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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하응…”
“허윽…”
새벽 네 시. 귓바퀴 안을 파고드는 얇은 숨이 두어 번 더 밀려왔다. 준호는 머리맡의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고, 화면이 꺼지자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소리는 한 번 가라앉았다가 벽을 타고 또 올라왔다.
“흐윽…”
아침 욕실 문턱에서 스치던 물빛 실루엣—젖은 머리칼이 목선을 따라 붙었다 떨어지던 장면이 술기운에 녹아 되살아났다.
“뭐지?” 입술 안쪽으로만 맴도는 소리.
뇌리에 어디서나 본 듯한 구도가 자동으로 겹쳤다. 일본의 성인물에서 나오는 흔한 설정.
욕망에 쩐 새엄마들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계기에도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더듬고, 아들이나 사위가 들으라는 듯 흘리는 신음은 발정의 페로몬처럼 그들을 끌어들여 결국 이어지게 만든다는…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오래전, 다희와 잠자리 뒤에 나눈 짧은 대화였다. 여자도 자위를 하냐는 질문 끝에 돌아온 말.
‘정말 잠이 안 올 때는 혼자 해본 적이 있어. 포르노처럼 손가락을 깊게 파고드는 게 아니라, 살짝 문지르는 정도?’
그땐 농담처럼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귓속에서 현실처럼 울렸다.
‘뭔가 하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그 문장이 둥글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벽 너머의 호흡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시트가 사락— 하고 한 번 더 당겨지고, 준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멈췄다.
“허윽…”
깊어지는 숨. 안경을 찾느라 다시 켠 휴대폰 불빛이 거실 바닥에 가는 선을 그었다.
***
준호는 거실을 살금살금 건넜다. 벽 너머 혜정의 방에서 울리던 얕은 숨을 이미 하나의 장면으로 결론지어 둔 채, 까치발로 몸을 세웠다.
맨발이 마룻바닥에 쩍— 달라붙었다 떼어낼 때마다 숨이 길게 눌렸다. 문 앞에 닿자 소리는 “딱” 끊겼다.
문손잡이 위에서 손가락이 원을 그리다 멈췄다.
‘한 뼘만 열어볼까’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에 얇게 번졌다. 그 짧은 망설임 사이, 머릿속에선 문이 먼저 열렸다.
낮게 고개 숙인 스탠드 불빛, 이불 위로 솟은 낮은 사막의 능선, 무릎이 만든 봉우리. 숨이 들고날 때마다 그 능선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손목이 박자를 잰다.
뺨은 반쯤 이불에 파묻혀 있고, 가라앉은 머리칼은 목선을 따라 붙었다 떨어진다. 헐거운 티셔츠 옆선이 조용히 흘러내리며 빈틈을 만든다.
길게 이어지다 끊기는 얇은 숨의 리듬이 문틈의 어둠과 포개졌다.
…조금만, 열어도…
결국 준호의 호기심이 술기운을 핑계로 손을 먼저 움직였다.
— 철컥
문손잡이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새벽의 고요 때문인지 금속 이빨이 맞물리는 마찰음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손잡이를 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던 찰나,
“허억!”
크게 들린 숨 뒤로, 몸이 일어나는 듯 시트가 부스럭— 소리를 냈다.
“누… 누구세요?!”
아뿔싸. 준호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무슨 일 있으세요!?” 닫힌 문에 부딪혀 말이 먼저 새어 나갔다.
입술이 닫히자마자 귓불부터 데워졌다. 준호는 문틀에 걸린 손가락 힘을 슬며시 풀고, 턱선을 안으로 말아 호흡을 낮췄다. 손끝에서 스테인리스의 매끈한 결이 몇 번 긁히고 흩어졌다.
— 탁!!
전등이 켜지고, 이어서 철컥하고 문이 짧게 열렸다.
