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분주하고 들뜬 아침 공기가 겨우 내려앉은 듯하다. 오늘따라 부산한 일들이 반 박자씩 밀려 아이 손을 잡은 준호의 발걸음도 서두른다.
그렇게 서둘렀지만 늦었는지, 어린이집 앞은 한산하다. 그래도 늘 늦는 집은 있기 마련, 유모차를 미는 몇 명의 엄마들과 마주친다. 준호가 익숙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 감정 없는 미소와 짧은 목례가 연달아 되돌아온다.
그 사이 아이의 걸음은 모래에 잠기듯 둔해지고, 손바닥엔 땀이 맺힌다. 결국 두 팔이 그의 어깨를 더 깊게 감싼다. 처음 이 문턱을 넘던 날의 무게와 닮았지만, 지금은 그의 가슴께가 더 묵직하다.
문이 열리자 선생님이 먼저 다가왔다.
아이의 엄마가 오늘 새벽에 미국으로 떠났다는 연락을 미리 해 둔 터라, 말보다 손이 앞선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 작은 장난감을 흔들고, 반짝이는 스티커를 손바닥에 척 붙여주며 속삭인다.
“하윤이한테만 주는 거야. 선생님하고 비.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듯 두 사람은 눈을 맞춘다. 아이의 표정이 금세 풀리고, 작은 발뒤꿈치가 타일 위로 또박또박 멀어진다.
닫히는 문틈에 남는 뒷모습은 여전히 가늘다. 준호의 마음이 잠깐 저민다. 천천히 돌아나오며 휴대폰을 꺼낸다.
아내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낸 뒤, 화면에 남은 마지막 인사 시각을 본다. 불과 몇십 분 전. 이제 비행기는 바다 위를 건너고 있을 것이다.
그때, 몇 시간 전의 일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아이와 장모가 깊게 잠들기를 기다려 겨우 치른 짧은 이벤트, 그 뒤에야 간신히 닿은 잠, 스탠드 불빛 아래 협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정액을 닦은 티슈 몇 뭉치가 번쩍 떠오른다.
장모 혜정은 부지런하다. 먼지가 집에 내려앉는 걸 참지 못하는 데다, 사위 집에 몸을 기대고 사는 미안함이 손부터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오늘 아침 아이 눈치를 보느라, 장모와 둘만 남은 공기를 더듬느라 치울 틈이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알았다”고는 하지만, 설거지통에 먼저 손을 담그는 사람의 표정은 늘 다르게 말하곤 하니까... 이 집에서 자신의 몫을 증명하는 방법이 집안일뿐인 사람이라면, 안방까지 들어와 침구를 정리할 것도 분명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진다. 신호등이 바뀌기도 전에 횡단보도를 물고 서는 바퀴, 주머니 속 휴대폰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장모의 손이 협탁을 스치기 전에, 밤의 흔적부터 지워야 한다.
***
— 철컥
문고리가 가볍게 물렸던 이빨을 풀었다. 들어서며야 준호는 깨달았다.
‘그깟 휴지가 무슨 대수였나. 수십 년 살아온 인생의 관록이 있는 장모라면, 부부가 생이별 하기 전날 밤의 흔적쯤은 웃어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괜한 마음에 차를 돌렸구나’
현관 맞은편의 욕실 문에서 얇은 수증기를 밀치고 나오는 장모의 알몸을 보며 준호는 생각했다.
욕실 문이 덜 닫힌 채로 서걱거렸고, 물방울이 타일에 또닥—또닥 부딪혔다. 그 사이로 혜정은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듯 현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막 씻고 나온 그녀의 맨몸, 젖은 어깨선이 조명을 한 겹 번지게 했다.
둘 다 잠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놀라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사과부터 해야 하나…
혜정의 눈빛이 먼저 흔들렸다. 사위 집에 신세를 지게 된 뒤, 집안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위를 마주할 낯이 없었다. 아침부터 땀도 흘린데다, 잠깐 숨을 고르려 샤워를 택했을 뿐인데…
그 선택이 이렇게 어색한 마주침을 만들었다는 듯, 그녀의 등줄기가 순간 굳었다.
“어…” 소리만 걸려 나왔다. 준호는 시선을 옆으로 털듯 내빼며, 허공에 고개를 깊게 숙였다. “헛… 죄, 죄송합니다.”
