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목요일 오후 두 시.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
백유라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했다.
오늘 그녀의 차림은 촬영 때와는 달랐다. 몸에 맞게 재단된 검은 재킷에 짧은 이너 톱, 허리선을 강조한 슬랙스를 매치했다. 재킷 아래로 드러나는 목선과 매끄럽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세련된 인상을 만들었다.
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이어링이 빛났고, 손목에는 얇은 골드 시계가 자리했다. 화려함을 앞세우기보다는 고급스러운 소재와 정확한 핏으로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는 스타일이었다.
긴 머리카락은 한쪽 어깨 앞으로 자연스럽게 넘겼다. 짙은 눈매와 선명한 입술은 여전히 강렬했지만, 메이크업은 촬영 때보다 절제되어 있었다.
유라는 회의실 벽면에 걸린 태성어패럴의 지난 시즌 캠페인 사진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모델로 참여한 광고였다. 사진 속 유라는 붉은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감과 도발적인 분위기가 동시에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그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셨습니까?”
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라가 돌아보았다. 서도겸이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짙은 남색 정장에 검은 넥타이. 단정하게 정돈된 검은 머리카락과 무심한 표정, 곧게 뻗은 어깨까지. 유라는 그를 보는 순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대표님.”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네요.”
도겸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받았다.
“지난 행사 이후로는 처음이군요.”
“그때는 인사만 하고 가셨잖아요. 제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세요?”
유라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도겸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리에 앉았다.
“행사 일정이 길어져서 먼저 나왔습니다.”
“알아요. 대표님이 바쁜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유라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제대로 이야기하려고요.”
회의가 시작되자 유라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녀는 다음 시즌 캠페인 기획안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단순히 유명한 얼굴을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브랜드의 이미지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어떤 소비자층을 공략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도겸은 자료를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지난 시즌보다 영상 콘텐츠 비중을 늘리자는 의견인데, 구매 전환율에 대한 근거가 있습니까?”
“지난 캠페인 데이터를 보시면 됩니다. 짧은 영상 콘텐츠에서 유입된 고객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좋았어요. 이번에는 제품을 노출하는 방식보다 실제로 착용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촬영 콘셉트는요?”
“도시적인 분위기와 일상적인 착용감을 함께 보여 주는 방향이요. 지나치게 광고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제품의 특징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요.”
유라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도겸은 자료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방향은 나쁘지 않네요. 다만 예산과 일정은 다시 조정해야겠습니다.”
“역시 쉽게 넘어가 주시지는 않네요.”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알아요. 그래서 대표님이랑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유라가 미소를 지었다.
“다른 분들은 제 이름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대표님은 적어도 제가 가져온 자료를 읽어 보시잖아요.”
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유라는 외모와 유명세만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줄 알았고, 대중의 반응을 분석하는 감각도 뛰어났다.
그는 그런 점을 인정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유라는 자료를 정리하며 물었다.
“대표님, 오늘 저녁에는 일정 있으세요?”
도겸이 서류를 덮었다.
“있습니다.”
“아쉽네요. 근처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던데. 예전에 대표님이 좋아한다고 했던 음식이 있더라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가시죠.”
정중하지만 분명한 대답이었다. 유라는 잠시 도겸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꼭이요.”
“네.”
도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라도 따라 일어났다. 문 앞까지 배웅하는 도겸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대표님은 정말 변하지 않으시네요.”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는 안 궁금하세요?”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유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 당하겠다니까.”
그녀는 회의실을 나서기 전 한 번 더 도겸을 돌아보았다.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업무 관련 내용은 담당자에게 전달해 주세요.”
“네, 대표님.”
유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그녀의 시선은 도겸에게 머물러 있었다.
***
오후 세 시.
도겸은 대표실로 돌아왔다. 최현석이 회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왔다.
“미팅은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기획안은 검토할 만합니다. 예산 수정해서 다시 받아 보세요.”
“네. 전달하겠습니다.”
현석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가 잠시 말을 망설였다.
“백유라 씨가 대표님과 상당히 친밀해 보이던데요.”
도겸이 고개를 들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왜요?”
“아닙니다.”
현석은 곧바로 대답을 거두었다. 도겸은 더 묻지 않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그 말이면 충분했다. 유라와 함께한 시간은 길었다. 서로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특별한 설명 없이도 대화가 이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일정 확인해 주세요.”
“네, 대표님.”
현석이 나간 뒤 도겸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유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에는 업무 말고 편하게 봐요.]
도겸은 짧게 답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도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서류를 펼쳤다. 그에게 오늘은 그저 예정된 미팅을 마친 날이었다.
