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죽었다고 믿었던 성녀를 잡으러 가겠다는 라엘의 선언이 떨어지자,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까지 기적이라며 감격하던 사제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고, 누군가는 불경한 말을 들었다는 듯 가슴 위에 성호를 그었다. 침대 곁에서 눈물을 훔치던 시녀마저 손수건을 쥔 채 굳어 버렸다. 카시안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라엘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성녀 세레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도, 핏기를 잃은 창백한 피부도, 빛을 잃은 자줏빛 눈동자도 자신이 알던 성녀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자신을 마주하는 존재는 세레나가 아니었다. 평소의 세레나는 누구를 대하든 조심스러웠다. 부탁할 일이 있어도 몇 번이나 말을 고르고, 상대가 불편해할까 염려하며 먼저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은 뒤 품평하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죽은 성녀를 붙잡으러 가자고 명령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모두 나가라.” 카시안의 명령에 대신전의 의원이 당황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전하, 성녀님께서는 조금 전까지 심장이 멎어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안정을 취하지 않으시면 다시 위독해질 수 있습니다.” “의원과 성기사단장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했다.” “전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서늘한 음성이 방 안을 가르자 사제들은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성녀를 모시던 시녀들까지 머뭇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묵직한 문이 닫힌 뒤에는 카시안과 성기사단장 데미안, 대신전의 의원 한 명만 남았다. 카시안은 문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라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붙잡혀 있던 자리에는 붉은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가는 손목이었다. 한 손으로 감싸고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시안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라엘은 그 변화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손목을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손에 힘이 꽤 세네요.”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설명하십시오.” “사과가 먼저 아닌가요?” “황태자의 얼굴을 허락 없이 만진 일에 대한 사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돌렸다. “무엇부터 알고 싶은데요?” “당신의 정체부터.” “라엘이에요.” “성은?” “그런 건 없어요.” “어디에서 왔습니까?” 라엘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카시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뒤에 서 있던 데미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천상에서 왔다는 뜻입니까?”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라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목을 조여 오는 날카로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델리아가 선물한 목걸이는 몸 안에 들어온 새로운 영혼을 알아차린 것처럼 점점 더 거세게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금빛 사슬 아래로 검붉은 문양이 번지며 가느다란 목을 옥죄었다. 라엘은 답답한 듯 목걸이를 잡아당겼지만 사슬은 끊어지기는커녕 더욱 팽팽하게 조여 왔다. “그것부터 풀어야 해요.” 라엘이 목걸이를 가리키자 의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성녀님, 그것은 로젠하르트 공작부인께서 직접 축성하여 선물하신 성물입니다. 신력의 안정을 돕는 물건이니 함부로 벗으시면 안 됩니다.” “축성?” 라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죽음의 신에게 사람을 바쳐 만든 물건을 여기서는 성물이라고 불러요?” “죽음의 신이라니요. 아무리 성녀님이라도 그런 불경한 말씀은…….” “그럼 직접 만져 봐요.” 라엘이 목걸이에 손가락을 걸었다. 금빛 사슬이 팽팽해지는 순간 그 아래에서 검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처음에는 은빛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살아 있는 벌레처럼 움직이며 라엘의 손가락을 휘감고 있었다. 의원이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것이…… 무엇입니까?” 데미안이 검자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흡신의 주구예요. 몸에서 신력과 생명력을 조금씩 뽑아낸 뒤 계약된 주인에게 보내는 물건이죠.” “계약된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걸 세레나에게 선물한 사람.” 라엘의 대답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로젠하르트 공작부인이…….” 의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이 시력을 잃은 것도, 다리의 감각이 사라진 것도 대부분 이것 때문이에요.” “대부분?” 카시안이 짧게 되물었다. “전부는 아니에요. 오랫동안 신력을 빼앗긴 탓에 영혼과 육체의 연결도 약해졌어요. 당장 목걸이를 없애더라도 눈과 다리가 바로 회복되지는 않을 거예요.” 라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했지만 카시안의 시선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과 다리를 잃고 영혼과 육체의 연결마저 끊어질 만큼 오랫동안 고통받았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대신전은 무엇을 했는가. 