장모, 혜정의 얼굴엔 베개 솔기가 남긴 얇은 자국과, 깊게 내려앉은 그늘이 겹쳐 있었다. 막 깬 사람의 초점이 한 번 흔들리고,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사위를 보며 눈썹을 아주 조금 올렸다 내렸다. 놀람과 수습이 빠르게 붙었다 떨어지며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아… 잠을 잘 못 자서… 잠들었다가 가위가 눌렸나 봐.”
짧은 말이 먼저 길을 막았다. 더 묻지 말라는 표지판처럼.
문틈은 얼굴 하나 겨우 드나들 만큼만 열려 있었다. 경계가 숫자처럼 분명했다.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 다시 떠올랐다. 다희와 다혜 자매를 낳은 뒤로 내리 그런 편이라 했다.
예민한 딸들의 이불 모서리를 바로잡아 주던 습관이 남아, 문틈 스치는 바람에도 눈이 떠진 것이 아이들이 다 컸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게다가 얼마전의 투자 실패 이후엔 우울증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때도 있었는데, 졸림이 과해 최근엔 끊었다고 했다. 사위집에서 얹혀 사는 것이 편하지 않았던 그녀의 선택은 결국 불면의 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 네. 어디 아프신 줄 알고…” 준호는 말을 낮춰 되받았다.
“휴… 미안해.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가 자.”
준호의 시선이 잠깐 얼굴을 스치고 침대로 옮겨가는 걸 느끼자, 혜정은 조심스레 문을 조금 더 닫았다. 준호도 그 불편함을 읽은 듯 서둘러 시선을 거뒀다.
***
“꼭 식후에 드셔야됩니다, 저녁 약에만 표시되어 있으니까 꼭 확인하고 드세요.”
준호가 약봉지를 길게 펼쳐 ‘저녁’에 둘린 동그라미를 한 번 더 짚어 준 뒤, 흰 봉투에 가지런히 접어 넣었다.
“감사합니다.”
밝은 미소와 함께 약봉지가 건너가고, 자동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잠깐의 고요. 그 틈을 타 조제실 커튼이 한 번 흔들리고, 지환이 가운을 털며 나왔다.
“휴— 이제 슬슬 들어갈 때 안 됐어?”
준호가 손사래를 쳤다. “어. 오늘부턴 장모님이 하원 도와주시기로 했어. 형 먼저 들어가. 문 닫는 건 내가 할게.”
기대했던 ‘좋다’는 표정 대신, 지환의 미간이 먼저 모였다. “괜찮아?”
준호는 카운터 표면을 의미 없이 한 번 쓸었다. “뭐가?”
“뭐긴. 장모랑 같이 사는 거, 안 불편하냐고.”
“별로… 괜찮아.”
말은 그렇게 나갔지만, 지환의 표정은 더 짙어졌다. “괜찮은 척하긴… 근데 장모님은 재혼 안 하신대?”
준호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섞었다. “아니, 장인이 멀쩡히 살아 계신데 무슨 재혼이야.”
지환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아, 장인이 계셨었지?!”
“내 말을 듣는 거야, 안 듣는 거야…” 준호는 서울에서 설계사무소를 하는 장인 얘기를 몇 번이나 했던 걸 떠올리라는 듯 눈초리를 보냈다.
“아 맞다, 그게 너였지… 맞아. 야, 너도 나이 들어봐. 내 이름도 까먹을 판이야.”
지환이 머쓱하게 웃더니, 곧바로 묻는다. “근데 장인이 사업하시면 좀 도와줄 여력은 없나 보지? 그쪽도 요즘 어렵나?”
장인은 사업수완이 없었다. 그럼에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며 설계업만 고집했다. 실력은 있지만 남 밑에선 못 버티는 성격이라, 결국 자기 사무소를 놓지 못하는 사람.
