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죽은 자의 제단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3:05:59

철문이 굉음과 함께 닫혔다.

쿵―!

복도를 밝히던 빛이 끊기고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카시안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황금빛 신성력마저 보이지 않는 막에 짓눌린 것처럼 급격히 희미해졌다.

계단 아래에 서 있던 마리안의 모습도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전하!”

데미안이 즉시 뒤로 몸을 돌려 철문을 밀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통과할 만큼 활짝 열려 있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을 틈에 꽂아 힘껏 비틀어도 마찬가지였다. 문 표면에 새겨진 검은 태양의 문양만이 심장처럼 붉은빛을 내며 한 번씩 뛰었다.

쿵.

문양이 박동할 때마다 지하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라엘은 카시안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는 어둠이 짙어졌다는 사실보다 주변의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대신전 위층에서 들리던 종소리도, 철야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곳만 세상에서 잘려 나간 듯했다.

“결계예요.”

라엘이 낮게 말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시안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검을 앞으로 세웠다. 품 안에 있는 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비스듬히 돌린 자세였다.

“아델리아가 만든 겁니까?”

“흔적은 그 여자 것이 맞아요. 하지만 지금 결계를 움직인 건 다른 사람이에요.”

“공범이 신전 안에 있다는 뜻이군.”

“그것도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모습을 지켜본 공범이겠죠.”

라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철컥.

철컥.

어둠 속에서 느린 발소리가 이어졌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을 긁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췄다.

갑자기 몸을 조인 팔에 라엘의 어깨가 그의 단단한 가슴에 더욱 깊이 닿았다. 바로 곁에서 뛰는 심장 소리와 낮아진 호흡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데미안, 오른쪽을 맡아.”

“예, 전하.”

데미안이 카시안과 등을 맞대고 검을 세웠다. 검신을 두른 신성력이 주변을 밝히려 했지만 어둠은 빛을 먹어 치우듯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라엘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어차피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작은 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감각을 넓히자 마리안의 불규칙한 호흡이 들려왔다. 가슴을 짓누르는 검은 문양 탓에 숨 한 번 내쉴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섞여 있었다.

그 뒤에서는 인간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심장 소리가 없었다.

“숙여요!”

라엘의 외침과 동시에 카시안이 몸을 낮췄다.

무언가가 머리 위를 거칠게 스치고 지나갔다. 단단한 벽이 종잇장처럼 갈라지며 돌조각이 쏟아졌다. 카시안은 라엘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고 자신의 몸을 방패처럼 돌려 파편을 피했다.

짧은 순간 그의 턱이 라엘의 머리 위에 닿았다.

라엘은 등을 덮은 단단한 손바닥과 몸 전체를 감싼 온기를 느꼈다. 천족인 자신이 인간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낯설었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카시안의 검이 어둠을 갈랐다.

금빛 검격이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형체가 잠시 드러났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라 부르기 어려운 존재였다. 지하의 어둠을 억지로 뭉쳐 만든 거대한 기사.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텅 빈 구멍만 있었고, 양손에는 핏빛이 흐르는 대검이 들려 있었다. 몸 곳곳에는 마리안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같은 검은 태양이 박혀 있었다.

카시안의 검이 그림자 기사의 옆구리를 베었다.

그러나 칼날이 지나간 자리는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가 순식간에 다시 이어졌다. 그림자 기사가 비어 있는 얼굴을 카시안 쪽으로 돌렸다.

『성녀의…… 그릇을…… 바쳐라.』

긁히는 듯한 목소리가 지하 사방에서 울렸다.

라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릇?”

『주인께서…… 기다리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아요?”

그림자 기사가 다시 대검을 들어 올렸다. 라엘은 카시안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다른 손을 어둠을 향해 뻗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물건처럼 부르는 거예요.”

손끝에서 순백의 빛이 피어났다.

빛이 퍼지는 순간 세레나의 가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았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비트는 듯한 고통이었다. 라엘은 숨을 삼켰지만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의 힘을 사용하려면 이 몸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력과 생명력을 빼앗긴 세레나의 육체에는 천족의 권능을 견딜 여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만 힘을 과하게 끌어내도 갈라진 그릇에 물을 붓는 것처럼 육체부터 무너질 수 있었다.

천상에서 들었던 경고가 뒤늦게 떠올랐다.

세레나의 육체가 손상되면 원래 주인까지 위험해진다.

‘그걸 조금 더 일찍, 자세히 알려 줬어야지.’

