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화

Author: 수박빙수
윤하경은 핸드폰을 들어 소지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경아, 설마 구지호랑 끝까지 간 거야? 첫 경험은 결혼할 때까지 남겨둔다고 하지 않았어?]

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누가 구지호라고 했어? 다른 남자가 없을 것 같아 보여?]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소지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진짜야? 윤하경, 대단한데?”

소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 구지호 같은 쓰레기를 네가 차버렸다니! 역시 내 친구!”

누가 봐도 구지호가 형편없는 남자라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윤하경도 예전에 그에게 푹 빠졌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를 믿고 사랑했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내가 구지호를 찼어. 그렇게 소문내줘.”

윤하경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구지호는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윤하경은 그를 망신 주고 싶었다.

“근데 그 남자는 누구야?”

윤하경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답했다.

“옷 갈아입고 회사에서 얘기하자.”

“알았어. 그런데 오늘 중요한 고객 만나는 날이니까 빨리 와.”

전화를 끊고 호텔을 나선 윤하경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젯밤, 그녀는 차를 가져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왔었다.
 시계를 보니 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

난감해하며 고민하던 순간, 익숙한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
 천천히 내려가는 창문 너머로 강현우가 보였고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차 안 가져왔어?”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럼 택시를 부르면 되겠네. 난 먼저 간다. 잘 있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몰고 떠났다.

“뭐야, 진짜?”

윤하경은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세게 차며 혼잣말했다.

“남자는 다 똑같아. 할 일 끝나면 모른 척.”

윤하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구지호와 윤하연이었다.
 둘은 그녀의 아버지 윤수철과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윤하경은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계단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윤수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거기 서!”

“어젯밤 어디 갔던 거야? 여자애가 밤새 집에 안 들어오고 네가 뭘 하는지 알고나 있어? 지호가 너 기다리느라 얼마나 애를 태웠는데!”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SNS를 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의 뺨에 손자국이 먼저 남았을 테니까.

그녀는 뒤돌아 구지호를 힐끔 쳐다본 뒤, 그의 옆에서 나약한 척 앉아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를 기다렸다고? 옆에 이렇게 잘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

그녀의 비꼬는 말에 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쳤다.

“이런 불효녀가 다 있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어? 어떻게 지호와 네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윤하경은 뺨을 감싸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그녀가 말도 꺼내기 전에 윤하연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언니, 오빠를 오해하지 마. 어제는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오빠가 나를 위로해 준 것뿐이야. 언니가 오해했다면 미안해.”

그러면서도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무 화내지 마. 그렇다고 다른 남자랑...”

윤하경은 그녀의 눈물 연기를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어제 오후, 그녀는 구지호와 윤하연이 서로 껴안고 있던 꼴을 똑똑히 목격했다.
 둘은 마치 껌처럼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위로해 준다고 껴안고 애정 행각을 벌였나 보네?”

윤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이제 구지호와 약혼식은 다시 진행해야겠네?”

윤하경의 말에 윤하연은 크게 당황했지만 윤하경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밌어? 내가 버린 걸 네가 가져갔으니, 둘이 오래오래 잘 살아.”

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넌 원래 그런 거잖아. 남이 쓰다 버린 걸 좋아하는 개. 난 언니니까 당연히 양보해야지.”

윤하경은 차갑게 등을 돌려 거실을 나서려 하자 구지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윤하경, 가지 마. 얘기 좀 해.”

윤하경은 짜증스럽게 돌아보며 말했다.

“난 개소리는 알아듣지 못해.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윤하경의 말에 구지호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윤하경은 그의 시선을 읽고 비웃음을 흘렸다.

모두가 윤하경이 구지호에게 오랫동안 매달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구지호는 그동안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지만 3년 전 갑자기 윤하경의 고백을 받아들였고 이후 두 집안은 약혼 이야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지호가 윤하연과 엮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윤하경은 깊은 배신감과 역겨움을 느꼈다.