장모가 말년에 크게 친 사고를 수습해 줄 여력은 애초에 기대하기 어려웠다. 미안했는지 한동안 부산에는 내려오지 않았다. 핑계는 달랐지만, 미안한 관계를 다루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장모님 아직 환갑도 안 되셨잖아? 요즘 그 나이면 한창일 텐데.” 혜정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듯 머리를 굴리는 지환의 표정에, 준호는 괜한 불쾌감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남의 장모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보내줄 때 얼른 들어가셔. 난 정리 좀 해놓고 갈게.” 툭 던진 한마디에 지환의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
준호는 매대 아래 틈과 카운터 모서리까지 마른걸레를 밀어 넣었다. 손목을 한 번 털어 다시 문지르자, 주황빛으로 눕는 먼지가 결 따라 사르르 흩어졌다.
집안일 핑계로 약국을 비운 날들이 줄줄이 떠올랐고, 말없이 빈자리를 메워 준 지환 생각에 짧은 숨이 풀렸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혼잣말 같은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 띵동
센서음과 함께 자동문 고무가 ‘끼이익—’ 하고 짧게 비벼졌다. 서늘한 공기가 한 겹 밀려들었다.
‘OPEN과 CLOSE를 바꿔 걸었나? 이 시간엔 병원도 마감일 텐데…’ 준호가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
“어? 오늘은 오빠가 있네? 웬일이야?”
익숙하지만 한동안 못 본 얼굴이 문턱을 넘었다. 소독제 냄새가 희미하게 스치는 듯했다. 준호는 무심코 마스크를 내려 코끝을 드러내고, 손에 묻은 먼지를 바지 옆선에 한 번 털어냈다.
현주였다.
대학 시절 레저 -라고 부르는 술- 동아리에서 처음 봤던, “술이 좋아서 들어왔어요”라며 웃던 그 의대생. 이상하게도 둘은 자주 부딪혔다.
친구였다가, 더 가까워졌다가, 어느 날은 멀어졌다가—그 어정쩡한 궤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
한 건물, 위층은 병원, 아래층은 약국.
오늘은 가운 대신 얇은 가디건, 목에는 카드키가 대충 감겨 살에 차갑게 닿는 소리를 냈다. 늘 티 내지 않으면서도 챙겨 주는 그녀가 고맙긴 했다.
다만 거리를 지키는 것이 다희에 대한 예의라 여겨 스스로 선을 그었고, 바쁜 스케줄이 서로를 자연스레 비껴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내와 자신 사이에 생긴, 말만 꺼내도 속이 시린 그 ‘태평양’ 덕에 우연이 생긴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맞춰 열리고, 계단참에서 발소리가 섞이는 식의 우연.
“어, 무슨 일이야?”
말꼬리를 올리자, 손에 쥔 종이를 내밀었다. 하얀 가장자리가 손끝에 눌려 얇게 말려 있었다. 처방전이었다.
준호는 손바닥을 바지 옆선에 한 번 더 쓸어내리고 종이를 받았다.
“뭐야, 어디 아파?”
습관처럼 시선이 아래로 흘렀다. 처방명 옆 굵은 약품군 표기—강한 최면진정제. 말끝이 저절로 옅어졌다. 그는 종이를 잠깐 멈춰 세우고 위를 올려다봤다.
“엄마가 요즘… 갱년기야.” 현주의 어깨선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시선을 다시 내리자, ‘강현주’가 아닌 다른 이름과 다른 나이가 눈에 들어왔다. 종이 맨 아래 원무과 도장이 반쯤 번져 있었다. 준호의 고개가 짧게 기울었다.
“강 원장님, 이거 불법인 거 알지.”
현주의 손가락이 잽싸게 올라왔다. 검지와 엄지가 처방전 모서리를 집어 빼려 드는 순간, 준호의 손이 한 발 빠르게 비켰다. 종이는 그의 손안에서 턱— 하고 멈췄다.
“됐어. 지환 오빤 줄 알고 들어왔던 거라구…” 현주는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눈꼬리가 빛을 한 번 끊었다. 준호가 일찍 퇴근하는 탓에 지환과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던 듯했다.
“알겠어. 어머님 많이 안 좋으셔? 불면증이야?”
현주가 짧게 숨을 고르고, 말끝만 눌렀다. “그렇게 됐어. 약이나 줘, 빨리.”
