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에드윈이 물었다.“그래도 위험합니다.”“알아.”“미래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그것도 알아.”준경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그래서 준비하는 거야.”그가 연회장 도면을 완전히 펼쳤다.“연회는 예정대로 한다.”솔의 시선이 도면에서 준경에게 올라갔다.에드윈이 다시 물었다.“예언자도 참석시키고요?”“그래.”“공작님.”이번에는 솔이 불렀다.준경이 그녀를 봤다.솔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제가 나오지 않으면 상대가 계획을 바꾼다는 건 이해했습니다.”“그런데.”“제가 나온다고 해서 예언대로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습니다.”준경의 눈빛이 미세하게 달라졌다.겁이 나서 묻는 말이 아니었다.계획의 빈틈을 확인하는 질문이었다.준경이 대답했다.“없지.”솔은 기다렸다.“그래서 첫 번째 놈을 잡아도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준경이 도면을 손가락으로 눌렀다.“예언에서 본 길만 막지도 않을 거야.”“…….”“미래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잡는다.”솔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준경이 물었다.“무서워?”에드윈과 경비대장이 있는 자리였다.솔은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사람이 있다.이유도 모른다.어디에서 어떻게 계획이 바뀔지도 알 수 없다.“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준경은 그녀를 몇 초 바라봤다.“그래.”그게 전부였다.괜찮다고 하지 않았다.자기가 지켜주겠다고도 하지 않았다.대신 도면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내가 판단한다.“솔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준경이 말했다.“어디 있을지.”도면 위 한 지점을 짚었다.“누가 네 옆에 있을지.”다른 지점.“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움직일지도.”마지막으로 솔을 바라봤다.“내가 정해.”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불확실한 선택지들이 하나씩 사라졌다.솔은 아직 도면 위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몰랐다.어떤 경비가 붙을지도 듣지 못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조금 전보다 숨쉬기가 편해졌다.준경은 이미 다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경비
그러나 솔은 알아차렸다.그의 호흡이 한번 끊겼다.준경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반동이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공작님.”준경은 대답하지 않았다.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천천히 등을 훑어 올라갔다.견갑골 아래를 지나,다시 옆구리로 내려왔다.부드러운 손길은 아니었다.손끝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솔은 움직이지 않았다.준경의 손이 다시 등을 타고 올라갔다.이번에는 뒷목까지.목덜미를 감싼 손가락이 잠시 굳었다.준경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통증이 더 깊게 들어온 듯했다.솔의 머리를 누르던 열은 그만큼 빠져나가고 있었다.“많이 아프십니까.”준경의 손이 멈췄다.잠깐.“가만히 있어.”“예.”솔은 입을 다물었다.그 말 하나로 해야 할 일이 사라졌다.얼마나 접촉해야 하는지.언제 끊어야 하는지.자기가 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생각하지 않아도 됐다.준경이 정할 일이었다.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뒷목에서 어깨.어깨에서 팔.다시 허리.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마치 가만히 있으면 통증이 더 선명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손이 움직일 때마다 솔의 몸도 그 방향으로 조금씩 따라갔다.준경의 숨은 처음보다 무거워져 있었다.솔은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보다,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느꼈다.“공작님.”“뭐.”“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준경의 손이 솔의 옆구리에서 멈췄다.솔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접촉만 유지하면 됩니다.”준경이 그녀를 내려다봤다.눈가가 조금 굳어 있었다.분명히 아팠다.그런데 대답은 짧았다.“알아.”손이 다시 움직였다.솔의 허리를 지나 등을 쓸어 올라갔다.이번에는 천천히.필요해서가 아니라는 걸,이제 솔도 알 수 있었다.상환에 필요한 것은 접촉이었다.어디를 만질지는 필요가 정하지 않았다.준경이 정했다.솔은 그 사실을 생각하다가,곧 생각을 멈췄다.그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니까.대가는 계속 넘어갔다