제국에서 가장 강한 신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성녀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병을 진단한다며 드나든 의원도, 매일 그녀를 보살핀 사제들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혹은 발견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카시안이 의원을 돌아보았다. “성녀의 몸에 저런 문양이 나타난 적이 없었나?” 의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진찰할 때마다 목걸이는 평범한 성물처럼 보였습니다. 검은 기운이나 저런 문양은 단 한 번도…….” “주구가 모습을 숨겼던 거예요.” 라엘이 대신 대답했다. “저주에 걸린 본인은 입 밖에 낼 수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성물로 보이게 만들었어요.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에요. 인간이 혼자 만들 수 있는 수준은 아닌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 카시안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외에 공범이 있다는 뜻이군.”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겠죠.” 라엘은 목걸이에 손가락을 걸고 힘껏 잡아당겼다. 가느다란 사슬이 팽팽해졌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기운이 손등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피부를 태우듯 파고들었다. 라엘이 불쾌한 얼굴로 혀를 찼다. “이 몸은 왜 이렇게 힘이 없지?” 천상에 있었다면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부서졌을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라엘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세레나의 육체가 견딜 수 있는 만큼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억지로 천상의 권능을 끌어내면 목걸이를 부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세레나의 몸도 함께 손상될 수 있었다. 인간계로 떨어지기 직전 들었던 대천사의 경고가 뒤늦게 떠올랐다. 세레나의 육체가 손상되면 원래 주인까지 위험해진다. “제가 자르겠습니다.” 데미안이 검을 뽑으려 하자 라엘이 고개를 저었다. “평범한 검으로 건드리면 저주가 세레나의 심장으로 옮겨 가요.” 처음으로 원래 성녀의 이름을 직접 부른 라엘의 목소리에 카시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좁아졌다. “세레나가 살아 있습니까?” 라엘의 손이 멈췄다. “조금 전 성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몸에 남은 기억을 읽은 것이 아니라, 실제 세레나와 대화했다는 뜻입니까?” 역시 눈치가 빨랐다. 라엘은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질문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카시안은 단 몇 마디만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살아 있어요.” 그녀가 순순히 대답했다. “다만 너무 많은 신력과 생명력을 빼앗겨서 몸 깊은 곳에 잠들어 있어요. 제가 이 몸에 들어온 것도 세레나가 허락했기 때문이고요.” “당신이 떠나면?” “세레나가 돌아와요.”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은?” 카시안의 질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라엘의 입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장난기가 사라졌다. “아델리아가 남은 신력까지 전부 빼앗으면 세레나의 영혼은 다시 깨어나지 못해요. 육체는 살아 있어도 안으로 돌아올 주인이 없어지는 거죠.” 방 안이 조용해졌다. 의원이 마른침을 삼켰고, 데미안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카시안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라엘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초점을 맺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올라가 있던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그녀는 세레나의 몸을 빼앗은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세레나를 살리기 위해 내려온 존재에 가까웠다. 하지만 카시안은 완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당신의 말을 증명할 방법은 있습니까?” “제가 천상에서 내려오는 걸 봐 놓고도 부족해요?” “천상에서 내려온 존재가 모두 선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라엘의 눈썹이 올라갔다. “인간치고는 꽤 불경한 말을 하네요.” “신을 믿는 것과 생각을 포기하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 라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신성제국의 황태자라고 하여 신의 이름만 나오면 무릎부터 꿇는 인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카시안은 천상의 힘을 직접 보고도 그것만으로 자신을 믿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기보다 흥미로웠다. 라엘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돌아왔다. “마음에 들어요.” “저는 아직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곧 바뀔 거예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군요.” “오래 살아 보면 알게 돼요.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저를 좋아하게 되거든요.” “당신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예외일 겁니다.” “그 말도 많이 들어 봤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데미안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조금 전까지 성녀의 생사와 제국의 실종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카시안도 더 상대하면 라엘의 말에 끌려갈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대화를 끊고 성녀의 목에 걸린 주구를 살폈다. “신성력이 깃든 검이라면 자를 수 있습니까?” “보통 신성력으로는 안 돼요. 