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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냄새가 나는 공작부인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3:21:40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

라엘의 물음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도, 신관들의 예복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라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

아델리아는 금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피 냄새라니요?”

“아주 많은 사람의 피가 엉겨 붙은 냄새예요.”

“성녀님께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새벽, 신전 서쪽 구호소 일부가 무너졌답니다. 저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으니 그때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예. 보시다시피 급히 오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했으니까요.”

장미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가 향이 밴 소매를 일부러 라엘 가까이 가져온 듯했다.

하지만 라엘이 맡은 피 냄새는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델리아의 살갗 아래, 본래 그 몸에 속하지 않은 영혼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마신 피와 빼앗은 생명력이 영혼에 눌어붙어 만들어 낸 악취였다.

라엘이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옷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몸속에서 나는 것 같은데.”

사절단에 섞여 있던 신관 하나가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다미안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

아델리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

죽음의 기운이었다.

가느다란 검은 실이 라엘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목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을 직접 노리고 들어오는 저주였다.

동시에 아델리아의 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웃었다.

연한 금발과 청명한 녹색 눈동자. 오래전 신전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옛 성녀 아스테리아.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천족.’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깊은 곳, 라엘의 영혼 안쪽에 목소리가 직접 울렸다.

‘어린것이 제법 영리하구나.’

라엘은 눈을 가린 천 아래로 눈꺼풀을 가늘게 좁혔다.

‘네가 생각보다 늙은 건 알겠어.’

아스테리아의 웃음이 멎었다.

‘그 몸에서 나가라.’

‘싫은데.’

‘그건 내 것이다.’

아델리아의 손가락이 더욱 차갑게 식었다.

‘그 아이의 신력도, 몸도, 남은 생명도 전부 내 것이야.’

라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세레나의 영혼이 잠든 하얀 꽃밭이 순간 흔들렸다. 그곳을 향해 검은 가시가 뻗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라엘은 즉시 자신의 신력으로 가시를 움켜쥐었다.

‘세레나는 네 것이 아니야.’

맞닿은 손 사이에서 검은 기운과 금빛 신력이 서로를 물어뜯었다. 방 안에 있던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는 두 여인이 손을 잡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아스테리아가 낮게 웃었다.

‘곧 네 것도 아니게 될 텐데.’

검은 실 하나가 방향을 틀었다.

라엘의 영혼을 핥듯 감고 올라오는 기운에는 살의보다 강한 탐욕이 실려 있었다. 아스테리아는 라엘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영혼을 살피고 있었다.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많은 신력을 담고 있는지. 빼앗을 가치가 있는지를 재고 있었다.

라엘은 그것을 알아차리고도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러 방어를 느슨하게 풀었다.

검은 실이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아스테리아가 라엘 안쪽을 들여다보는 동안, 라엘 역시 그 실의 반대편을 더듬었다.

영혼과 영혼을 잇는 길.

아스테리아가 자신의 본체를 숨겨 둔 곳으로 향하는 흔적이었다.

조금만 더.

라엘이 검은 실을 붙잡고 깊이 파고들려는 순간이었다.

“손을 놓아라.”

차가운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카시안이 아델리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손을 대는 순간 강한 신성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델리아의 몸 안에 있던 아스테리아가 사라지고, 맞잡은 손도 강제로 떨어졌다.

라엘의 손끝이 허공에 남았다.

거의 찾았는데.

아쉬움에 입술을 깨물던 라엘은 자신의 팔 안쪽에서 검은 기운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추적할 만큼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카시안은 아델리아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라엘을 살폈다.

“무슨 짓을 했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아델리아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 끝에는 서늘한 적의가 묻어 있었다.

“성녀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나.”

“저는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그 손으로 무엇을 했는지 묻고 있다.”

카시안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아델리아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성녀님을 해쳤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판단은 내가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신전의 심문관이라도 부르시겠습니까?”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함께 온 신관들이 동요했다. 그중 가장 높은 지위로 보이는 중년 신관이 앞으로 나섰다.

