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십 년 만에 전 남자친구의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처음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단순한 안부 전화인 줄 알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적당히 안부를 묻다가 전화를 끊으려 했는데 도통 끊을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난감해 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말이 멈춰 버렸다.
“세린아….”
낮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모… 한 번만 만나 줄 수 있겠니?”
그 말 뒤로 한동안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이모가 숨을 참고 울음을 참으려는 듯한 기척만 들려와 마음이 약한 자신은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엄마와 이모는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친구였고, 두 집안은 친척처럼 가까워 어릴 때만 해도 두 집을 오가는 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인지 각종 행사도 명절에도 같이 밥을 먹고, 방학이면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세린에게 이모는 단순한 친구의 엄마가 아니라 정말 이모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모든 게 바뀐 건 십 년 전이었다.
세린과 한태준이 헤어지면서 두 집안의 관계도 완전히 틀어졌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의 엄마는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게 되어 버려 그래서인지 그 일은 항상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두 분 사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결국 세린은 오래전부터 계획해 두었던 여름휴가를 취소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역에서 무려 세 시간이 넘게 떨어진 대전으로 향했다.
기차 창밖으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지만 세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모가 그렇게까지 울면서 만나자고 할 이유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약속 장소인 카페에 도착했을 때였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세린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창가 자리에 이모가 먼저 와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만지작거리며 초조한 눈으로 입구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어 좀 처럼 자리에 가지 못했다.
예전에 알던 이모는 항상 밝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니까.
세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다가가 이모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모.”
그제야 이모의 시선이 세린에게 향하며 순간 이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세린아….”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오랜만이라세린의 가슴이 순간 묘하게 울렸다.
“오랜만이에요.”
세린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이모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다가 다시 앉았다.
마치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그래… 와 줘서 고맙다.”
세린은 의자에 앉으며 테이블을 바라봤다. 이미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이모가 네 거 미리 시켜놨어.”
“아… 감사합니다.”
커피잔을 손에 쥐었지만 차가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오기 훨씬 전부터 미리 와 기다리게 아닌가 짐작하게 끔 했다.잠깐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단어 선택을 고르려 어색하게 미소만 지어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침묵은 없었을 것이다.
사소한 이야기로도 몇 시간씩 웃으며 떠들던 사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이모를 보며 세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어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하는 순간 세린의 마음도 조금 무거워졌다.
자신의 대답에 이모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린아….”
잠깐 숨을 고른 뒤 겨우 말을 꺼냈다.
“태준이가… 파혼을 했어.”
순간 세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네?”
얼마 전 대학 동창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분명 5월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지금쯤 이미 결혼식을 끝내고 한창 신혼 생활을 하고 있어야 했다.
“결혼식 한다고 들었는데….”
세린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이모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좋게 말해서 파혼이지… 사실은….”
이모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태준이랑 결혼하려던 여자가 다른 남자도 만나고 있었나 봐.”
세린의 손이 살짝 굳었다.
“계속 조건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의사랑 결혼식을 올렸어.”
말을 듣는 순간 세린의 마음이 묘하게 복잡해졌다.분명 이제는 아무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조용히 흔들렸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이모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어.”