성녀의 힘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높은 격을 지닌 힘이 필요해요.” 카시안은 말없이 자신의 검을 뽑았다. 황태자의 검신을 따라 푸른빛과 금빛이 동시에 번졌다. 아르테온 황가에는 건국 황제가 빛의 여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전승이 내려왔다. 카시안은 계시를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의 몸에 흐르는 신성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엘의 표정에 처음으로 순수한 감탄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쓸 만하네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은 아니었는데.” 카시안은 침대 가까이 다가와 라엘의 어깨 뒤로 손을 뻗었다. 검을 목 가까이에 가져가자 그녀의 몸이 아주 잠깐 굳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피부 가까이 닿는 감각은 천족인 라엘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무섭습니까?” “제가 칼을 무서워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움직이지 마십시오.” 카시안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라엘은 그의 숨결이 귓가와 목덜미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처음 얼굴을 만졌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한 손이 목 뒤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 다른 손이 검을 움직이자, 검은 제복 자락에서 서늘한 밤공기와 희미한 금속 냄새가 전해졌다. 등 뒤에 닿은 손은 조심스러웠지만 단단했다. 그 손끝을 따라 카시안의 신성력이 피부 위로 번졌다. 차가운 검과 달리 그의 힘은 뜨거웠다.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이 밀려나며 라엘의 목덜미가 민감하게 떨렸다. 카시안의 시선이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아프면 말하십시오.” “아픈 건 아니에요.” 라엘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왜 떨었습니까?” “당신의 힘이 생각보다 뜨거워서요.” 가까운 거리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잠시 겹쳤다. 라엘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카시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만은 선명하게 느꼈다. 얼굴에 닿는 시선과 목덜미를 받치는 손의 온도가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그녀는 괜히 턱을 조금 들었다. “잘못 베면 책임져야 해요.” “어떤 책임을 말하는 겁니까?” “당신이 알아서 생각해요.” “그렇다면 아무 책임도 지지 않겠습니다.” “황태자가 그렇게 무책임해도 돼요?” “가만히 계십시오.” 찰칵. 짧은 파열음과 함께 금빛 사슬이 끊어졌다. 목걸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사슬에 매달린 붉은 보석이 검은빛을 뿜었다. 벌레처럼 꿈틀거리던 저주가 라엘의 목을 파고들려 했지만 카시안의 검에서 뻗어 나온 황금빛 신성력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끼이이익―! 사람의 비명과 쇠붙이를 긁는 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괴한 음향이 방 안을 울렸다. 바닥에 떨어진 보석에 금이 갔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검붉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더니 한 여자의 얼굴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금발과 붉은 입술. 흐릿한 형상뿐이었지만 라엘은 그 얼굴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아델리아였다. 연기로 만들어진 여자의 입술이 움직였다. 『내 것을 건드리는 자가 누구냐.』 순간 방 안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의원이 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고, 데미안은 검을 뽑아 카시안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라엘은 오히려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보석을 집어 들었다. 검은 기운이 그녀의 손바닥을 휘감았다. 『그 몸은 이미 내 것이다.』 “누구 마음대로?” 라엘의 손끝에서 순백의 빛이 터졌다. 아델리아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너는…… 누구지?』 “곧 직접 만나게 될 텐데, 그때 알려 줄게.” 라엘은 금이 간 보석을 손안에서 완전히 부숴 버렸다. 『감히―!』 아델리아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끊어졌다. 검은 연기가 흩어지고 방 안의 촛불이 다시 피어오르자 라엘은 손바닥에 남은 검은 가루를 털어 냈다. “이제 증명이 됐어요?” 카시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나타난 여자의 얼굴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황실의 자선 연회마다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던 로젠하르트 공작부인. 적어도 그녀와 목걸이 사이에 수상한 연결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부족하지만 시작은 되겠군요.” “끝까지 까다롭네요.” “황태자의 말 한마디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으니까.” 카시안은 바닥에 남은 목걸이 조각을 손수건으로 감싼 뒤 데미안에게 건넸다. “황실 봉인함에 보관해. 이 방과 성녀궁의 출입도 모두 통제한다.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보낸 물건은 하나도 빠짐없이 압수하되 이유는 밝히지 마라.” “신전에서 반발할 겁니다.” “내 명령이라고 해.” “그렇게 하면 공작부인에게도 소식이 들어갈 겁니다.” “이미 들었어요.” 라엘이 끼어들었다. “목걸이가 부서질 때 아델리아도 알았을 거예요. 세레나가 깨어났다는 것과 누군가 자신의 저주를 끊었다는 것까지.” “그렇다면 시간이 없군.” 카시안은 검을 검집에 넣었다. “지하로 안내하십시오.” 