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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밤이 삼킨 경계

作者: 데이지
last update 公開日: 2026-06-18 11:16:35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

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

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

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호위무사.”

도진은 고개를 돌렸다.

“예, 마마.”

“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

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

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온몸이 아주 작게 굳어졌다가 다시 풀리는 느낌.

도진은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고 말했다.

“…어울림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잠시 멈춘 뒤, 그가 덧붙였다.

“인연이 판단하는 것이지요.”

이수의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 말은 너무 단순했고, 너무 담담했으나

마치 오래전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문장 같은 기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도진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카메라로 찍힌 것처럼 두 사람의 그림자가 햇빛 아래 길게 나란히 이어졌다.

그 순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아주 작은 ‘기울어짐’이 시작되었다.

현에게서, 이수에게서, 그리고 무엇보다 도진에게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극의 첫 균열이 바람 속에서 조용히 생겨나고 있었다.

햇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잔잔한 붉음을 남기고 기와 너머로 천천히 사라졌고, 궁 전체가 서늘한 회색빛으로 덮였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의 그 짧은 틈 아침과 밤이 서로의 숨을 들이마시는 시간.

바람은 낮보다 얇아졌고, 소리는 밤을 향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이수의 처소는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각 공간마다 정갈하게 놓인 장식들이 기품을 품고 있었다.

촛불이 방안을 비추기 시작하자 섬세한 그림자들이 벽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이수는 혼자였다.

궁인들은 모두 물러나고 오직 바람과 촛불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창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상 위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집었다.

잔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가 손끝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이곳이… 내 새로운 삶의 자리인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의 장면들이 숨 고를 틈도 없이 떠올랐다.

궁에 들어섰던 순간, 세자의 담담하면서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시선, 궁인의 조심스러운 손길,

그리고, 도진.

그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기름 묻은 칼집, 단정한 어깨,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걸음.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따뜻한 느낌을 남겼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마음 한쪽이 움직이는 걸까.

이수는 스스로를 꾸짖듯 숨을 조금 세게 내쉬었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은 허락을 받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수는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처소의 한쪽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창호 바깥에는 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기와를 훑고, 나무 사이를 지나며 작은 들숨 같은 기척을 남기고 있었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 창호를 스쳤다.

그 순간, 그녀의 등줄기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흘렀다.

오늘 느낀 모든 낯섦과 떨림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머무를 것이라…

현의 말이 떠올랐다.

세자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오려 했지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지우고 있었다.

이수는 그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지만

자기 자리에서 그를 버티려는 외로움이 바람결처럼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조차 도진의 눈을  마주쳤던 순간의 떨림만큼은 아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작은 기척이 들렸다.

발소리는 가볍고 짧았다.

문을 열려는 사람의 숨을 죽인 움직임.

궁인들이라면 단정한 규칙성이 있었을 터인데

문 앞의 움직임은 어딘가 머뭇거리는 결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마마.”

낮고 깊은 음성. 어둠 속에서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진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촛불과 바람 사이에서 

반쯤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고, 눈빛만 또렷하게 밝았다.

이수의 가슴이 조용히 뛰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사옵니까…?”

그녀는 뜻하지 않게 목소리가 가늘어지는 걸 느꼈다.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궁인들이 마마의 처소로 향하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저하의 분부가 있었사옵니다.”

그의 표정에는 전달해야 할 명령을 지키려는 무사다운 엄정함과,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얇게 겹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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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37. 지체 없는 개입

    한낮의 해는 밝았지만 궁의 위쪽 전각들은 햇빛보다 더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대비전 앞뜰의 매화는 조용히 피어 있었으나,그 고요는 어딘가 불길한 예고처럼 느껴졌다.평소라면 상궁들과 궁녀들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전각을 살뜰히 챙겼을 터였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군거림이 없었다.걸음은 더 조심스러웠고, 목소리는 더 작은 속삭임으로 바뀌었고,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공기였다.그러다 마침내 그 공기의 중심이 대비전으로 흘러들었다.대비의 측근 상궁이 문 앞에서 발끝을 끌며 조심스레 들어왔다.그녀는 대비가 손에 들고 있는 불경을 방해하지 않으려 허리를 깊게 굽힌 채 한참을 기다렸다.그러나 대비는 이미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무슨 일인가.”상궁은 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더 숙였다.“마마, 전각에… 소문이 하나 퍼지고 있습니다.”대비의 손이 불경을 덮는 동작은 조급하지 않았으나 침착함 속에 묵직한 무게를 띠고 있었다.“…말하라.”상궁은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말했다.“세자 저하의… 최근 행보에 대해 궁인들이 우려를 품는 기류가 있어옵니다.”대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졌다.“우려라.”“예, 마마. 부부 사이의 정은 당연한 것이나 요사이 저하께서 빈마마를 대하시는 모습이 평소 전하셨던 예법과 다르다 하여… 전각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사옵니다.”대비는 손끝으로 상을 한 번 두드렸다.그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전각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할 만큼 명확했다.“다르다 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상궁은 숨을 한 번 더 고르고 말을 이었다.“어젯밤… 저하께서 정해진 시각도 아니었음에도 홀로 빈마마의 처소 근처를 한참 머무르셨다 하옵니다.”대비전 안의 공기가 슬며시 움직였다.궁녀들이 바늘을 들던 손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상궁은 말을 이어야 했으나 그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떨렸다.“빈마마께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니오나…

  • 천년의 기억   36. 검은 아직 무겁지 않았다.