회색 정복.낯선 얼굴은 아니었다.연회에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섞였다.그의 손에는 반지가 없었다.목에도 문장이 없었다.아무것도 없었다.다만 두 손을 검은 장갑이 덮고 있었다.솔은 그를 봤다.남자는 첫 번째 자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준경도 보지 않았다.걸음을 옮겼다.빠르지 않았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갈 만큼만 정확했다.한 걸음.다시 한 걸음.솔은 그의 동선을 따라갔다.준경에게 가는 것이 아니었다.중앙으로도 가지 않았다.벽 쪽.자신이 서 있는 방향이었다.솔의 숨이 멎었다.남자가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쳤다.그 눈이 보고 있는 것은,자신이었다.⸻미래가 끊겼다.솔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숨이 한꺼번에 돌아왔다.“하아…….”준경의 손이 곧바로 의자 팔걸이를 짚었다.솔은 눈을 뜨려 했지만 시야가 잠시 흔들렸다.오른쪽 눈 아래가 뜨겁게 뛰었다.“솔.”준경의 목소리가 가까웠다.솔은 두 번 숨을 고른 뒤 눈을 떴다.준경이 바로 앞에 있었다.“뭘 봤어.”솔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을 순서대로 붙잡았다.“연회가 열렸습니다.”목소리가 조금 거칠었다.“문장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인 복장이었습니다.”준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자객?”“예.”솔이 고개를 끄덕였다.“반지가 발견돼 붙잡혔습니다. 칼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럼 문장이 맞았나.”솔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바닥을 굴렀던 반지가 떠올랐다.“아닙니다.”준경의 눈이 좁아졌다.“반지가 손가락에 맞지 않았습니다.”“뭐?”“너무 컸습니다. 안쪽에 실을 감아서 억지로 끼웠습니다.”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준경이 낮게 말했다.“보여주려고 낀 거군.”“그렇게 보입니다.”“첫 번째가 미끼야.”“예.”솔은 계속했다.“그 사람이 붙잡힌 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습니다.”눈앞에 다시 시계가 떠올랐다.“그다음 시계가 울렸습니다.”“몇 번.”“세 번입니다.”준경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여
준경은 한동안 연회 준비 명단을 내려다봤다.왕실 사절단.가신과 기사들.각 가문의 수행원.공작가의 하인들까지.이틀 뒤면 평소에는 서로 다른 문을 이용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대연회장으로 모인다.그중 누가 적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준경이 명단을 내려놓았다.“솔.”“네, 공작님.““예언이 필요하다.“솔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책상 가운데 놓인 봉투로 내려갔다.“저 문장에 관한 예언입니까?”“정확히는 아니야.”준경이 붉은 밀랍 위의 문장을 손끝으로 돌렸다.세 갈래의 발톱.그 아래를 가로지르는 검.“저 가문이 배후인지 물어봐도 소용없어.”“왜 그렇습니까?”“배후라고 나오면 믿을 거야?”솔이 잠시 생각했다.“예언이 명확하다면요.”“난 아니야.”준경이 봉투를 내려놓았다.“누가 저 문장을 일부러 보여준 거라면, 우리가 거기에 매달리는 것까지 계획했을 수 있으니까.”솔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준경은 연회 참석자 명단을 그 옆에 놓았다.“그러니까 과거를 맞히려고 하지 말자.”“그러면 무엇을 보시려는 겁니까?”준경이 솔을 바라봤다.“미래.”그가 문장을 손가락으로 눌렀다.“우리가 이걸 진짜 배후의 표식이라고 믿었다고 치자.”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연회장에 들어오는 사람들 중 저 문장을 가진 놈들부터 찾고.”“관련 가문도 경계하고.”“그래.”준경의 손끝이 명단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그렇게 했을 때.”움직이던 손이 멈췄다.“우리가 뭘 놓치는지 봐.”솔이 문장을 다시 바라봤다.범인을 찾는 질문이 아니었다.지금부터 내릴 판단이 틀렸을 때 어디에서 틈이 생기는지를 보는 질문이었다.“문장을 배후의 표식으로 단정하고.”솔이 천천히 말을 정리했다.“그 문장과 관련된 사람들만 경계했을 때.”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솔이 마지막까지 확인했다.“승전 연회에서 우리가 무엇을 놓치는가.”“그래.”질문은 정해졌다.솔은 의자에서 일어났다.준경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석실로 가겠습니다.”“가자.“솔이
