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햇빛이 조금 더 깊숙이 처소 안으로 스며들었을 무렵, 문이 다시 열렸다.이번에는 내관 혼자가 아니었다. 내명부의 관리 둘과 기록을 맡은 서리 하나, 그리고 낯선 눈빛을 한 무관이 함께 들어섰다. 그들은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살피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눈들이었다.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로 그들을 맞았다. 이제는 예를 갖추는 것조차 조사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해석될 것이었다."빈마마."내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불렀다."앞서 조사에 이어 몇 가지를 더 확인하고자 합니다.""묻거라."그녀의 대답은 짧았다. 그 짧음 속에는 더 이상 덧붙일 것도, 해명할 것도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도진 나으리와 마지막으로 대면한 시각이 언제입니까?"상궁의 손이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정확한 시각은... 기억하지 못한다.""기억하지 못하십다고요?"내관이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도진 나으리는 빈의 처소 인근을 여러 차례 순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순찰은 그의 임무이옵니다.""그 임무가 유독 빈마마의 처소에만 집중될 이유가 있습니까?"이수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망설임이 아니라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증거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궁이 소란스러웠습니다."그녀가 낮게 말했다."도진 나으리는 저하의 분부를 따랐을 뿐이옵니다."내관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이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빈마마의 처소에서 발견된 물건 중, 외부에서 반입된 것으로 보이는 물품들이 있습니다.""저는 그 물건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그러나 그 물건들이 빈마마의 처소에 있었습니다."이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포기도 없었지만, 기대도 없었다.
새벽은 예고 없이 도착했다.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도 울리지 않았지만, 궁은 분명히 깨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운명이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려는 듯,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이수의 처소 앞에 발소리가 멎은 것은 동이 트기 전이었다. 아직 하늘이 푸르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 애매한 시간. 밤과 낮 사이,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은 경계의 시간이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없었다. 두드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허락은 위에서 내려와 있었고, 남은 것은 문을 여는 절차뿐이었다."분부에 따라 처소를 열겠습니다."내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명령을 전달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항상 그렇게 비어 있는 법이었다. 마치 자신이 전하는 말의 무게를 느끼지 않으려는 듯 상궁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무슨 분부이옵니까.""빈의 처소에 대한 정식 조사입니다."'정식'이라는 말이 공기 속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 말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궁 전체가 지켜보는 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상궁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자신의 말은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는 것을. 변명도, 해명도, 모두 문서 속 활자가 되어 누군가의 판단을 기다리게 될 것이었다.문이 열렸다.아침 공기가 처소 안으로 밀려들었다. 차갑고 정돈된 공기, 사람을 몰아내는 공기였다. 이수는 그 차가움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빈마마."내관이 고개를 숙였다."조사에 앞서 간단한 확인이 있겠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묻거라.""최근 이 처소에 외부인이 드나든 일이 있습니까?"'외부인.'그 단어 하나에 상궁의 숨이 멎었다. 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녀의 속눈썹이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올라왔다."없다."그 대답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진실이란 때로 이렇게 무력한 것이었다.내관은 고개를 끄
밤은 깊어졌으나 궁은 잠들지 않았다.잠들 수 없는 밤이 있다는 것을이 궁은 너무 오래 알고 있었다.이수의 처소에는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문밖의 기척조차 사라진 뒤였다.지키는 자도, 감시하는 자도 이미 자리를 옮긴 뒤였다.이수는 그 사실을 의아해하지 않았다.지금 이 고요는 풀어주는 고요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밖은 보이지 않았으나 공기의 흐름이 바뀌어 있었다.바람이 멎고, 대신 묵직한 정적이 깔리는 감각.“얼마 안 남았구나…”그 말은 체념이 아니었다.이 순간을 오래 기다려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숨이었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마마, 내명부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사옵니다.”“대비전이겠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 마마. 그리고… 저하의 침전도 불이 꺼지지 않았사옵니다.”이수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저하께서는 결심하신 모양이구나.”그 말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다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조용한 인정만이 남아 있었다.“상궁.”이수가 말했다.“지금부터 내 처소에 드나드는 말은 하나도 기록하지 말거라.”상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마마, 그게 무슨”“기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이수는 담담했다.“내 이름으로 남는 기록은 이제 충분하다.”상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더 묻지 않았다.이미 물을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녀 또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 대비전.향은 짙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바빴다.말은 많지 않았으나 결정은 빠르게 내려지고 있었다.“빈의 처소에서 나온 물건들은 모두 정리되었습니까.”대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그 부드러움은 언제나 가장 단단한 형태였다.“예, 마마. 이미 대전 쪽에도 보고가 올라갔사옵니다.”“도진은?”잠시 침묵이 흘렀다.“…변방에 있습니다.”그 대답에 대비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잘 보내졌구나.”그 말은 안
밤은 조용히 내려앉았으나 그 고요는 잠을 부르는 종류가 아니었다.궁 안의 모든 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하나씩 닫히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이수의 처소는 여전히 봉쇄된 채였다.문밖에는 기척이 있었으나 그 기척들은 들어오지 않았다.들어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이미 안쪽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모두 묶여 있었으므로.이수는 등불을 끄지 않았다.어둠 속에 숨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지금 이 시간은 피하거나 낮출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그녀는 단정히 앉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손끝은 차분했다. 이상할 정도로.사람은 마지막을 감각할 때 이렇게 조용해진다.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그 발소리는 궁인도, 내관도 아니었다.걸음의 간격이 일정했고 멈춤이 없었다.상궁이 숨을 삼켰다.“마마…”“괜찮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올 것이 온 것이다.”문이 열렸다.이번에는 상궁의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았다.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현이 들어섰다.그의 옷자락에는 밤의 냄새가 묻어 있었다.차갑고, 얇고, 어디선가 피 냄새가 섞인 듯한 밤의 공기.“빈.”그가 낮게 불렀다.그 호칭은 예우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이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췄다.“저하.”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 보였으나실은 너무 많은 것이 말해지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현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등불, 자리, 아무도 숨지 않은 공간.“이토록 조용할 줄은 몰랐소.”“조용해야 했기 때문이옵니다.”이수가 대답했다.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빈은…”그가 말을 고르듯 잠시 멈췄다.“지금 이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정말 모르겠소?”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저하께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확신이옵니다.”현의 입술이 굳었다.“그 확신의 중심에 도진이 있지 않소.”그 이름이 방 안에 떨어졌다.
