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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의 마지막 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2 22:21:40

정헌이 결국 크게 웃었다.

연화도 입을 가리고 웃었다.

도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따라 웃었다.

서화도 웃었다.

그날의 저녁은.

그렇게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서화는 그 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밤이 깊었다.

모두 잠든 뒤에도 서화는 잠들지 못했다.

결국 저고리를 하나 더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루 끝에 앉았다.

달빛이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오래된 감나무.

어머니가 가꾸던 작은 화단.

어릴 적 넘어져 무릎을 깨뜨렸던 돌계단.

눈을 감아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느냐?”

서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정헌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딸의 옆에 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아쉽습니다.”

서화가 먼저 말했다.

“무엇이?”

“이 집을 떠나는 것이요.”

정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가 마당을 바라보았다.

“저 감나무에서 오라버니가 떨어졌던 것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울었습니다.”

“네 오라비는 울지 않았다고 주장하더구나.”

“제가 봤는데요.”

정헌이 웃었다.

서화도 웃었다.

“어머니와 처음 꽃을 심었던 곳도 저기입니다.”

“그래.”

“아버지께 처음 글자를 배운 것도 이 집이고요.”

“네가 먹을 갈아놓고 졸았지.”

“그건 아주 어릴 때입니다.”

“아비에게는 얼마 전 같구나.”

서화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아버지.”

“그래.”

“…괜찮으십니까?”

정헌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관직.

명예.

집.

그동안 잃어버린 모든 것.

“괜찮다.”

대답은 간단했다.

“정말이십니까?”

“서화야.”

정헌이 딸을 바라보았다.

“아비가 벼슬을 잃었다고 해서 네 아비가 아닌 것이 되더냐?”

서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집을 잃었다고 네 어머니가 네 어머니가 아닌 것이 되느냐?”

“아닙니다.”

“도겸이 네 오라비가 아닌 것이 되고?”

서화가 조금 웃었다.

“그랬으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정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도겸에게 말하지 말거라.”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잠시 후.

정헌이 다시 마당을 바라보았다.

“집이 우리를 가족으로 만들어준 것은 아니란다.”

서화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가 있고.”

천천히.

“네 오라비가 있고.”

그리고.

“네가 있고, 내가 있다.”

정헌이 웃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다시 집이 되겠지.”

서화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아버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예.”

그날 밤.

서화는 그것을 믿었다.

내일 이 집을 떠나더라도.

어디로 가더라도.

가족이 함께라면 다시 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다음 날.

비가 내렸다.

가족이 한양을 떠난 지 반나절쯤 지났을 때였다.

산길로 접어들면서 빗줄기가 굵어졌다.

서화는 말 위에서 삿갓을 조금 더 눌러썼다.

“서화야.”

앞서가던 도겸이 돌아보았다.

“괜찮으냐?”

“예.”

“힘들면 말해.”

“오라버니나 앞을 보십시오.”

“걱정해줘도.”

그 순간이었다.

피잉―!

무언가 공기를 찢었다.

도겸의 표정이 변했다.

“숙여!”

화살이 날아왔다.

서화가 몸을 숙였다.

비명.

말 울음.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아버지!”

“서화를 데리고 가!”

정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겸이 말을 돌렸다.

“서화야, 따라와!”

“하지만—”

“지금!”

서화는 이를 악물고 고삐를 잡았다.

말이 달렸다.

빗속의 산길.

뒤에서 사람들의 고함이 들렸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

서화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보지 마!”

도겸이 소리쳤다.

“앞만 봐!”

그러나 추격자들이 따라왔다.

한 명.

두 명.

세 명.

도겸이 말을 늦추며 칼을 뽑았다.

“먼저 가!”

“싫습니다!”

“윤서화!”

“함께 가겠다고 했잖습니까!”

도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말이 크게 울었다.

서화의 몸이 기울었다.

“서화야!”

세상이 뒤집혔다.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숨이 막혔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서화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발밑에 땅이 없었다.

절벽.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아!”

서화가 반사적으로 바위를 붙잡았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서화!”

도겸이 달려왔다.

그가 바닥에 엎드려 서화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잡았다.”

도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놓지 마.”

서화는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절대 놓지 마!”

“예.”

올라가야 했다.

살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가야 했다.

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화의 허리춤에서 빛이 났다.

“…?”

백옥 노리개.

어머니가 물려준 그것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화야.”

도겸도 그것을 보았다.

“그게 왜….”

빛이 강해졌다.

그리고.

절벽 아래의 어둠이 움직였다.

검은 것이 둥글게 벌어졌다.

마치.

문처럼.

“오라버니.”

서화가 처음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보지 마.”

도겸이 이를 악물었다.

“내 손만 봐.”

“오라버니.”

“올라와.”

도겸의 손이 미끄러졌다.

“안 돼.”

다시 붙잡았다.

“서화야!”

“오라버니!”

손끝이.

조금씩.

멀어졌다.

서화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도겸도 그랬다.

하지만 이상한 힘이 아래에서 서화를 끌어당겼다.

“윤서화!”

마지막으로 본 것은.

비를 맞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오라버니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손이 떨어졌다.

“오라버니―!”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웠다.

서화의 눈꺼풀이 떨렸다.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비인가.

아니었다.

차갑고.

가벼웠다.

서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

새하얀 세상.

분명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서화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 보는 나무.

처음 보는 산.

그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라버니가 없었다.

“오라버니?”

대답이 없었다.

“오라버니!”

서화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아버지!”

고요했다.

“어머니!”

눈 내리는 숲이 그녀의 목소리를 삼켰다.

서화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때.

붉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피.

새하얀 눈 위로 긴 핏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서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는 옷.

처음 보는 얼굴.

큰 체격.

검은 머리.

피투성이였다.

서화는 망설였다.

도망쳐야 한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서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남자에게 다가갔다.

목에 손을 대었다.

맥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했다.

너무 느렸다.

그런데 동시에 무언가가 피부 아래에서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서화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대체….”

그 순간.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옅은 회색.

서화가 처음 보는 색이었다.

남자의 손이 서화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누구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서화의 눈이 흔들렸다.

“무슨 말씀을….”

남자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졌다.

서화 역시 알아들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입술이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서화가 침통을 꺼냈다.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놓으십시오.”

당연히 알아듣지 못한다.

“죽기 싫으시면 가만히 계십시오.”

서화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침 하나를 꺼냈다.

첫 번째 침이 남자의 몸에 들어간 순간.

꿈틀.

검은 무언가가 목덜미 아래에서 움직였다.

서화가 숨을 멈췄다.

“……?”

백옥 노리개가 다시 빛났다.

그리고.

분명 아무도 없는 설원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서화의 눈이 커졌다.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찾았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문을 여는 아이야.』

그날.

조선의 양반가 규수 윤서화는.

자신이 세상 하나를 건너왔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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