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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멈춰 있던 시간

last update 게시일: 2026-10-09 19:17:06

태준은 눈을 뜬 이후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엄마, 세린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거의 매시간 세린이만 찾았다. 처음 세린이를 찾았을 때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십 년 전에 헤어진 뒤 더 이상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들의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사고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담당 의사 선생님의 소견에 최대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대답을 회피했지만, 그 어떤 대답도 태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출장 갔어.”

자신의 짧은 대답에 태준은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세린이 언제 와?”

그 질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됐다. 도통 기억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아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왔다.

병실 창가로 오후 햇빛이 천천히 기울어 갈 무렵, 태준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등에는 아직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고, 팔에는 희미하게 남은 멍이 보였다.

사고의 흔적들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태준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엄마.”

아들이 조용히 자신을 불렀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태준의 부름에 천천히 고개를 들며 속상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대답했다.

“응.”

“세린이 아직 연락 안 돼?”

자신의 손이 잠깐 멈췄다.

“출장이라니까.”

태준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내리깔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세린이 이번 출장 길다고 했지.”

그의 말투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정말 며칠 전에도 그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걔 원래 일 욕심 많잖아.”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저히 너희 두 사람은 십 년 전에 헤어졌고, 너에게는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태준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연락은 할 텐데.”

태준은 속상한 듯 링거를 꽂은 팔을 얼굴에 갖다 대더니 아이처럼 소리가 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남자 친구가 사고 났는데, 아무리 바빠도 연락 한 통 없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괜찮은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더 마음이 무너졌다.

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엄마.”

“왜?”

“세린이한테 혹시라도 연락 오면 절대 싫은 소리 하지 마. 엄마도 알잖아. 세린이가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는 등한시하는 거. 내가 최우선이 아니라 조금 질투는 나지만.”

숨이 순간 멈춘 듯했다.

모든 게 자신의 업보인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그 죄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 애써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태준에게 말했다.

“엄마가 왜 세린이한테 화를 내겠어. 엄마는 그런 점이 좋아서 너희 두 사람을 응원했는데. 세린이는 분명 네가 사고 났다는 소식을 알면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올 아이야. 너보다는 아니지만 엄마도 세린이를 볼 만큼 봤어.”

태준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나 유학 가기 전까지밖에 기억이 안 나. 십 년 전으로 기억이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어제 일처럼 너무 생생해. 세린이가 유학 준비도 도와줬었는데, 시간이 십 년이나 지나고 세린이가 취업해서 우리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다니.”

태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유학 준비하면서 맨날 내가 투덜거렸지.”

태준은 잠시 지난날을 떠올리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시간도 없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냐고. 질투했었어. 엄마도 알다시피 내가 질투심이 많잖아. 그게 항상 불안했어. 혹시 기나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내가 하는 일에 유학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유학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야.”

“엄마, 그때마다 세린이가 나한테 주문처럼 항상 같은 말을 했었어. ‘태준아, 조금만 참아. 시간은 금방 가.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라고 말이야.”

그 말을 기억하는 듯 태준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래도 걔 약속은 잘 지켜.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잘 만나고 있는 거겠지.”

태준이 확신하듯 말하자 도저히 진실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너희 둘은 오래전에 헤어졌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엄마가 그랬잖아. 나 안정된 직업도 있고 돈도 꽤 많이 번다고. 그런데 왜 아직까지 세린이랑 결혼하지 않은 거야? 내 성격에 진작에 일을 치르고도 남았을 텐데. 그것도 모자라 장거리 연애라니. 내가 그걸 진짜로 허락했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란스러워하는 태준을 보며 무너지는 가슴을 억지로 쓸어내렸다.

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세린이, 문자 받고 많이 놀랐겠다. 괜히 나 때문에 허둥지둥 오느라 사고 나는 거 아니야? 엄마가 나 괜찮다고, 조심히 오라고 꼭 말해 줘.”

태준의 시선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지금 내 모습 보면 걔 울 텐데.”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세린이 울면 나 진짜 싫은데.”

태준이 작게 웃었다.

“내가 달래야 하잖아.”

태준의 말이 끝나자 병실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왜?”

“세린이 오면 꼭 깨워 줘야 해. 내가 제일 먼저 안심시켜 주고 싶어.”

태준은 천천히 침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 괜찮다고. 그러니까 놀라지 말라고 말이야.”

눈을 감기 직전, 태준이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나 살아서 여기, 네 곁에 있다고.”

그 말은 마치 십 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 속에 혼자 남겨진 사람의 고백 같았다.

병실 안에서 엄마는 끝내 고개를 숙였다.

태준이 기다리는 시간은 단지 며칠이 아니었다.

태준에게는 아직도 세린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십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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