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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은 황궁에 계십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3:14:48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도 지나칠 만큼 희었다. 천상과 닮았으나 천상은 아닌 곳. 누군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작은 안식처였다.

라엘은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신비로운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을 감고 있어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 느껴지는 얼굴. 라엘이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이었다.

“세레나.”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라엘은 꽃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레나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손끝이 햇빛에 녹는 눈처럼 투명했다.

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레나는 잠들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

라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려는 순간, 꽃밭이 일그러졌다.

낯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신전의 정원이었다. 눈이 보이던 시절의 세레나가 하얀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그 앞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아델리아 로젠하르트.

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성녀님을 생각하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랍니다.’

상자 안에는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중앙에 박힌 보랏빛 보석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것처럼 영롱했다.

세레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왔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구호소를 세웠고, 흉년에는 누구보다 많은 식량을 내놓았다.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과 병든 이들을 위한 요양원도 운영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 불렀다.

세레나 역시 그녀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제가 직접 걸어 드려도 될까요?’

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차가운 보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던 순간, 아주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넘길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

그날 밤부터 세레나는 악몽을 꾸었다.

검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이름 없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 울부짖었다. 아침이 되면 몸 안의 신력이 조금씩 줄어 있었다. 신관들은 과도한 기도 탓이라 진단했고 아델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약을 보내왔다.

약을 먹을수록 눈앞이 흐려졌다.

빛이 번지고, 사람들의 얼굴이 지워졌다.

마침내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 날에도 세레나는 아델리아를 의심하지 못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성녀님.’

아델리아가 떨고 있는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제가 곁에 있잖아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때 아델리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검은 실이 목걸이 속으로 스며들었다. 보랏빛 보석이 세레나의 신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제야 세레나는 알았다.

자신을 병들게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러나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사람들은 눈먼 성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존경받는 공작부인이었고 세레나는 신력을 잃어 가는 실패한 성녀였다.

세레나가 마지막 힘으로 하늘을 향해 기도하던 모습이 보였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무릎을 꿇은 그녀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제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도 구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는 절망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니 부디…… 저 대신 저들을 구해 주세요.’

그 기도가 천상에 닿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사고를 치고 벌 받을 곳을 찾던 라엘이 그 목소리를 들었다.

기억이 끝나자 다시 하얀 꽃밭이 나타났다.

라엘은 잠든 세레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투명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바보 같기는.”

꾸짖는 말과 달리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부터 살려 달라고 했어야지.”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맞잡은 손끝에서 아주 희미한 온기가 전해졌다.

“조금만 더 자고 있어.”

라엘이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네 눈도, 힘도 전부 되찾아 줄게. 네가 구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사람들도 내가 구할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세레나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니까 그때는 네가 직접 깨어나.”

약속을 마친 순간,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엘.”

낮고 단정한 목소리.

하얀 꽃밭 위로 금빛 균열이 번졌다.

“눈을 떠.”

라엘은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처음 만났지만, 이상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깨끗한 비 냄새와 서늘한 금속 향. 그 아래 깊숙이 감춰진 따뜻한 신력까지.

카시안이었다.

라엘이 눈을 떴다.

정확히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는 여전히 짙은 어둠뿐이었다.

대신 다른 감각들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부드러운 침대와 매끄러운 이불. 은은하게 타는 장작 냄새. 낯선 방 안에 둘, 아니 셋의 인기척이 있었다. 문밖에도 여러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 바로 옆.

카시안이 앉아 있었다.

그가 몸을 기울이자 익숙한 향이 가까워졌다.

“카시안.”

“정신이 드나?”

“내가 얼마나 잤지?”

“두 시간 남짓.”

라엘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오래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카시안의 손이 곧장 어깨를 받쳤다. 다른 손은 허리 뒤로 들어와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단단한 팔이 닿은 부분으로 체온이 번졌다.

지하 제단에서 신력을 연결한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가슴 안쪽이 미세하게 울렸다. 서로 다른 두 심장이 보이지 않는 실에 엮인 것처럼.

라엘이 무심코 카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있군.”

“부축하고 있으니 당연하지.”

“그것 말고.”

라엘은 손을 들어 그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손끝이 단단한 셔츠 위에 닿았다.