혜정도 재빨리 욕실 벽의 타월을 잡아 둘러 맸다. 수증기가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밀고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엔 모양이 너무 뻔했고, 뻔뻔해지기엔 각자의 처지가 너무 가까웠다.
준호는 어깨를 한 번 접듯 돌리더니, 현관으로 물러났다. 문이 부드럽게 닫히고, 복도에 잠시 정적이 깔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준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했다.
[장모님] 이제 들어오게.
혜정의 문자였다. 잠깐의 숨 고르기를 끝내야할 시간이 되었나보다. 벌써.
***
문손잡이 위에서 손가락이 잠깐 맴돌았다. 사과를 해야 할까. 내 집에 들어가면서 왜 사과부터 떠올리는 걸까…
준호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가 가라앉았다. 오래 끌면 더 어색해질 것 같았다.
— 철컥
문을 열자 구겨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걸친 혜정이 거실에 서 있었다. 다 말리지 못한 웨이브 단발 끝에서 물방울이 톡— 떨어져 티셔츠 목선을 어둡게 적셨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애써 정돈돼 있었다.
“뭘 두고 갔어?”
준호는 시선 둘 데를 잃고 서성이듯 발을 옮겼다.
“아… 저… 휴대폰을 두고…” 말끝이 흐려졌다. 손에 쥔 휴대폰은 방금 전 진동을 멈춘 채였다. 혜정의 눈길이 그것을 스치고 곧 돌아갔다. 의아함과 미소가 번갈아 스쳤다.
“그럼 얼른 찾아서 출근해. 나는…” 그녀는 젖은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들어 보이며 짧게 웃고는 말꼬리를 삼켰다. 그리고 욕실 쪽으로 사라졌다.
준호는 어정쩡하게 뒷머리를 긁고 혼자 너털웃음을 흘렸다. 느려터진 순발력을 탓하듯 고개를 젖힌 뒤 발끝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매끈한 협탁의 코팅이 아침빛에 반짝였다.
준호의 둔한 발끝과 달리, 혜정의 손끝은 이미 집안을 한 바퀴 돌아 있었다. 아침까지 구겨져 있던 침구는 호텔 시트처럼 반듯했고, 휴지가 나뒹굴던 협탁 위는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했다.
스탠드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방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제야 신혼 초의 사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침실에 휴지통을 두자고 했다가 “휴지통에 냄새 밸까 봐 싫어”라며 고개를 저었던 다희.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목에서 턱 막혔다.
현관의 어색함 위로 얹힌 부끄러움이 귀끝을 달궜지만, 늘 쓰던 안방에는 낯선 정돈의 기운이 감돌았다. 세 식구가 살던 집에서 정리는 대체로 자신의 몫이었지만, 이렇게 반듯한 각은 손에 익지 않았다. 베개 라인을 손등으로 쓸어보니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다. 린넨 유연제 향이 은근히 올라와 잠깐 부끄러움마저 지웠다.
준호는 시트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훑고 문을 열었다. 머리를 말리고 나온 혜정이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전 물기를 머금던 짙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평소의 부드러운 갈색 곱슬로 돌아와 있었다.
“다희 걔는… 정리는 안 하면서 내가 손도 못 대게 해서…” 말끝이 스르르 기울었다. 좋은 뜻으로 꺼낸 말이 더 멀어지지 않도록 그녀가 먼저 입술을 다물었다. 협탁 위 티슈가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
‘그걸 먼저 봤다면 이 방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거야’, 하는 기색이 눈빛에 잠깐 스쳤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래도 이렇게 깔끔하니까 기분이 좋네요.”
준호가 한마디 보태자, 혜정의 표정이 한 톤 밝아졌다. “걔가 어릴 때는 잘하더니, 요샌 무슨 나라 구하는 일 한다고… 내가 대신 미안하네. 그래도 방이 깨끗해야 잠도 잘 오지.”
어색한 짧은 웃음이 오갔고, 둘 다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다.
***
— 띵동
— 끼이이익
약국 자동문이 또 고무를 긁었다. 이놈의 문은 A/S 기사가 올 때만 멀쩡했다. ‘오래돼서 그렇다’는 말에 교체도 고민했지만, 다희의 갑작스런 발령으로 사업 앞날이 불투명한 마당에 이따금 울리는 소음쯤은 참아 넘길 수밖에.