라엘이 속으로 대천사를 원망하는 사이 손끝의 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카시안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멈추십시오.”

“놓아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에요.”

“피를 토한 뒤에도 같은 말을 할 생각입니까?”

카시안의 시선이 라엘의 입가에 머물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술 끝으로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엄지로 라엘의 입가를 훑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라엘의 호흡이 잠시 멈췄다. 입술 끝을 누른 엄지의 감촉과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신성력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카시안은 손가락에 묻은 붉은 피를 확인한 뒤 더욱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원래 그런 겁니까?”

라엘은 입술에 남은 온기를 느끼며 뒤늦게 대답했다.

“조금 무리한 것뿐이에요.”

“힘을 거두십시오.”

“저 아이를 살려야 해요.”

“당신까지 쓰러지는 방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어요?”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황금빛 신성력이 검신을 타고 흘렀지만 그림자 기사의 몸을 완전히 소멸시키기에는 부족했다. 베어 낸 자리를 주변의 어둠이 계속 채우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라엘의 손과 자신의 검 사이를 오갔다.

“당신은 제 검을 쓸 수 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라엘이 고개를 들었다.

“검을 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힘을 몸 밖으로 직접 끌어내지 말고, 내 신성력을 통로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라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천상의 권능을 인간의 신성력에 실으려면 두 힘의 결이 맞아야 했다. 한쪽이라도 상대를 거부하면 힘을 잇는 순간 통로가 된 쪽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은 황족이라도 위험한 일이었다.

“제가 어떤 존재인지 아직 믿지 않는다면서요.”

“믿는 것과 필요한 판단을 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제가 힘을 잘못 흘리면 당신의 신성력 통로가 전부 타 버릴 수도 있어요.”

“그 전에 멈출 수 있습니까?”

라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카시안은 그녀의 침묵에서 답을 알아냈다.

“당신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건…….”

“마리안이 살아 있는 한, 이 몸을 망가뜨려서라도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겠지.”

정확했다.

자신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가 성격을 너무 빨리 파악해 버렸다. 라엘이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술을 다물자 카시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내 힘을 사용하십시오.”

그가 검을 쥔 손 위로 라엘의 손을 겹치게 했다.

차가운 검자루와 그 아래 자리한 단단한 손등이 동시에 느껴졌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라엘의 손을 감싸 검자루에 고정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 카시안에게서 흐르던 황금빛 신성력이 라엘의 손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뜨겁고 곧은 힘이었다.

오랜 세월 쌓인 황가의 축복과 카시안 자신의 의지가 그 안에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부정한 것을 베어 내고 자신의 뒤에 있는 이들을 지키겠다는, 완고할 만큼 단단한 의지였다.

라엘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감쌌다.

힘을 안정적으로 연결하려면 숨과 박동까지 맞춰야 했다. 하지만 카시안의 심장은 조금 전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것이 전투의 긴장 때문인지, 품 안에 있는 자신과 손을 겹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에 힘을 빼요.”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아닌데요. 어깨도 굳었고 심장도 너무 빨리 뛰어요.”

카시안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전투 중입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

“집중하십시오.”

낮고 단호한 대답이었지만 라엘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조금 더 단단히 감싸는 것을 느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지려 했지만 지금은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아플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모른 척할 거예요.”

“말이 많군요.”

“걱정해 주는 건데.”

“그렇다면 빨리 끝내 주십시오.”

라엘은 작게 웃었다.

“좋아요. 대신 놓치지 말아요.”

“무엇을 말입니까?”

“저요.”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라엘이 눈을 감았다.

원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꺼풀을 내리자 외부의 어둠과 몸 안의 어둠이 분리되었다. 깊은 곳에 잠든 세레나의 영혼과 가느다랗게 연결된 빛의 실이 느껴졌다.

라엘은 그 실을 건드리지 않았다.

세레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카시안의 신성력을 자신의 권능과 연결했다.

순간 카시안의 검에서 눈부신 백금빛이 솟구쳤다.

콰아아앙―!

빛이 지하 전체를 뒤흔들었다.

주변의 어둠이 파도처럼 갈라지며 그림자 기사의 형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수십 개의 검은 손이 서로를 움켜쥔 채 그 몸을 구성하고 있었다. 지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을 억지로 붙잡아 만든 괴물이었다.

그림자를 이루던 입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아파.』

『살려 줘.』

『집에 가고 싶어.』

『엄마가 기다려.』

라엘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들의 영혼을 묶어 놨어요.”

