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계연수는 황제가 여전히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그러나 그가 어째서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속내를 확인하려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심장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한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더없이 공손하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신첩이 폐하의 마음에 들도록 최선을 다해 그리겠습니다.”황제는 눈을 내리깔고 계연수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곤룡포 자락에 묻은 눈을 털어 낸 뒤, 계연수의 곁을 스쳐 천천히 멀어졌다.밝은 황색의 뒷모습이 매화나무 사이로 한참 멀어진 뒤에야 계연수는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그녀는 곁에 있던 용춘의 손을 붙잡았다. 손바닥에는 온기 한 점 없이 차가운 식은땀만 배어 있었다.매화 숲에 바람이 가지를 스치는 소리만 남고서야 계연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행매나무에는 희고 여린 꽃이 소복이 피어 있었다. 옅은 향기가 바람결을 따라 코끝을 스쳤으나, 조금 전 황제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니 그 맑은 향마저 서늘하게 느껴졌다.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려 매원을 나가려 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태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곁을 따르는 궁인 하나 없이 홀로였다.계연수는 태자가 어째서 혼자 이곳에 왔는지 의아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먼저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태자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부황께서 외숙모를 이곳으로 부르신 겁니까?”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그린 매화도가 폐하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라고 하셨습니다.”태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내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들어 눈앞의 행매나무를 바라보았다.“부황께서 만족하시는 일은 본래 드뭅니다. 그러니 외숙모께서도 너무 마음에
계연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깊이 숙였다.“폐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존귀한 옥체입니다. 천추만세토록 강녕하실 폐하께 감히 충성을 다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황제는 고개를 숙여 계연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두려움에 질린 듯 창백해진 얼굴과 깊이 내리깔린 눈매,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정갈하게 틀어 올린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이 불어와 연노란 망토 자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목둘레를 감싼 새하얀 여우털 속에 파묻힌 얼굴은 본래보다도 한층 작아 보였다.황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이내 몸을 조금 굽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는 듯 손을 내밀었으나, 손끝은 닿지 않았다.“심씨 부인은 어찌 이리 겁을 먹었느냐? 짐은 그저 한담을 나누었을 뿐이다.”그가 담담히 덧붙였다.“일어나거라.”계연수는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몸에서 풍기는 용연향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혹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살을 에는 한겨울의 냉기와 뒤섞이자, 그 향은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하게 할 만큼 위압적으로 느껴졌다.계연수는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감정이라곤 좀처럼 읽히지 않는 냉담한 눈이었다.심서준보다도 한결 더 차가웠다.계연수가 황제의 얼굴을 이토록 똑바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에도 천안을 볼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그녀 자신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황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그 얼굴만 외면하면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도 애써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황권 앞에 고개를 숙인 채 과거를 마음 깊이 묻어 두고, 지금의 평온한 삶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이어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그러나 뜻하지 않게 마주한 황제의 모습은 그녀가 상상해 온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키가 크고 몸은 늘씬했으며, 마른 얼굴에는 날카로운 선이 살아 있었다. 적
계연수는 요 며칠 황제에게 바칠 매화도를 그리고 있었다.계연수는 서재의 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한편의 화병에는 정원에서 갓 꺾어 온 매화 가지가 꽂혀 있었고, 갓 피어난 꽃잎에서는 맑고 그윽한 향이 흘러나와 방 안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채웠다.그러나 계연수는 몇 번이나 붓을 들었다가도 좀처럼 마음속에 그리던 운치를 잡지 못했다. 대충 그려 끝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찾아내면 그 또한 골칫거리였다.그렇다고 정성을 다해 그리고 있자니, 황제를 위해 그만한 마음을 쏟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상반된 마음을 품어 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계연수는 먹향과 매화향이 뒤섞인 서재 안에서 오전 내내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허비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야 마침내 붓끝을 종이 위에 내렸다.어찌 되었든 제대로 그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그녀는 꼬박 하루 동안 그림에 매달렸다. 붓을 놓은 뒤에도 한참 동안 그림을 들여다보며 꽃잎의 농담(濃淡:색·먹의 농도 변화)과 가지의 흐름을 거듭 살폈다.위운필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로 그녀의 화공은 예전보다 한층 깊어져 있었다. 계연수 스스로 보기에도 제법 흡족한 그림이었다.이튿날 심서준에게 부탁해 그림을 궁으로 들여보낸 계연수는 그것으로 황제의 분부를 무사히 마쳤다고 여겼다.그러나 고작 하루가 지난 뒤, 궁에서 다시 그녀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황제를 다시 마주한 곳은 어서재가 아니라 매원이었다.계연수가 매원에 들어섰을 때, 황제는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행매나무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희디흰 설원 위로 밝은 황색 곤룡포가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계연수는 눈을 내리깔고 소리 없이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황제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 온화하고 단아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은 눈밭에 서 있으니 어딘지 서늘하고 고고해 보였다.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행매의 향을 어찌 생각하느냐?”계연수는 속뜻을 헤아