“황태자 전하. 로젠하르트 공작부인께서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오신 분입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이런 모욕을 주시는 것은 지나치십니다.”

“증거라.”

카시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대들은 아직 내가 무슨 혐의를 말하는지도 듣지 못했을 텐데.”

신관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다만…….”

“그런데도 증거가 없다는 사실부터 확신하는군.”

“그것은 공작부인의 인품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실종된 제국민도 되찾아 낼 수 있나?”

카시안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델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목을 빼냈다.

“전하께서 실종 사건을 수사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성녀님의 안위가 먼저입니다.”

그녀는 다시 라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성녀님께서는 신성력 고갈로 오랫동안 앓아 오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황궁으로 옮겨진 뒤 이렇게 불안정한 말씀까지 하시다니, 신전으로 돌아가 정식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성녀는 황궁에 머문다.”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구 마음대로 성녀를 데려가겠다는 거지?”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성녀는 신전의 소유물이 아니다.”

“소유물이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성녀님을 보호할 의무가 신전에 있다는 뜻이지요.”

“보호?”

카시안이 비웃었다.

“신전의 지하에서 사십여 명이 사라졌는데도 몰랐던 자들이 누구를 보호한다는 말인가.”

사절단 전체가 얼어붙었다.

아직 지하 제단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아델리아 역시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드러내지 않기 위해 쉽사리 반응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아델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십여 명이라니요?”

“놀라는 표정이 제법 자연스럽군.”

“처음 듣는 이야기이니 당연히 놀라지요.”

“정말 처음인가?”

카시안의 물음에 아델리아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듯했다.

“구호소와 신전에서 몇 사람이 사라졌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저 역시 그들을 찾도록 사람을 풀었어요. 특히 마리안이라는 아이는 제가 아끼던 직원이라…….”

다미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라엘도 웃음을 삼키며 아델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아델리아의 기척이 찰나 흔들렸다.

카시안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실종자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나?”

“구호소에서 사라진 아이의 이름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군. 구호소 책임자가 황궁에 제출한 공식 명단에는 마리안이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아델리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라엘은 손목에 남은 검은 기운이 거칠게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아스테리아가 동요하고 있었다.

“책임자가 실수한 모양이군요.”

“아니면 일부러 명단에서 지웠거나.”

카시안이 한 걸음 다가섰다.

“마리안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 아이를 찾으셨습니까?”

아델리아가 빠르게 되물었다.

다정한 공작부인의 가면 아래로 감추지 못한 조급함이 엿보였다.

라엘은 일부러 환하게 웃었다.

“그 아이는 안전해요.”

아델리아의 숨이 멎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전부 말해 주었고요.”

“무슨…… 일을 말인가요?”

“공작부인이 더 잘 알지 않나요?”

라엘이 이불 위에 놓인 손으로 자신의 목을 천천히 쓸었다.

“젊은 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아델리아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튀었다.

그것을 감지한 카시안이 곧바로 라엘 앞을 막았다. 다미안도 검을 반쯤 뽑았고, 황실 기사들이 사절단을 포위했다.

아델리아는 잠시 굳어 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성녀님께서 정말 많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제가 알던 분이라면 이런 끔찍한 말을 입에 담지도 못하셨을 텐데.”

그 말은 세레나를 걱정하는 척했지만, 실은 라엘을 향한 경고였다.

나는 네가 세레나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라엘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사람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성녀님께서는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라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공작부인은 제가 죽기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말하네요.”

아델리아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사절단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은 물러나겠습니다. 성녀님께서 안정을 찾으신 뒤 다시 뵙지요.”

“다시 올 필요 없어.”

라엘이 대꾸했다.

“다음에는 내가 찾아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델리아의 구두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문 앞에 이른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아, 전하.”

아델리아가 뒤돌아보며 덧붙였다.

“닷새 뒤 성휘제에는 황족 모두가 대성전에 참석해야 하지요.”

