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가 오지는 않았다.그러나 공기는 비가 내리기 직전처럼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이수는 창을 닫고 커튼을 반쯤 내렸다.밖의 빛을 전부 차단하지는 않았다.오늘은 어둠보다 현실이 더 불편했기 때문이다.주방 시계가 짧게 울렸다.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몸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컵에 물을 따르다 말고 손을 멈췄다.물결이 잔 안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괜찮아.”이번엔 소리 내어 말했다.말은 공기 속에서 금방 사라졌지만 그 여운만큼은 가슴 아래에 남았다.문득 도진의 말이 떠올랐다.오늘은 경계가 얇다.그 문장은 예언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그래서 더 무거웠다.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켜졌다.이번엔 메시지가 아니라 부재중 전화 표시였다. 현의 번호였다.이수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바로 뒤집어 두었다.연결되지 않는 선택이 지금은 유일한 대답이었다.그 시각,도진은 차를 세워 두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이수의 집 근처였다.눈에 띄지 않는 거리. 그러나 필요하다면 곧바로 닿을 수 있는 위치.그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숫자는 의미가 없었다.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변화의 징후였다.도시는 지극히 평온했다.평온함은 때로 가장 위험한 위장이다.도진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익숙한 긴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아직은…”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말로 규정하는 순간 현실이 그 방향으로 움직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때 전화가 울렸다.이번엔 그의 것이었다.이수였다.“도진 씨.”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아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지금… 집 앞에 계세요?”도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예.”“역시.”그녀는 웃으려 했으나 웃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그냥… 확인하고 싶었어요.”“무슨 일 있었습니까.”“아니요. 아직은.”아직이라는 말이 둘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현 씨한테서 전
도진은 차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엔진 소리는 이미 멎었고, 거리의 소음만이 유리창 너머에서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이수는 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말없이, 그러나 도망치지 않은 자세로.두 사람 사이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은 말로 채워지지 않았다.말은 필요할 때만 존재해야 했다.지금은 아직 아니었다.“추웠어요?”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목소리는 낮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아니요.”이수는 고개를 저었다.“햇빛이 있었어요.”그 대답은 사실이기도 했고, 사실이 아니기도 했다.햇빛은 있었지만, 그 온도는 마음까지 닿지 않았다.도진은 차를 출발시켰다.부드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현 씨와는…”그가 말을 꺼내다 멈췄다.묻는 순간, 이미 경계가 흔들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끝냈어요.”이수는 짧게 말했다.“정확히 말하면 선을 다시 그었어요.”도진은 그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당신 얼굴이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군요.”“단단해 보이나요?”“예.”그는 시선을 도로 위에 둔 채 말했다.“무너질 사람은 저런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이수는 잠시 웃었다.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지 않았다.“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얼굴일 수도 있죠.”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의 속도를 아주 조금 낮췄다.“오늘은 집에 바로 들어가세요.”“왜요?”“오늘은…”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도시의 공기가 너무 좋습니다.”이수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의도가 많은 날이라는 뜻이었다.“도진 씨는요.”“저는 잠깐 다른 데 들렀다 가겠습니다.”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선언에 가까웠다.차가 이수의 집 앞에 멈췄다.엔진 소리가 다시 잦아들었다.이수는 문을 열다 말고 도진을 돌아봤다.“오늘… 와줘서 고마워요.”“당연한 일입니다.”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리고,”이수가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오늘 제가 흔들려 보였다면…”
아침은 예상보다 맑았다.구름은 높았고, 햇빛은 날카롭지 않았다.마치 오늘이 평범한 하루일 수 있다고 도시가 먼저 말해주는 듯했다.이수는 창을 열어 환기를 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며 밤의 잔여를 밀어냈다.그러나 머릿속까지 말끔해지지는 않았다.전날 밤의 통화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도진의 목소리, 그가 말한 ‘경계’라는 단어. 그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이수는 커피를 내리며 손잡이를 꼭 쥐었다.뜨거운 김이 올라왔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오늘이구나.”그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말했다.휴대전화 화면이 켜졌다.메시지 하나.오전 11시,그때 이야기합시다.-현이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이미 거절하지 않겠다는 뜻은 침묵으로 전해진 상태였다.그 시각, 도진은 집을 나서며 현관 앞에서 잠시 멈췄다.이유 없이 발걸음이 느려졌다.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오늘은 몸보다 감각을 더 믿어야 하는 날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차에 오르기 전, 그는 이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연락 오면 바로 알려주세요.잠시 후, 짧은 답이 왔다.-알겠어요.그 두 글자만으로도 도진은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차분하려 애쓰는 사람의 톤이었다.오전은 느리게 흘렀다.이수는 집 근처를 벗어나지 않았다.약속까지 두 시간 남짓. 무엇을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결국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너무 단정해 보이지 않게, 그러나 흔들려 보이지도 않게.“설명하지 말 것.”“변명하지 말 것.”그녀는 속으로 몇 가지를 정리했다.“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말 것.”약속 장소는 사람이 많지 않은 호텔 라운지였다.공개적인 장소. 현이 고른 이유는 명확했다.이수는 먼저 도착했다.자리에 앉아 물 한 잔을 주문했다.손끝이 유리잔을 스칠 때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잠시 후, 현이 들어왔다.정장은 단정했고, 표정은 놀랍도록 온화했다.“기다리게 했군요.”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아니에요.”이수는 짧게
