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디저트?’유남준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내가 민정이한테 꽃이랑 디저트를 보냈었다고?’유남준에게 박민정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추경은은 지금 이를 악물고 있다.여기저기 한눈을 팔고 다니는 여자는 유남준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면서 말이다.“서 비서가 보낸 거야. 알고 싶으면 서 비서한테 물어봐.”이상하기는 했지만 유남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순간 추경은은 당황하기 그지없었다.당연히 의심부터 하면서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박민정을 감싸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추경은은 화장실에서 연지석과 박민정의 통화 내용을 똑똑히 들었었다.연지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는 것까지.“남준 오빠, 서 비서님이 보낸 거 맞아? 확실해?”자기 시나리오와 다르게 흘러가고 있자, 추경은은 달갑지 않아 했다.그 말에 유남준은 마침내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서 비서가 아니면 네가 보낸 거야?”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반박에 추경은은 말 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박민정 역시 살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대놓고 자기를 도와주는 유남준의 말과 행동에 말이다.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고 난 뒤.지금 침실에는 유남준과 박민정 둘만 있다.“남준 씨, 그 꽃이랑 디저트 말이에요... 지석이가 보낸 거예요.”박민정이 먼저 자기한테 설명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유남준이다.“오는 길에 나한테 준 그 케이크도 걔가 보낸 거야?”“아니에요! 그건 회사 근처에 있는 디저트가게에서 내가 직접 산 거예요.”이성 친구한테서 받은 물건으로 자기 남편에게 잘 보일 만큼 어리석은 박민정이 아니다.하물며 연지석과 유남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박민정의 설명을 듣고 난 유남준은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듯했다.“근데 왜 너한테 꽃이랑 디저트를 보낸 거야?”“너무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아서...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연락하고 싶었다고 해요.”박민정은 연지석이 해준 말을 그대로 유남준에게 알려주
“오늘 박 비서님 덕분에 호강하게 생겼어요.”“5성급 호텔 쉐프가 해주는 음식은 또 처음이잖아요. 음식도 미리 고르게 해주시고우리 박 비서님 참 세심도 하셔.”“한두 푼이 아닐 것 같은데, 미안해서 어떡해요.”화장실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내내 박민정은 이와 같은 말만 들었다.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괜찮아요’라고 인사치레만 한 박민정이다.하지만 대답하면 할수록 속으로 의문이 부풀어갔다.‘내가? 밥을? 그것도 5성급 호텔 쉐프?’‘지석이가 보냈나?’의문을 가득 품은 채 박민정은 마침내 사무실로 돌아왔다.비서 사무실 전체 직원은 역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박 비서님, 고마워요.”추경은도 마지못한 채 괴상 야릇하게 덧붙였다.“새언니, 남준 오빠가 아주 통 크게 질렀네요. 회사 전체 직원들 배불리 먹을 수 있겠어요.”“무려 5성급 호텔 쉐프가 직접 해주는 음식이라니.”‘남준 씨?’‘회사 전체 직원?’‘지석이가 아니라 남준 씨가 보낸 거란 말이야?’비로소 의문이 풀린 박민정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다름이 아니라 호산 그룹 전체 직원이라고 하면 적어도 5천 명은 넘기 때문이다.“직원 복지 차원에서 박 비서님이 통 크게 쏘신 거 아니겠어요? 결국 따지고 보면 호산 그룹 사모님이 박 비서님이잖아요.”박민정 뒷담화를 했었던 청아 역시 아부를 뜨느라 정신이 없었다.“맞아요. 박 비서님 남편분이 호산 그룹 전 대표님이잖아요.”같은 비서라고 하더라도 박민정은 부잣집 며느리로 자신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 직원들이다.하지만 박민정은 아직도 현재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얼렁뚱땅 대답만 하고 말았다.이윽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준 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박민정이 물었다.실은 연지석이 박민정 회사 동료들까지 챙겨줬다는 말을 듣고서 유남준이 야심 차게 준비한 일이었다.연지석이 디저트를 보냈다면 자기는 5성급 호텔 쉐프장을 보낸다고.“별거 아니야. 그냥 회사 동