카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올해는 특별한 의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늦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황태자의 심장에 새겨진 죽음의 표식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델리아는 우아하게 인사를 마친 뒤 방을 나갔다. 신관들도 불편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라엘은 입가에 남아 있던 미소를 거두었다.

“다미안.”

카시안이 명령했다.

“사절단 전원을 미행해. 서로 헤어진 뒤 누구를 만나는지도 확인하고.”

“예.”

“오늘 황태자궁에 근무한 자들의 명단도 확보해. 아델리아가 성녀의 위치를 먼저 알았다는 건 이 안에 눈과 귀가 있다는 뜻이다.”

다미안이 기사들과 함께 나가자 방 안에는 라엘과 카시안만 남았다.

라엘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곧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손목에 남은 검은 실이 갑자기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팔을 타고 올라온 차가운 통증이 어깨와 가슴까지 번졌다.

라엘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카시안이 즉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라엘.”

“조금 따끔한 것뿐이야.”

“이게 조금인가?”

그가 라엘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얀 팔 안쪽에 검은 핏줄이 퍼지고 있었다. 아델리아와 손을 맞잡았던 손바닥에는 바늘로 찌른 것처럼 작은 상처가 생겨 있었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식었다.

“저주가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군.”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손을 놓지 않았나?”

“길을 찾으려면 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무슨 길이지?”

라엘은 대답하는 대신 손목에 감긴 검은 기운을 신력으로 끌어냈다. 가느다란 실이 피부 아래에서 움직일 때마다 입술 사이로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아스테리아는 아델리아의 몸을 완전히 차지한 게 아니야.”

카시안이 라엘의 등 뒤로 팔을 넣어 몸을 받쳤다.

“무슨 뜻이지?”

“영혼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었어. 가장 큰 조각은 아델리아 안에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본체를 붙잡아 두는 핵이 따로 있어.”

“그 핵이 진짜 장부가 있다는 거울 안에 있나?”

“아마도.”

라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스테리아는 이미 한 번 죽었어. 그런데도 영혼이 사라지지 않은 건 자신의 일부를 성물이나 육체에 묶어 두었기 때문이야. 아델리아의 몸만 죽이면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갈 수도 있어.”

“누구에게든?”

“조건에 맞는 그릇이라면.”

세레나처럼 신성력이 강한 육체.

혹은 라엘처럼 강한 영혼을 품은 존재.

카시안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라엘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델리아가 네 정체를 알았나?”

“천족이라는 건 알아차렸어.”

“그리고?”

“내 영혼을 탐내더라.”

라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카시안의 기척은 더욱 싸늘해졌다.

“다시는 그 여자와 직접 접촉하지 마.”

“그건 곤란해.”

“명령이다.”

“나한테?”

“황태자궁에서는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

라엘은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황태자는 천족까지 다스리나 봐?”

“적어도 내 품에서 쓰러지는 천족은 다스려야겠지.”

그제야 라엘은 자신이 어떤 자세로 안겨 있는지 깨달았다.

카시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고, 라엘은 거의 그의 무릎 위에 기대어 있었다. 한쪽 팔이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은 저주가 번진 팔을 받치고 있었다.

닿은 곳마다 뜨거웠다.

무엇보다 지하 제단에서 이어진 신력이 다시 반응하고 있었다. 카시안의 가슴에 박힌 표식과 라엘의 팔에 들어온 저주가 서로를 알아본 듯 동시에 맥박쳤다.

통증이 커질수록 두 사람의 신력도 세차게 얽혔다.

카시안의 호흡이 라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떻게 빼내야 하지?”

“내가 하면 돼.”

“혼자 하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방식 말고.”

“네가 도와주면 아플 텐데.”

“이미 아프다.”

카시안이 라엘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왼쪽 가슴에 눌렀다.

손바닥 아래로 빠른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그 곁에 박힌 죽음의 표식이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반응하며 날카로운 통증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니 끝내.”

짧은 명령이었다.

라엘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

“내가 멈추라고 하면 바로 손을 놓아.”

“네가 무리하지 않는다면.”