카시안의 몸이 순간 굳었다.

“네 신력이 느껴져.”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라엘은 그 박동을 따라 손을 조금 옮겼다.

카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깨어나자마자 남자의 가슴부터 만지는 것이 천상의 인사법인가?”

“궁금하면 천상에 올라와 보든가.”

“초대라고 받아들여도 되나?”

“죄를 많이 지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라엘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방 한쪽에서 참지 못한 헛기침이 터졌다.

“흠, 흠.”

다미안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창가에 서 있었다. 옆에는 황궁 의원이 난처한 얼굴로 진료 도구를 들고 있었다.

“전하, 성녀님의 의식이 돌아왔으니 이제 손을 놓으셔도…….”

의원이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카시안은 라엘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라엘이 휘청이면 언제든 붙잡을 수 있는 거리에 그대로 있었다.

라엘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걱정했나 봐?”

“내 앞에서 쓰러진 사람이 죽으면 조사가 번거로워진다.”

“심장 뛰는 소리는 그보다 솔직한데.”

카시안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차가워졌다. 다미안이 창밖을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황궁 의원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진맥에만 집중했다.

“맥박은 안정되었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쇠약해져 있던 몸에 갑자기 강한 신력이 흐른 탓에 당분간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안정이라면 얼마나?”

“적어도 보름은 침상을 벗어나지 않으시는 편이…….”

“불가능해.”

라엘이 단호하게 잘랐다.

“내일이라도 로젠하르트 공작저에 가야 해.”

의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안 됩니다. 다시 신력을 무리하게 사용하셨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 몸이 생각보다 약하긴 하지.”

라엘이 팔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아스테리아가 오랫동안 신력을 빨아낸 탓이었다.

“그래도 보름은 너무 길어. 그사이에 아델리아가 증거를 전부 없앨 거야.”

“이미 없애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카시안이 말했다.

“지하 제단은 무너졌고 장부의 사본도 확보하지 못했다. 우리가 마리안을 구했다는 사실 역시 곧 알려질 거다.”

“마리안은?”

“살아 있다.”

다미안이 대답했다.

“황궁 별궁에서 보호 중입니다. 사제들이 새긴 죽음의 표식도 성녀님이 제단을 파괴하면서 상당 부분 약해졌습니다. 다만 의식이 돌아온 뒤부터 계속 성녀님을 찾고 있습니다.”

라엘은 곧장 이불을 걷었다.

“가자.”

“방금 의원의 말을 듣지 못했나?”

“눈은 안 보여도 귀는 잘 들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자 차가운 바닥이 발바닥에 닿았다. 라엘은 침대 기둥을 붙잡고 일어섰다.

한 걸음.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카시안의 팔이 허리를 낚아챘다. 라엘의 등이 그의 가슴에 부딪쳤다. 단단한 몸과 뜨거운 체온이 얇은 잠옷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자 걷는 일은 포기하는 게 좋겠군.”

라엘은 자신을 감싼 팔을 내려다보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 부축해.”

“명령인가?”

“부탁하면 들어줄 건가?”

“내용에 따라서는.”

“마리안에게 데려다줘.”

잠시 침묵하던 카시안이 몸을 돌렸다. 라엘은 그가 자신의 팔을 어깨에 걸쳐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한쪽 팔이 무릎 아래로, 다른 팔이 등 뒤로 들어왔다.

라엘은 본능적으로 카시안의 목을 감쌌다.

“또 안는 거야?”

“부축해 달라며.”

“보통은 옆에서 붙잡아 주는 걸 말하지 않나?”

“두 걸음 만에 쓰러지는 사람에게는 이쪽이 빠르다.”

“네가 날 안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고?”

카시안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멎었다.

“그 입은 쓰러져도 멀쩡하군.”

무뚝뚝한 대답과 달리 그녀를 받친 팔에는 힘이 들어갔다.

라엘은 그의 목에 팔을 건 채 코앞에 있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카시안의 시선이 자신에게 내려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는 손바닥 하나만큼의 거리도 없었다.

지하 제단에서 신력을 나눈 탓일까.

가까이 붙을수록 그의 감정이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경계심과 의심, 책임감. 그 아래에는 본인조차 인정하지 않을 낯선 동요가 있었다.