에드윈이 돌아간 뒤에도 준경은 한동안 전투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병력 손실.포로 숫자.회수한 물자.퇴각로에서 발견된 시신과 장비 목록까지.솔은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기다렸다.연회 준비를 위해 집사가 몇 차례 드나들었지만, 준경은 필요한 말만 짧게 했다.그러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서 손이 멈췄다.“이건 뭐지.”준경이 종이를 들어 올렸다.솔의 시선이 따라갔다.보고서 아래쪽에 별도의 기록이 붙어 있었다.적군 퇴각로 북쪽 숲에서 신원 불명의 시신 한 구 발견.군복 없음.신분을 확인할 만한 물건 없음.소지품은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그 안에서 봉인된 종이가 나왔다.준경이 종을 울렸다.잠시 뒤 경비대장이 작은 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동부 협곡에서 함께 넘어온 물건입니다.”상자가 책상 위에 놓였다.준경이 뚜껑을 열었다.안에는 흰 천에 싸인 작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붉은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솔의 시선이 그곳에 멈췄다.밀랍 위에 낯선 문장이 찍혀 있었다.세 갈래로 갈라진 짐승의 발톱.그 아래를 가로지르는 검.준경이 봉투를 집어 들었다.“아는 문장인가.”경비대장이 고개를 저었다.“공작가 기록실에 확인을 맡겼습니다.”“결과는.”“오래전에 몰락한 가문이라고 합니다.”준경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얼마나 오래됐지.”“백 년 가까이 됐습니다. 직계는 완전히 끊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솔이 문장을 바라봤다.선은 지나치게 선명했다.밀랍 역시 최근에 찍은 것이 분명했다.백 년 전에 사라진 가문의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새것이었다.준경도 같은 생각을 한 듯 봉투를 뒤집어 살폈다.“안은.”“공작님께 보고한 뒤 개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준경이 봉인을 뜯었다.안에는 작은 종이 한 장뿐이었다.이름도 없었다.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몇 개의 짧은 문장만 남아 있었다.준경이 첫 줄을 읽었다.“하르젠.”그 아래에는 시간을 뜻하는 듯한 숫자 몇 개가 있었다.마지막에는 짧은 문장
동부 협곡에서 전령이 돌아온 것은 사흘 뒤였다.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준경의 서재 문이 열리고, 먼지가 채 가시지 않은 군복 차림의 에드윈 로셀이 들어왔다.그는 준경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동부 협곡 전투가 끝났습니다.”준경이 책상에서 눈을 들었다.“결과는.”“국경을 넘어온 적군은 협곡 너머로 완전히 밀어냈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하지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동시에 풀렸다.에드윈은 품에서 접어 둔 전투 보고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예상대로 안개가 걷히기 전에 적 주력이 움직였습니다.”준경이 보고서를 펼쳤다.“매복은.”“절벽 아래에 있었습니다. 규모는 예언에서 본 것보다 조금 컸습니다.”준경의 시선이 종이를 따라 내려갔다.“그래도 좌측 기병을 먼저 움직인 덕분에 진형이 무너지기 전에 끊었습니다.”에드윈이 말을 이었다.“주력이 빠진 뒤 협곡 입구를 막았고, 퇴로까지 확보했습니다. 피해도 예상보다 적습니다.”준경이 마지막 장까지 훑은 뒤 종이를 내려놓았다.“됐네.”그제야 에드윈의 시선이 서재 한쪽으로 향했다.솔이 그곳에 서 있었다.예전과 같은 검은 옷.오른쪽 눈 아래의 붉은 문양도 그대로였다.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드윈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는 준경 곁에 선 중급 예언자를 확인하듯 봤었다.이번에는 아니었다.에드윈이 솔을 향해 몸을 돌렸다.“예언대로였습니다.”솔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병력 수는 달랐다고 들었습니다.”“그 정도는 문제되지 않았습니다.”에드윈이 말했다.“중요한 건 전부 맞았습니다. 안개가 걷히는 시간도, 적이 움직인 방향도, 매복 위치도.”솔은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다행입니다.”기쁜 기색은 크지 않았다.자기가 본 미래가 맞았다는 사실보다, 그걸 이용해 사람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쪽이 더 중요한 듯한 얼굴이었다.에드윈이 그런 솔을 잠시 보다가 다시 준경 쪽으로 돌아섰다.“이번에는 제가 틀렸군요.”준경이 눈썹을 들었다.“뭐가.”“상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