“지금 협상하는 거야?”

“조건을 확인하는 중이지.”

라엘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카시안의 신력을 자신의 몸 안으로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금빛과 은빛이 맞잡은 손을 중심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차갑고 깨끗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두 신력이 서로 섞이자 온도가 빠르게 올라갔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열기가 손목과 팔을 지나 가슴 안쪽까지 깊게 퍼졌다.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카시안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지하 제단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정신없이 힘을 섞었다. 지금은 달랐다. 서로의 신력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까지 너무 선명했다.

카시안의 고통이 라엘에게 전해졌다.

동시에 라엘의 감각도 그에게 흘러갔다.

몸을 감싼 팔의 단단함. 목덜미 가까이 닿는 숨결. 허리를 받친 손바닥에서 번지는 열기. 서로의 심장 소리까지 겹치자 방 안에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라엘의 호흡이 조금 흐트러졌다.

“카시안.”

“왜?”

대답과 함께 그의 입술이 라엘의 귓가 가까이 스쳤다. 실제로 닿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숨이 피부를 훑었다.

“너무 가까워.”

“네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잖아.”

“네가 올려놓았잖아.”

“내려놓으면 쓰러질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엘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처음으로 불편했다. 지금 카시안이 어떤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생각이 신력을 타고 전해진 것일까.

카시안이 갑자기 라엘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무엇을 보고 싶지?”

라엘의 숨이 멎었다.

“내 생각을 읽었어?”

“말이 아니라 느낌이 전해졌다.”

카시안의 엄지가 그녀의 턱선을 천천히 쓸었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신력이 연결된 상태라 감각은 몇 배로 짙어졌다.

라엘은 눈 위를 가린 흰 천 아래로 눈꺼풀을 감았다.

“네 얼굴.”

“아까도 만져 보지 않았나?”

“보는 것과 만지는 건 다르니까.”

“그렇다면 봐.”

카시안이 이마를 맞대었다.

그 순간 어둡기만 하던 라엘의 시야에 푸른빛이 터졌다.

희미한 형상이 나타났다. 눈앞에 있는 자신의 얼굴, 흰 천으로 가려진 눈, 창백한 뺨과 살짝 벌어진 입술.

라엘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카시안의 눈을 통해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잠시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

라엘이 놀라 몸을 움직이자 시야도 함께 흔들렸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의 눈에서 입술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 움직임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시안.”

라엘이 낮게 불렀다.

카시안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왜 내 입술을 보고 있어?”

잠시 대답이 없었다.

이마를 맞댄 채로 두 사람의 숨이 얕게 뒤섞였다. 손가락은 여전히 맞물려 있었고, 그의 팔은 라엘의 허리를 놓지 않았다.

카시안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보고 싶다기에 내가 보는 것을 보여 줬을 뿐이다.”

“황태자는 거짓말을 잘하네.”

“너에게 배웠지.”

라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때 팔에 박혀 있던 검은 저주가 갑자기 꿈틀댔다. 라엘은 정신을 차리고 카시안의 신력을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금빛이 검은 실을 휘감았다.

라엘의 피부 아래에서 버티던 저주가 끝내 뽑혀 나왔다. 검은 실은 공중에서 작은 뱀처럼 몸부림치다가 라엘의 손가락 사이에서 금빛 불꽃에 타 사라졌다.

동시에 손목 위로 작은 문양이 남았다.

검은 장미를 금빛 실이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게 길잡이가 되어 줄 거야.”

라엘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스테리아의 영혼이 가장 짙은 곳으로 가까워지면 장미가 움직일 거야.”

“그것 때문에 저주를 받아들였나?”

“응.”

“또 이런 식으로 네 몸을 미끼로 쓰면—”

“쓰면?”

카시안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라엘은 아직 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냉정함은 남아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억눌린 분노와 걱정이 선명했다.

그 감정의 방향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라엘이 먼저 신력의 연결을 풀었다.

푸른빛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돌아왔다.

이마도 떨어졌지만 카시안의 팔은 한동안 허리에 남아 있었다.