카시안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구할 수 있습니까?”

“몸은 이미 죽었지만 영혼은 풀어 줄 수 있어요.”

“방법은?”

“저 검을 심장에 꽂아요. 중심에 있는 검은 태양을 부수면 돼요.”

그림자 기사가 대검을 휘둘렀다.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채 옆으로 몸을 틀었다. 거대한 칼날이 바로 옆의 계단을 내리찍으며 돌바닥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튀어 오르는 파편 사이를 파고들어 그림자 기사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손들이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데미안이 뒤따라오며 신성력이 실린 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해도 두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손을 잠시 밀어 낼 수는 있었다.

“전하, 지금입니다!”

카시안이 그림자 기사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나 칼끝이 검은 태양에 닿기 직전, 그림자의 몸 안에서 마리안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살려 주세요!”

소녀의 비명에 카시안의 검이 멈췄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검은 손이 그의 팔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 죽음의 기운이 파고들면서 제복 소매가 검게 타들어 갔다.

“카시안!”

라엘이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짧은 부름에 카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라엘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그건 진짜 마리안이 아니에요!”

그림자 기사의 몸에서 소녀의 얼굴이 울음을 터뜨렸다.

“전하,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공포를 읽어서 보여 주는 환영이에요. 진짜 마리안은 뒤에 있어요!”

카시안은 눈앞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었다.

검은 손이 팔을 옥죄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라엘의 백금빛 권능이 실린 검이 그림자의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쩌적―!

검은 태양 위로 균열이 번졌다.

“이제 보내 줘요.”

라엘의 목소리가 지하에 울렸다.

“그 누구도 너희를 붙잡아 둘 수 없어.”

백금빛이 폭발했다.

그림자 기사의 몸을 이루던 검은 손들이 하나둘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어린아이와 노인, 젊은 여자와 견습 사제. 오랫동안 고통에 붙잡혀 있던 이들의 영혼이 검은 기운에서 벗어나 빛 속으로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울리던 비명이 멎었다.

대신 아주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고마워요.』

『이제 갈 수 있어.』

마지막 영혼이 천장을 향해 사라지자 그림자 기사의 몸이 무너졌다. 검은 연기가 바닥으로 흩어지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마리안이 힘없이 쓰러졌다.

데미안이 재빨리 소녀의 몸을 받아 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라엘의 몸에서도 힘이 빠졌다.

카시안의 검을 감싸고 있던 백금빛이 꺼졌다. 라엘은 가슴을 움켜쥔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직접 힘을 끌어내지는 않았지만 세레나의 육체가 통로가 된 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가해졌다.

“라엘.”

카시안이 그녀를 불렀다.

조금 전까지 빈틈없이 단정하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라엘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술 사이로 소리보다 기침이 먼저 터져 나왔다.

“콜록…….”

하얀 예복 위로 붉은 피가 떨어졌다.

카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라엘의 입가를 닦아 주려다 손을 멈췄다. 조금 전 자신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 그녀의 숨이 흔들렸던 것을 떠올린 듯했다. 그러나 라엘이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자 결국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받치고 엄지로 피를 훔쳐 냈다.

“괜찮아요.”

“피를 토하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몇 방울 안 되잖아요.”

“의원에게 돌아갑니다.”

“안 돼요.”

라엘은 자신을 돌려세우려는 카시안의 제복을 붙잡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의 몸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나가면 안에 있는 증거를 전부 없앨 거예요. 결계를 작동시킨 사람은 우리가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림자 기사가 사라진 것도 곧 알아차리겠죠.”

카시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라엘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 공작부인의 공범이 있다면 지금도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지원 병력을 기다리는 동안 증거와 생존자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엘의 호흡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겁니까?”

“원래 걷고 있지도 않았는데요.”

라엘은 자신이 여전히 카시안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듯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황태자에게 다리가 있잖아요.”

“나를 이동 수단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방금 전에는 증인을 운반하는 것뿐이라면서요.”

카시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곁에서 마리안의 상태를 살피던 데미안이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데미안.”

“예, 전하.”

“지금 웃었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데미안은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로 마리안을 등에 업었다. 카시안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 다시 라엘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빠지면 즉시 돌아갑니다.”

“명령이에요?”

“경고입니다.”

“듣는 건 생각해 볼게요.”

“반드시 따르십시오.”

“황태자는 요구가 많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라엘은 카시안의 품에 얌전히 몸을 맡겼다. 방금 전 자신의 권능과 그의 신성력을 연결한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맞닿은 팔과 가슴을 통해 카시안의 힘이 뜨거운 온기처럼 전해졌다.