기다리고 있던 말을 들은 라엘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두 발이 바닥에 닿은 순간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세레나의 다리는 오랫동안 감각을 잃은 상태였다. 라엘이 본능적으로 침대 기둥을 잡으려 했지만 손끝은 허공만 스쳤다.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카시안이 라엘의 허리를 붙잡았다. 한 팔이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쓰러지는 몸을 받아 냈다. 라엘의 이마가 그의 가슴에 부딪혔고, 길게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검은 제복 위로 퍼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라엘이 숨을 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탓인지 다른 감각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얇은 예복 너머로 허리를 받친 손의 크기와 온도, 뺨에 닿은 단단한 가슴, 머리 위에서 한결 빨라진 호흡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엇보다 목걸이가 사라진 뒤라 카시안의 신성력이 더욱 뚜렷했다. 뜨거운 힘이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몸 안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망가진 세레나의 신력 통로가 그 온기를 갈구하듯 미세하게 열렸다. 라엘은 자신도 모르게 카시안의 제복을 움켜쥐었다. 카시안의 몸이 아주 조금 굳었다. “놓지 그래요?” “놓으면 쓰러집니다.” “제가 일부러 넘어진 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이 몸의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것도 압니다.” 카시안의 대답이 너무 차분해서 라엘은 괜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제복을 짚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세우려 했지만, 감각이 사라진 다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카시안의 손이 더욱 단단해졌다. 그의 손바닥이 얇은 예복 위로 완전히 밀착되자 라엘의 호흡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카시안 역시 그 변화를 느낀 듯 시선을 내렸다가 곧바로 그녀의 얼굴로 돌렸다. “성녀님께서는 지금 움직이실 수 없습니다.” 의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목걸이를 제거했어도 쇠약해진 몸이 곧바로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며칠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그동안 지하에 있는 사람들이 죽으면요?”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요.” 라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목걸이가 사라지자 조금 전까지 막혀 있던 세레나의 기억과 감각이 전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돌벽과 비릿한 피 냄새, 누군가 살려 달라고 우는 목소리. 그중 하나는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마리안. 황실에 도움을 청하려 했던 소녀가 지하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 “어떻게 아는 겁니까?” 카시안이 물었다. “이 신전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기억이 보여요.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고요.” 라엘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쿵. 한참 뒤. 쿵. 금방이라도 멈출 것처럼 약한 박동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카시안은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라엘의 무릎 뒤로 한 팔을 넣고 그대로 몸을 들어 올렸다.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라엘이 짧게 숨을 삼키며 그의 목을 붙잡았다. 가벼운 몸이 카시안의 가슴에 밀착됐다. 목 뒤로 둘러진 라엘의 팔과 뺨 가까이에 흩어진 은빛 머리카락, 품 안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호흡 때문에 카시안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고쳐 안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직접 걸을 수 없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부축하면 되잖아요.” “감각이 없는 다리로 계단을 내려갈 생각입니까?” “천족을 이렇게 함부로 안는 인간은 처음 봐요.” “황태자의 얼굴을 함부로 만진 천족도 당신이 처음입니다.” 반박할 말이 없어진 라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몸 안으로 스며드는 카시안의 신성력은 아까보다 더욱 뜨거웠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가까이에서 전해졌다. 쿵, 쿵. 규칙적인 박동을 듣고 있자 불안정하던 세레나의 심장도 조금씩 같은 속도를 찾아갔다. 라엘은 고개를 들어 카시안의 얼굴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를 계속 안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무슨 뜻입니까?” “당신의 신성력이 이 몸을 안정시키고 있어요.” 카시안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그것도 신의 뜻입니까?” “글쎄요. 제 생각에는 당신이 저랑 아주 잘 맞는 것 같은데.” 라엘의 말에는 다른 의도가 없었다. 두 사람의 신성력 결이 잘 맞는다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세 남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의원이었다. 데미안은 목을 가다듬으며 바닥에 떨어진 돌가루를 유난히 진지하게 살폈고,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팔에 힘을 준 채 무표정하게 물었다. “인간계에서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왜요?” “오해를 부를 수 있으니까.” “무슨 오해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설명해요.” “시간이 없다면서요.” 라엘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카시안의 목에 팔을 조금 더 편하게 둘렀다. 