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호가 떠난 뒤 간호사는 박민정의 얼굴에 약을 발라주었다. 이때 유남준도 돌아와 박민정을 데리고 퇴원했다.차에 올라 탄 후 유남준이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 시켜서 그 남자에 대해 조사하라고 했어. 그 남자가 진주에 있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있을 거야.”“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박민정도 정민기에게 사람을 보내 윤소현과 최현아를 잘 관찰해 보라고 했다.두원 별장에 돌아온 후.박윤우는 바로 박민정의 품에 안겼다.“엄마, 형 괜찮아?”인터넷 기사가 폭발스러운 주목을 받았다.박민정은 서둘러 박윤우를 안심시켰다.“형은 괜찮아. 이미 하랑 이모랑 인우 삼촌이랑 같이 집으로 돌아갔어.”그제야 박윤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박윤우는 박민정의 얼굴에 있는 거즈를 보고 의아해했다.“엄마 얼굴은 왜 이래?”박민정은 박윤우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했다.“실수로 긁혔어.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며칠 지나면 나을 거라고 하셨어.”세심한 박윤우는 당연히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박민정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엄마, 앞으로 꼭 조심해야 해.”그러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박윤우는 또 유남준에게 말했다.“아저씨, 앞으로 밤에 밖에 나가지 마요. 아니면 우리가 찾아다녀야 하잖아요.”“그래.”유남준도 박윤우에게 인내심이 생겼다.하지만 한 가지가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박예찬에게 사고가 났을 때 박민정이 “우리의 아이”라고 한 말이다.박예찬이 구조된 후 박민정은 더 이상 이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박예찬과 박윤우가 자신의 아이란 말인가?하지만 서다희에게 친자 확인 검사를 부탁했을 때 분명 그들 사이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했었다.그렇다면 그때 친자 확인 검사 결과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유남준은 결국 서다희에게 다시 한번 친자 확인 검사를 부탁하기로 결심했다....저녁에 박윤우가 잠든 후 집에 유남준과 박민정 두 사람만 남았다.“예찬이 구
원래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유남준이 침대에 눕자 박민정은 더욱 정신이 들었다.박민정은 몸을 침대 가장 자리로 움직였다.그런데 갑자기 손이 잡히자 곧바로 자는 척하면서 눈을 감았다.유남준은 박민정의 작은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만졌다.박민정은 눈을 꼭 감은 채 한참 지나서야 유남준이 앞을 못 본 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 눈을 떠도 유남준은 자신이 정말 잠든 것인지 모를 것이다.그래서 박민정은 눈을 천천히 떴다.그러자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유남준은 어느새 일어나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유남준의 박민정의 이마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유남준은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키스했다.박민정의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었다.유남준은 다른 움직임 없이 다시 누워서 조심스럽게 박민정을 가까이 끌어당겼다.그녀의 얼굴 상처를 건드릴까 봐 걱정돼서 그런지 예전처럼 꽉 끌어안지는 않았다.박민정은 그동안 유남준이 기억을 잃은 덕분에 그가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한참 지나 박민정은 드디어 잠들었다. 하지만 낮에 겪었던 일 때문이지 깊게 편하게 자지는 못하고 얼마 지난지 않아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예찬아...”유남준도 깊이 잠들지 않은 상태라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괜찮아. 예찬이 무사히 돌아왔어.”그제야 박민정은 안심하면서 다시 잠들었다.밤새 깊이 잠들지 못한 박민정은 몇 번이나 유남준의 손을 꽉 잡았다.“남준 씨.”“응. 나 여기 있어.”유남준이 대답했다.박민정은 이 장면이 유난히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이지원의 남자 친구에게 공격당했을 때가 떠올랐다.그때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며 자신을 안심시켰었다.박민정은 유남준의 손을 잡았을 때 손등에 흉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의아해했다.“손등에 왜 흉터가 있어요?”전에 유남준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박예찬 납치 사건이 인기 검색어에 오른 후로 박예찬은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많은 네티즌들이 이 아이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는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사람들은 의아해했다.[아이가 너무 차분해서 마음이 가네요. 이름이 뭐예요? 이 아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저도요. 아이의 외모가 연예인 같아요.][연예인들보다 더 잘생겼네요. 이제 크면 엄청나겠는데요.]...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 덕분에 박예찬의 이름은 또 한번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조하랑은 일할 때 박예찬에 관한 기사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내가 예찬이 얼굴 먹힐 거라고 했지.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관심 가질 줄은 몰랐네. 슈퍼 스타 에리가 귀국한 기사보다 반응이 더 뜨거워?! 대박!”조하랑은 점심에 집으로 돌아가 박예찬에게 보여주었다.그러나 박예찬은 뉴스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하랑 이모, 이런 거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차라리 어떻게 해야 더 높은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봐요.”박예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물가 높은 진주시에서 고작 그 정도 월급으로 어떻게 살아가요?”말을 마친 박예찬은 조하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덧붙였다.“지금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정말 김씨 가문 돈만 쓸 거예요?”조하랑은 어린아이에게 혼이 난 기분이 들었다.박예찬은 전혀 어제 납치당했던 아이 같지 않고 어린 악마 같았다.보통 아이들은 어제의 상황을 겪고 아직까지 겁에 떨며 울었을 것이다.그런데 오히려 어젯밤에 악몽을 꾼 사람은 조하랑이었고 잠에 서 깨 박예찬의 방으로 뛰어갔을 때 박예찬이 조하랑을 안심시켰다.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지,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는지 하면서 말이다.“나도 열심히 일하고 싶어. 그런데 공무원이 어떻게 큰 돈을 벌어. 내가 네 엄마처럼 작곡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조하랑은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주목받는 사람이 아닌 그럭저럭 살기만을 바랐다.하지만 박예찬은 조하랑처럼 의미