반면 라엘의 감정도 그에게 전해질지 몰랐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묘하게 심장이 간지러웠다.

라엘은 일부러 그의 목 가까이에 얼굴을 기울였다.

카시안의 호흡이 얕아졌다.

“역시 네 냄새는 기억하기 쉬워.”

“……무슨 뜻이지?”

“난 지금 눈이 보이지 않잖아. 냄새를 외워 두면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어.”

“다른 남자들의 냄새도 그런 식으로 외우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라엘은 웃음을 삼켰다.

“그게 신경 쓰여?”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이 빨라졌다.

다미안이 뒤따라오며 작게 중얼거렸다.

“병문안을 온 신관들이 저 모습을 보면 기절하겠군.”

“그들이 기절하면 네가 치워라.”

“전하께서 직접 안고 가시는 성녀님을 제가 어떻게 설명합니까?”

“호위 중이라고 해.”

“누가 봐도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카시안이 싸늘하게 돌아보자 다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마리안은 황태자궁 서쪽의 작은 응접실에 있었다.

침대 대신 소파에 기대 앉은 그녀는 따뜻한 담요를 몇 겹이나 둘렀는데도 계속 떨고 있었다. 손목과 목에는 죽음의 표식이 남긴 검은 핏줄이 희미하게 번져 있었다.

카시안이 라엘을 맞은편 소파에 내려놓았다.

라엘의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성녀님!”

달려오려던 마리안은 힘이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미안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라엘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살아 계셨군요. 정말…… 정말 살아 계셨어요.”

“덕분에.”

라엘이 손을 뻗어 마리안의 머리를 찾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닿았다.

“네가 버텨 줬으니까 나도 제단을 찾을 수 있었어.”

“저 때문에 성녀님이…….”

“울지 마. 네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까.”

마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려던 흐느낌이 결국 터져 나왔다.

라엘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천족답지 않게 다정한 손길이었다.

한동안 울던 마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구호원에서 일하게 된 건 석 달 전이었어요. 로젠하르트 공작부인께서 운영하는 곳이었죠. 처음에는 정말 좋은 곳인 줄 알았어요. 굶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갈 곳 없는 여자들에게 일자리도 줬으니까요.”

카시안과 다미안의 기척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매달 보름이 되면 몇 사람씩 사라졌어요. 신전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고 들었지만…… 한 번도 돌아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그들은 어떻게 희생자를 골랐지?”

카시안이 물었다.

“피를 검사했어요.”

“피?”

“신성력을 확인하는 검사라고 했어요.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찌르고 피를 은쟁반에 떨어뜨렸어요. 피가 맑게 빛나는 사람은 따로 명단에 적었고요.”

라엘의 표정이 굳었다.

“신성력 때문만은 아니야.”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아스테리아가 빼앗은 힘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야. 몸 안에 붙잡아 두려면 생명력이 강한 피가 필요하지. 젊고 건강하며 신성력에 대한 친화력이 높은 피일수록 효과가 좋았을 거야.”

마리안의 손이 떨렸다.

“장부에 적힌 ‘음용’이…….”

“마신다는 뜻이야.”

응접실이 얼어붙었다.

다미안이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가 수십 명을 죽여 가며 사교를 벌였는데, 신전에서는 아무도 몰랐단 말입니까?”

“몰랐던 자와 모른 척한 자를 구분해야겠지.”

카시안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리안. 지하의 제단으로 사람들을 옮긴 자들의 얼굴을 기억하나?”

“몇 명은요. 구호원 관리인과 신전의 하급 사제 둘, 그리고…….”

마리안이 망설였다.

“말해도 된다.”

“대신관님의 보좌 신관도 보았습니다.”

다미안의 표정이 굳었다.

대신관의 보좌라면 신전의 핵심부였다. 공작부인 혼자 벌인 범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장부는 어디에 있지?”

카시안이 다시 물었다.

“제단에 있던 것은 날짜와 용도만 적은 기록이에요. 진짜 장부는 따로 있습니다.”

“공작부인의 침실에 있는 거울 안.”

라엘이 말을 받았다.

마리안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네가 쓰러지기 전에 말했어.”

“아…….”

“정확히 어떤 거울이지?”