하지만 유라에게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건물 밖으로 나와 차에 오르면서도 회의실에서 마주했던 도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특별히 다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차갑게 밀어내지도 않았다. 늘 그랬다. 그 애매한 거리가 유라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도겸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한해원. 태성그룹의 장남인 서도겸과 결혼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여자. 특별한 집안 배경도, 화려한 인맥도 없는 평범한 여자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한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유라는 해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공식 석상에서 몇 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였고, 두 사람이 어떤 결혼생활을 하는지는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도겸은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유라는 휴대전화를 들어 포털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 새로운 기사와 화보가 연달아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관심이 익숙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도겸은 아직, 그녀가 포기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해외 캠페인 계약서의 수정 조항이 띄워져 있었다. 백유라는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문제는 이 부분이에요.”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현지 에이전시에서 제 초상권 사용 범위를 변경했어요. 기존에는 아시아 지역 광고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수정안에는 유럽 온라인 플랫폼까지 포함되어 있거든요.”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약 조건을 확대하려는 것 같습니다.”“단순한 확대가 아니에요.”유라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이대로 계약하면 제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의 프로모션에도 간접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요.”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겸이 물었다.“대안이 있습니까?”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초상권 사용 범위를 지역이 아니라 매체별로 제한하는 거예요. 그러면 태성은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고, 저도 이미지 사용을 관리할 수 있어요.”도겸은 자료를 살폈다.“현지 에이전시가 받아들이겠습니까?”“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유라는 미소 지었다.“제가 직접 협의할게요.”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상대 측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그 부분도 생각했어요.”유라는 또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제가 유럽 일정 중에 진행하기로 했던 개인 화보가 있거든요. 그 촬영을 태성 캠페인과 연계하면 추가 제작비를 줄일 수 있어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개인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겁니까?”“네.”“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유라는 고개를 저었다.“필요해요. 이번 캠페인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분하게 덧붙였다.“저도 태성의 얼굴로 계약한 사람이잖아요. 제 역할은 제대로 해야죠.”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유라는 오늘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
밤 열한 시. 도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해원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오셨어요?”“네.”“행사는 잘 다녀오셨어요?”도겸이 잠시 멈췄다.“알고 있었습니까?”“사진을 봤어요.”“아.”도겸은 넥타이를 풀었다.“협찬사 행사였습니다.”“네. 알아요.”해원은 책을 덮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백유라 씨랑 많이 친하세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오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그렇군요.”“왜 묻습니까?”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 두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업무상 자주 만날 뿐입니다.”“...네.”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해원은 더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며칠 전 자신을 끌어안으려던 남편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늘 사진 속에서 백유라가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있던 모습도.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예민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한편, 같은 시각.백유라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SNS에 올린 사진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그녀는 댓글을 하나씩 읽었다. 그러다 문득 해원의 얼굴이 떠올랐다.청담동 쇼룸에서 만났던 여자.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던 모습.‘저는 제 힘으로 해 보고 싶어요.’유라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한해원 씨.”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생각보다 재미있어지겠는데.”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서도겸이 선택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자신이 그토록 가까워지고 싶었던 남자의 곁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듯 서 있는 여자. 그 자리가 문득 거슬리기 시작했다.유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었다.‘그렇게 당연하게
미팅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도겸은 마지막 보고서를 덮었다.“오늘 논의한 내용대로 진행해 주세요. 수정안은 최 실장님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네.”유라는 서류를 정리하다 문득 물었다.“도겸 씨,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무슨 일입니까?”“제가 참석하는 브랜드 행사요. 태성어패럴에서도 관계자 몇 분 오시잖아요.”“확인해 봐야겠습니다.”“가능하면 도겸 씨도 오셨으면 좋겠어요.”유라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이번 캠페인에 중요한 자리니까요.”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일정 확인 후 말씀드리겠습니다.”“기다릴게요.”유라는 웃었다.그의 대답은 언제나 비슷했다. 가능하다고도, 불가능하다고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라는 알고 있었다. 서도겸은 업무상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결국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점을 이용하면 됐다.***같은 날 오후. 해원은 윤정숙의 작업실에서 첫 번째 블라우스를 완성하고 있었다.“해원 씨, 마지막 단추만 달면 되겠네요.”정숙이 말했다.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늘을 움직였다.연회색 원단으로 만든 블라우스였다. 과하지 않은 볼륨의 소매와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이 특징이었다. 마지막 단추를 단 뒤 해원은 옷을 마네킹에 걸었다.정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어머.”해원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때요?”“예쁜데요?”정숙은 옷의 옆선을 살펴보았다.“특히 이 부분이 좋아요. 허리선을 너무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실루엣이 살아 있네요.”해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정말요?”“네. 첫 작품치고 아주 잘했어요.”해원은 마네킹 앞에 섰다. 오랜만에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옷이었다.아직 부족한 부분도 많았다. 봉제선이 조금 고르지 못한 곳도 있었고, 소매 끝은 한 번 더 수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만든 옷이었다.“사진 찍어도 될까요?”“그럼요.”해원은 휴대전화를 꺼내 옷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민지에게 사진을 보냈다. 잠시 후 답장이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