준호는 말없이 조제실로 들어갔다.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어색함 사이로 라벨프린터의 드드득— 얇은 열과 소리가 겹쳤다. 준호가 카운터로 돌아와 봉투들을 일렬로 세우고 ‘저녁’ 표기 옆에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치려는 순간—
“오빠, 장난하는 거지?” 현주의 손이 색연필을 낚아채듯 잡아챘다.
봉투만 빠르게 모아 코트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는다.
“그리고 이것도 같이 계산해줘.” 작은 종이박스가 매대 위에 가볍게 얹히며 미세한 종이 마찰음이 났다.
‘0.01’ 이라는 숫자가 유난히 커 보이는…
콘돔이었다.
***
현주는 대학 때부터 늘 앞자리와 뒷문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공부 따윈 안 하는 얼굴로 맨 앞줄에 앉아 칠판을 꿰뚫어 보다가도, 어느 날은 예고 없이 강의실에서 증발했다.
시험 성적표가 올라오면 이름은 윗칸에 있었지만, 술 약속이 잡히면 새벽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외계인’. 동아리 남자들 사이에선 “다 한 번쯤은 자 봤다”는(정말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무용담이 떠돌았고, 그 가운데서 끝내 예외로 남은 사람이 준호였다.
그래서일까, 졸업 뒤에도 연락을 끊지 않은 사이 역시 준호뿐이었다.
준호에게 현주가 여자로서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다. 결과보다는 사건을, 계획보다는 모험을 먼저 고르는 손길이 늘 신경을 긁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했다. 작은 내과 간판 아래 한자리를 꿰차고 눌러앉은 건 현주였고, 반대로 그의 아내 다희는 태평양을 건너 사라졌다. 질서 정연해야 할 삶의 선들이 어딘가에서 엇갈린 듯했다.
그는 현주가 집어 갔던 콘돔 박스가 빠진 매대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래도… 남자는 있나 보네.’
***
아이는 한참을 서럽게 운 듯했다. 작은 몸에 감당할 수 있는 인내가 하루 분량뿐이라는 걸, 오늘에서야 온몸으로 증명하듯. ‘엄마가 오늘도 오지 않는다. 내일도 모르겠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울음은 마치 긴 비처럼 이어졌다.
준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숨이 잠깐 골랐지만, 아이는 다시 곤두박질쳤다. 아빠가 집안일을 다 하고 엄마처럼 다정해 보인대도—엄마는 엄마였다.
혜정의 마법 같은 손길도 오늘만큼은 닿지 않았다. 퇴근해 돌아온 사위 앞에서 이런 모습이라, 혜정은 미안해 어깨를 모았다.
준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방으로 들어가 쉬라는 손짓. 혜정은 소리 없이 물컵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그는 아이를 가슴께로 안아 올렸다. 젖은 콧김이 목을 스치고, 작은 주먹이 그의 티셔츠를 구겨 쥐었다. “그 장난감 있잖아,” 낮게 말했다.
“네가 오래전부터 갖고 싶다던 그거. 엄마가 못 사게 했던 거.” 덜컥거리던 숨이 반 박자 늦춰졌다.
“그거 사러 갈까? 엄마가 사도 된대.” 아이 눈동자에 반짝임이 한두 알 돌아오고, 울음의 고개가 아주 낮아졌다.
“나가자.”
준호는 아이를 그대로 안아들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느린 진동, 주차장의 차가운 냄새를 지나 마트의 밝은 복도. 장난감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시연 버튼을 눌러보며 깔깔 웃다가, 커다란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계산대를 지나 차에 오르자 부드러운 엔진소음과, 도로의 오렌지빛 가로등이 아이의 속눈썹을 천천히 무겁게 만들었다. 고개가 툭, 카시트 옆으로 기울더니 숨결이 고르게 내려앉았다.