“네? 거절하라고요?”사무실 직원들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왜 거절해야 하는 거죠?”공짜로 고급스러운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자기 입으로 직접 거절하라고 하니 내심 언짢기도 했다.하지만 최현아 비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없어서 완곡하게 에둘러 말했다.“저희 마케팅 5팀이 좀 바쁘잖아요. 다들 열심히 일하시면 앞으로 그 돈으로 얼마든지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예요.”직원들은 그 말을 듣고서 마침내 풀이 죽고 말았다.마케팅 5팀은 담당자가 최현아로 바뀌고 난 뒤로 실적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줘야 할 인셉티브까지 주려고 하지 않았다.호산 그룹의 오래된 직원으로 일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책임져야 할 식솔이 없었더라면 다들 그만두고 갔을 것이다.“지금 인셉티브로는 호텔 요리가 아니라 평범한 한식당으로 가서 밥 한 끼 먹기도 부담스러워요.”마음 편히 외식 한 번 하기 어려운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는 마케팅 5팀이다.비서 역시 같은 직원으로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나 최현아가 결정한 일이니 번복할 자격도 없었다.자기 속도 말이 아닌데 직원들의 푸념을 그대로 듣고 소화해야만 했다.한편 최현아는 자기 이미지와 신념이 점점 바닥을 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케팅 총담당자 자리에 오르려고 머리를 짜고 있다.지금은 단지 마케팅 5팀의 작은 담당자로 실적도 가장 낮은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이게 다 그 노인네 때문이야! 남우는 본사 대표 자리에 앉혀 놓고 우리 성혁을 지사로 보낸 바람에 내가 고작 이런 자리에 있는 거라고!”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최현아는 유난히 화가 났다.점심시간이 되고 다들 오전에 주문한 대로 음식을 받게 되었다.호산 그룹 근처에 있는 호텔 전체가 힘을 합쳐 5천 명의 점심을 준비한 것이었다.마케팅 5팀만 제외하고 다른 부서에서는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점심을 즐기게 되었다.그리고 최현아의 팀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마케팅 5팀 직원들은 배달 음식을 시켜서 먹을 수밖에 없었다.화가
유남우 사무실에서 나온 홍주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즐기고 있는 동료들을 보게 되었다.잠깐 흠칫거리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도착한 배달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이때 배달 음식을 먹고 있는 홍주영을 보고서 박민정은 이상하기만 했다.‘어찌 된 상황이지?’“혹시 호텔 측에서 깜빡하고 홍 비서님께 주문을 받지 않았나요?”그 말에 동료들이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기다리다시피 비아냥거렸다.“그럴 리가요. 아무리 잘해준다고 한들 절대 민정 씨 마음 몰라줄 거예요.”“워낙 혼자에 익숙해진 사람이라 늘 저런 식이에요. 저렇게 해야만 대표님 눈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굳이 홍 비서님 때문에 민정 씨 기분까지 망치지 말고요.”그 말을 듣고서 박민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점심을 먹었다.산모인 박민정을 위해서 야심 차게 준비한 점심을 말이야.박민정은 갈수록 홍주영에 대한 호기심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홍주영은 결코 다른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하물며 어제 디저트를 건네주었을 때도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은 홍주영이다.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직접 주문한 배달 음식에만 집중했다.다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때 누군가가 홍주영 옆으로 다가왔다.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박민정이었다.홍주영은 곧바로 차갑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그러자 호텔에서 여부로 보내온 음식을 홍주영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는 박민정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배달 음식 자주 드시면 안 좋아요. 저 혼자서 먹기에는 좀 과분한 양이라 괜찮으시면 이거 드세요.”실은 속으로 거절을 당하게 될까 봐 살짝 걱정하면서 뱉은 말이기도 했다.하지만 호산 그룹의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본다면 홍주영은 깊이 사귈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동서가 직접 받아온 계약서야. 어쩜 이틀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런 사달이 나게 할 수 있어? 천인 그룹에서 계약을 강제로 해제하겠다고 하고 있잖아!”최현아가 말했다.