구지호는 윤하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에 윤하연의 어머니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하연과 관계를 맺은 건 그녀에게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구지호와 윤하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윤하경은 결심했다.

‘구지호 같은 쓰레기 남자는 필요 없어.’

평소라면 모든 걸 담담히 넘겼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복수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구지호는 윤하경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윤하연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아빠... 지호 오빠... 이건 제 잘못이에요. 모두 제 탓이에요...”

그러더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윤하연은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3)
goodnovel comment avatar
장경숙
완전 재밌고 웃김 예상도 했지만~
goodnovel comment avatar
고윤주
재밌네요......
goodnovel comment avatar
yeim815
굿굿 재밌어여 다행
VIEW ALL COMMENTS

Related chapters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3화

    구지호는 쓰러질 듯한 윤하연을 서둘러 부축했다. 
윤하경은 꼴도 보기 싫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거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윤수철이 소리를 질렀다.
“윤하경! 당장 돌아와! 그 남자는 대체 누구야?!”‘역시. 우리 아버지는 늘 내 잘못만 본다니까.’윤하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지호와 윤하연이 서로 껴안고 있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을 땐 마치 귀머거리가 된 사람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하지만 윤하경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5년 전, 계모와 윤하연이 이 집에 들어온 후에 이곳은 그녀에게 더 이상 ‘집’이라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엄마의 물건들이 이 사람들 손에서 망가질까 봐 참으며 머물고 있었을 뿐이었다.회사의 문을 열고 들어선 윤하경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을 때쯤, 소지연이 다가왔다.
“하경아, 상대 회사 사람들이 왔어. 게다가 대표님이 직접! 우리 이번 프로젝트 진짜 중요한가 봐.”
소지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특히 네가 직접 만나길 원한대. 잘해봐! 내가 다음 달 유럽 여행 갈 수 있을지는 네 손에 달렸어!”윤하경은 자신감 있게 회의실로 들어갔지만 문을 열고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잠시 발이 멈칫했다.
 그곳에 강현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윤 대표님,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냉정한 태도였다.윤하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강 대표님께서 직접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프로젝트는 ‘자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테마를 통해 귀사의 제품이 경쟁사와 차별화될 수 있는 요소를 부각할 계획입니다.”윤하경은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다. 일에 몰두한 그녀의 표정은 더욱 진지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눈가의 붉은 점은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4화

    택시 안에서 윤하경은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덧발랐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이 조금은 생기를 되찾았다.
30분쯤 지나, 택시는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는 클럽 ‘옥타곤’ 앞에 멈췄다.
 하이힐을 신고 안으로 룸에 들어서자 안에는 남녀가 뒤섞여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방 안 공기는 담배 연기, 술 냄새, 그리고 강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를 정도였다.
 윤하경은 손으로 코를 가리며 가볍게 기침하고 안쪽을 둘러보며 온지우를 찾았다.하지만 온지우 대신, 그녀가 발견한 건 소파에 비틀거리며 누워 술을 마시고 있는 구지호였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했다.
‘재수 없게.’온지우가 구지호와 짜고 자신을 여기로 불렀다는 게 뻔히 보였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돌아서서 나가려 했지만 구지호가 이미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구지호의 흐릿하던 눈빛이 윤하경을 보자마자 선명해졌고 그는 휘청거리며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손을 붙잡았다.
“하경아, 가지 마. 우리 얘기 좀 하자.”“얘기할 게 없어.”
윤하경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을 놓지 않고 애원했다.
“하경아, 내 말 좀 들어봐. 나랑 윤하연은 그런 사이가 아니야. 걔가 먼저 나한테 접근한 거야.”“그만해.”
윤하경은 그의 말을 끊고 쏘아붙였다.
“책임을 여자한테 떠넘기는 게 남자라고 생각해? 윤하연이 잘못했다면 너도 똑같아. 둘 다 한심하다고.”구지호는 그녀의 날 선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생 남에게 비난받아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늘 자신을 쫓아다니던 윤하경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구지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내가 이렇게 사과했으면 됐잖아.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정말 약혼을 깨겠다는 거야?”
그는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
“하경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매달렸는지 잊었어? 네가 그렇게 애원해서 내가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화