현관이 살짝 열리자 찬 공기가 먼저 들어왔다. 준호는 잠든 아이를 안은채 한 손으로 신발을 툭—벗겨냈다. 혜정이 달려와 발목을 받쳐 양말을 조심스레 말아 내리고, 아이 방으로 먼저 뛰어들어 이불을 탁탁 펴고 베개를 두 손으로 고르게 두드렸다.
아이를 내려놓는 순간, 작은 숨이 배 위로 얕게 올라왔다 내려갔다. 준호가 이불 끝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손바닥으로 배를 한 번—둘—길게 쓸어내렸다. 스탠드 불빛을 낮추고 문을 반 뼘 남기고 닫자, 복도 공기가 한 톤 누그러졌다.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은 소파 등받이를 사이에 두고 섰다. 혜정이 낮게 물었다.
“괜찮았어? 어떻게 달랜 거야?”
준호가 어깨를 한 번 돌리고 숨을 고르게 맞췄다. “그냥… 마트에서 한참 놀다가 차에 타니까 골아떨어졌어요.”
혜정의 눈가가 잠깐 젖었다 말라갔다. “수고했어.”
아이의 방문을 바라보는 준호의 눈가를 살피며 혜정이 덧붙였다. “오늘도 마실 거면… 안주라도 해줄까?”
준호는 잠시 고민했다.
“후우…”방으로 돌아온 준호는 알콜이 섞인 한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누웠다.장모, 혜정이 차려준 안주 앞에서 소주잔이 몇 번이나 비워졌다. 술기운이 얼굴을 달구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맑아져 있었다.잔을 부딪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전날 밤, 그녀의 방에서 새어 나왔던 소리. 낮고 가늘게, 숨이 섞인 듯한—잠결에 들은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가 혼자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냈던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장모는 손자를 둔 나이였지만 동안의 얼굴과 탄력을 잃지 않은 몸매는 여전히 성욕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적어도 준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모두 잠든 새벽, 혼자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그렇지만…아무리 그래도 사위와 단둘이 사는 집에서. 밤에.자위를? 신음소리를 참지도 않고?그것도 정말로, 사위와 단 둘이 사는 이 집에서?준호는 술이 올라온 채로 그런 생각을 하다 스스로 얼굴을 찌푸렸다.혹시 일본 야동에서나 나오는 장면처럼, 자신이 과감하게 문을 열어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망측한 상상만 꼬리를 물었다.그러나 오늘 저녁, 자신을 대하는 혜정의 복장이나 태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여유로운 미소, 자연스러운 말투, 가끔 건네는 잔소리까지.그녀의 말대로 그저 불면증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것이겠지. 준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그런데도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눈에 들어왔던 가슴골이 자꾸만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나던 하얀 살결, 잔을 기울일 때마다 미세하게 움직이던 그 곡선.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전날 밤의 소리 탓인지, 시선은 자꾸만 그곳으로 미끄러졌었다.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혹시나 또 그 방에서 그 소리가 날지, 촉각을 곤두세워 보았다.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술이 한 잔 더 필요해…'소주를 더 꺼내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두웠고, 건너편 장