“침실 북쪽 벽을 전부 덮은 커다란 거울입니다. 장미 문양 가운데 가시 하나를 누르면 열려요. 그 안에 이름과 출신, 피의 양, 신성력 수치가 적힌 장부가 있어요. 귀족들의 이름도 보았습니다.”

“희생자 명단에 귀족이 있었다는 뜻인가?”

“아니요.”

마리안은 더욱 창백해졌다.

“공작부인께 사람을 넘긴 이들의 명단 같았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몰락한 가문의 빚을 갚아 주는 대가로 하인을 넘겨받고, 고아원을 후원하는 대가로 아이들을 골라 갔다면 범행은 신성제국 전역에 걸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카시안이 다미안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로젠하르트 가문의 모든 출입을 감시해. 허가 없이 빠져나가는 마차는 신분을 막론하고 세워라. 대신관의 보좌 신관도 은밀히 붙잡아.”

“예.”

“공작저 압수 수색은?”

다미안이 물었다.

“아직 안 된다. 장부가 거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우리뿐이라면, 아델리아가 방심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다.”

“그사이에 장부를 없애면?”

라엘의 물음에 카시안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없애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방법이 있어?”

“오늘 새벽,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은 신전에 있었다. 지하 제단이 무너진 직후 성녀의 안위를 걱정한다며 직접 나타났지.”

“뻔뻔하네.”

“성녀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흘릴 생각이다.”

라엘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나를 미끼로 쓰겠다는 거군.”

“싫다면 거절해도 된다.”

“싫을 리가.”

라엘의 입가에 느린 미소가 번졌다.

“나도 그 여자가 날 찾아오길 기다렸으니까.”

그 순간 라엘의 가슴 안쪽이 따끔하게 아렸다.

처음에는 세레나의 약한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통증이 느껴진 곳은 자신의 가슴이 아니었다.

신력으로 이어진 반대편.

카시안이었다.

라엘이 고개를 홱 돌렸다.

“카시안.”

“왜 그러지?”

“이리 와 봐.”

카시안이 가까이 다가왔다. 라엘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성녀님?”

다미안이 당황해 불렀지만 라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시안의 셔츠 단추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따뜻한 피부가 닿았다.

카시안의 손이 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지금 무엇을—”

“움직이지 마.”

장난기 없는 목소리였다.

라엘은 눈을 감고 감각을 집중했다. 그의 심장에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떨어진 곳. 피부 아래에 아주 작은 이물감이 박혀 있었다.

신력으로 감싼 손끝을 더 깊이 밀어 넣자 검은 가시의 형상이 떠올랐다.

라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언제부터 있었지?”

“무엇이 말인가?”

“네 심장 옆에 죽음의 표식이 박혀 있어.”

다미안이 검을 움켜쥐었다.

“전하께 표식이 있다고요?”

“마리안에게 새긴 것보다 훨씬 정교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아주 조금씩 심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카시안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생각한 뒤 차분하게 물었다.

“제거할 수 있나?”

“지금 당장 뽑으면 심장도 함께 찢어져.”

라엘의 손끝을 따라 검은 형상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목숨을 빼앗기 위한 저주가 아니었다. 제물의 피를 오랫동안 숙성시키고, 정해진 때가 오면 한꺼번에 수확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아스테리아는 네 피를 노리고 있어.”

“황족의 피라서?”

“그것만은 아니야. 넌 태어날 때부터 신성력을 몸 안에 봉인하고 있지?”

카시안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황족 중 일부는 신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하지만 황위 계승자가 지나치게 강한 신성력을 드러내면 신전의 권위와 충돌할 수 있었다. 카시안은 자신의 힘을 철저히 숨겨 온 듯했다.

“언제 표식이 새겨졌는지 기억해 봐.”

카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달 전, 건국 기념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훈장 수여식이 있었다.”

“훈장을 달아 준 사람이 누구였지?”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다미안이 낮게 욕설을 삼켰다.

아델리아는 수많은 귀족과 신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직접 황태자의 가슴에 훈장을 달았다. 누구도 그 짧은 접촉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엘은 카시안의 가슴에 손을 댄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표식은 이미 깊었다.

그녀가 지하에서 그와 신력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음 의식이 언제지?”

다미안이 물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 했으니 다음 보름까지는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

라엘이 고개를 저었다.