박민정은 상대조차 하지 않고 서류에 적힌 내용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뭐? 위약금을 3배나 낸다고? 계약 해제하려고?’“천 대표님께서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한다고요?”“그쪽에서 무슨 사정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도 몰라.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계약 해제라는 사실이야.”“어디 한 번 말해 봐. 재고 상품은 어떻게 할 거야? 유통 기한이 있는 식품들이야.”최현아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식품 판매이다.그리고 천인 그룹은 진주시 전체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구매상이다.천인 그룹에서 계약을 해제한다면 호산 그룹 재고 상품은 그대로 ‘쓰레기’가 될 때까지 두고만 볼 수 없게 된다.비록 계약 해제 금으로 회사에서 막대한 손실을 받지 않을 수 있지만 천인 그룹이라는 비즈니스 파트너를 잃게 된 셈이니 앞으로 손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혹시 동서가 천수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야? 우리 회사 욕하기라도 했어?”최현아가 본격적으로 책문하기 시작했다.소리가 결코 작지 않아서 사무실에 있던 다른 직원들의 시선도 한 방에 끌어당겼다.막장 드라마나 다름없는 지금 이 상황이 지루한 직장 생활을 보내고 있던 직원에게는 단비 같은 존재였다.따지고 보면 최현아와 박민정은 친척 사이인데, 한 명은 대표 소리를 듣고 다른 한 명은 비서 소리를 듣고 있으니 궁금하기 그지없었다.박민정은 최현아의 말을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최 대표님 말씀대로 제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하면 천 대표님께서 왜 계약서에 사인을 하셨겠습니까? 돈이 남아돌아서 계약 해제 금을 3배나 지급하면서까지 사인했다가 해제하려고 했겠습니까?”‘대체 어떻게 마케팅팀장이 된 거지?’최현아 같은 여자가 어떻게 한 팀을 이끌 수 있고 그 자리까지 올랐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말을 바로 직설적으로 내뱉는 사람이
박민정의 말에 회의실은 순간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그 또한 찰나 바로 회의실이 떠나갈 정도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IM 그룹? 또 IM 그룹에서 한 짓이란 말입니까?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입니까!”“돈밖에 없는 회사 아닙니까! 어쩜 이렇게 가는 곳마다 막고 있을 수 있습니까!”“IM 그룹이 진주시에 있는 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해외 회사인 것 같습니다!”고위직 직원들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한두 마디씩 주고받았다.지금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은 최현아이다.다른 회사에서 가로채 갔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갑지 않아 하면서 박민정을 의심했다.“통화 내용만 들어봐도 둘이 엄청 친한 것 같은데 혹시 박 비서님이 IM 그룹 소개해 준 건 아니죠?”어떻게든 박민정에게 골탕을 먹이려고 애간장을 쓰고 있는 최현아이다.“최 대표님, 그 의문에 대해서는 앞서 답변드린 것 같은데요. 혹시 요즘 잠을 설치시나요? 기억력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그래요.”“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만약 제가 천 대표님께 IM 그룹을 소개해 드렸다면 그쪽에서 무슨 이유로 저희 회사와 계약서를 체결하겠어요. 아니에요?”“계약 체결하고 나서 알려준 거 아니에요?”최현아는 어떻게든 반박만 하려고 앞뒤도 가리지 않았다.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는 최현아를 상대로 박민정은 화를 내지도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제가 그렇게 했다면 천 대표님께서 저를 미워하지 않겠어요? 저희 회사와 체결하게 하고서 IM 그룹과 다시 계약 관계를 맺게 한다고요? 그 엄청난 계약금까지 지급해 가면서요?”“하물며 그렇게 했다고 한들 저한테 이로운 건 뭐죠? 저 호산 그룹의 직원이기 전에 유씨 가문의 며느리입니다. IM 그룹 대표가 저였으면 뭐 이유가 될 수 있겠죠. 근데 그건 아니잖아요.”IM 그룹의 대표는 박민정이 아니지만 유남준이므로 전혀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다만 그 사실을 박민정 본인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조리 정연