그 모습을 본 데미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하지만 성녀님의 몸이…….” “내가 데려간다.” 단호한 대답에 데미안은 더 말하지 않았지만 라엘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더니 벌써 직접 안고 다니네요.” “수사에 필요한 증인을 운반하는 것뿐입니다.” “증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중하게 안고 있는데.” 카시안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라엘의 몸이 더욱 깊이 그의 가슴에 밀착됐다. “계속 말하면 방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건 안 되죠. 저 없이는 입구도 못 찾을 텐데.” 라엘은 승리했다는 듯 웃었다. 카시안은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문이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제들과 시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죽었다 살아난 성녀가 황태자의 품에 안겨 나오는 모습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성녀님께서 아직 편찮으시다.” 카시안이 차갑게 명령했다. “오늘 이 방에서 보고 들은 일은 황실의 허가가 있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성녀궁은 지금부터 황실 성기사단이 통제한다.” 고위 사제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성녀궁은 대신전의 관할입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도 신전의 허락 없이 병력을 배치하실 수는 없습니다.” “성녀의 목숨이 위협받았다.” “성녀님께서는 원인 모를 병을 앓으셨을 뿐입니다.” “성녀의 몸에서 저주받은 주구가 발견되어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나?” 사제의 얼굴이 굳었다. “저주받은…… 주구라니요?” “더 알고 싶다면 그대들이 성녀에게 약이라며 먹인 것들과 로젠하르트 공작가에서 받은 물품의 목록부터 준비해라.” 카시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대신전의 긴 복도에는 철야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성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카시안의 품에 안긴 그녀를 보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여신의 기적이 성녀님과 함께하기를.” “빛의 성녀께 축복이 있기를.” 낮고 경건한 기도가 복도를 채웠다. 라엘은 카시안의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세레나가 평생 들어 온 기도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신의 축복이라 부르고 신성제국을 지킬 성녀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세레나가 살려 달라고 할 때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라엘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저 사람들의 기도요.” 카시안이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왜입니까?” “정작 세레나가 살려 달라고 할 때는 아무도 듣지 않았잖아요.” 그 말에 카시안의 턱이 굳었다. 잠시 뒤 그가 낮게 대답했다. “그 점은 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라엘이 그의 얼굴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도 몰랐어요?” “제국 전역의 실종자를 조사하면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죽어 가던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했지만 라엘은 그 아래에 가라앉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분노와 자책, 그리고 더는 누구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 “황태자 탓은 아니에요.” “위로입니까?” “사실을 말한 거예요. 인간은 눈이 두 개나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게 많으니까.” “그 말을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당신에게 듣고 싶지는 않군요.” 라엘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말대꾸를 잘하네요.” “당신에게만 특별히 그러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성녀궁을 벗어나 대신전의 서쪽 회랑으로 향했다. 라엘은 세레나의 기억을 따라 방향을 지시했다. 오른쪽. 다시 왼쪽. 빛의 여신상이 세워진 작은 기도실을 지나 성상 뒤의 좁은 통로까지. 공식 도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길을 따라갈수록 사람의 발길은 줄어들고 공기는 차가워졌다. 천장도 점점 낮아졌지만 카시안은 라엘이 부딪치지 않도록 그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갑자기 머리 위를 덮은 온기에 라엘이 고개를 들었다. “뭐 해요?” “천장이 낮습니다.” “저는 안 보여서 몰랐어요.” “그래서 하고 있는 겁니다.” 무심하게 대답한 카시안이 낮은 돌기둥 아래로 몸을 숙였다. 라엘의 얼굴이 그의 목 가까이 닿았다. 미세하게 젖은 검은 머리카락 끝과 단단한 턱선,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가까워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의 향이 났다. 찬 밤공기와 검, 그리고 뜨겁고 깨끗한 신성력의 향. 라엘은 처음 경험하는 낯선 감각에 잠시 말을 잊었다. 천족에게 인간은 언제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존재였다. 짧은 생을 살다 천상으로 돌아오는 수많은 영혼 중 하나. 이렇게 가까이에서 체온과 숨결, 심장의 박동까지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왜 조용해졌습니까?” 카시안의 물음에 라엘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말이 많다고 할 때는 언제고, 조용하니까 또 물어요?”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줄 알았습니다.” “걱정했어요?” “증인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 증인이라는 말, 나중에도 계속할 수 있는지 두고 봐요.” “무엇을 두고 보겠다는 겁니까?” “저를 마음에 들어 하게 될 때요.” 