그 온기가 불안정하게 뛰던 세레나의 심장을 서서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라엘은 카시안의 목 가까이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와 돌가루가 가득한 지하에서도 그의 체취만은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금속, 그 아래 숨은 따뜻한 향.

“왜 그러십니까?”

카시안의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렸다.

“냄새를 기억하려고요.”

“무슨 냄새를 말하는 겁니까?”

“당신 냄새요.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알아 두면 찾기 편하잖아요.”

카시안의 발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라엘은 그가 왜 침묵하는지 알지 못한 채 고개를 조금 들었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정확히 그의 얼굴을 향했다.

“싫어요?”

“그런 말은 인간계에서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또 오해 때문이에요?”

“그렇습니다.”

“무슨 오해인지 설명해 주면 되잖아요.”

“지금은 수사 중입니다.”

“황태자는 불리할 때마다 수사를 핑계로 삼네요.”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엘을 안은 팔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라엘은 장난을 거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림자 기사가 사라지면서 지하를 뒤덮었던 어둠도 조금씩 엷어졌다.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피 냄새와 죽음의 기운이 흘러오는 방향은 구분할 수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요.”

세 사람은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오래된 성화가 걸려 있었다. 빛의 여신이 병자를 치유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성화 속 인물들의 얼굴은 모두 날카로운 도구로 긁혀 지워져 있었고, 여신의 머리 위에는 검은 태양이 덧그려져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피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긴 계단이 끝나자 둥근 의식실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핏물이 고인 은제 욕조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끊어진 쇠사슬 여러 개가 매달려 있었다. 바닥을 가득 채운 마법진 곳곳에는 아직 굳지 않은 피가 고여 있었다.

벽 한쪽에는 신전에서 사용하는 의복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시녀복 일곱 벌.

견습 사제복 세 벌.

그리고 로젠하르트 공작가의 구호원에서 지급하는 회색 작업복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데미안의 표정이 굳었다.

“실종자들의 옷입니다.”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채 의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검에서 흘러나온 빛이 벽을 비추자 붉은 글씨로 가득한 이름들이 드러났다.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것은 희생자들의 명단이었다.

이름 옆에는 나이와 출신지, 건강 상태가 적혀 있었고 가장 마지막에는 피가 사용된 목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목욕.

음용.

신력 안정.

영혼 봉인.

라엘의 손끝이 차갑게 굳었다.

카시안은 가장 최근에 작성된 이름을 발견했다.

마리안 베르.

열일곱 살. 건강 상태 양호. 두려움에 민감함.

그 아래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글씨로 ‘음용 예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카시안의 눈빛에서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다.

“전부 기록해.”

“예.”

데미안은 마리안을 조심스럽게 벽에 기대 앉힌 뒤 품에서 황실 기록석을 꺼냈다. 의식실과 벽면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기 시작했다.

카시안은 방 안을 살피다 욕조 옆에 놓인 작은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피가 묻은 은잔과 검은 초, 펼쳐진 장부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가 장부를 들자 라엘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열지 말아요.”

“이유는?”

“불의 냄새가 나요.”

카시안이 장부를 내려놓기도 전에 표지에 새겨진 문양이 붉게 빛났다.

화르륵―!

검은 불길이 장부를 삼켰다.

데미안이 급히 신성력을 일으켰지만 불은 종이만 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탁자와 욕조, 벽에 적힌 명단까지 붉은빛이 번지며 차례로 불길에 휩싸였다.

“증거를 없애려는 겁니다!”

의식실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천장에 매달린 쇠사슬이 녹아내리고, 바닥의 피가 끓어오르며 검은 연기를 피워 냈다. 연기 속에는 죽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카시안은 망설이지 않고 라엘을 자신의 외투 안으로 감쌌다.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는 검은 외투에 막혔다. 라엘의 얼굴이 카시안의 목 아래에 밀착되었고,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그의 피부를 스쳤다.

“데미안, 마리안을 데리고 나가!”

“전하는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벽의 명단을 하나라도 더 확보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라엘이 카시안의 제복을 움켜쥐었다.

“이미 늦었어요. 이 불은 의식실 전체를 무너뜨릴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졌다. 카시안은 몸을 돌려 라엘을 완전히 감싼 채 옆으로 뛰었다. 돌덩이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내리찍으며 바닥을 갈랐다.