대문 너머의 마당은 세린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잔디 사이로 값비싸 보이는 소나무들이 자리했고, 한쪽에는 물레방아를 닮은 분수대가 잔잔한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담장 가까이 심어진 동백나무와 단정한 산책로까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꾸민 흔적이 없었다. 그 뒤로 세련된 회색 외벽의 이층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창문과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구조가 눈길을 끌었다.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와, 정말 멋있다. 여기 네 집 맞아?”“그럼 남의 집에 들어왔겠어?”태준이 웃으며 짐을 고쳐 들었다. 세린은 그의 장난을 받아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건축학과를 나온 태준이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이런 집을 지었다니 새삼 놀라웠다. 대학 시절 도면을 펼쳐 놓고 밤새 설계 이야기를 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어려운 말은 몰라도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이 좋았다. 이제는 이름난 건축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소문으로 듣는 것과 그가 직접 지은 집을 보는 것은 전혀 달랐다.“멋있네. 신혼집이었나 봐.”무심코 흘린 말에 태준이 피식 웃었다.“강세린, 꼭 처음 온 사람처럼 구네. 그리고 당연히 신혼집이지. 너랑 살려고 지은 집인데.”“누가?”“누구긴 누구야. 내가.”태준은 세린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너한테 이야기 안 했어? 대학 다닐 때부터 우리 둘이 살 집은 내가 직접 설계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세린이 되묻자 태준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웃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병원에서부터 이상했어. 넌 계속 나보다 엄마랑만 이야기했잖아. 내가 들어오면 두 사람 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 좀 한 게 뭐 어때서?”“그 정도가 아니니까 그러지. 꼭 나만 빼놓고 둘이 무언가 꾸미는 사람들 같았어.”태준은 잠시 말을 끊고 세린의 가방을 바라보았다.“아까 택시에서 받은 문자도 엄마한테서 온 거지?”세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방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괜히 뜨겁게 느껴졌다.'이 자식은 십 년 동안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어떻게 저걸 알아맞혀?'태준의 기억에는 두 사람이 헤어졌던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과 이모가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이모가 어디까지 이야기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현실을 태준에게 한꺼번에 말할 수도 없었다. 그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세린은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만들었다.“이모랑 내가 무슨 범죄자라도 돼? 둘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한 것뿐이야. 그런데 넌 이제 이모한테까지 질투하는 거니?”태준은 헛웃음을 흘렸다.“내가 누구한테 질투를 한다고 그래? 문제는 네가 자꾸 나만 피한다는 거잖아.”“피하는 게 아니라 피곤해서 그래. 사고도 났고, 병원에 계속 있었으니까.”“그럼 집에 와서 푹 쉬면 되
“여기까지 와서 다시 병원으로 가자고?”태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세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팔짱을 단단히 낀 채 차 문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네가 멋대로 데려왔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자고 하는 것도 내 마음이야.”“강세린, 진짜 끝까지 이럴래?”“응. 내가 얼마나 화났는지 이제 좀 알겠어?”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열린 문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목이 붙잡힌 순간 세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태준이 조심할 틈도 없이 자신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야! 한태준, 뭐 하는 짓이야!”태준에게 부딪힌 세린은 그의 어깨를 짚었다. 십 년 전과 같은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익숙한 향까지 느껴지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태준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이렇게 가까이 오니까 이제 좀 말할 마음이 생겨?”“누가 네 품에 안기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당장 놓으라니까!”그때 운전석에서 기다리던 기사가 헛기침을 했다.“죄송한데 두 분, 애정 표현은 집에 들어가셔서 하시고 짐부터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다음 손님을 태워야 해서요.”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기사가 보는 앞에서 밀어내자니 소란이 날 듯했다. 세린은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너 진짜 이러기야?”태준은 못 들은 척 미소만 지었다.“기사님,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하지만 태준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가 저한테 단단히 화가 나서요. 금방 정리할게요.”“누가 네 여자친구야!”“아이고, 젊은 분들은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딱 그렇네.”세린은 더는 변명하지 못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에서 내려 짐을 챙겼다. 차가 떠나고 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태준은 입술을 삐죽 내민 세린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여름휴가 못 가게 해서 화난 거야?”“누가 여름휴가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그럼 왜 그러는데? 아까부터 입이 댓 발은
