계산과 결합하여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황실은 민석그룹의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민석그룹은 제국의 권력이 필요했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주던 다정한 오라버니가 남편이 된다는 사실에 13살의 시은은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뻐했다. 

 

제 몸집보다 큰 대례복을 입고 무거운 칠보 화관을 쓴 채 제단의 계단을 오르던 날 시은은 평생 이 남자만을 바라보며 헌신하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제단의 끝에서 그녀를 맞이한 15살의 어린 신랑 유종석의 눈빛은 시은이 기억하던 따뜻한 봄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한의 시베리아 벌판처럼 차갑고 건조했다. 

 

오직 민석그룹의 재력만을 탐욕스럽게 훑어내리는 기만의 눈빛 그때 시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어야 했다.

 

 

​자신이 쓴 화관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가시관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가시가 평생토록 자신의 심장을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시은이 13살의 나이로 화려한 새장 속에 갇혀 천천히 시들어가고 있을 때 황궁의 가장 어둡고 습한 밑바닥에서는 전혀 다른 종자의 짐승이 자라나고 있었다.

 

​같은 시각 빈민가 외곽의 낡은 고아원12살의 신아리는 차가운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원장이 휘두르는 매질을 독기 어린 눈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배고픔과 폭력 그리고 지독한 가난 아리의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그녀는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대가 없는 다정함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세상이 엿 같은 것뿐이야 '

 

​피멍이 든 손을 꽉 말아 쥐며 12살의 아리는 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되뇌었다. 

 

다른 아이들이 배고픔에 울다 지쳐 잠들 때 아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시궁창 같은 곳을 벗어나 세상을 발밑에 두겠다고 결심했다. 

 

동무의 빵을 훔쳐 먹고 남에게 뒤집어씌우는일 원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끔찍한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은 아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생존 본능이었다.

 

​그 독기와 비열함 그리고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처연한 미모 덕분에 아리는 하급 궁녀 선발에 합격하여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12살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한 아리의 눈에 비친 황궁은 거대한 사냥터였다.

 

​그녀는 천사의 얼굴을 한 채 철저하게 타인을 짓밟고 모함하고 이용하며 차근차근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냥감인 황제 유종석의 눈에 띄는 데 성공했다. 

 

유종석의 오만함과 허영심을 단숨에 꿰뚫어 본 아리는 그가 가장 원하는 달콤한 독이 되어 그의 이성과 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해 나갔다.

 

​그 지옥 같은 고아원에는 아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역모라는 누명을 쓰고 하룻밤 사이에 멸문지화를 당한 옛 귀족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부모가 목이 베여 나가는 끔찍한 광경을 벽장 틈 사이로 숨죽여 지켜봐야만 했던 핏빛 상처를 안고 짐승처럼 살아가던 소년김민혁이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만으로 버티던 민혁의 얼어붙은 세상에 단 한 줄기 따뜻한 빛이 스며든 건 고아원 후원 행사에 부친을 따라왔던 13살의 민시은을 본 순간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웅크려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민혁에게 시은은 주저 없이 다가와 자신의 하얀 손수건을 건넸다.

 

​"아프지 마  울어도 괜찮아."

 

​누구도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려준 소녀 그 순간 민혁의 심장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민혁은 그날 밤 고아원을 탈주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둠의 뒷골목을 뒹굴며 무술을 익혔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 민시은을 다시 만나 그녀의 그림자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리고 10년 뒤 지옥의 훈련을 수석으로 통과한 민혁은 대한제국 황실 경호실의 최정예 요원이 되어 마침내 시은의 곁에 섰다. 

 

비록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는 비참한 황후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민혁은 그녀의 발밑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 평생 시은을 지키겠노라 자신의 피와 영혼을 걸고 침묵의 서약을 맺었다.

 

​"시은마마"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내실의 휘장이 걷히고 시은의 개인 비서인 한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 뒤로는 어느새 젖은 머리칼을 빗어 넘긴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서 있는 호위무사 김민혁의 늠름한 실루엣이 보였다. 

 

시은의 시선이 아주 찰나 민혁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한비서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비서"

 

​"대비마마 측 김비서님으로부터 긴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오늘 밤, 폐하께서 신아리 처소에서 은밀히 외부 인사들과 접선 중이시라 하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입니다."

 

​시은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최근 황실 내에 막대한 자금이 알 수 없는 곳으로 새어나가고 있다는 정황을 한비서를 통해 은밀히 추적하던 중이었다.

 

​"채비를 하겠어 황제의 처소로 간다."

 

​"마마! 이 늦은 밤에 어딜 가신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진노하실 텐데"

 

​유모가 만류했지만 시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구속 같던 적의를 벗어 던지고 검은색 실크 가운을 걸친 그녀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폐하를 뵙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을 훔치는 도둑들의 꼬리를 밟으러 가는 것이지."