똑똑.

이번에는 다미안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카시안의 대답이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다미안은 침대 위의 두 사람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라엘은 카시안의 무릎 위에 반쯤 앉아 있었고, 한 손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얹혀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요?”

“아니.”

카시안이 라엘을 침대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라엘은 다미안의 방향을 향해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궁의 시녀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언제?”

“공작부인의 방문 직후입니다. 성녀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사실을 외부로 전한 자로 추정됩니다.”

다미안이 검은 재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시녀의 방에서는 이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라엘이 손을 내밀자 카시안이 병을 받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열지 않았는데도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라진 게 아니야.”

라엘의 표정이 굳었다.

“죽었어.”

“시신은 없었습니다.”

“몸까지 태워 제물로 보낸 거야.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흔적을 없애도록 저주가 걸려 있었겠지.”

다미안이 이를 악물었다.

“황궁 안에서 사람을 제물로 삼았다는 겁니까?”

“아델리아의 눈이 황궁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야.”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의 위치도 들켰을 가능성은?”

“그래서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신전 기사들이 황궁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실종된 신전 관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마리안의 신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데려가게 둬.”

다미안이 놀란 얼굴로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전하?”

“물론 진짜 마리안은 아니다.”

카시안이 지도를 펼쳤다.

“변장한 황실 정보원을 마차에 태워 북쪽 별궁으로 이동시켜. 신전 측에는 마리안이 그곳에서 치료받는다고 흘리고.”

라엘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아델리아의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려는 거군.”

“오늘 밤 공작저를 비워야 하니까.”

지도 위에 놓인 카시안의 손가락이 로젠하르트 공작저를 가리켰다.

“아델리아가 가짜 마리안을 쫓는 동안 거울 안의 장부를 확보한다.”

라엘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카시안의 손이 어깨를 눌렀다.

“넌 남는다.”

“누구 마음대로?”

“두 번이나 쓰러진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다.”

“거울 안에는 아스테리아의 영혼이 묶여 있어. 나 없이는 문을 열어도 무엇이 핵인지 찾지 못해.”

“황실 마법사를 데려가겠다.”

“죽음의 신에게 영혼을 판 옛 성녀를 평범한 마법사로 상대하겠다고?”

“너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다는 낫다.”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손목에 생긴 장미 문양을 카시안에게 내밀었다.

“길잡이는 나한테 있어.”

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네 심장에 박힌 표식도 거울 속의 핵과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커. 그 앞에서 내가 직접 살펴봐야 해.”

“걷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따라오겠다는 거지?”

“네가 안고 가.”

너무 당연하게 나온 대답에 다미안이 헛기침했다.

카시안은 한동안 라엘을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나?”

“효율적이잖아.”

“내가 거절하면?”

라엘은 손을 뻗어 정확히 그의 옷깃을 찾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래도 따라갈 거야.”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라엘이 속삭였다.

“그러니 얌전히 나를 안고 가, 황태자.”

카시안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잠시 뒤 그가 라엘의 손을 옷깃에서 떼어 내며 말했다.

“작전은 자정에 시작한다.”

다미안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북쪽 별궁을 향해 황실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출발했다. 예상대로 신전의 감시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카시안과 다미안은 검은 망토를 걸친 채 황태자궁의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다.

라엘도 흰 성녀복 대신 움직이기 편한 검은 옷을 입었다. 얼굴과 연보라색 머리카락은 깊은 후드 안에 감췄다.

걷는 연습을 해 보겠다고 고집했지만 황궁 담장을 넘기도 전에 다리가 풀렸다.

결국 카시안이 그녀를 들어 올렸다.

“웃지 마.”

라엘이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느껴져.”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네 심장 소리로 알아.”

카시안이 대꾸하지 않자 라엘은 작게 웃었다.

세 사람은 지하 제단에서 탈출했던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무너진 비석 뒤로 몸을 숨긴 다미안이 땅에 묻힌 고리를 찾아냈다.