백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형수님은 자신보다 훨씬 독한 사람이었다. 특히 집안의 소실을 다루는 일에는 한 치의 인정도 없었다.명씨는 차가운 기색을 거두고 백씨를 바라보며 웃었다.“그러고 보니 고하운은 정말이지 속 빈 허수아비나 다름없더구나. 매사에 남의 눈치만 살피며 쩔쩔매니, 어디 내세울 만한 구석이 있어야지.”그녀는 찻잔을 들어 맑은 찻물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이었다.“선혁이 제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며 전에는 내 처소까지 찾아와 울더구나. 헌데 울어서 무엇 하겠느냐? 여자가 자꾸 눈물을 보이면 사내의 마음만 더 멀어지는 법인데.”명씨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스쳤다.“그래도 덕분에 그 부부를 한바탕 꾸짖을 구실은 생겼다. 요즘은 그나마 눈치가 생겼는지 더는 내 앞에 와서 울지 않더구나. 그래도 나는 그 아이가 어리석어서 마음에 든다.”백씨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차츰 짜증이 일었다. 그녀는 말없이 명씨를 한 번 바라보았다.백선혁은 그래도 백씨 가문에서 제법 장래가 촉망되는 후손이었다. 그런데 명씨가 고하운 같은 여자를 부인으로 들여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으니, 결국 손해를 입는 것은 백씨 가문의 기반이자 큰오라버니의 자손이었다.생각해 보면 자신도 그때는 무언가에 홀렸던 모양이었다. 계연수를 견제하고 셋째 동생을 구해 내겠다는 생각에 이 혼사를 받아들였으나, 이제 와서는 후회가 밀려왔다.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백씨는 더 길게 말하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명씨를 바라보았다.“형수님도 이제는 조금 자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큰오라버니는 호락호락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선혁의 혼사가 잘못되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고하운이 더는 이용할 가치조차 없다면, 저도 나중에는 큰오라버니께 그녀를 내보내고 선혁에게 더 나은 부인을 맞아 주라고 권할 생각이에요.”명씨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말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방 안
고하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음부터 줄곧 알고 있었다.그저 계연수 앞에서만큼은 어떻게든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자신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 그토록 조급하게 제 행복을 떠벌린 것이었다.그러나 계연수는 불과 몇 마디만으로 그녀가 공들여 지켜 온 체면을 무너뜨렸다. 그보다 고하운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그 모든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는 계연수의 무심한 태도였다. 마치 자신이 그토록 애써 자랑한 것들이 애초부터 견줄 만한 가치조차 없다는 듯했다.계연수는 고하운이 누리고 있는 지금의 삶을 굳이 망가뜨릴 생각이 없었다. 창가로 스며든 늦은 햇살이 장부 위에 엷게 내려앉은 가운데,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고하운을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나는 네가 잘 살기를 바란다. 너와 나를 견주어 본 적도 없고.”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조롱도 노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해서, 고하운은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내가 대체 너와 무엇을 비교해야 하느냐? 네가 잘못 산다고 해서 내가 너를 비웃고 조롱하기라도 할 것 같으냐?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 일만 해도 산더미인데, 어디에 그런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계연수는 손끝으로 장부 가장자리를 가볍게 누르며 말을 이었다.“너는 단 한 번도 나를 제대로 알려고 한 적이 없구나.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으면서도 말이다.”방 안에는 향로에서 피어오른 은은한 침수향만이 고요히 감돌았다. 계연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으나, 이어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고하운의 가슴속 가장 아픈 곳을 어김없이 파고들었다.“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느냐? 오히려 네가 내게 한 일을 돌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 네 어머니가 예전에 저지른 일들을 네가 정말 하나도 몰랐다고 할 셈이냐?”고하운의 낯빛이 다시 한번 새하얗게 질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녀는 옷자락을 움켜쥔 채 넋이 나간 듯 계연수만 바라보았
계연수는 용춘에게 물러나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아이 소식이 없다는 말은 고하운만 꺼낸 것이 아니었다. 심서준과 혼인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태 태기가 없으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상했다.일전에 태의가 찾아와 진맥한 적도 있었지만,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계연수 역시 조급해하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몸을 돌보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레 소식이 찾아올 터였다.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일은 인연이 닿아야 하는 법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소식이 올지도 모르니,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구나.”지나칠 만큼 평온한 계연수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하운은 입가의 미소가 잠시 굳었다.지금 자신이 사촌 언니보다 나은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자신이 먼저 아이를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계연수는 그 사실을 조금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고하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저와 사촌 언니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언니가 걱정되어서 그래요.”계연수는 할 말이 있으면서도 선뜻 꺼내지 못하는 고하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거라.”그러자 고하운이 계연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요즘 심 후작께서 언니 처소에 잘 들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던데… 그래서 아직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계연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고하운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밖에서 들었어요.”“밖의 누구에게?”계연수의 거듭된 물음에 고하운은 손에 쥔 손수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잘 기억나지 않아요.”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고하운의 시선은 집요하게 계연수의 눈매를 좇았다.사실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고하운이 제멋대로 짐작한 것에 불과했다.계연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든, 심서준의 총애를 잃은 것이든, 어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