라엘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머리를 감쌌던 손이 떨어지기 전, 은빛 머리카락을 따라 손끝이 아주 느리게 스쳤다. 마침내 오래된 철문 앞에 도착했을 때 라엘이 손을 들었다. “여기예요.” 데미안이 앞으로 나가 철문을 확인했다. 문에는 대신전의 봉인과 함께 낯선 검은 문양이 겹쳐 새겨져 있었다.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문양이에요.” 라엘의 말에 카시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신전 안에 어떻게 이런 것이…….” 데미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라엘은 카시안의 품에서 몸을 틀어 철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래에 있어요.” “누가 말입니까?” “마리안.” 라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아직 살아 있어요.” 그 순간 철문 너머에서 희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쿵. 그리고 한참 뒤. 쿵. 사람의 심장 소리였다. 카시안은 라엘을 데미안에게 맡기려 했지만 그녀가 그의 제복을 단단히 붙잡았다. “같이 들어갈 거예요.”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거잖아요.” “당신의 몸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싸우는 건 황태자가 하고 저는 길을 찾으면 되죠.” 카시안은 고집스럽게 자신을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힘이 부족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그가 데미안에게 명령했다. “문을 열어.” 성기사단장의 검이 철문의 봉인을 갈랐다. 콰득―! 신성력과 죽음의 기운이 충돌하며 검은 불꽃이 튀었다. 오래 잠겨 있던 철문이 느리게 열리자 지하에서 차갑고 비릿한 바람이 밀려 나왔다. 피 냄새였다. 라엘의 얼굴이 굳었다. 어둠 아래에서 수십 명의 흐느낌이 겹쳐 들려왔다. 이미 죽은 자들의 목소리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의 숨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계단 가장 아래에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누군가 어둠 속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시안은 라엘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다른 손으로 검을 뽑았다. 황금빛 신성력이 검신을 타고 번지면서 어둠의 일부를 밀어냈다. 빛이 닿은 계단 아래. 피투성이가 된 어린 소녀가 벽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마리안?” 카시안의 부름에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가슴 한가운데에는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검은 태양이 새겨져 있었다. 소녀의 갈라진 입술이 움직였다. “도……망쳐요.” 마리안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 여자가…… 성녀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철문이 굉음과 함께 닫혔다.한 글자.‘에.’세레나의 손가락이 라엘의 손바닥 위에서 멈췄다.검은 가시가 그녀의 목을 휘감아 꽃밭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고통으로 흔들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목소리 대신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세레나!”라엘은 멀어지는 손을 붙잡았다.검은 가시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팔까지 휘감았다. 날카로운 끝이 피부를 찢고 영혼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라엘은 손을 놓지 않았다.꽃밭 아래에서 떠오른 거대한 눈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검은 눈동자 안에는 수백 명의 얼굴이 비쳤다. 아스테리아에게 피를 빼앗긴 사람들, 죽은 뒤에도 영혼을 붙잡힌 희생자들이 소리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내 진명을 입에 담는 순간, 세레나의 영혼부터 찢어질 테니까.’아스테리아의 웃음소리가 하얀 세계를 뒤흔들었다.‘그 아이가 네게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니?’검은 가시가 더욱 거세게 세레나를 끌어당겼다. 발밑의 꽃들이 썩어 가며 검게 변했다.라엘은 세레나의 손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말하지 않아도 돼.”세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이름은 내가 찾을게.”‘라엘…… 님.’“그러니까 버텨.”라엘의 몸에서 금빛이 터져 나왔다.가시가 타들어 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를 끊으면 두 개가 돋아났고, 두 개를 끊으면 네 개가 세레나의 영혼을 휘감았다.이곳은 세레나의 내면이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아스테리아의 저주에 잠식되어 있었다. 라엘이 무리하게 힘을 쓰면 세레나의 영혼도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아스테리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해 봐.’검은 눈이 즐겁다는 듯 휘어졌다.‘그 아이를 구하려고 힘을 쓸수록 네가 직접 세레나를 찢게 될 테니.’라엘은 입술을 깨물었다.가시를 태우던 금빛이 흔들렸다.그 순간 멀리서 희미한 박동이 들렸다.쿵.세레나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라엘의 영혼과 연결된 또 하나의 심장.카시안이었다.‘라엘.’현실에서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하얀 세계까지 닿았다.‘눈을 떠.’은빛 실이 어