    아침 수련이 막 끝나갈 무렵, 도진은 검집을 천천히 닫고 있었다.대나무 숲 사이로 바람이 흐르고, 잘린 잎사귀들이 흩날리며 날카로운 공기 속에서 맴돌았다.아침 햇살은 맑았지만 궁의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탁했다.그는 처음엔 그것이 단지 자신의 기분 탓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곧, 수련장 주변을 스치며 지나가는 궁인들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감지했다.그들은 도진에게 인사할 때 머리를 너무 깊이 숙였다.그리고 너무 빨리 자리를 떠났다.피하는 것처럼. 숨기려는 것처럼. 도진은 눈썹을 미세하게 좁혔다.'…무슨 기류가 달라진 것인가.'그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도진은 돌아보지도 않았지만 누가 오는지 발걸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무사 우두머리인 장 무사였다.그는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마른 얼굴로 한참을 말을 망설였다.“도진.”도진은 묵묵히 검을 닦던 손을 멈췄다.“무엇이오.”장 무사는 주변을 두 번이나 돌아보았다.그리고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문이 돌고 있다.”도진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을 말하는 것이오.”장 무사는 한 번 더 주저했다.그 주저함이 더욱 불길했다.“…세자 저하와… 빈마마 사이의 일입니다.”그 말은 방금 전까지 고요하던 아침 공기 속에서 돌처럼 떨어졌다.도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 검집 위 천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저하와… 빈마마 사이의 일이라니.”장 무사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말했다.“어젯밤… 저하께서 빈마마의 처소 근처를 한참 거닐었다고… 궁인들 사이에서 그 이야기가 커졌다 하옵니다.”도진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멎는 듯했다.마치 누군가 뼈 속 깊은 곳을 천천히 움켜쥐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것이 어찌 소문이 되는가.”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 담긴 불안은 숨길 수 없었다.장 무사는 고개를 떨구었다.“궁이란 곳은… 보이는 것을 그대로 말하지 않사옵니다.보이지 않는 것을 붙잡아 이야기를 만들지요.”

  • 천년의 기억   35. 명명할 수 없는 파동

    점심이 가까워오는 시각.햇빛은 조금 더 강해졌지만 궁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이수는 처소 안 회랑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지만,그 가벼움 아래에 미묘한 불안이 실려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궁녀들의 움직임은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그들은 대답은 평소처럼 공손하게 했지만,눈길은 이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바닥이나 손끝만 자꾸 바라보았다.이수가 걸음을 멈추면 궁녀들은 동시에 숨을 삼켰고,이수가 말을 건넬 때면 익숙한 말투에도 작은 떨림이 스며들었다.이수는 그 모든 미묘한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무언가가 있다.말로 하지 않아도 궁이라는 장소는'기류'라는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의 전조를 알려주는 곳이다.이수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다들… 무슨 일이 있느냐.”궁녀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수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묻는 것이 두렵느냐.”그 말에서 꾸짖음의 결은 없었지만 궁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그녀들 중 한 명이 마침내 입술을 눌러 떼었다.“…빈마마, 그게…”그녀는 말하다 멈췄다.다른 궁녀들이 눈으로 말렸다.이수의 눈은 그들의 떨리는 손끝뿐 아니라숨을 죽이듯 움직이는 기척까지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아주 조용히 다가갔다.그리고, 궁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렸다.“괜찮다. 무슨 말이든 하여라.”그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궁녀는 결국 시선을 들었다.그 눈에는 불안이 잔뜩 들어 있었다.“…소문이 하나… 돌고 있사옵니다, 마마.”이수의 가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소문이라니. 나에 관한 것이냐.”궁녀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이수는 호흡을 곧게 유지했다.“무슨 소문인지 말해보아라.”궁녀는 주변을 확인하듯 둘러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세자 저하께서… 요사이… 빈마마를 유독…살피신다 하옵니다.”그 말은 조용했지만