“이 표식은 평범한 의식에 쓰는 게 아니야. 아스테리아가 황족의 피까지 손에 넣으려 한다면 날짜도 특별해야 해.”

카시안이 말했다.

“닷새 뒤, 성휘제.”

신성제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가장 큰 축일.

태양이 지고 두 개의 달이 겹치는 밤, 황족과 신전은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린다. 제국 전역에서 가장 많은 신성력이 수도로 모이는 날이었다.

아스테리아에게는 그보다 완벽한 제삿날이 없었다.

“닷새.”

라엘이 중얼거렸다.

그 안에 장부를 손에 넣고, 신전에 숨은 협력자를 찾아내며, 카시안의 심장에 박힌 표식을 제거해야 했다.

시간이 너무 짧았다.

“우선 네 표식부터 묶어 둘게.”

라엘의 손에서 연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빛이 카시안의 피부 아래로 스며들자 검은 가시가 사납게 몸부림쳤다. 동시에 라엘의 심장도 꽉 조여 왔다. 둘의 신력이 이어진 탓에 저주의 통증까지 고스란히 넘어온 것이다.

카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해.”

“가만히 있어.”

“네 입술에서 또 피가 난다.”

그가 엄지로 라엘의 입가를 문질렀다. 손끝에 묻은 붉은 피를 확인한 순간, 카시안의 기척이 차갑게 굳었다.

“내게 걸린 저주 때문에 네가 다칠 필요는 없다.”

“필요가 없는지는 내가 정해.”

“라엘.”

“이 표식이 터지면 너는 죽어.”

그녀가 그의 옷깃을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가 잡아야 할 놈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 사람이 사라지면 곤란하거든.”

“그 이유뿐인가?”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떨어졌다.

라엘은 대답하려다 멈췄다.

아주 잠깐, 손바닥 아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 박동이 자신의 심장까지 번져 어느 쪽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카시안이 조금 더 몸을 숙였다.

그의 숨결이 라엘의 이마를 스쳤다.

“네가 거짓말할 때도 심장 소리는 꽤 솔직하군.”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라엘이 웃음을 터뜨리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바깥에 있던 시종이 다급히 말했다.

“로젠하르트 공작부인께서 대신관님의 사절단과 함께 도착하셨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마리안은 비명을 삼키며 담요를 움켜쥐었다. 다미안은 즉시 기사들에게 그녀를 숨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라엘은 카시안의 가슴에서 손을 거두었다.

“소문을 벌써 흘렸어?”

“아직.”

카시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성녀의 회복을 알리기도 전에 아델리아가 찾아온 것이다.

“공작부인은 성녀님께서 황궁에 계신다는 사실을 어디서 들었답니까?”

다미안이 물었다.

시종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에게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벽 기도 중 신탁을 받았다고…….”

“신탁?”

라엘이 비웃듯 되물었다.

죽음의 신을 섬기는 자가 빛의 신이 내린 신탁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성녀님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신관의 권한으로 성녀님을 신전으로 모셔 가야 한다고도…….”

아델리아의 목적은 분명했다.

세레나의 몸에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다시 신전으로 끌고 가려는 것이다.

라엘은 소파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카시안의 팔을 붙잡아 균형을 유지했다.

“들여보내.”

“괜찮겠나?”

“저쪽에서 제 발로 와 줬는데 문전박대할 수는 없지.”

라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듯 손으로 더듬었다. 잠옷 위에 얇은 실내복만 걸친 상태였다.

“대신 준비할 게 있어.”

“말해.”

“내가 아직 약하다는 걸 그 여자가 믿게 해야 해.”

라엘은 세레나의 기억 속 모습을 떠올렸다.

힘을 빼앗기고 눈까지 먼 채,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으려 조용히 고통을 삼키던 성녀. 아델리아는 그런 세레나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아델리아 앞에서는 내가 세레나인 척할 거야.”

“가능하겠나?”

“다른 건 몰라도 얌전한 척은 자신 있어.”

다미안이 의심스러운 침묵을 흘렸다.

라엘이 그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무슨 생각 했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천족은 사람의 생각도 읽습니까?”

“아니. 그런데 네 한숨은 잘 들려.”