다음 날, 공항에서.에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정아, 나 왔어. 두 아이 데리고 나와서 나를 위해 환영식 해 주지 않을래?”박민정은 어이가 없었다. 만약 두 아이를 데리고 에리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가면 에리는 악플을 받을 것이다.게다가 에리에게는 많은 여자 팬이 있는데 자신도 그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너 오면 다시 보자.”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이 새로 설립한 IM 그룹에서.서다희는 에리에 관한 자료를 유남준에게 건넸다.“대표님, 에리라는 분은 혼혈입니다. 국내와 해외에서 엄청난 팬덤을 보유하고 있더라고요. 남자 여자 팬 비례가 균등해서 저희 회사 제품 모델로 적합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에리 씨를 있으면 진주시의 많은 사람들이 저희 IM 그룹을 알게 될 겁니다.”유남준은 서다희의 말에 동의하며 그더러 에리를 설득하여 계약을 맺을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다.그리고 한참 있다가 유남준이 서다희에게 물었다.“그때 친자 확인 검사할 때 확실히 다른 사람이 개입한 적 없지?”서다희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유일하게 조작 가능한 건 윤우의 칫솔밖에 없습니다.”“그럼 다른 사람이 칫솔을 바꿨을 가능성은 없어?”“윤우가 직접 바꾸지 않는 한 도우미들은 과거가 깨끗한 사람들이라 그런 짓은 안 할 겁니다.”이 한 마디에 서다희조차도 의심이 생겼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절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제가 세 개나 준비해서 각기 다른 병원에 검사를 맡겼거든요.”그제야 유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서다희는 유남준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부하 직원을 시켜 에리를 회사 모델로 요청하게 했다.원래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치 못 하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서 비서님, 에리는 귀국하자마자 저희 회사뿐만 아니라 많은 회사의 러브콜을 받았는데 다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주의라 어느 회사와도 계약을 체결하고 싶지 않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줘
에리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었다. 그때 박민정의 응원과 곡이 없었다면 에리는 아직도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지 못했을 것이다.매니저가 나간 후 에리는 서둘러 아버지에게 한수민 암 진단서 위조 사건에 대해 물었다.에리의 아버지는 이미 사람을 통해 한수민의 진단서가 실제로 본인의 진단서가 아니란 것을 알아냈다고 했다.“잘됐네요. 그 증거들을 저에게 보내주세요.”“너한테 줄 수는 있는데, 넌 언제 며느리를 데려올 거냐?”에리의 아버지가 물었다.그러자 에리는 갑자기 풀이 죽었다.어머니는 요리를 식탁으로 옮기며 웃었다.“인터넷에 우리 에리에게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던데 사실은 한 명도 집에 못 데려올 줄은 누가 알았을까.”아버지는 한숨을 내쉬었다.“엄마, 연예인은 연애 안 해요.”에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에리의 아버지는 그에게 증거를 보내주었다.그 날 밤, 에리는 바로 그 증거들을 박민정에게 보냈고 박민정은 연신 고맙다고 했다.“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밥 사.”“좋아. 내일 살게. 시간 괜찮아?”“당연히 괜찮지.”박민정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는 유남준은 그녀가 누구와 통화했길래 이렇게 기뻐하는지 궁금했다.“하랑 씨랑 통화했어?”유남준이 물었다.“아니요. 다른 친구예요.”박민정은 유남준의 물음에 대답하고 박윤우에게 당부했다.“윤우야, 내일 엄마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갈 거야. 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알겠지?”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박민정은 변호사에게 증거를 보낸 후 일찍 잠들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잠을 자지 못 했다.조금 전에 박민정과 통화한 사람의 목소리가 여자 같지는 않아서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사했다가 박민정이 알면 화를 낼 것 같았다.이튿 날 아침 일찍 박민정은 집을 나섰고 정민기가 차를 몰고 그녀를 데려다 주었다.유남준은 찝찝한 마음으로 회사에
박민정은 에리에게 자신의 근황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다른 것들은 말하지 않았다.식사 후 에리는 박민정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나 혼자 갈 수 있어. 네 팬이 보면 어떻게 하려고?”박민정은 바로 거절했다.박민정은 연예인의 친구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꽁꽁 싸매서 누구도 날 알아보지 못 할 거야.”에리는 박민정이 지금 어디서 지내느지 알고 싶었다.박민정은 몇 번이나 거절해도 에리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그럼 그렇게 해.”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에리는 서둘러 박민정의 앞에 섰고 눈보라가 그에게만 닥쳤다.에리는 웃으며 말했다.“진주에 이렇게 큰 눈이 내릴 줄은 몰랐네. 나 돌아오기 전에 바닷가에 갔었는데 거긴 엄청 따뜻했어.”에리는 아주 밝은 사람이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가끔씩 대답하곤 했다.두 사람은 나란히 차에 탔다. 하지만 박민정은 내리는 눈 속에 검은색 마이바흐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정민기가 차를 몰면서 그들 뒤를 따랐고 마이바흐에 앉아 있는 유남준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저 남자 어떻게 생겼어?”