갈라진 틈 아래에서 붉은빛이 솟구쳤다.

이곳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무너지도록 설계된 의식실이었다.

“전하!”

데미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안은 무너지는 돌기둥 사이로 몸을 돌렸다. 출구까지는 길지 않았지만 라엘을 안은 상태로 쏟아지는 파편을 모두 피하기는 어려웠다.

라엘은 자신을 덮고 있는 외투 안에서 손을 뻗었다.

“힘을 조금만 더 빌릴게요.”

“안 됩니다.”

“안 그러면 둘 다 여기에 깔려요.”

“당신의 몸이 견디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제 몸을 통로로 쓰지 않을 거예요.”

라엘은 카시안의 가슴 한가운데에 손바닥을 올렸다.

두꺼운 제복 너머에서도 그의 심장이 손바닥 아래에서 강하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카시안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깊어졌다.

“당신이 직접 사용해요.”

“방법을 모릅니다.”

“제가 알려 줄게요.”

라엘은 자신의 의식을 카시안의 신성력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조금 전 검을 통해 힘을 잇던 것보다 훨씬 직접적인 연결이었다.

두 사람의 신성력이 맞닿자 감각의 경계가 흐려졌다.

라엘은 카시안의 심장 박동을 자신의 것처럼 느꼈고, 카시안은 자신의 가슴에 닿은 라엘의 손바닥뿐 아니라 그녀의 가느다란 호흡과 불안정한 맥박까지 한꺼번에 느꼈다.

힘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연결이었다.

라엘은 카시안의 기억이나 감정을 엿볼 생각이 없었지만 강한 의지의 파편들이 빛을 따라 밀려왔다.

어린 시절부터 황태자라는 이유로 수없이 목숨을 위협받았던 기억.

신의 이름을 앞세운 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환멸.

어떤 계시보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한 사람의 고통을 믿겠다고 다짐했던 순간.

라엘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제야 카시안이 왜 신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카시안에게도 라엘의 감정 일부가 흘러들었다.

천상의 막내로 태어나 모두에게 사랑받았지만 누구도 자신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지 않았던 답답함. 실수와 사고 뒤에 가려져 있던 외로움. 그리고 깊이 잠든 세레나를 반드시 살리고 싶다는 간절함.

카시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 목소리에 집중해요.”

라엘이 속삭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외투 안에서 숨이 섞일 만큼 가까웠다.

“당신의 힘은 검에만 머무는 게 아니에요. 몸 안에 있는 빛을 밖으로 펼친다고 생각해요. 무엇을 부술지가 아니라 무엇을 지킬지 생각하고.”

카시안은 눈을 감지 않았다.

한 팔로 라엘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 검을 바닥에 꽂았다.

황금빛 신성력이 그의 발밑에서 퍼졌다. 처음에는 희미한 선에 불과했지만 라엘의 백금빛이 더해지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구형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콰아아앙―!

무너진 천장이 보호막 위로 쏟아졌다.

빛이 거칠게 흔들렸지만 깨지지 않았다.

데미안이 마리안을 안고 보호막 안으로 뛰어든 순간, 의식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마지막으로 폭발했다.

붉은 불길이 네 사람을 삼켰다.

그러나 황금빛과 백금빛이 뒤엉킨 보호막은 불길 한가운데서 끝까지 버텨 냈다. 카시안의 제복 아래로 핏줄 같은 빛이 번졌고, 라엘의 손바닥이 닿은 가슴에서는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하나의 울림처럼 겹쳤다.

쿵.

쿵.

서로 다른 두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었다.

라엘은 그 박동에 집중하며 힘이 끊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다. 카시안도 자신의 품에서 전해지는 작은 몸의 떨림을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더욱 단단히 감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굉음이 멎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시안이 검을 뽑자 보호막이 천천히 사라졌다. 의식실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은제 욕조와 장부, 벽에 적혀 있던 이름도 모두 돌더미와 검은 재 아래 묻혔다.

그러나 네 사람은 살아 있었다.

“모두 무사합니까?”

카시안이 물었다.

“예.”

데미안은 마리안의 호흡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도 살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라엘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팽팽하게 붙들고 있던 긴장이 풀리자 머릿속이 하얗게 흐려졌다.

카시안의 가슴에 올렸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라엘?”

“잠깐…… 졸린 것뿐이에요.”

“눈을 뜨십시오.”

“원래 눈을 떠도 아무것도 안 보여요.”

“말장난할 때가 아닙니다.”