    “죄송합니다. 두 분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에요.”
강현우는 코끝을 한번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윤하경과 구지호 사이를 지나치려 했지만 윤하경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당기며 구지호를 향해 말했다.
“어제 내가 누구랑 있었는지 알고 싶다며? 바로 이 사람이야.”윤하경의 말에 구지호의 창백하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지만 이내 흘깃 웃으며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
“강 대표님, 죄송합니다. 하경이가 잠시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같네요. 먼저 들어가서 술 한잔하시죠.”강현우는 상류층에서도 가장 손대기 어려운 인물로 통했다.
 그의 집안은 재력과 권력 모두 독보적이었고 젊은 나이에 이미 가문 기업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윤하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어젯밤 함께 잤는데 이 작은 부탁도 못 들어주나?’그때 구지호가 말했다.
“하경아, 네가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 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강현우를 끌어들이는 건 위험해.”그 말을 들은 강현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구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구 대표님의 말은 제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인가요?”구지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그가 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강현우는 윤하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 끝났으니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윤하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갈까요?”구지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현우는 평소 누군가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런 그가 윤하경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다니.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구지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옆 벽에 주먹을 내리쳤다.강현우는 블랙 마이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6화

    소지연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뭐 어때? 안 되면 말지. 우리한테 고객이 그 사람 하나뿐이 아니잖아. 천천히 하면 돼.”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겉으로는 언제나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가끔 모든 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는 자신을 철옹성처럼 단단히 감싸며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면 누군가 틈을 타 자신을 짓밟아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그녀는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춘 닭처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고 평소라면 윤수철은 벌써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하지만 오늘 윤수철은 소파에 단정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그를 못 본 척 지나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어디 갔다 온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윤하경은 돌아서며 쏘아붙였다.“갑자기 왜 저한테 관심을 가지세요?”엄마가 살아있던 시절, 윤수철은 괜찮은 아버지였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계모와 윤하연이 이 집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부녀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였고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윤수철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지만 평소와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하경아, 여기 앉아봐. 할 얘기가 있어.”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오랜만이라 더 의심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윤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하경아, 우리 가문이 여기까지 오는데 쉽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다... 네 엄마가 남긴 물건 좀 나한테 줄 수 없겠니?”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그건 절대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외쳤다.“그건 엄마가 저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드릴 수 없어요!”엄마가 남긴 건 열쇠 하나였다. 하지만 그 열쇠는 그녀가 스물네 살이 되기 전까지 열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엄마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보관한 상자의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7화

    오늘은 윤하경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3년 전부터 윤수철은 이날을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주미나는 매년 이날을 기억하며 윤하경과 함께 산소를 찾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올해는 윤하경 자신조차도 그날을 잊고 있었다.윤하경은 전화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에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하경아, 오늘 오후에 같이 네 엄마 산소에 가자.”주미나는 부드럽게 말했고 윤하경은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네, 어머님. 같이 가요.”결국, 그녀는 주미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8시였다. 그녀는 이른 시간이지만 회사를 들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회사의 상황은 최근 들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온지우가 어제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의 집안에서 맡고 있던 사업 일부를 윤하경의 회사에 넘겼다.온지우는 농담 반, 사과 반으로 메시지를 남겼다.[하경아,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구지호가 울면서 부탁하길래 도와준 거야. 이번 건 내가 우리 아버지의 파트너들한테서 어렵게 따낸 거야. 나중에 내가 회사를 맡게 되면 광고나 기획은 전부 너한테 맡길게.]메시지에 계약서 링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우리 회사 직원이 곧 너희와 협의하러 갈 거야. 걱정 말고 편히 있어.]윤하경은 메시지를 읽으며 약간 고개를 젖혔다. 온지우에게 화를 내는 것도 어쩐지 의미 없게 느껴져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온지우와 윤하경은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고 그녀가 구지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온지우가 두 사람을 다시 이어보려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사랑할 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온지우 역시 그녀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오늘 이렇게 직접 사과하며 사업을 제안했을 것이다.온지우가 준 사업은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8화