“허억…”“하응…”“허윽…”새벽 네 시. 귓바퀴 안을 파고드는 얇은 숨이 두어 번 더 밀려왔다. 준호는 머리맡의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고, 화면이 꺼지자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소리는 한 번 가라앉았다가 벽을 타고 또 올라왔다.“흐윽…”아침 욕실 문턱에서 스치던 물빛 실루엣—젖은 머리칼이 목선을 따라 붙었다 떨어지던 장면이 술기운에 녹아 되살아났다. “뭐지?” 입술 안쪽으로만 맴도는 소리.뇌리에 어디서나 본 듯한 구도가 자동으로 겹쳤다. 일본의 성인물에서 나오는 흔한 설정.욕망에 쩐 새엄마들은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계기에도 손가락이 다리 사이를 더듬고, 아들이나 사위가 들으라는 듯 흘리는 신음은 발정의 페로몬처럼 그들을 끌어들여 결국 이어지게 만든다는…그때 문득 떠오른 건 오래전, 다희와 잠자리 뒤에 나눈 짧은 대화였다. 여자도 자위를 하냐는 질문 끝에 돌아온 말.‘정말 잠이 안 올 때는 혼자 해본 적이 있어. 포르노처럼 손가락을 깊게 파고드는 게 아니라, 살짝 문지르는 정도?’그땐 농담처럼 흘려들었지만 지금은 귓속에서 현실처럼 울렸다.‘뭔가 하려고 작정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그 문장이 둥글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벽 너머의 호흡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시트가 사락— 하고 한 번 더 당겨지고, 준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멈췄다.“허윽…”깊어지는 숨. 안경을 찾느라 다시 켠 휴대폰 불빛이 거실 바닥에 가는 선을 그었다.***준호는 거실을 살금살금 건넜다. 벽 너머 혜정의 방에서 울리던 얕은 숨을 이미 하나의 장면으로 결론지어 둔 채, 까치발로 몸을 세웠다.맨발이 마룻바닥에 쩍— 달라붙었다 떼어낼 때마다 숨이 길게 눌렸다. 문 앞에 닿자 소리는 “딱” 끊겼다.문손잡이 위에서 손가락이 원을 그리다 멈췄다.‘한 뼘만 열어볼까’금속의 냉기가 손바닥에 얇게 번졌다. 그 짧은 망설임 사이, 머릿속에선 문이 먼
저녁상이 차려지면, 늘 그랬듯 아이의 숟가락은 금세 멈췄다. 반찬을 건너뛰고 물컵을 들여다보며, 젓가락으로 밥풀을 옮겨 심는 데만 열중했다.집안 공기가 어제보다 더 얇아진 탓인지 투정이 유난했다. 준호의 손이 무심코 휴대폰을 더듬었다. 다희가 없을 때면 늘 꺼내 들던 마지막 수단—그녀는 못마땅해했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넘어가던 방식.그때 혜정의 손이 가볍게 그의 손등을 눌렀다.“자꾸 그런 거 보여주고 그러면 안 좋대.”유튜브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난 전문가라는 인간들이 빠짐없이 하는 경고. 전두엽 손상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나도 약사라구요, 안 좋은 거 안다구요’ 준호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혜정의 눈빛이 먼저 움직였다.혜정은 딱히 대안이 필요없는 손짓과 눈빛으로 아이의 투정을 제압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인상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아이는 그 기세에 눌렸다가, 할머니 특유의 미소가 지어지자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아이가 고개를 젖히며 기세를 올리는 순간마다, 혜정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먼저 올라갔다 내려가며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아이는 따라 웃으며 입을 벌렸다. 고전은, 늘 통했다.“내가 먹일 테니까, 자네나 얼른 먹어. 배고플 텐데.”혜정의 밥그릇엔 공기가 반쯤 남아 있었다. 준호는 ‘됐어요’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그녀는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밥풀을 한 알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듯, 아이 입술 가장자리까지 행주로 쓸듯 닦아내며 템포를 이어갔다.숟가락과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 번 정도 더 났을 때, 아이의 접시는 반 이상 비워졌다. 준호는 뒤늦게 젓가락을 들어 한 술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지나갈 때, 휴대폰은 식탁 끝에서 조용히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 공기는, 오래된 방식대로 천천히 평온 쪽으로 되돌아갔다.***분리수면을 하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엄마의 팔꿈치를 꼭 쥐어야만 잠이