“말장난할 힘이 있으면 괜찮은 것 아닌가…….”

라엘의 목소리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고개가 힘없이 카시안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따뜻한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다가 조금씩 약해졌다.

카시안은 급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호흡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가늘었다. 하얗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 끝에는 다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출구를 찾는다. 즉시.”

데미안이 주변을 살폈다.

“들어왔던 계단이 무너졌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이곳을 드나들던 자들이 매번 정문을 이용했을 리 없어.”

두 사람은 무너진 의식실의 벽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미안이 돌더미 아래에서 작은 통로를 발견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외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카시안은 대답 대신 라엘을 고쳐 안았다.

그녀의 몸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신력을 빼앗긴 탓에 두꺼운 예복 아래의 몸은 뼈가 느껴질 만큼 말라 있었다.

그는 라엘인지 세레나인지 모를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세레나를 구하겠다며 내려온 존재.

그러면서 정작 자신이 다치는 일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정말 제멋대로군.”

낮은 혼잣말과 달리 그녀를 안은 팔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라엘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외투를 끌어 올려 차가워진 몸을 빈틈없이 감쌌다.

두 사람은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습기 어린 흙냄새가 피 냄새를 밀어냈고, 멀리서 새벽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뒤 통로 끝을 막고 있던 돌문을 밀자 희미한 달빛이 쏟아졌다.

그들이 나온 곳은 대신전 바깥이 아니었다.

대신전과 로젠하르트 공작저 사이에 자리한 오래된 공동묘지였다. 무너진 비석과 마른 나무들 너머로 공작가의 붉은 첨탑이 보였다.

데미안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이 통로를 이용하면 공작저에서 대신전 지하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오갈 수 있습니다.”

카시안은 공작저를 바라보았다.

가장 높은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순간 정신을 잃었던 마리안이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데미안의 등에 업힌 소녀의 손이 힘없이 움직이더니 카시안의 외투 자락을 붙잡았다.

“전하…….”

카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말하지 마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겠다.”

“장부…….”

마리안의 검게 물들었던 눈동자는 조금씩 본래의 갈색을 되찾고 있었다. 소녀는 의식을 붙들기 위해 애쓰며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없어진 사람들의…… 진짜 장부가…… 있어요.”

“어디에 있지?”

“공작부인의…… 침실.”

희미한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침대 아래가 아니라…… 거울 안에…….”

마리안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카시안의 시선이 멀리 보이는 공작저의 창문으로 향했다.

거의 동시에 가장 높은 방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누군가 창가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어두워진 침실 창가에서 공동묘지를 내려다보았다.

무너진 의식실의 불길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자 기사와의 연결도 끊겼다.

실패했다.

인간의 황태자와 성녀의 몸을 차지한 정체불명의 존재가 살아서 빠져나온 것이다.

아델리아의 손에 들린 은잔이 천천히 구겨졌다.

“라엘.”

그녀는 조금 전 목걸이를 통해 들은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아무리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도 인간계의 신화나 대신전 기록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힘만큼은 알고 있었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신족의 권능과도 조금 달랐다.

오래전 죽음의 신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천상을 지키는 날개 달린 종족의 힘이었다.

“천족이 직접 내려왔단 말이지.”

불쾌해야 마땅했지만 아델리아의 입가에는 오히려 느린 미소가 번졌다.

인간의 피로는 이제 부족했다.

세레나의 신력을 온전히 흡수하려면 더 강하고 깨끗한 생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음 제물로 신성한 황가의 피를 지닌 카시안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귀한 존재가 제 발로 인간계에 내려왔다.

천족의 영혼이 깃든 성녀의 피.

천상의 권능과 황가의 신성력을 동시에 흡수할 수 있다면, 더는 매달 젊은 피를 찾아 헤맬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성녀의 신력과 천족의 영혼이라.”

아델리아가 구겨진 은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번 보름달에는 아주 특별한 목욕을 할 수 있겠구나.”

그녀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손끝으로 유리 표면을 누르자 거울이 물결처럼 흔들리며 안쪽에 감춰진 공간을 드러냈다.

수십 권의 장부와 작은 유리병들이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각 유리병 안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빼앗은 생명과 신력의 흔적이었다.

아델리아는 가장 안쪽에 놓인 빈 병 하나를 꺼냈다.

병 표면에는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녀는 붉은 잉크에 펜촉을 적셔 새로운 이름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라엘.

마지막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빈 유리병 안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기다리렴.”