철판을 들어 올리자 지하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그 아래에서는 익숙한 피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공작저의 지하와 연결된 통로입니다.”

다미안이 등불을 밝혔다.

카시안이 라엘을 안은 채 먼저 내려갔다. 계단이 좁고 가팔라 몸이 자연스럽게 밀착됐다. 라엘의 뺨이 그의 목 가까이에 닿을 때마다 카시안의 호흡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불편한가?”

라엘이 물었다.

“무엇이?”

“내가 너무 가까워서.”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목을 더 세게 감고 있군.”

“떨어질까 봐 그러는 거야.”

“정말 그것뿐인가?”

카시안이 되묻자 이번에는 라엘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어깨에 얼굴을 조금 더 묻었다. 깨끗한 비와 금속이 섞인 향 아래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 긴 복도가 나왔다.

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장미 문양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금빛 실에 묶인 검은 꽃잎이 통로 안쪽을 향해 흔들렸다.

“이쪽이야.”

그들은 장미 문양을 따라 움직였다.

복도 끝에는 돌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다미안이 벽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지만 문을 여는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라엘이 카시안의 품에서 손을 뻗었다.

“조금 더 가까이.”

카시안이 그녀의 손바닥을 돌벽에 닿게 했다.

죽음의 기운이 손목의 문양과 반응했다. 검은 장미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금빛을 뿜었다.

쿠르릉.

돌벽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에는 공작부인의 침실로 이어지는 비밀 계단이 있었다.

세 사람이 계단을 올라가자 은은한 장미 향이 감도는 넓은 방이 나타났다. 아델리아는 북쪽 별궁으로 향한 마차를 쫓아 저택을 비운 상태였다. 시녀와 기사들도 대부분 물러가 침실은 고요했다.

“북쪽 벽.”

라엘이 말했다.

카시안이 그녀를 안은 채 방향을 틀었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거대한 거울이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으로 만든 테두리에는 장미와 가시가 복잡하게 얽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다미안이 거울 앞을 살폈다.

“마리안의 말대로라면 장미 가운데 가시 하나가 열쇠입니다.”

그러나 테두리에 새겨진 가시는 수백 개가 넘었다. 잘못된 것을 누르면 경보나 저주가 발동할 수 있었다.

라엘은 카시안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의 팔을 붙잡아 몸을 지탱한 채 거울에 손을 댔다.

손목의 장미가 거세게 떨렸다.

그 순간 라엘의 귓가에서 수많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거울 안에 갇힌 영혼들의 목소리였다.

라엘이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자 카시안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라엘.”

“괜찮아. 열쇠를 찾았어.”

라엘의 손가락이 테두리 아래쪽에 있는 가시 하나를 눌렀다.

딸깍.

작은 소리와 함께 거울 표면에 물결이 번졌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 풍경이 변했다.

원래라면 침실과 그 앞에 선 세 사람의 모습이 비쳐야 했다. 하지만 거울 안에는 카시안도, 라엘도, 다미안도 없었다.

핏빛으로 물든 제단만 보였다.

그 중앙에 아델리아가 서 있었다.

아니, 아델리아의 몸을 차지한 아스테리아였다.

현실에서는 북쪽 별궁으로 향했어야 할 여인이 거울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없었던 것이 들려 있었다.

목이 꺾인 채 축 늘어진 황실 정보원.

가짜 마리안으로 마차에 태워 보냈던 여자였다.

아스테리아가 시신을 제단 아래로 내던졌다.

‘어리석기는.’

그녀의 목소리가 거울을 넘어 침실에 울렸다.

‘내 집에 들어오면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다미안이 검을 뽑는 순간, 침실 문밖에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시안이 라엘을 자신의 등 뒤로 당겼다.

하지만 라엘은 거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차가운 무언가가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거울 속 아스테리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현실의 거울 표면에서도 검은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라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아스테리아의 얼굴 위로 끔찍한 미소가 번졌다.

‘네 몸을 빼앗아 줄게, 천족.’

거울이 라엘을 안으로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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