준호의 입가에서 “씨…ㅂ.”이 맴돌다 삼켜졌다. 알코올 스왑 냄새와 밤새 내려앉은 종이 가루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환풍기를 켠지 오래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자신만 늦은 줄 알았더니 동업자인 지환도 출근이 늦은 것 같아 준호는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 옆 약국의 북적임을 보자 그 숨을 도로 삼키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조제실 가림막 뒤에서 목소리가 먼저 튀었다.
“왔냐? 미국까지 데려다 주고 오라니까.”
“거기서도 뭐가 보여? 나인 줄은 또 어떻게 알아…” 준호가 카운터 플랩을 들어 올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 고물 문짝은 너한테만 그 소리를 내잖아.”
이죽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환이 나타났다. 흰 가운 아래 셔츠는 어제 보던 그 무늬, 버튼 옆 주름까지 그대로였다.
준호가 코끝으로 웃었다. “형도 방금 나온 주제에… 어제도 집에 안 들어갔어?”
지환이 가운 자락을 털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 티 나냐?”
준호는 가운 틈으로 보이는 셔츠를 한 번 더 흘끗했다. “어제는 또 어디서 놀았길래. 참 대단해, 형도.”
지환이 피식 웃더니 준호의 어깨에 팔을 척 얹었다. “웰컴 투 기러기! 이제 너도 밤에 같이 놀자고!”
준호가 그 팔을 슬쩍 밀어냈다. 옆벽에 걸린 자기 가운을 집어 들며 눈매가 차게 가늘어졌다. “뭔 소리야. 그리고 형이 무슨 기러기야, 참나…”
“넌 안 그럴 것 같지!?” 지환이 따라붙는 순간, 자동문이 또 열렸다.
— 띵동
이번엔 고무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환이 준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
“하윤아, 밥 먹어야지~ 어린이집 늦었다.”
밥공기의 김이 얇아지며 사그라졌다. 숟가락은 아이 입 앞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오늘따라 아이는 앞을 보지 않고 식탁 너머 냉장고 자석과 창가의 바람개비만 번갈아 훔쳐봤다.
지금 시선을 붙잡아 두지 못하면 ‘엄마가 한동안 없다’는 걸 눈치챌까 봐, 준호의 엄지가 휴대폰 화면 위에서 망설였다. 만화를 틀면 겨우 잠잠해질지, 아니면 더 파고들어 묻고 또 물을지…
“자네도 출근해야 되잖아. 어서 준비해. 하윤이 밥은 내가 먹일 테니까.”
뒤에서 혜정이 다가왔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손끝은 재빨랐다. 아내가 새벽마다 나가고 난 뒤 아이의 아침과 등하원은 줄곧 준호의 몫이었지만, 그 손놀림은 장모 혜정의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턱받이를 반듯이 채우고, 밥을 한 숟갈 작게 뭉쳐 김으로 살짝 감싸 쥐여 주었다. 젓가락으로 반찬 그릇을 리듬 있게 두드리며 ‘아—’를 눈짓으로 대신했다. 아이는 그 리듬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고, 숟가락이 다시 입을 찾았다.
마법 같은 손길이 집안의 어색함을 얇게 갈아 없애는 동안, 준호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예민한 딸아이를 둘이나 길렀던 세월이 식탁 위에 고요하게 앉아 있는 듯했다.
벽시계를 보니 이미 늦었다는 시간이 숫자처럼 선명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짧게 인사만 하고 준호는 허둥지둥 안방 욕실로 향했다. 거울엔 이른 김이 엷게 남아 있었고, 칫솔걸이에는 칫솔이 하나 비었다. 공기가 잠시 끊겼다. 그래도 멈출 틈은 없었다.
**
“한머니, 한머니—”
아이의 입김이 혜정의 목선에 닿았다. 엄마 샴푸와 비슷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스민 품으로 파고들더니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혜정은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작은 등뼈가 손바닥 아래에서 숨쉬듯 오르내렸다. 손자와 사위를 문밖으로 내보내고서야 가슴께에 남은 온기를 한 번 쓸어내렸다.
거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휴대폰을 켜자 첫 화면에 시사 평론과 뉴스 헤드라인이 겹겹이 떠올랐다. ‘토지거래 허가 번복’ 같은 제목이 눈을 찌르듯 번쩍였다.