  • 천년의 기억   34. 소문은 바람을 타고

    아침 햇빛이 궁의 기와를 가볍게 스칠 무렵,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궁인들의 발자국이 회랑을 옅게 적시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이미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보이지 않는 것.잡히지 않는 것.소문.소문은 언제나 물보다 빨랐다.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소문은 사람의 마음이 낮아진 곳으로 흐른다.그리고 오늘, 그 낮아진 곳은 ‘궁녀들’의 주변이었다.“…정말이래요. 세자 저하께서 빈마마를… 유독 살피신다더군요.”그 말은 부엌 뒤편에서 슬며시 새어나왔다.그곳에는 아침 준비를 하던 궁녀 몇 명이 모여 있었다.“누가 그래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목이 날아가요.”한 궁녀가 입을 막았지만 다른 궁녀는 주변을 살핀 뒤 더 낮게 속삭였다.“어젯밤 내가 본 게 있어서요… 저하께서 빈마마 처소 근처를 직접 거닐었다지 뭐예요.”“저하께서… 직접요?”“예. 그 늦은 시각에요. 게다가 오래 머무르셨다는데…”낮은 음성은 점점 더 낮게, 더 은밀하게 변해갔다.그러나 은밀할수록 소문은 더 빠르게 타올랐다.궁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부부끼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밤에 나서실 일은 없지 않나요…?”“혹시… 빈마마께 무슨 다른 감정을 품으신 건 아닐까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 자체가 멈춘 듯한 느낌이 흘렀다.궁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었다.그들은 알았다.이 말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란 것을.궁을 뒤흔들기 충분한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그러나 말은 이미 튀어나왔다.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조금 떨어진 곳, 우물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속삭여지고 있었다.“저하랑 빈마마께서… 예전보다 가까워지신 것 같대요.”“전하께서 직접 빈마마를 부르신다더군요.”“혹시… 중전마마께서 들으시면…”“쉿!”그들의 말은 어느새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류로 바뀌고 있었다.소문은 방향이 없었다.그러나 속도는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 속도는 위험할 만큼 빨라졌다.한편, 대비 쪽 전각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슬

  • 천년의 기억   33. 부정의 부정

    깊은 밤. 궁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달은 높이 떠 있었고, 빛은 너무 밝아서 어둠조차 얇은 막처럼 비쳐 보이는 밤이었다.그 고요함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현이었다.세자의 처소 안은 촛불을 모두 끄고도 달빛만으로 충분히 밝았다.현은 침상에 몸을 뉘었지만 눈을 감아도 마음은 잠들지 않았다.누우면 누울수록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장면이 더 선명하게 피어올랐다.이수. 달빛 아래 선 모습.서늘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도진.그들은 단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았다.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형식도 어기지 않았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흐르던 그 공기. 현은 그 공기가 잊히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많은 말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현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숨이 너무 답답했다.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그는 한동안 숨을 골랐다.그러나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았다.현은 천천히 처소 안을 걸었다.발소리는 옅고 조용했으나 그 발걸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혼란이 스며 있었다.그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장면이… 이토록 마음을 울리는가.'경계? 걱정? 책임감?아니었다.그 감정은… 그 어느 단어로도 맞지 않았다.현은 이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다.그러나 부정할수록 그 감정은 더 또렷해졌다.그는 결국 창가로 걸어갔다.달빛이 방 안으로 길게 흘러 들어와바닥에 고요한 물결처럼 퍼져 있었다.현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 장면 앞에서 마음이 이토록 요동치는가.'답은 나오지 않았다.나올 리 없었다.세자가 감정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은 ‘이수’가 아니라 ‘둘 사이에 감지된 설명할 수 없는 조짐’이다.그리고, 그 조짐에 흔들리는 자신을 세자는 가장 두려워했다.그러나 그 모든 금기 속에서 이수라는 존재가 현의 마음 한가운데에 아주 조용히 발을 들이고

  • 천년의 기억   32. 검을 쥔 손이 흔들리다.

    새벽의 궁은 하루 중 가장 맑고 가장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아직 해가 뜨지 않은 흙빛 하늘 아래에서 살짝 하얀 물안개가 땅 위를 흐르는 듯 피어오르고,대나무 숲은 서늘한 바람에 조용히 몸을 떨었다.이 시간은 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잡념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검과 하나가 되는 시간.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시간.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련장은 아직 텅 비어 있었고, 도진은 홀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그의 손끝에 닿은 검의 감각은 늘 같아야 했다.단단하고, 차갑고, 정확한 감각.하지만 오늘, 그 감각이 이상하게 생경했다.마치 손이 아닌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 듯한 기분.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요란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었다.그런데도 그 흔들림은 심장을 아주 조용히 휘감으며 검을 쥔 손까지 퍼져갔다.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칼끝이 새벽 안개 속에서 반짝였고, 몸을 낮게 숙이며 발을 굴렀다.첫 동작은 정확했다.둘째 동작도 흠잡을 데 없었다.그러나 셋째 동작에서 칼끝이 흔들렸다.아주 미세한 흔들림.하지만 도진에게는 치명적인 흔들림이었다.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눈썹을 좁히며 자세를 고쳤다.다시 한 번. 검을 높이 올리고,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휘익~소리는 정확했지만 동작의 맥이 끊겼다.도진의 숨이 깊게 흔들렸다.'왜 이리… 집중이 되지 않는가.'평생 칼을 잡아온 사내에게 이 정도의 흐트러짐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그는 검을 들고 선 채 가볍게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달빛 아래에 선 이수.바람결에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카락.가볍게 떨리던 목소리.“…유난히 긴 밤이옵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눈.그 눈 속에서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결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도진은 숨을 내쉬었다.그 순간 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호위관은… 자리를 지키는 법을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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