 

​어두운 회랑을 걷는 시은의 뒤를 민혁이 소리 없이 따랐다.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빗소리에 섞여 맴도는 기나긴 복도에 마침내 황제의 개인 처소인 교태전 앞 가장 구석진 비밀스러운 별채에 다다랐다.

 

​경비마저 물려버린 한적한 별채 앞에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역겨울 만치 달콤하고 끈적이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 정말로 민석그룹을 치실 작정이시옵니까? 만약 황후가 알게 된다면..."

 

 

​신아리의 교태 섞인 목소리였다. 

 

간드러지는 그 음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통쾌함과 탐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그 계집이 알면 무엇을 어찌할 수 있단 말이냐? 13살부터 내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울던 멍청한 인형일 뿐이다."

 

 

​이어지는 유종석의 오만한 비웃음은 시은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다 못해 산산조각이 나는 듯했다.

 

​"이미 황실 복원 사업을 빙자해 빼돌린 국고 5천억은 네 이름의 차명 계좌로 완벽하게 세탁해 두었다 내일 아침 내각을 움직여 이 모든 횡령의 배후를 민석그룹과 황후로 몰아갈 것이다 그 가증스러운 민현석 영감의 숨통을 끊어놓고 나면 이 제국의 옆자리는 온전히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나의이쁜 아리야"

 

 

​"아아~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시건방진 황후가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 쏟으며 폐위되는 꼴을 빨리 보고 싶사옵니다."

 

​쾅-!

 

​천둥이 치며 순간 별채 안을 환하게 밝혔다. 

 

창밖의 어둠 속에 서 있는 시은의 얼굴은 핏기하나 없이 창백했다.

 

​14년의 세월 13살의 순수했던 애정과 아내로서 다하고자 했던 알량한 의무감마저 철저하게 짓밟히고 유린당한 순간이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을 넘어 자신을 낳아준 아비와 가문마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저 극악무도한 기만이 시은의 몸이 충격과 배신감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던 그 찰나 크고 거친 손이 시은의 가녀린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놀라 고개를 돌린 시은의 시선 끝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야수 같은 눈빛을 한 김민혁이 서 있었다.

 

​민혁의 눈빛은 무너지려는 시은을 향해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마마 절대 무너지지 마십시오 그리고 울지 마십시오 '

 

​시은은 입술을 꽉 깨물어 흐르려는 눈물을 억눌렀다.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번졌지만 그녀의 텅 비어있던 눈동자 속에 처음으로 시퍼런 불꽃이 점화되고 있었다.

 

​그래 네놈들이 그토록 원한다면 내가 기꺼이 이 황실을 피로 씻어내어 주마 유종석! 

 

​시은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민혁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품속에서 붉은 피가 낭자하게 묻어있는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시은의 손에 쥐여주었다. 

 

시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수첩의 표지에는 금박으로 황실 재무부의 문양이 찍혀 있었고 끄트머리는 누군가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이게무엇이냐."

 

​시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민혁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빗물에 젖은 그의 어깨 위로 깊게 베인 검상이 드러났고, 붉은 피가 빗물과 함께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신아리의 수하들이 외부로 반출하려던 5천억 횡령의 진짜 장부 원본입니다."

 

 

​민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짐승 같은 충성심이 기괴하게 얽혀 있었다.

 

​"그리고 마마 "

 

​"……."

 

​"오늘 밤 자정폐하의 은밀한 지시를 받은 암살단이 마마의 아버님이신 민현석 회장님의 침소로 투입될 예정입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 시은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단순한 음모가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 밤, 모든 것을 끝장내려는 유종석과 신아리의 잔혹한 선전포고였다.

 

​"제게 명을 내려주십시오 마마를 위해 저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피를 흘리며 엎드린 민혁의 등 위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손에 쥐어진 피 묻은 장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암살단 시은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슬픔과 배신감은 산산이 부서져 날카로운 복수의 칼날로 벼려졌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피투성이가 된 민혁의 차가운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국의 황후가 가장 천한 호위무사의 얼굴에 제 체온을 나누어주는 불경하고도 애절한 순간에도시은의 붉은 입술이 서늘한 호선을 그리며 말아 올라갔다.

 

​"민혁아"

 

​"예.. 마마"

 

​"황제의 사냥개들을 모조리 물어뜯어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깨어진 화관 대신, 스스로 피 묻은 가시관을 집어 든 황후의 잔혹한 반격이, 폭우가 쏟아지는 제국의 밤하늘 아래서 그 거대한 서막을 올리고 있었다. 

 

 

"유종석,신아리 너네둘은 내가그동안 겪어온 고통을  이제부터 다시 되돌려줄게 이제는 내가 빛을 갚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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