카시안이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라엘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흰 성녀복으로 갈아입었다.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늘어뜨리고, 눈 위에는 얇은 흰 천을 둘렀다.

침대에 기대앉은 뒤 손을 가지런히 모으자 제법 세레나처럼 보였다.

다만 입을 열기 전까지만이었다.

“카시안, 내 표정은 어때?”

“지나치게 사악해 보인다.”

“눈까지 가렸는데?”

“입꼬리가 올라가 있군.”

라엘은 손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이제?”

“무언가를 죽일 생각을 참고 있는 사람 같다.”

“정확하네.”

“조금 더 불쌍한 표정을 지어 봐.”

“천족에게 연기 지도까지 하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영광이군.”

카시안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공식적으로는 보호를 위해 성녀 곁을 지키는 황태자였다. 실제로는 아델리아가 손을 쓰는 순간 목을 겨눌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다미안은 마리안을 비밀 통로로 이동시킨 뒤 문 옆에 섰다.

준비가 끝나자 카시안이 명령했다.

“들라 해.”

문이 열렸다.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정돈된 박자로 들어왔다. 신관들의 긴 예복이 바닥에 스치는 소리, 기사들의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독 선명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지하 복도에서 마리안을 뒤쫓던 바로 그 소리였다.

아델리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미 향이 먼저 퍼졌다.

향수 아래에는 일반인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비릿한 냄새가 감춰져 있었다. 씻어 내고, 향으로 덮고, 성유까지 발랐지만 라엘의 감각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피 냄새.

수십 명의 생명이 뒤엉켜 썩어 가는 냄새였다.

아델리아가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성녀님.”

애틋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라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세레나의 약하고 조용한 모습을 흉내 냈다.

“정신을 잃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기도했답니다. 이렇게 깨어나신 모습을 보니 빛의 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신 모양이에요.”

아델리아가 손을 뻗었다.

손끝이 라엘의 뺨에 닿기 직전, 카시안이 손목을 가로막았다.

“성녀는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한다.”

“저는 그저 상태를 확인하려 했을 뿐입니다, 전하.”

“황궁 의원이 이미 확인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흘렀다.

아델리아는 곧 물러섰다. 그러나 라엘은 흰 천 너머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을 느꼈다.

의심과 경계.

그리고 탐욕.

아델리아는 세레나의 몸 안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전에 없던 강한 영혼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알아차린 듯했다.

“성녀님.”

아델리아가 다시 부드럽게 불렀다.

“혹시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라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델리아…… 공작부인.”

일부러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아델리아의 경계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다행이에요. 기억은 온전하시군요.”

“공작부인께서 주신 목걸이가…….”

아델리아의 숨이 찰나 멎었다.

“목걸이가 왜요?”

라엘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가늘게 떨었다.

“갑자기 깨져 버렸어요.”

“그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와 달리 아델리아의 감정에서는 섬뜩한 분노가 느껴졌다. 세레나를 묶어 두던 저주가 파괴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제가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아니요.”

라엘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죠?”

“목걸이가 깨진 뒤부터…… 이상한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했거든요.”

아델리아의 기척이 굳었다.

“무엇이 느껴지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라엘은 불안한 듯 손을 뻗었다.

“공작부인, 제게 조금만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카시안이 말리려는 듯 움직였지만 라엘은 이불 아래로 손을 내려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아델리아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여기 있습니다, 성녀님.”

라엘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아델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살아 있는 인간의 체온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서늘한 손이었다.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 아델리아 안에 기생하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름답지만 끔찍하게 일그러진 얼굴.

한때 진짜 성녀였던 아스테리아가 아델리아의 육체 안에서 라엘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에게서 빼앗은 피와 세레나의 신력을 몸에 두른 채.

아스테리아가 속삭였다.

‘천족.’

라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만났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곳에서 검은 기운과 금빛 신력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아델리아의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그러나 대신관의 사절단과 카시안이 지켜보는 앞이라 손을 빼지도, 공격하지도 못했다.

라엘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세레나의 얼굴로 더없이 순진하게 물었다.

“공작부인.”

“……말씀하세요, 성녀님.”

“이상하네요.”

라엘이 코앞의 장미 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 아래 감춰진 피비린내를 한 방울도 놓치지 않으면서.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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