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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둠이 새긴 흔적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18 11:19:26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짧게 흘렀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

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

“…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

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것은 동의도, 부정도 아니었다.

궁에서 오래 산 사람만이 가진 조용한 체념 같은 것이었다.

이수는 그의 그런 반응이 더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대 이름이 무엇이오..”

그녀가 조용히 불렀다.

도진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예, 마마. 소인 도진이옵니다.”

“저하께서… 나와 잘 어울린다 생각하오?”

그녀는 그가 낮에 대답을 뭉개고 지나갔던 질문을 다시 묻고 있었다.

도진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판단을… 제가 하는 것은 옳지 않사옵니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떠하오?”

이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도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사의 눈이 흔들릴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마음이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흔들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울림이란,”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옵니다.”

“그대 눈에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소?”

그 질문은 예리했고, 도진은 갑작스럽게 말을 잃었다.

그 순간 문 너머 어둠의 끝에서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도진이 고개를 돌리며 본능적으로 허리에 손을 댔다. 

그리고 문 앞에 한 사람이 조용히 섰다.

세자 현이었다.

그의 눈빛은 빛과 어둠 사이에 서 있는 듯한 냉정하고 고요한 색을 띠고 있었다.

도진은 즉시 무릎을 꿇었다.

“저하”

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시선이 이수에게서 잠시 멈췄다가 도진에게 향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도진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거운 파문으로 뒤흔들렸다.

그리고, 이수는 직감했다.

이 순간부터… 세 사람의 운명이 조용히 엇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불빛이 방 안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촛불은 바람도 없는 공간에서 천천히 흔들렸고,

그 미세한 떨림조차도 이 자리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숨결을 따라 불안하게 일렁였다.

문가에 선 현의 그림자는 길고 길었다.

그의 발끝에서부터 어둠이 퍼져 나와 방의 바닥을 덮는 듯했고,

도진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이수는 그 장면을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그 순간만을 분리해낸 것처럼 모든 소리가 저 멀리 뒤로 밀려나 있었다.

“저하를… 놀라게 해드렸사옵니까.”

도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러나 그의 등 뒤로 스치는 공기는 이수만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서늘하게 떨리고 있었다.

현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굳어 있는 방 안의 공기 속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조심스럽게 가르는 것처럼.

“마마의 처소에… 무슨 일이라 하였더냐.”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그러나 담담함의 아래에 감춰진 무언가는 마치 얇은 얼음을 밟듯 아슬아슬했다.

도진은 잠시 숨을 고르듯 머뭇거렸다.

“마마께서… 처음 드는 이 밤이기에 궁인들이 들기 전까지 근처에 기다리라는  분부가 있었사옵니다.”

현의 시선이 이수를 스쳤다.

그 순간, 이수는 알 수 없는 불편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다.

마치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가볍게 누르는 듯한 감각.

“그래.”

현은 도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명령대로 한 것이니 잘못은 없도다.”

그러나 그 말은 이상하리만치 짧았다.

용서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그 정도면 됐다’는 선을 긋는 말 같았다.

도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촛불 아래에서 잔잔하게 흔들렸다.

“도진.”

이수가 부르자 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은 짧았지만 너무도 예리했다.

이수는 자신이 부를 때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그냥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궁에서 어떤 파문을 남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이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표정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세자빈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도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단단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눈빛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이수는 입술을 조금 더 다물었다.

“수고했소.”

그녀는 그렇게 말을 잇는 것이 가장 온전한 선택일 것 같았다.

“오늘은 그만 물러나도 좋소.”

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눈맞춤이었으나, 그 짧은 순간에 말하지 못한 마음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현의 목소리가 낮게 닿았다.

“도진.”

그 목소리에는 이수에게 말할 때와는 다른 결이 있었다.

무언가 오래된 습관처럼, 그러나 지금은 조금 낯선 감정이 섞인 음색.

도진은 다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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