아델리아가 유리병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곧 네 피까지 내 것이 될 테니.”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죽은 성녀의 진짜 이름

    한 글자.‘에.’세레나의 손가락이 라엘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검은 가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아 꽃밭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 대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세레나!”라엘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았다.검은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까지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피부를 찢고 영혼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라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꽃밭 아래에서 떠오른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수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아스테리아에게 피를 빼앗긴 사람들, 죽은 뒤에도 영혼을 붙잡힌 희생자들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내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세레나의 영혼부터 찢어질 테니까.’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하얀 세계를 뒤흔들었다.‘그 아이가 네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검은 가시가 더욱 거세게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발밑의 꽃들이 썩어 가며 검게 변했다.라엘은 세레나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말하지 않아도 돼.”세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내가 찾을게.”‘라엘…… 님.’“그러니까 버텨.”라엘의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가시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를 끊으면 두 개가 돋아났고, 두 개를 끊으면 네 개가 세레나의 영혼을 휘감았다.이곳은 세레나의 내면이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었다. 라엘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세레나의 영혼도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아스테리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해 봐.’검은 눈이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그 아이를 구하려고 힘을 쓸수록 네가 직접 세레나를 찢게 될 테니.’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가시를 태우던 금빛이 흔들렸다.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쿵.세레나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라엘의 영혼과 연결된 또 하나의 심장.카시안이었다.‘라엘.’현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세계까지 닿았다.‘눈을 떠.’은빛 실이 어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해가 뜨기 전까지만

    검은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로 변했다.라엘의 가슴에 남은 꽃잎은 세 장.성휘제까지 남은 시간도 사흘이었다.‘꽃잎이 모두 떨어지는 밤, 네 몸은 나의 것이 된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엘의 심장을 파고들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장미의 가시는 새로 만들어진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아래로 느리게 뛰는 심장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카시안이 망토 자락을 여며 라엘의 몸을 가렸다.“표식을 옮길 수 있나?”“다른 사람한테?”“내게 돌려놔.”라엘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제 눈에 담은 카시안의 얼굴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고, 피가 묻은 얼굴에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지 않았다.걱정과 분노, 조금 전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두려움까지 감추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싫어.”라엘이 잘라 말했다.“왜지?”“겨우 빼앗아 왔는데 다시 줄 것 같아?”“그건 빼앗은 게 아니라 떠넘겨진 거다.”“결과는 같아. 아스테리아는 이제 너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그 사실이 마음에 드나?”“적어도 네 심장을 뽑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잖아.”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대신 죽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죽을 생각 없다니까.”“아까 심장이 멎었다.”“그건 세레나의 몸이고, 지금 나는 멀쩡해.”라엘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세레나의 약한 육체를 빌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그러나 카시안은 안심하지 않았다.“해가 뜨면 이 몸은 사라진다고 했지.”“응.”“그럼 표식은?”라엘의 손이 멎었다.그 부분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표식은 세레나의 육체가 아니라 라엘의 영혼을 따라왔다. 해가 뜬 뒤 임시 육체가 사라져도 저주는 영혼에 남을 가능성이 컸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이번 제물은 나였다