순간 일평생 상상도 못한 일에 휘말리며 가족에게서 들었던 아픈 말들이 입천장에서 모래처럼 씹혔다. 가슴 안쪽이 구겨지며 두근거림이 치올랐다. 시야가 좁아지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허으윽—”
차가운 바닥에 손을 짚고 잠시 이마를 댔다. 한 뼘만 쉬고 다시 일어섰다. 오래 겪어 터득한 방법—몸을 먼저 움직이는 것.
손이 속도를 찾자 공기도 조금씩 넓어졌다. 식탁부터 정리했다. 아이가 흘린 밥풀을 훑어 모으고, 식기를 싱크대에 옮겼다. 걸음을 옮기는 사이 안방 문이 스쳤다.
구겨진 이불산이 시야에 걸렸다. 자기 방은 손도 못 대게 하던 이집의 안주인이 없으니 오늘은 좀 치워도 되겠지—라는 듯, 혜정은 설거지를 하려고 집어 들었던 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올렸다. 타월로 손을 한 번 더 닦고 안방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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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문턱에서 혀가 잠깐 찼다. “휴지는 왜 머리맡에 두는 거야…” 중얼거림이 반으로 잘렸다. 구겨진 뭉치 서너 개를 한 손에 모으자, 부스럭—손끝에 굳은 감이 닿았다.
오래 굳은 설탕을 건드린 듯한 질감. 손바닥에 표백제 같은 냄새가 스며드는 착각이 뒤따랐다.
멈칫. 목울대가 짧게 움직였다. 새벽, 문틈을 타고 스치던 낮은 숨소리, 시트가 한 번씩 당겨지던 마찰음이 뒤늦게 의미를 얻었다. 협탁 위 조명 스위치가 아직 덜 꺼진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한 톤 더워지는 듯했다.
“엄마야…”
밤사이의 이미지를 상상하자 혜정은 뭉치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잠시 우두커니 내려다보더니, 손가락—아니, 손톱끝으로 조심스레 집어 들어 곧장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닐봉지를 펼쳐 입구를 크게 벌리고 그것을 조심스레 던져 넣었다.
작은 공기의 파동에 락스 향이 스치는 듯해 혜정은 인상을 구겼다. 봉지를 묶은 뒤 손세정제를 한 번 더 눌러 거품을 길게 문질렀다. 물줄기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리자 심장 고동이 차츰 속도를 낮췄다.
다시 안방. 이불산을 허리로 끌어당겨 반듯이 펴고, 베개선을 손날로 쓸어 각을 맞췄다. 매무새가 정리될수록 얼굴빛은 가라앉았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후우…”방으로 돌아온 준호는 알콜이 섞인 한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웠다.장모, 혜정이 차려준 안주 앞에서 소주잔이 몇 번이나 비워졌다. 술기운이 얼굴을 달구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맑아져 있었다.잔을 부딪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전날 밤, 그녀의 방에서 새어 나왔던 소리. 낮고 가늘게, 숨이 섞인 듯한—잠결에 들은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혼자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냈던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장모는 손자를 둔 나이였지만 동안의 얼굴과 탄력을 잃지 않은 몸매는 여전히 성욕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준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모두 잠든 새벽, 혼자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그렇지만…아무리 그래도 사위와 단둘이 사는 집에서. 밤에.자위를? 신음소리를 참지도 않고?그것도 정말로, 사위와 단 둘이 사는 이 집에서?준호는 술이 올라온 채로 그런 생각을 하다 스스로 얼굴을 찌푸렸다.혹시 일본 야동에서나 나오는 장면처럼, 자신이 과감하게 문을 열어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망측한 상상만 꼬리를 물었다.그러나 오늘 저녁, 자신을 대하는 혜정의 복장이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여유로운 미소, 자연스러운 말투, 가끔 건네는 잔소리까지.그녀의 말대로 그저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이겠지. 준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그런데도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눈에 들어왔던 가슴골이 자꾸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나던 하얀 살결, 잔을 기울일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던 그 곡선.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전날 밤의 소리 탓인지, 시선은 자꾸만 그곳으로 미끄러졌었다.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혹시나 또 그 방에서 그 소리가 날지, 촉각을 곤두세워 보았다.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술이 한 잔 더 필요해…'소주를 더 꺼내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두웠고, 건너편 장