“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젊은 사람 같습니다.”서다희가 말했다.유남준의 기분이 매우 안 좋다고 생각한 서다희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잘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선글라스랑 마스크를 썼을까요.”그러자 유남준의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아주 살짝 말이다.“민정이에게 국내에 연지석 말고 다른 남자 없었다며?”서다희는 다소 억울했다.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게 조사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유남준의 뜻은 박민정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남자를 다 조사해야 한다는 말인가?‘어휴.’서다희는 유남준 몰래 한숨을 쉬었다.“대표님, 사실 여자들에게 남사친이 한 두 명 있는 건 이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 여자 친구한테도 남자 절친이 있거든요.”하지만 그 남자 절친을 언급하자 서다희는 이를
“우리 사이는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야.”박민정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에리도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다.“괜찮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응.”“그럼 나 먼저 간다. 다음엔 예찬이랑 윤우도 꼭 데려와.”박예찬과 박윤우도 에리를 참 좋아했고 에리도 두 아이를 좋아했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에리가 가고 정민기가 차에서 내려 박민정을 향해 걸어오더니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내가 얻은 정보가 맞다면 예찬이를 납치한 사람 윤소현과 관련될 가능성이 많아요.”“윤소현이요?”박민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윤소현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윤소현은 박민정과 혈연관계가 있었다. 윤소현이 박민정을 미워한다면 아마도 그녀가 유남우와 몇 번 만난 것밖에 없을 것이다.“확실해요?”박민정이 되물었다.“내가 조사한 바로는 예찬이가 그린 그림에 정호철이라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 정수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이미 해외로 도주한 상태고요.”정민기가 대답했다.정수미.박민정은 전에 정수미가 그녀를 협박했던 게 떠올랐다.“알았어요. 일단 이 일은 비밀로 해요.”정씨 집안은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아이를 데려간 후로 김씨 가문에서 밤새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정수미는 박민정이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수미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도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네.”정민기도 이를 꿰뚫고 있었다.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모든 걸 드러내기보다는 일단 상대가 모르게 숨기는 게 낫다....유씨 가문과 김씨 가문도 이내 정씨 가문이 한 짓임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은 혼인으로 맺어진 사이기에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아이만 괜찮으면 정씨 집안을 문제 삼기가 애매했다.유명훈도 유남준에게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정수미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절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다.유남준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박윤우는 잠깐 고민하더니 유남준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간단해요. 아저씨가 새로 세운 회사로 데려가 줘요.”유남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회사 가서 뭐하게?”“그냥요. 아저씨 회사가 얼마나 큰지 보게.”박윤우가 관찰한 데 의하면 박민정이 유남준을 받아줄 가능성이 커 보였다. 만약 유남준과 같이 살아야 한다면 먼저 유남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그저 그렇다면 그는 박민정이 유남준을 만나는 걸 반대할 생각이었다.“그래, 내일 데려가 줄게. 말해봐.”유남준은 박윤우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박윤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오늘 엄마랑 만난 사람 에리 삼촌이에요. 엄마가 외국에서 구제해 준 가수였는데 지금은 엄청 핫한 글로벌 스타가 됐죠.”글로벌 스타? 에리?유남준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낮에 서다희가 알려주긴 했지만 연예인 이름이라 따로 기억하지는 않았다.“아저씨, 에리 삼촌 진짜 잘생겼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혼혈이래요. 혼혈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외국인과 내국인이 같이 아이를 낳으면 되게 예쁜 애가 나온다고 티브이에서 그랬어요.”유남준이 이를 듣더니 코웃음 쳤다.“티브이에서 하는 말 다 믿으면 안 돼. 노새가 뭔지 알아?”박윤우는 의문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동물 아니에요?”“노새가 바로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동물이야. 당나귀보다 크고 말보다는 착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그게 뭔데요?”박윤우가 궁금해했다.“아기 노새를 낳지 못한다는 거지.”박윤우는 똘똘한 편이었기에 유남준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에리는 예쁜 아이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박윤우는 유남준이 이런 독설을 하고도 벌받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다.유남준이 다시 걸음을 옮기다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에리랑 나랑 누가 더 잘생겼어?”박윤우가 한참 멍해 있더니 끝없이 쫑알거리기 시작했다.“아저씨랑 에리 삼촌은 다 잘생겼는데 잘생긴 포인트가 달라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