    휴대폰 화면에는 강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시간 없어.]짧은 두 글자는 마치 그녀와의 대화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차에 타자마자 주미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하경아, 조금 있다가 지호랑 데이트라도 해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잖아.”그녀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다음에 하죠.”구지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비록 그녀가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때 자신을 향했던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전의 윤하경이라면 감히 이렇게 선을 긋지 않았을 텐데.그는 복잡한 표정을 숨긴 채 차를 몰아 구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윤하경은 차에서 내리며 주미나에게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구지호는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바람피운 주제에. 이미 끝난 사람인데 내가 왜 다시 신경 써야 하지?’그녀는 단호히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그가 있는 곳의 소음이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어, 하경아! 이제 화 푼 거야?”온지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지.”“뭔데? 말만 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온지우는 이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강현우가 오늘 밤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윤하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온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너 설마 강현우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지? 그 남자는 좀 무서운 사람이야. 며칠 전에 어떤 여자가 강현우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알몸으로 호텔 밖에 던져졌다는 얘기도 들었어.”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태연한 목소리로 말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9화

    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러자 추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어이구, 네가 구지호를 차버렸다던데 사실이야?”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성운 씨,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셨죠?”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다를 떨려고 온 게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바로 강현우와의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수억 원 규모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운영이 한결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장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된다.온지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얼른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성운 씨, 아까 드시기로 한 술이 아직 석 잔 남아 있는 거 기억하시죠? 제가 직접 따라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온지우는 추성운을 다른 자리로 끌고 가며 윤하경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윤하경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잔을 손에 들고 강현우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강현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저 좀 불편한데 여기 좀 눌러주세요.”그 여자는 말하면서도 경계 어린 눈길로 윤하경을 힐끔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며 윤하경을 째려봤다. 이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물었다.“그래? 어디가 불편한데? 여기? 아니면 여기?”그는 말하며 그 여자의 허리 주위를 천천히 어루만졌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윤하경을 쳐다보지 않았다.강현우의 태도는 윤하경에게 굴욕을 주려는 듯 보였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숨소리가 가빠졌다.“현우 씨, 정말 나쁜 남자야.”윤하경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도 꽤 많은 상황을 겪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여전히 낯부끄럽게 느껴졌다.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윤하경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저기, 강 회장님, 사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계약 건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지금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10화

    윤하경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금세 파티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이전에 구지호의 기분을 신경 쓰느라 이들과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술잔을 드는 모습을 처음 보며 놀랐고 농담을 던졌다.“하경 씨, 오늘 정말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 이렇게 큰 판을 깔아주시다니요.”윤하경은 대꾸하기도 귀찮아했다.‘몇억 원짜리 계약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그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고 강현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에 윤하경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큰 잔의 술을 급하게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입가에서부터 턱,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쇄골과 드레스 속으로 스며들었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고 아무도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볼 때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몇 잔의 술이 넘어가며 윤하경의 얼굴엔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윤하경은 멈추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잔씩 더 마셨다. 몇 잔을 더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강현우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순간 윤하경은 동작을 멈췄다.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구지호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윤하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오늘 밤 계약하러 간다더니 이런 데 와서 술 마시고 있었어? 윤하경, 넌 자존심도 없어?”술기운에 흐릿했던 윤하경의 눈빛은 단숨에 차갑게 변했고 차분히 입술을 다물었다.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 씨, 일단 개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저한테 와서 계약 이야기하시죠.”비즈니스와 관련된 말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서 조롱의 뉘앙스를 읽어냈다.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큰 키와 존재감은 방 안

Latest chapter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23화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22화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21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20화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19화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18화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17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16화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제515화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