“허억…”“하응…”“허윽…”새벽 네 시. 귓바퀴 안을 파고드는 얇은 숨이 두어 번 더 밀려왔다. 준호는 머리맡의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고, 화면이 꺼지자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소리는 한 번 가라앉았다가 벽을 타고 또 올라왔다.“흐윽…”아침 욕실 문턱에서 스치던 물빛 실루엣—젖은 머리칼이 목선을 따라 붙었다 떨어지던 장면이 술기운에 녹아 되살아났다. “뭐지?” 입술 안쪽으로만 맴도는 소리.뇌리에 어디서나 본 듯한 구도가 자동으로 겹쳤다. 일본의 성인물에서 나오는 흔한 설정.욕망에 쩐 새엄마들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계기에도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더듬고, 아들이나 사위가 들으라는 듯 흘리는 신음은 발정의 페로몬처럼 그들을 끌어들여 결국 이어지게 만든다는…그때 문득 떠오른 건 오래전, 다희와 잠자리 뒤에 나눈 짧은 대화였다. 여자도 자위를 하냐는 질문 끝에 돌아온 말.‘정말 잠이 안 올 때는 혼자 해본 적이 있어. 포르노처럼 손가락을 깊게 파고드는 게 아니라, 살짝 문지르는 정도?’그땐 농담처럼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귓속에서 현실처럼 울렸다.‘뭔가 하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그 문장이 둥글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벽 너머의 호흡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시트가 사락— 하고 한 번 더 당겨지고, 준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멈췄다.“허윽…”깊어지는 숨. 안경을 찾느라 다시 켠 휴대폰 불빛이 거실 바닥에 가는 선을 그었다.***준호는 거실을 살금살금 건넜다. 벽 너머 혜정의 방에서 울리던 얕은 숨을 이미 하나의 장면으로 결론지어 둔 채, 까치발로 몸을 세웠다.맨발이 마룻바닥에 쩍— 달라붙었다 떼어낼 때마다 숨이 길게 눌렸다. 문 앞에 닿자 소리는 “딱” 끊겼다.문손잡이 위에서 손가락이 원을 그리다 멈췄다.‘한 뼘만 열어볼까’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에 얇게 번졌다. 그 짧은 망설임 사이, 머릿속에선 문이 먼
저녁상이 차려지면, 늘 그랬듯 아이의 숟가락은 금세 멈췄다. 반찬을 건너뛰고 물컵을 들여다보며, 젓가락으로 밥풀을 옮겨 심는 데만 열중했다.집안 공기가 어제보다 더 얇아진 탓인지 투정이 유난했다. 준호의 손이 무심코 휴대폰을 더듬었다. 다희가 없을 때면 늘 꺼내 들던 마지막 수단—그녀는 못마땅해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넘어가던 방식.그때 혜정의 손이 가볍게 그의 손등을 눌렀다.“자꾸 그런 거 보여주고 그러면 안 좋대.”유튜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난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빠짐없이 하는 경고. 전두엽 손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나도 약사라구요, 안 좋은 거 안다구요’ 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혜정의 눈빛이 먼저 움직였다.혜정은 딱히 대안이 필요없는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의 투정을 제압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인상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아이는 그 기세에 눌렸다가, 할머니 특유의 미소가 지어지자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아이가 고개를 젖히며 기세를 올리는 순간마다, 혜정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먼저 올라갔다 내려가며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이는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 고전은, 늘 통했다.“내가 먹일 테니까, 자네나 얼른 먹어. 배고플 텐데.”혜정의 밥그릇엔 공기가 반쯤 남아 있었다. 준호는 ‘됐어요’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녀는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밥풀을 한 알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아이 입술 가장자리까지 행주로 쓸듯 닦아내며 템포를 이어갔다.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정도 더 났을 때, 아이의 접시는 반 이상 비워졌다. 준호는 뒤늦게 젓가락을 들어 한 술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지나갈 때, 휴대폰은 식탁 끝에서 조용히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 공기는, 오래된 방식대로 천천히 평온 쪽으로 되돌아갔다.***분리수면을 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엄마의 팔꿈치를 꼭 쥐어야만 잠이