밤은 끝내 잠으로 흘러가지 않았다.이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불을 끄고 한참이 지났지만 눈은 좀처럼 감기지 않았다.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라, 감각이 깨어 있어서였다.창밖에서 어디선가 문 닫는 소리가 났다.아파트의 일상적인 소음이었다.그러나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리는 밤이었다.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부엌으로 가 물을 따랐다.컵을 쥔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괜찮아.”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대신 속으로만 몇 번이나 되뇌었다.물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그 애매함이 오히려 마음에 남았다.그녀는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불 켜진 창들이 규칙 없이 이어져 있었다.각자의 삶이 각자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이었다.이수는 화면을 보지 않고도 누군지 알았다.도진.전화를 받자 잠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상하지 않았다.“잠 못 이루셨군요.”도진이 먼저 말했다.“도진 씨도요.”“예.”짧은 대답. 그러나 그 안에는 같은 밤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 담겨 있었다.“무슨 일 있었어요?”“특별한 건 없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다만 이상하게 집이 너무 조용해서요.”이수는 작게 웃었다.“저도요. 조용해서 오히려 잠이 안 와요.”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이수 씨.”“네.”“오늘은 경계가 유난히 얇습니다.”그 말은 설명 같기도, 경고 같기도 했다.“그래서 제가 전화한 겁니다.”“확인하려고요?”“아니요.”그는 조용히 말했다.“당신이 괜찮은지.”이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괜찮다는 말이 너무 가벼워 보였고, 괜찮지 않다는 말은 너무 무거워 보였다.“지금은… 버틸 수 있어요.”그녀가 말했다.“그걸로 충분합니다.”도진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까웠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조금 단단해 보였다.그 시
차가 도심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 창밖의 불빛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늦은 시간의 거리에는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그 모습은 이수에게 잠시 현실감 없는 장면처럼 느껴졌다.“저 사람들은,”이수가 낮게 말했다.“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을 끝내겠죠.”“대부분은 그렇습니다.”도진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는 오래된 체념이 섞여 있었다.“모르는 채로 잠드는 게 축복일 때도 있죠.”“도진 씨는 그 축복을 가진 적 없죠.”그의 손이 핸들 위에서 잠시 멈췄다.그러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아주 오래전부터요.”차는 이수의 집 근처에 멈춰 섰다.엔진 소리가 꺼지자 갑작스럽게 고요가 내려앉았다.그 고요 속에서 이수는 문을 열지 않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오늘은… 여기까지죠.”“네.”도진은 곧장 내리려 하지 않았다.이수는 그가 아직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느꼈다.“이수 씨.”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앞으로 한동안, 일상이 조금 더 불편해질 겁니다.”“위험해진다는 뜻이죠.”“그렇습니다.”“그래도”이수는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당신이 곁에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은 의존이 아니었다.동행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였다.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그 말 하나면 충분합니다.”이수는 차에서 내렸다.문을 닫기 전, 그녀가 다시 몸을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오늘뿐만이 아닙니다.”그의 대답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집으로 들어간 뒤, 이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집 안은 너무 조용했다.공원의 밤보다도, 차 안보다도 더 고요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었다.“괜찮아.”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그 시각, 도진은 차를 몰아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라디오도, 음악도 켜지 않았다.침묵 속에서 그는 몸 안
해가 완전히 저물자 공원의 공기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사람들의 발걸음은 뜸해졌고,남은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차량의 마찰음뿐이었다.이수는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손끝이 조금 시렸지만 말하지 않았다.도진은 그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예전에는,”이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밤이 이렇게 조용하면 안심이 됐어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지금은요.”“지금은… 조용한 밤이오히려 무섭게 느껴져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김이 없었다.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벤치에 함께 앉았다.“조용한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그가 말했다.“일어나기 직전의 숨 고르기일 때가 많습니다.”이수는 그 말을 이해했다.그래서 반박하지 않았다.“도진 씨는 언제부터 이런 느낌을 알게 됐어요.”“아주 오래전부터요.”그 대답은 자연스러웠지만그 안에 말해지지 않은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수는 더 묻지 않았다.지금은 알아야 할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도진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이번에는 그가 바로 받지 않았다.“안 받아도 돼요.”이수가 말했다.“아닙니다.”도진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화를 나눴다.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현 씨가,”이수가 먼저 물었다.“예.”“뭔가… 결정한 것 같죠.”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요.”“중요한 건 자신이 잃고 있다는 감각을 멈추는 것이니까요.”이수는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그가 원하는 건 당신의 불안이고, 당신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