    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심장을 향해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하얀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이 빠르게 번졌다. 손목을 휘감은 가시는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고, 그 끝이 가슴을 향해 파고들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터졌다.라엘의 무릎이 꺾였다.“라엘!”카시안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장부 조각 위에서는 여전히 붉은 글자가 번지고 있었다.〔성휘제 최종 제물 변경.〕〔라엘.〕카시안의 이름에 그어진 검은 선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종이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느다란 연기가 된 선은 라엘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동시에 카시안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죽음의 표식도 반응했다.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전하!”다미안이 다급히 다가왔다.“가까이 오지 마!”라엘이 외쳤다.그녀와 카시안 사이에 검은 실이 나타나 있었다. 영혼의 공간에서 더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을 따라 저주가 옮겨 다니고 있었다.카시안에게 새겨졌던 제물의 표식이 라엘에게 넘어가는 대신, 라엘이 느끼는 고통이 카시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다미안이 검 끝으로 검은 실을 끊으려 했다.“자르면 안 돼.”라엘이 이를 악물고 그의 검을 붙잡았다.“이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야. 제물의 자리를 바꾸는 계약이야.”“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우선 이 방에서 나가야 해.”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조각마다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웃는 얼굴, 분노한 얼굴, 피를 마시며 황홀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라엘을 바라보았다.‘찾았다.’수십 개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네 영혼으로 향하는 길을.’깨진 거울 사이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나왔다.다미안이 검을 휘둘렀다. 신력이 실린 검격에 앞쪽의 손들이 잘려 나갔지만, 거울 조각은 침실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새로운 손을 만들어 냈다.카시안은 고통을 누른 채 일어섰다.“장부를 챙겨.”“이미 있습니다.”다미안이 타다 남은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거울은 영혼의 얼굴을 비춘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라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표면이 물처럼 출렁이며 손과 팔을 삼켰다. 라엘이 반대편 손으로 거울의 은제 테두리를 붙잡았지만, 발밑이 미끄러지며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라엘!”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거울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사람 하나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라엘의 어깨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카시안은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세게 당겼다.그러나 두 사람의 몸에 이어진 신력이 동시에 반응했다.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와 카시안의 심장 옆에 박힌 죽음의 표식이 붉게 빛났다.쿵.거울 너머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한 번의 박동이 침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카시안의 발이 바닥에서 밀렸고, 거울 가까이에 있던 촛대와 탁자까지 검은 표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미안이 카시안의 망토를 붙잡았다.“전하!”그 순간 침실 문이 부서졌다.쾅!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저택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자도 있었고 가슴에 검이 박힌 채 걷는 자도 있었다.죽은 자들을 움직여 만든 인형이었다.다미안은 한 손으로 카시안의 망토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가장 먼저 달려든 인형의 목이 잘려 나갔지만,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목을 잃은 시체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이런 빌어먹을…….”다미안이 이를 악물었다.거울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카시안의 상체까지 검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엘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 보이지 않았다.카시안은 자신의 망토를 붙잡고 있던 다미안의 손을 떼어 냈다.“밖을 맡아.”“전하, 안 됩니다!”“거울이 닫히지 않게 해.”“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그래서 혼자 보낼 수 없다.”카시안은 망설이지 않았다.라엘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준 채 거울 속으로 몸을 던졌다.“전하!”다미안의 외침이 멀어졌다.시야가 검게 뒤집혔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피 냄새가 나는 공작부인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라엘의 물음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도, 신관들의 예복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라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아델리아는 금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피 냄새라니요?”“아주 많은 사람의 피가 엉겨 붙은 냄새예요.”“성녀님께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새벽, 신전 서쪽 구호소 일부가 무너졌답니다. 저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으니 그때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어요.”“그래요?”“예. 보시다시피 급히 오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했으니까요.”장미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가 향이 밴 소매를 일부러 라엘 가까이 가져온 듯했다.하지만 라엘이 맡은 피 냄새는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아델리아의 살갗 아래, 본래 그 몸에 속하지 않은 영혼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마신 피와 빼앗은 생명력이 영혼에 눌어붙어 만들어 낸 악취였다.라엘이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이상하네요. 옷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몸속에서 나는 것 같은데.”사절단에 섞여 있던 신관 하나가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다미안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아델리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죽음의 기운이었다.가느다란 검은 실이 라엘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목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을 직접 노리고 들어오는 저주였다.동시에 아델리아의 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웃었다.연한 금발과 청명한 녹색 눈동자. 오래전 신전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옛 성녀 아스테리아.그녀의 입술이 움직

  • 죽은 성녀를 심판하러 왔습니다   성녀님은 황궁에 계십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도 지나칠 만큼 희었다. 천상과 닮았으나 천상은 아닌 곳. 누군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작은 안식처였다.라엘은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신비로운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을 감고 있어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 느껴지는 얼굴. 라엘이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이었다.“세레나.”불러도 대답은 없었다.라엘은 꽃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레나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손끝이 햇빛에 녹는 눈처럼 투명했다.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세레나는 잠들어 있었다.누군가에게 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라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려는 순간, 꽃밭이 일그러졌다.낯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신전의 정원이었다. 눈이 보이던 시절의 세레나가 하얀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그 앞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아델리아 로젠하르트.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성녀님을 생각하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랍니다.’상자 안에는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중앙에 박힌 보랏빛 보석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것처럼 영롱했다.세레나는 의심하지 않았다.아델리아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왔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구호소를 세웠고, 흉년에는 누구보다 많은 식량을 내놓았다.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과 병든 이들을 위한 요양원도 운영했다.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 불렀다.세레나 역시 그녀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제가 직접 걸어 드려도 될까요?’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차가운 보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던 순간, 아주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넘길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그날 밤부터 세레나는 악몽을 꾸었다.검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이름 없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