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경서의 울음이 뚝 멎었다.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내가... 잘못 들었나?’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몇 초 뒤에야 아주 천천히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윤모의 눈이 어느새 가늘게 열려 있었다.검고 충혈된 눈이 경서에게서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윤모는 힘없이 미간을 좁히고 온 힘을 다해 한마디 더 했다.“우니까... 진짜 못생겼다.”경서는 놀라서 온몸이 뻣뻣해졌다.“심윤모?”믿을 수 없어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뺨을 만져 봤다.‘진짜야. 따뜻해.’“깨어났구나. 정말 다행이야!
“응.”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경서가 호출 벨을 누르자 간호사가 문을 열었다. 경서는 안으로 들어갔다.하얀 침대 시트와 차가운 기계들, 그 한가운데 몸에 여러 관을 꽂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생기 하나 없이 고요했다.침대 곁으로 다가간 경서는 용기를 내어 옆으로 내려진 손을 가볍게 잡았다.차가웠다. 온기가 전혀 없었다.“심윤모.”경서의 목소리는 심하게 말라 있었다.“나 왔어.”아무 반응도 없었다.경서는 훌쩍이며 주머니에서 망가진 혼인서약서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쳐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손에 넣어 줬다.“네
경서는 겁이 나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뺨은 날아오지 않았다.아픔도, 모욕도 없었다.1초.2초.그러다 뺨에 지극히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은은한 향이 나는 따뜻한 손이 울다가 뺨에 붙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며시 걷어 줬다.놀라울 만큼 다정한 손길이었다.경서가 눈을 번쩍 떴다. 눈앞의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도 화가 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이 어린 부드러운 표정이었다.경서를 부축하던 혜니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재벌가 시어머니라면 아들을 위험하게
“제가 할게요.”혜니가 옆에 놓인 따뜻한 수건으로 경서의 이마를 살살 닦았다.그때 경서의 속눈썹이 몇 번 떨리더니 눈이 천천히 열렸다.깨어난 경서는 온몸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깼어? 배고프지?”혜니가 몸을 숙여 경서를 봤다.“박사님이 병문안 오셨어.”경서의 시선이 침대 곁에 선 남자에게 닿았다.조승구는 위에서 경서를 내려다봤다. 눈에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몸은 좀 어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가져오라고 할게.”너무 다급한 관심은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왔다.“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돌아가세요.”경
햇살이 밝게 내리쬐는 아름답고 넓은 정원이었다.모상원은 활짝 핀 튤립으로 가득했다.윤모가 꽃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흰색 정장을 입고 손에는 새 혼인서약서를 들었다.“달님, 이리 와.”따뜻하게 웃으며 손짓했다.경서는 놀랍고 기쁜 마음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윤모에게 달려갔다.갑자기 하늘이 아무 예고 없이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뒤엉켰다.경서는 걸음을 더 빨리해 필사적으로 달렸다.쾅!굉음과 함께 윤모가 있던 자리에 눈부신 불꽃이 터졌다. 윤모의 모습이 통째로 사라졌다.“심윤모!
“화지병원의 협력사는 HY캐피탈뿐이어야 합니다.”말을 마친 인우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연결되자 간결하게 지시했다.“S국 화지병원의 새 AI 에이전트 의료 시스템은 HY캐피탈이 반드시 확보해야 해.”“네.”혜니가 경서를 병실로 데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우가 올라왔다.혜니는 서둘러 나가 문 밖 창가에서 인우와 마주 섰다.“오늘 밤은 내가 경서 옆에 있을게.”인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혜니를 품으로 끌어당겼다.혜니는 인우의 가슴에 기대 말을 이었다.“혜원으로 돌아가서 나래 잘 봐 줘.”“요
혜니는 기분이 확 상해 곧바로 말했다.“대표님, 비서가 세 명이나 있잖아요. 박 비서에게 동행하라고 하셔도...”‘아무리 그래도 나만 붙잡고 끝까지 갈아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인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한마디를 던졌다.“윤 비서가 대표야, 내가 대표야?”“그야 당연히 대표님이십니다.”혜니는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짜냈다.‘악덕 자본가.’“47분 남았어.”인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덧붙였다.혜니는 토끼보다 빠르게 뛰쳐나갔다.‘젠장...’집까지 가는 데 30분.화장하고 옷 갈아입는 데 17분.목을
게다가 혜니를 따로 태그까지 해 두었다.주소 하나.연락처 하나.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쓸데없는 말은 단 한 글자도 없었다.혜니는 체념한 듯 가방을 움켜쥐고, 곧장 택시를 잡아 그 주소로 향했다.차 안에서도 머릿속은 계속 윙윙거렸다.반년 전 재계약한 근로계약서에 경업금지 약정이 끼어 있었을 줄은 몰랐다.일방적으로 퇴사하면 회사에 43억 원대의 위약금을 물어내야 했다.혜니의 평생을 갈아 넣어도 갚을 수 있을지 모를 돈이었다.혜니는 지금 미칠 듯이 울적했다.어렵게 도착한 곳은 수리 옥션이었다.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
혜니는 그 순간 생각했다.인우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이제 이 남자는 깨끗하지 않다고.인우가 돌아왔을 때, 인우는 그저 일이 바빴다고만 말했다.그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혜니는 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혜니의 눈가는 무섭도록 붉어져 있었다.하지만 이를 악물고 끝내 눈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한인우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다음 날, 혜니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인우의 호출이 내려왔다.혜니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문이
“아!”혜니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떴다.시야가 뒤집히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인우가 혜니를 단번에 어깨에 둘러멘 것이다.단단한 어깨가 몸을 눌러 와 아플 정도였다.“뭐 하는 거야! 내려놔, 한인우!”혜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공중에 뜬 두 다리가 허둥지둥 버둥거렸다.우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그러다 혜니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서야, 온몸이 움찔 굳었다.한인우.소문으로만 듣던 A국 금융계의 거물.수십 조 원대 자산을 손에 쥔 남자였다....혜니는 끌려가는 내내 버둥거렸다.하이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