IM 그룹이 진주시에 나타난 뒤로 거의 시장 전체를 독점하고 있다.IM 그룹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어서 호산 그룹은 손해를 본다고 한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 된 것이다.고위직 직원들은 하나같이 IM 그룹의 기세를 꺾을 생각만 하고 그 누구도 감히 IM 그룹의 고객을 빼앗아 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러한 생각을 제기한 선두자가 바로 박민정이라고 할 수 있다.박민정의 말을 듣고서 유남우는 흐뭇하기만 했다.당하기만 하는 상황에 이미 질 린 대로 질린 상황이었고 먼저 나서서 싸울 때도 되긴 했다.입이 떡 벌어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박민정은 계속 말했다.“그 어느 회사든 능력이 제한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바입니다. IM 그룹은 천인 그룹과 계약서를 체결함과 동시에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 틈을 타서 IM 그룹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그래도 되는 겁니까?”어느 한 고위직 직원이 의문을 드러냈다.호산 그룹의 오래된 직원 역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호산 그룹은 큰 도련님께서 책임졌을 때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별 탈 없이 회사를 계속 운영하려면 안정적으로 시장에 스며들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다른 회사의 고객을 빼앗아 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IM 그룹에서 알고 난 뒤 보복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맞습니다. IM 그룹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만약 큰 도련님께서 시력이 회복되신다면 모를까... 큰 도련님이 나서게 되면 IM 그룹과 맞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지금 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큰 도련님’은 바로 유남준이다.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남준에 대한 믿음이 이 정도로 클 줄이라고 박민정은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호산 그룹이 유남준 손으로 넘어갔을 때 지금의 규모도 아니었고 매일 예상치 못하는 위기에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박민정은 다소 압박감이 들었다.“유 대표님,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남우 씨’가 아니라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박민정의 모습에 유남우는 감정이 복잡해졌다.“민정아, 너도 같은 생각이야? 내가 형보다 못한 거 같아?”순간 박민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말이다.박민정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유남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타일렀다.“회의실에서 어떤 분위기이었는지 봤을 거 아니야. 말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해. 네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않을게. 그냥 오래된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했으면 좋겠어.”박민정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운을 떼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서로 잘난 점이 다른 것 같아요. 대표님 같은 경우는 성격이 워낙 부드럽잖아요.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남준 씨는 성격이 불같아요. 그리고 대표님은 남에게 상처도 쉽게 주지 않고 위로도 잘 해주시는 분이지만 남준 씨는 아니에요.”“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대표님보다 남준 씨가 호산 그룹에 더 오래 있었고 남준 씨가 호산 그룹을 책임졌을 때 거의 밑바닥에서부터 책임진 거였잖아요. 회사 규모든 뭐든 거의 업계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의 호산 그룹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말이에요. 연세가 좀 드신 분들은 돈을 버는 데만 익숙해졌으니 당연히 모험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으시려고 할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숨기기 위해서 아마 남준 씨를 걸고넘어진 것 같아요.” 박민정은 객관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유남우는 그 모든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민정아, 너 혹시 기억나? 너 거짓말할 때면 항상 고개 푹 숙이고 나랑 눈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었어.”박민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거짓말한 거 아니에요. 사실 그대로 말한 것뿐이에요.”유남준의 잘만 점에 대해서 말하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