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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황녀의 정원 앞에

Author: 훌리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13:54:38

18화

황후궁을 나서던 프레데리크의 시야에 멀찍이 서 있던 일황자 레나토가 들어왔다.

귀족의회 내내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눈빛으로 프레데리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 대신 눈빛으로 짧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흐른 뒤 레나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중립을 지키겠다더니…… 정작 대공이 이 지경이라니. 이쯤 되면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 건지, 나도 궁금해지는군.”

“…….”

황후와의 날선 신경전을 치른 직후, 또다시 이런 도발을 마주하자니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려 애썼다.

“베라트 가문의 이름을 걸고,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황후께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대공의 모습이란. 보고 있자니 속이 터져서 말이야.”

레나토는 일부러 속을 긁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제국의 제1검답게, 목숨을 걸고 이 땅이나 지켜. 언젠가 그대가 죽더라도— 황녀이자 내 누이는, 내가 책임지지.”

프레데리크의 미간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는 레나토가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황권에 대한 야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

그가 황위에 오른다면, 그것은 곧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터였다.

황제가 병환에 들기 전이었다면, 그 역시 바르게 자란 황녀에게 기대를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고, 황녀와 약혼에 이른 지금 그 또한 이 결혼을 이용하고 있다 봐도 무방했다.

북부가 황후의 편에 선 듯한 인상을 준 것이, 일황자 측의 불신을 낳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중립을 지킨다’는 말은 쉽지만, 그것이 늘 검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제국의 제1검으로서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야 했지만, 나라에 해악을 끼칠 자를 두고 볼 수만도 없었다.

“제 목숨은 언제나 제국을 위해 바쳐질 것입니다.”

그는 더는 말하지 않고, 레나토 곁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

귀족의회를 마친 프레데리크는 이튿날 정오 무렵 황후의 지시대로 황녀의 궁에 도착했다. 황녀의 시녀가 된 레오노라가 그를 맞이했다.

“프레데리크…… 아, 아니, 죄송합니다. 대공 각하…….”

이제 그를 맞는 곳은 그녀의 백작저가 아니었다. 한때 그가 백작저로 찾아오던 날들이, 아득하게 멀면서도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처럼 떠올랐다.

“황녀 전하는 잠시 궁을 비우셨어요.”

“…어디로 갔지?”

“정원으로 산책을 나가셨어요.”

프레데리크의 시선이 황녀의 정원 쪽으로 향했다. 레오노라는 아주 잠시지만 그와 만난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고 계시면 모셔오겠습니다.”

돌아서는데 붙잡는 말이 들려왔다.

“아니. 내가 직접 가보지.”

레오노라는 끝내 아쉬운 마음이 들고 말았다. 제 심정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돌아섰다.

그녀의 기대라도 안 것인지 프레데리크는 가던 길을 멈춘 채 뒤돌아서 레오노라에게 물었다.

“황녀의 시녀가 된 일… 후회 없나?”

“역시… 변함없으시네요. 제 삶을 걱정해주시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선택은 존중해주세요.”

“……그러지.”

프레데리크는 레오노라를 잠시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레오노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미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곳을 하염없이 좇았다.

단 한 번이라도 매달려 봤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그녀가…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후회할 거면서… 이렇게 아플 거면서…….’

***

프레데리크는 황녀의 정원 앞에 다다라 장갑을 벗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습한 공기, 곧 비라도 쏟아질 듯한 기운이 눅눅하게 피부에 스며들었다.

대공의 방문을 알 리 없는 지빌라는 정원 한가운데를 산책 중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걷는 것이 가장 좋은 해답이었다.

정원의 꽃들은 화려하고 눈부셨지만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꽃들만은 죄가 없었다. 정치도 야망도 없는 생명. 그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잠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대공을 떠올렸다. 그는 귀족의회가 끝나면 늘 타운하우스로 돌아가 조용히 틀어박히곤 했다. 수도에 머무는 동안 연회 한 번 참석하지 않았다.

황후가 그를 다시 무대로 끌어내려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빌라 역시 그를 억지로 움직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라 해서 움직일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같은 자리를 천천히 맴돌고 있을 때, 어느샌가 정원의 향기를 가르는 묵직한 기척이 다가왔다. 장신의 남자가 그녀의 앞에 우뚝 섰다.

“……대공.”

“이름을… 부르라 했습니다.”

“……프레데리크.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죠?”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지빌라는 불현듯, 오래전과는 다른 거리감에 당황했다.

“기다리고 계셨다면… 돌아갔을 텐데… 먼 걸음하게 했네요.”

이곳은 여느 귀족가의 정원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복잡했다. 회귀 후 그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가꾼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조차 아직 다 밟아보지 못한 길들이 남아 있었으니, 그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걸어왔을지 짐작이 갔다.

“차를 마시러 왔지만… 오늘은 산책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프레데리크는 그녀가 향하려던 미로정원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벗어 든 장갑이 그의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맨손이 된 손끝이, 낯설게 허전했다. 비를 머금은 공기가, 두 사람 사이로 눅눅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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