분주하고 들뜬 아침 공기가 겨우 내려앉은 듯하다. 오늘따라 부산한 일들이 반 박자씩 밀려 아이 손을 잡은 준호의 발걸음도 서두른다.그렇게 서둘렀지만 늦었는지, 어린이집 앞은 한산하다. 그래도 늘 늦는 집은 있기 마련, 유모차를 미는 몇 명의 엄마들과 마주친다. 준호가 익숙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 감정 없는 미소와 짧은 목례가 연달아 되돌아온다.그 사이 아이의 걸음은 모래에 잠기듯 둔해지고, 손바닥엔 땀이 맺힌다. 결국 두 팔이 그의 어깨를 더 깊게 감싼다. 처음 이 문턱을 넘던 날의 무게와 닮았지만, 지금은 그의 가슴께가 더 묵직하다.문이 열리자 선생님이 먼저 다가왔다.아이의 엄마가 오늘 새벽에 미국으로 떠났다는 연락을 미리 해 둔 터라, 말보다 손이 앞선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 작은 장난감을 흔들고, 반짝이는 스티커를 손바닥에 척 붙여주며 속삭인다.“하윤이한테만 주는 거야. 선생님하고 비.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듯 두 사람은 눈을 맞춘다. 아이의 표정이 금세 풀리고, 작은 발뒤꿈치가 타일 위로 또박또박 멀어진다.닫히는 문틈에 남는 뒷모습은 여전히 가늘다. 준호의 마음이 잠깐 저민다. 천천히 돌아나오며 휴대폰을 꺼낸다.아내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낸 뒤, 화면에 남은 마지막 인사 시각을 본다. 불과 몇십 분 전. 이제 비행기는 바다 위를 건너고 있을 것이다.그때, 몇 시간 전의 일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아이와 장모가 깊게 잠들기를 기다려 겨우 치른 짧은 이벤트, 그 뒤에야 간신히 닿은 잠, 스탠드 불빛 아래 협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정액을 닦은 티슈 몇 뭉치가 번쩍 떠오른다.장모 혜정은 부지런하다. 먼지가 집에 내려앉는 걸 참지 못하는 데다, 사위 집에 몸을 기대고 사는 미안함이 손부터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오늘 아침 아이 눈치를 보느라, 장모와 둘만 남은 공기를 더듬느라 치울 틈이 없었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알았다”고는 하지만, 설거지통에 먼저 손을 담그는
거실의 스탠드 조명은 낮게 깔려 있었다. 커튼은 반뼘쯤 열려 있고, 맞은편 아파트의 희미한 사각빛이 밤공기와 함께 얇게 스며들었다. 벽은 두껍고 단단했기에 이 시간의 소리는 대개 숨까지 얇아진다.그래서인지 건너방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이제 잠들었을 것이다. 아파트의 새벽은 그런 확신을 조용히 허락한다.소파 옆 테이블 위에는 여권과 항공권, 호텔 바우처가 겹겹이 놓여 있었고, 여권 표지는 스탠드 불빛을 받아 얇게 번들거렸다. 모서리에 얹은 손가락 하나가 그 광택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캐리어는 반쯤 채워진 채 소파 옆에 기대어 있었다. 접어 넣은 옷 사이로 남겨둔 칸이 눈에 띄었다. 그 빈칸은 돌아올 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들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었다.바닥 한쪽에는 아이의 장난감 자동차가 누워 있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준 까닭을 아이는 알까. 마치지 못한 놀이의 아쉬움을 말하듯 장난감은 아직 서랍에 들어가지 않았다.아이가 내일 아침 이것을 본다면 또 엄마와 놀 수 있다는 기대를 할 것만 같아 준호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바쁜 엄마와 떨어지는 일이 잦았기에, 하루이틀 집을 비우는 평소의 외출이라고 녀석은 생각하겠지. 분명 며칠 뒤면 아이는 엄마를 찾아댈 테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준호에게는 그것까지 대비할 여력도 여유도 없었기에, 애먼 장난감 자동차의 바퀴만 매만지며 서 있었다.아이가 엄마와 함께 이 바퀴를 굴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날이 언제일지 생각하다가, 준호는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온 욕실 문 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하아.이렇게 생이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준호와 아내는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소소한 투정과 화해로 이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다. 그래서 더 조용히 마음이 아팠다.내일이면 저 방은 한동안 자신만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 사실을 논쟁이나 원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