이모에게서 도착한 문자는 짧았다.[금방 따라갈 테니 걱정 마, 세린아.]문자를 확인한 세린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이모까지 따라와 준다니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옆에 앉은 한태준이 문제였다.세린은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려다 말았다. 지금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봤자 태준이 곧바로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이다. 방금 전에도 이모와 대화하는 내내 예민하게 반응했던 남자였다.'제발 빨리 와 줘, 이모.'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택시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린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고, 태준은 팔짱을 낀 채 앞만 바라보았다. 조금 전 병원에서 벌어졌던 실랑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먼저 말을 걸 마음이 들지 않았다.태준은 세린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러더니 당연하다는 듯 짐까지 챙겨 택시에 태웠다.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남의 의사까지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사람을 이렇게 멋대로 데려가 놓고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세린이 옆눈으로 노려보자 태준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세린은 재빨리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태준이 작게 웃었다.세린은 괜히 무릎 위에 올린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이라도 십 년 전의 일을 전부 털어놓고 싶다가도, 자신을 연인으로 믿는 태준의 얼굴을 보면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그에게는 어제 같은 일이 자신에게는 이미 오래된 상처였다.“왜?”“뭐가?”“할 말 있으면 해. 아까부터 몇 번이나 쳐다보던데.”“착각하지 마. 그냥 창밖 보는 거야.”“창문이 내 얼굴에 달렸나 보네.”태준의 능청스러운 말에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십 년이 흘렀는데도 사람 약 올리는 재주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운전석에서도 조심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등을 기대고 있었지만 세린은 창문에 비친 그의 옆얼굴조차 편하게 볼 수 없었다. 한때는 가장 가까웠던 사람인데 이제는 같은
세린이 전화를 막 끊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였다.병실 안에 들어서자 태준이 커다란 짐가방을 털썩 소리가 나게 침대 구석에 내려놓고는 침대에 기대앉아 손가락을 까딱이고 있었다.아까까지 장난스럽던 표정은 사라지고,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통화가 길던데.”단순히 건넨 말이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세린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십 년 전에도 그랬지만 태준은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타입이 아니었다.오히려 평소보다 더 조용해졌다.지금 태준의 모습처럼 말이다.조용한 적막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태준이었다.“퇴원 수속 방금 밟고 왔어. 바로 집으로 갈 거야.”“뭐? 퇴원 수속하고 집으로 간다고? 너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미쳤어? 교통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모도 너 퇴원하는 거 알아?”“알고 있어.”태준의 말투는 평소보다 더 낮고 담담했다.자신의 일이 아니라 꼭 먼 나라에 사는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하는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세린이 이모를 찾으러 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태준이 세린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이모한테. 다녀올 거니까 손 놔!”“담당 의사랑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온다고 했어. 괜히 나가서 엇갈리지 말고 기다려.”“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자동차가 거의 반파된 상태였다면서! 너 진짜 죽다 살아난 거야. 분명 어제 이모한테 듣기로는 종합검사가 남았다고 했는데.”세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휴대전화를 꺼내 이모에게 확인 전화를 하려는 순간이었다.마침 그때, 상담을 마친 듯 이모가 의사와 함께 병실로 들어왔다.그런데 병실에 들어온 이모의 표정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막무가내로 퇴원하겠다는 한태준을 결국 말리지 못했는지, 지쳐 보이는 이모의 모습에 세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모, 태준이 오늘 퇴원하는 거 진짜예요?”“아, 응. 담당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 단위로 추적 검사를 계속 받는 조건으로 퇴원을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이모가 조용히 움직이며 태준의 물건을 내려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세린이 깜짝 놀라 병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눈치 없이 태준이 아직 잠이 덜 깬 듯 그녀의 허리에 두 팔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세린아, 더 자자.”“자긴 뭘 더 자! 빨리 일어나, 바보야.”이모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괜히 태준에게 화를 내며 흔들어 깨우자, 이모는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호호호! 너희 둘이 같이 잔 거 이 이모가 하루 이틀 봤니? 괜찮아. 너희 둘이 속옷만 입고 잔 모습도 본 적 있는데.”한태준이 누굴 닮아서 저렇게 짓궂은가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모를 닮은 게 분명했다.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어색하게 웃으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그 모습을 본 한태준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화가 난 세린은 그대로 그의 볼을 쭉 늘리며 말했다.“정신 차렸으면 빨리 세수나 하고 와. 한.태.준!”태준이 씻으러 가자 세린도 대충 씻으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세상에.머리는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어제 겨우 양치만 한 상태로 잔 탓에 얼굴 꼴도 말이 아니었다. 옷 역시 잠옷이 아니라 꾸깃꾸깃 주름이 져 있었다.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겠다는 생각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클렌징폼으로 대충 화장을 지우고 병실로 나오며 선전포고하듯 태준에게 말했다.“나 이제 진짜 집에 갈 거야!”맨얼굴에 앞머리까지 야무지게 똑딱이 핀으로 올린 세린의 모습에 태준이 물을 마시다가 뿜어내더니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풉! 크크큭. 아, 뭐야. 아침부터 나 웃겨 주는 거야?”비웃음을 당했다는 생각에 세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새초롬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태준은 그저 귀엽다는 듯 세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집에 다녀와.”“뭐?”집에 다녀오라니.우리 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