검은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로 변했다.라엘의 가슴에 남은 꽃잎은 세 장.성휘제까지 남은 시간도 사흘이었다.‘꽃잎이 모두 떨어지는 밤, 네 몸은 나의 것이 된다.’아스테리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라엘의 심장을 파고들던 통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나 표식은 지워지지 않았다. 검은 장미의 가시는 새로 만들어진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아래로 느리게 뛰는 심장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카시안이 망토 자락을 여며 라엘의 몸을 가렸다.“표식을 옮길 수 있나?”“다른 사람한테?”“내게 돌려놔.”라엘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처음으로 제 눈에 담은 카시안의 얼굴은 목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단단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 아래로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고, 피가 묻은 얼굴에도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차갑지 않았다.걱정과 분노, 조금 전 자신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느꼈던 두려움까지 감추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싫어.”라엘이 잘라 말했다.“왜지?”“겨우 빼앗아 왔는데 다시 줄 것 같아?”“그건 빼앗은 게 아니라 떠넘겨진 거다.”“결과는 같아. 아스테리아는 이제 너보다 나를 원하고 있어.”“그 사실이 마음에 드나?”“적어도 네 심장을 뽑겠다는 계획은 미뤄졌잖아.”카시안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대신 죽는다면 아무 의미 없다.”“죽을 생각 없다니까.”“아까 심장이 멎었다.”“그건 세레나의 몸이고, 지금 나는 멀쩡해.”라엘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자신의 심장이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세레나의 약한 육체를 빌리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박동이었다.그러나 카시안은 안심하지 않았다.“해가 뜨면 이 몸은 사라진다고 했지.”“응.”“그럼 표식은?”라엘의 손이 멎었다.그 부분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표식은 세레나의 육체가 아니라 라엘의 영혼을 따라왔다. 해가 뜬 뒤 임시 육체가 사라져도 저주는 영혼에 남을 가능성이 컸
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가 심장을 향해 뿌리를 뻗기 시작했다.하얀 피부 아래로 검은 핏줄이 빠르게 번졌다. 손목을 휘감은 가시는 팔꿈치를 지나 어깨까지 올라왔고, 그 끝이 가슴을 향해 파고들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터졌다.라엘의 무릎이 꺾였다.“라엘!”카시안이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장부 조각 위에서는 여전히 붉은 글자가 번지고 있었다.〔성휘제 최종 제물 변경.〕〔라엘.〕카시안의 이름에 그어진 검은 선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더니 종이 위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느다란 연기가 된 선은 라엘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동시에 카시안의 심장을 감싸고 있던 죽음의 표식도 반응했다.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전하!”다미안이 다급히 다가왔다.“가까이 오지 마!”라엘이 외쳤다.그녀와 카시안 사이에 검은 실이 나타나 있었다. 영혼의 공간에서 더 깊게 연결된 두 사람을 따라 저주가 옮겨 다니고 있었다.카시안에게 새겨졌던 제물의 표식이 라엘에게 넘어가는 대신, 라엘이 느끼는 고통이 카시안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다미안이 검 끝으로 검은 실을 끊으려 했다.“자르면 안 돼.”라엘이 이를 악물고 그의 검을 붙잡았다.“이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야. 제물의 자리를 바꾸는 계약이야.”“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우선 이 방에서 나가야 해.”바닥에 흩어진 거울 조각들이 일제히 떨리기 시작했다.조각마다 아스테리아의 얼굴이 비쳤다. 웃는 얼굴, 분노한 얼굴, 피를 마시며 황홀하게 눈을 감은 얼굴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라엘을 바라보았다.‘찾았다.’수십 개의 입술이 동시에 움직였다.‘네 영혼으로 향하는 길을.’깨진 거울 사이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나왔다.다미안이 검을 휘둘렀다. 신력이 실린 검격에 앞쪽의 손들이 잘려 나갔지만, 거울 조각은 침실 바닥과 벽을 기어 다니며 끊임없이 새로운 손을 만들어 냈다.카시안은 고통을 누른 채 일어섰다.“장부를 챙겨.”“이미 있습니다.”다미안이 타다 남은 종이를 품 안에 넣었다.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이 라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표면이 물처럼 출렁이며 손과 팔을 삼켰다. 라엘이 반대편 손으로 거울의 은제 테두리를 붙잡았지만, 발밑이 미끄러지며 몸 전체가 앞으로 쏠렸다.“라엘!”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거울 안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사람 하나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라엘의 어깨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카시안은 그녀의 몸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세게 당겼다.그러나 두 사람의 몸에 이어진 신력이 동시에 반응했다.라엘의 손목에 새겨진 검은 장미와 카시안의 심장 옆에 박힌 죽음의 표식이 붉게 빛났다.쿵.거울 너머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한 번의 박동이 침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카시안의 발이 바닥에서 밀렸고, 거울 가까이에 있던 촛대와 탁자까지 검은 표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다미안이 카시안의 망토를 붙잡았다.“전하!”그 순간 침실 문이 부서졌다.쾅!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저택의 기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목이 기이하게 꺾인 자도 있었고 가슴에 검이 박힌 채 걷는 자도 있었다.죽은 자들을 움직여 만든 인형이었다.다미안은 한 손으로 카시안의 망토를 붙들고 다른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가장 먼저 달려든 인형의 목이 잘려 나갔지만,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목을 잃은 시체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이런 빌어먹을…….”다미안이 이를 악물었다.거울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카시안의 상체까지 검은 표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라엘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 보이지 않았다.카시안은 자신의 망토를 붙잡고 있던 다미안의 손을 떼어 냈다.“밖을 맡아.”“전하, 안 됩니다!”“거울이 닫히지 않게 해.”“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그래서 혼자 보낼 수 없다.”카시안은 망설이지 않았다.라엘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준 채 거울 속으로 몸을 던졌다.“전하!”다미안의 외침이 멀어졌다.시야가 검게 뒤집혔
