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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어머니의 노리개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1 22:14:17

서의는 연고 함을 내려놓고, 안섶에 품고 온 종이를 은비녀 상자 바닥에 밀어 넣었다.

폐서인 정씨.

아버지에게 배운 획으로 옮겨 적은 그 글자들을 다시 펼쳐 볼 틈은 없었다.

문밖에서는 등롱을 든 연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의녀청 들어가기 전에 순덕 언니 방에 한 번 더 들러 봤거든요. 이부자리도 안 펴져 있고, 같은 방 언니들도 저녁 설거지 뒤로는 못 봤대요."

서의는 더 묻지 않고 신을 꿰었다.

두 사람은 밤새 궐 동쪽을 뒤졌다.

자시가 넘고 축시가 지나도록, 순덕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 숨어서 졸고 있을 거예요. 떡 찌느라 늘 잠이 모자라다고 했거든요."

모퉁이를 돌 때마다 연이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등롱 심지가 다 타 들어가고, 동쪽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올 무렵이었다.

동쪽 소주방 뒤뜰에서 째지는 비명이 터졌다.

물 길으러 나온 나인 하나가 바가지를 내던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뒤뜰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 긷다 빠졌나 봐."

"밤에 혼자 나왔다던데."

"저 큰 독에 사람이 어찌 빠져?"

"부정 타게, 입 다물어."

사람 키만 한 물독 가장자리에 젖은 치맛자락이 걸쳐져 있었다.

궁녀 3명이 매달려 끌어낸 몸은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연이의 손에서 등롱이 굴러떨어졌다.

물에 불은 얼굴을 들여다보는 순간, 서의도 숨을 멈췄다.

2년 전 중궁전 소주방에서 약과를 굽던 아이.

원자가 약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꿀을 한 숟가락씩 더 넣어 몰래 따로 싸 두던 아이였다.

원자 아기씨 몫이에요, 마마.

쉿, 상궁마마님께는 비밀이에요.

그 아이가 지금, 물독 옆 젖은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제가 전했어요."

연이가 시신 곁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제 저녁에 분명히 전했어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언니가 웃으면서 알았다고, 너나 잘 먹으라고 떡을 하나 더 줬는데……."

울음에 먹혀 들어간 말끝 대신, 연이가 품에서 작은 떡 보자기를 꺼내 들었다.

보자기를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서의는 연이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가 거두었다.

지금 해 줄 수 있는 위로는 하나뿐이었다.

순덕이 어떻게 죽었는지, 끝까지 밝혀 적는 것.

무릎을 꿇고 차갑게 식은 이마에 손을 얹자, 늘 하던 말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순덕. 하던 말을 마저 해 보거라."

물에 빠진 시신은 입과 코에 거품이 고인다.

순덕의 입가에도 하얀 거품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손목이 이상했다.

양 손목을 한 바퀴 두른, 실처럼 가느다란 붉은 자국.

비단 끈같이 가는 것으로 단단히 졸라 묶었던 흔적이었다.

조심스레 벌리려는 손길에, 굳은 턱이 한참 버티다가 겨우 벌어졌다.

입술 안쪽이 찢겨 있었고, 잇몸에는 손톱에 패인 자국이 반달처럼 박혀 있었다.

누군가 억지로 입을 벌려 무언가를 쏟아 넣은 것이다.

혀끝을 손가락으로 쓸자, 자잘하게 부르튼 결이 손끝에 걸렸다.

'부자.'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순덕의 손을 들어 손톱 끝을 햇빛에 비추자, 엉긴 피 사이로 얇게 말려 들어간 살점이 보였다.

순덕의 손끝은 상한 데 없이 멀쩡했으니, 남의 살이었다.

순덕은 끝까지 버텼다.

자신을 묶은 누군가의 살갗을 손톱으로 뜯어낼 만큼.

먹지 않겠다는 사람의 손을 묶고, 입을 벌려 독을 부었다.

그러고는 실족한 것처럼 물독에 처넣었다.

어제 보낸 경고가 순덕을 살리기는커녕, 죽음을 앞당겼을지도 몰랐다.

"어머, 또 죽었느냐?"

매화 향이 먼저 뒤뜰로 밀려들자, 궁녀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김 상궁을 거느린 정화가 들어서고 있었다.

동쪽 소주방은 중궁전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요즘 궁녀들은 어찌 이리 명이 짧으냐. 그렇지?"

정화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저 물독은 깨 버리거라. 시체 담갔던 물로 밥을 지을 수는 없지 않으냐."

"예, 마마."

김 상궁이 허리를 숙이는 순간, 서의의 눈이 그 손등에 머물렀다.

소맷부리 아래로, 붉은 줄 3개가 나란히 그어져 있었다.

밤사이 생긴 듯 아직 피딱지도 채 앉지 않은, 할퀸 자국이었다.

서의의 시선을 느꼈는지, 김 상궁이 슬그머니 손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정화가 그제야 시신 곁에 무릎 꿇은 서의를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또 너로구나."

"……."

"이상하지 않으냐? 네가 궐에 들고 나서 벌써 2번째다. 시체가 나오는 곳엔 꼭 네가 있구나."

정화가 생긋 웃었다.

"혹, 네가 죽이고 다니는 것 아니냐?"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그 의녀 오고 나서부터잖아."

"설마."

대답 대신 고개를 든 서의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정화의 허리춤에서 무언가가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산호 가지와 비취 나비, 밀화 불수를 오색 매듭으로 엮어 늘어뜨린 삼작노리개.

서의는 그 노리개를 알았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그녀의 허리에 손수 매어 준 것이었다.

어미가 곁에서 지켜 주지 못하는 날엔, 이게 너를 지켜 줄 거다.

어머니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노리개는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 되었다.

폐위되던 밤, 의금부 나졸들이 그녀의 허리에서 거칠게 뜯어 간 그 노리개가.

지금 동생의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서의의 시선을 눈치챈 정화가 노리개를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이것? 곱지 않으냐?"

산호와 밀화가 달그락 부딪혔다.

"죽은 언니 물건이란다. 다른 건 다 태웠는데, 이것만은 아깝더구나. 우리 언니가 이것만은 끔찍이 아꼈거든."

정화가 노리개를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언니가 아끼던 것이라, 더 갖고 싶었지."

서의는 젖은 흙을 짚은 손을 거둬들이지 못했다.

매듭 끝이 흔들릴 때마다, 그날 허리끈을 당겨 조여 주던 어머니의 손끝이 옆구리에 되살아났다.

정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의를 내려다보았다.

"왜, 탐나느냐?"

눈을 내리깔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화의 웃음이 천천히 걷혔다.

접힌 부채 끝이 서의의 턱밑을 받쳐 들어 올렸다.

"그 눈."

매화 향이 코끝까지 다가왔다.

"꼭 우리 언니 같구나."

정화가 어깨 너머로 손짓했다.

"김 상궁, 이 의녀 눈 좀 보아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냐?"

쪽빛 치맛자락이 서의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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