변방의 밤은 궁보다 훨씬 조용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잠들기 위한 고요가 아니라 숨을 죽이기 위한 고요에 가까웠다.도진은 말에서 내려 갑옷을 풀지도 않은 채 천막 앞에 서 있었다.불은 피워져 있었으나 그 불빛은 따뜻함을 주지 못했다.그는 그 불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불을 보면, 지금 이 자리가 어디인지 더 또렷해지기 때문이다.변방의 공기는 얇았다.숨을 들이마실수록 가슴 깊숙한 곳이 쓸렸다.그 쓸림은 부상의 통증이 아니었다.몸은 회복되고 있었으나 감각은 그렇지 않았다.그날 이후로 그는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칼날이 번뜩이고, 누군가의 손이 붉게 젖고,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울음만 남아 공기 속을 떠다니는 꿈.깨어나면 심장이 이유 없이 세게 뛰었다.손끝에는 아무것도 쥐지 않았는데도 검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청명.”그는 무심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여기에는 없는 것,지금은 쥘 수 없는 것.그 순간 가슴이 한 번 세게 조여왔다.숨이 멎는 듯한 통증.도진은 이를 악물고 천막 기둥을 붙잡았다.‘아직 아니다.’‘아직은… 돌아가면 안 된다.’그는 알고 있었다.지금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돌아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돌아와도 늦을 때까지 버티라는 뜻이라는 것을.그 시각, 궁.봉쇄된 처소 안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같았다.낮과 밤의 경계가 흐려졌고 기척은 모두 문밖에서 멎었다.이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밖을 볼 수는 없었다.휘장과 문, 그리고 봉쇄라는 이름의 벽이 겹겹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리지 않았다.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고 느낄 때 오히려 이렇게 차분해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마마…”상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렸다.“내명부에서 사람이 다녀갔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무엇을 가져갔느냐.”“가져간 것은 없사옵니다.”상궁의 숨이 흔들렸다.“다만… 무
밤은 낮보다 빠르게 궁을 잠식했다.해가 완전히 기울기도 전에 처소의 문은 닫혔고, 닫히는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쇠가 맞물리는 소리, 나무가 숨을 멈추는 소리.그것은 단순한 문단속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를 분리하는 소리였다.이수는 방 안 한가운데 서 있었다.상궁이 불을 밝혔으나, 등불의 빛은 넓게 퍼지지 않았다.마치 빛조차 이곳을 오래 머물기를 꺼리는 듯했다.“마마…”상궁이 입술을 떼었으나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잇지 못했다.이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허리를 곧게 세운 채, 등받이에 기대지도 않았다.이제 이 방 안에서는 기대는 행위조차 기록될 수 있었다.“밖은 어떠하더냐.”상궁은 고개를 낮추었다.“근위가 처소를 에워쌌사옵니다. 교대도 잦고… 내명부 쪽에서도 사람을 붙였다고 들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은 없었다.이미 대비전에서 문을 나설 때부터 이 밤의 모양을 알고 있었다.“사람들은?”“말을 하지 않사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듯하옵니다.”이수의 입가에 아주 옅은 웃음이 스쳤다.“그게 더 무섭지.”궁에서는 말이 사라질 때 피가 가까워진다.상궁은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왔다.“마마, 혹여 이 밤에 누군가 들이닥칠 수도 있사옵니다. 마음을 단단히”“괜찮다.”이수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흐트러짐이 없었다.“이 밤은 들이닥치는 밤이 아니다. 기다리게 하는 밤이지.”기다리게 하는 밤.그 말 속에는 도망도, 변명도 허락되지 않는 잔인한 여백이 숨어 있었다.잠시 후, 상궁은 밖으로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방 안은 완전히 고립되었다.그 고립 속에서 이수는 처음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 순간, 기억이 아닌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차가운 돌바닥의 냄새.낮게 울리던 북소리. 멀리서 들리던 말발굽 소리.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마치 이미 지나간 것처럼 몸 안에서 반응하고 있었다.“도진 경…”그 이름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입술 안쪽에서만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