“공작부인에게서 왜 이렇게 진한 피 냄새가 나는 걸까요?”라엘의 물음이 떨어진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소리가 멎었다.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들던 바람도, 신관들의 예복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라엘의 손을 잡고 있던 아델리아의 손가락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러나 당황은 찰나였다.아델리아는 금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피 냄새라니요?”“아주 많은 사람의 피가 엉겨 붙은 냄새예요.”“성녀님께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아델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새벽, 신전 서쪽 구호소 일부가 무너졌답니다. 저도 부상자들을 옮기는 일을 도왔으니 그때 피가 묻었을지도 모르겠어요.”“그래요?”“예. 보시다시피 급히 오느라 옷도 갈아입지 못했으니까요.”장미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델리아가 향이 밴 소매를 일부러 라엘 가까이 가져온 듯했다.하지만 라엘이 맡은 피 냄새는 옷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아델리아의 살갗 아래, 본래 그 몸에 속하지 않은 영혼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마신 피와 빼앗은 생명력이 영혼에 눌어붙어 만들어 낸 악취였다.라엘이 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이상하네요. 옷이 아니라 공작부인의 몸속에서 나는 것 같은데.”사절단에 섞여 있던 신관 하나가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말없이 아델리아를 바라보았고, 다미안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아델리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 순간 두 사람의 맞잡은 손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다.죽음의 기운이었다.가느다란 검은 실이 라엘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와 손목을 휘감았다. 피부 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혼을 직접 노리고 들어오는 저주였다.동시에 아델리아의 몸 안에서 낯선 얼굴이 웃었다.연한 금발과 청명한 녹색 눈동자. 오래전 신전에 걸려 있던 초상화 속에서라면 누구보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보였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과 광기로 일그러져 있었다.옛 성녀 아스테리아.그녀의 입술이 움직
끝없이 펼쳐진 하얀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이름 모를 꽃들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멀리 보이는 지평선도 지나칠 만큼 희었다. 천상과 닮았으나 천상은 아닌 곳. 누군가의 영혼 깊숙한 곳에 만들어진 작은 안식처였다.라엘은 꽃밭 한가운데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신비로운 연보라색 머리카락. 눈을 감고 있어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 느껴지는 얼굴. 라엘이 지금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이었다.“세레나.”불러도 대답은 없었다.라엘은 꽃을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세레나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손끝이 햇빛에 녹는 눈처럼 투명했다.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세레나는 잠들어 있었다.누군가에게 힘을 빼앗긴 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라엘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싸려는 순간, 꽃밭이 일그러졌다.낯선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화사한 햇살이 비치는 신전의 정원이었다. 눈이 보이던 시절의 세레나가 하얀 장미를 다듬고 있었다. 그 앞에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아델리아 로젠하르트.그녀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성녀님을 생각하며 특별히 주문한 것이랍니다.’상자 안에는 은빛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중앙에 박힌 보랏빛 보석은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것처럼 영롱했다.세레나는 의심하지 않았다.아델리아는 오랫동안 신전을 후원해 왔다. 전염병이 돌았을 때는 구호소를 세웠고, 흉년에는 누구보다 많은 식량을 내놓았다.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과 병든 이들을 위한 요양원도 운영했다.사람들은 그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 불렀다.세레나 역시 그녀를 선한 사람이라고 믿었다.‘제가 직접 걸어 드려도 될까요?’아델리아가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차가운 보석이 세레나의 가슴에 닿던 순간, 아주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착각이라 여기고 넘길 만큼 희미한 소리였다.그날 밤부터 세레나는 악몽을 꾸었다.검은 손이 심장을 움켜쥐고, 이름 없는 이들이 어둠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