분주하고 들뜬 아침 공기가 겨우 내려앉은 듯하다. 오늘따라 부산한 일들이 반 박자씩 밀려 아이 손을 잡은 준호의 발걸음도 서두른다.그렇게 서둘렀지만 늦었는지, 어린이집 앞은 한산하다. 그래도 늘 늦는 집은 있기 마련, 유모차를 미는 몇 명의 엄마들과 마주친다. 준호가 익숙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면, 감정 없는 미소와 짧은 목례가 연달아 되돌아온다.그 사이 아이의 걸음은 모래에 잠기듯 둔해지고, 손바닥엔 땀이 맺힌다. 결국 두 팔이 그의 어깨를 더 깊게 감싼다. 처음 이 문턱을 넘던 날의 무게와 닮았지만, 지금은 그의 가슴께가 더 묵직하다.문이 열리자 선생님이 먼저 다가왔다.아이의 엄마가 오늘 새벽에 미국으로 떠났다는 연락을 미리 해 둔 터라, 말보다 손이 앞선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아 작은 장난감을 흔들고, 반짝이는 스티커를 손바닥에 척 붙여주며 속삭인다.“하윤이한테만 주는 거야. 선생님하고 비.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 듯 두 사람은 눈을 맞춘다. 아이의 표정이 금세 풀리고, 작은 발뒤꿈치가 타일 위로 또박또박 멀어진다.닫히는 문틈에 남는 뒷모습은 여전히 가늘다. 준호의 마음이 잠깐 저민다. 천천히 돌아나오며 휴대폰을 꺼낸다.아내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보낸 뒤, 화면에 남은 마지막 인사 시각을 본다. 불과 몇십 분 전. 이제 비행기는 바다 위를 건너고 있을 것이다.그때, 몇 시간 전의 일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아이와 장모가 깊게 잠들기를 기다려 겨우 치른 짧은 이벤트, 그 뒤에야 간신히 닿은 잠, 스탠드 불빛 아래 협탁에 아무렇게나 던져 둔 정액을 닦은 티슈 몇 뭉치가 번쩍 떠오른다.장모 혜정은 부지런하다. 먼지가 집에 내려앉는 걸 참지 못하는 데다, 사위 집에 몸을 기대고 사는 미안함이 손부터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오늘 아침 아이 눈치를 보느라, 장모와 둘만 남은 공기를 더듬느라 치울 틈이 없었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알았다”고는 하지만, 설거지통에 먼저 손을 담그는
거실의 스탠드 조명은 낮게 깔려 있었다. 커튼은 반뼘쯤 열려 있고, 맞은편 아파트의 희미한 사각빛이 밤공기와 함께 얇게 스며들었다. 벽은 두껍고 단단했기에 이 시간의 소리는 대개 숨까지 얇아진다.그래서인지 건너방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인기척이 없었다. 다른 방 사람들은 이제 잠들었을 것이다. 아파트의 새벽은 그런 확신을 조용히 허락한다.소파 옆 테이블 위에는 여권과 항공권, 호텔 바우처가 겹겹이 놓여 있었고, 여권 표지는 스탠드 불빛을 받아 얇게 번들거렸다. 모서리에 얹은 손가락 하나가 그 광택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캐리어는 반쯤 채워진 채 소파 옆에 기대어 있었다. 접어 넣은 옷 사이로 남겨둔 칸이 눈에 띄었다. 그 빈칸은 돌아올 때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들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었다.바닥 한쪽에는 아이의 장난감 자동차가 누워 있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준 까닭을 아이는 알까. 마치지 못한 놀이의 아쉬움을 말하듯 장난감은 아직 서랍에 들어가지 않았다.아이가 내일 아침 이것을 본다면 또 엄마와 놀 수 있다는 기대를 할 것만 같아 준호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바쁜 엄마와 떨어지는 일이 잦았기에, 하루이틀 집을 비우는 평소의 외출이라고 녀석은 생각하겠지. 분명 며칠 뒤면 아이는 엄마를 찾아댈 테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준호에게는 그것까지 대비할 여력도 여유도 없었기에, 애먼 장난감 자동차의 바퀴만 매만지며 서 있었다.아이가 엄마와 함께 이 바퀴를 굴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는 날이 언제일지 생각하다가, 준호는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온 욕실 문 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하아.이렇게 생이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준호와 아내는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 소소한 투정과 화해로 이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부부였다. 그래서 더 조용히 마음이 아팠다.내일이면 저 방은 한동안 자신만의 보금자리가 된다. 그 사실을 논쟁이나 원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