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
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
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조금 더 투명해졌고, 바람은 기와 사이를 흘러가며 은은한 서늘함을 남겼다.
이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숨은 곧장 가슴 깊이 내려가지 못하고 목울대 어딘가에 머물렀다.
숨을 고르는 일조차 조심해야 하는 자리,
그녀는 이제 처음으로 세자와 눈을 마주하게 될 순간을 앞두고 있었다.
전각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쪽에는 고요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빛이 차등처럼 내려앉아 바닥을 부드럽게 비추고, 멀리 높은 자리에는 현이 앉아 있었다.
세자는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 시선은 생각보다 차갑지도, 지나치게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눈이었다.
그는 이수가 궁의 대문을 넘어오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했다.
이수는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단 치마가 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미세한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예를 올리려는 순간, 현이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세자빈이라 불러야 하는 날이 올 터이니, 굽히는 예는 오래 보지 않겠소.”
그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 담담함에는 어떤 무게가 있었다.
이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감히 저하 앞이오나… 감사한 마음뿐이옵니다.”
현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단순히 외모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는 듯했다.
그러나 이수의 눈이 잠시 흔들린 것은 현을 바라봐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바로 오른쪽 뒤, 기둥 그림자 아래 조용히 서 있는 한 남자 때문에.
도진.
그는 정해진 위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자세로 그저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은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이수는 이상하게 그 눈 속의 기척을 느꼈다.
마치 편안한 적도, 다정한 적도 없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스쳐 지나간 듯한 기척.
현도 그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도진에게 시선을 살짝 돌렸다.
“너는 어찌 거기 있느냐.”
도진은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저하는 오늘 새로 들어온 분을 모시라 하셨사옵니다.”
“그래, 네 역할은 그러하다.”
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거기엔 언뜻 모를 감정이 스쳐 있었다.
현은 다시 이수를 바라보았다.
잠시의 정적 뒤에, 그는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궁에 처음 들어온 이는 누구나 낯설고 외롭소. 그러니 내가 굳이 위로를 더하진 않겠소. 대신…”
그의 손끝이 의자 팔걸이를 가만히 두드렸다.
“내 곁에서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은 미리 말해두고 싶소.”
이수는 고개를 숙이려다 얼핏 도진의 기척을 느끼고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왜… 저 사람이 신경 쓰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설명할 수도 없었다.
현은 그녀의 표정을 읽고는 아주 미세하게 눈썹을 좁혔다.
“마마,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 있소?”
“아니옵니다.”
이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도진은 알아챘다.
그녀의 단정한 말투 아래 숨겨진 작은 떨림을.
자신의 존재가 그 떨림에 닿아 있음을.
‘왜… 그녀의 감정이 이렇게 느껴지는가.’
그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가슴 어딘가를 손으로 눌렀다.
그 순간 현의 시선이 도진에게 아주 잠시 걸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무언가를 재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시 뒤, 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마마를 위해 전각을 준비했으니 궁인들 안내에 따라가면 될 것이오.”
이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저하의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도진과 궁인들이 그녀를 모셔 나가려는 순간, 현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마마.”
이수는 멈추어 서서 뒤돌았다.
현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오늘 본 이는 두 사람뿐이오. 나와…”
그의 시선이 도진에게 스쳤다.
아주 짧았으나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나의 호위무사.”
이수는 숨을 삼켰다.
도진은 미세하게 고개를 숙였다.
현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 느낀 모든 낯섦과 떨림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머무를 것이오.”
점심이 가까워오는 시각.햇빛은 조금 더 강해졌지만 궁 안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다.이수는 처소 안 회랑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지만,그 가벼움 아래에 미묘한 불안이 실려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지만 궁녀들의 움직임은 오늘따라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그들은 대답은 평소처럼 공손하게 했지만,눈길은 이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바닥이나 손끝만 자꾸 바라보았다.이수가 걸음을 멈추면 궁녀들은 동시에 숨을 삼켰고,이수가 말을 건넬 때면 익숙한 말투에도 작은 떨림이 스며들었다.이수는 그 모든 미묘한 변화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느꼈다.무언가가 있다.말로 하지 않아도 궁이라는 장소는'기류'라는 언어를 통해 모든 것의 전조를 알려주는 곳이다.이수는 조용히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다들… 무슨 일이 있느냐.”궁녀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이수는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묻는 것이 두렵느냐.”그 말에서 꾸짖음의 결은 없었지만 궁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했다.그녀들 중 한 명이 마침내 입술을 눌러 떼었다.“…빈마마, 그게…”그녀는 말하다 멈췄다.다른 궁녀들이 눈으로 말렸다.이수의 눈은 그들의 떨리는 손끝뿐 아니라숨을 죽이듯 움직이는 기척까지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아주 조용히 다가갔다.그리고, 궁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렸다.“괜찮다. 무슨 말이든 하여라.”그 부드러운 말 한마디에 궁녀는 결국 시선을 들었다.그 눈에는 불안이 잔뜩 들어 있었다.“…소문이 하나… 돌고 있사옵니다, 마마.”이수의 가슴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소문이라니. 나에 관한 것이냐.”궁녀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이수는 호흡을 곧게 유지했다.“무슨 소문인지 말해보아라.”궁녀는 주변을 확인하듯 둘러본 뒤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세자 저하께서… 요사이… 빈마마를 유독…살피신다 하옵니다.”그 말은 조용했지만
아침 햇빛이 궁의 기와를 가볍게 스칠 무렵,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궁인들의 발자국이 회랑을 옅게 적시고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이미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보이지 않는 것.잡히지 않는 것.소문.소문은 언제나 물보다 빨랐다.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소문은 사람의 마음이 낮아진 곳으로 흐른다.그리고 오늘, 그 낮아진 곳은 ‘궁녀들’의 주변이었다.“…정말이래요. 세자 저하께서 빈마마를… 유독 살피신다더군요.”그 말은 부엌 뒤편에서 슬며시 새어나왔다.그곳에는 아침 준비를 하던 궁녀 몇 명이 모여 있었다.“누가 그래요? 그런 말 함부로 하면 목이 날아가요.”한 궁녀가 입을 막았지만 다른 궁녀는 주변을 살핀 뒤 더 낮게 속삭였다.“어젯밤 내가 본 게 있어서요… 저하께서 빈마마 처소 근처를 직접 거닐었다지 뭐예요.”“저하께서… 직접요?”“예. 그 늦은 시각에요. 게다가 오래 머무르셨다는데…”낮은 음성은 점점 더 낮게, 더 은밀하게 변해갔다.그러나 은밀할수록 소문은 더 빠르게 타올랐다.궁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부부끼리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밤에 나서실 일은 없지 않나요…?”“혹시… 빈마마께 무슨 다른 감정을 품으신 건 아닐까요?”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 자체가 멈춘 듯한 느낌이 흘렀다.궁녀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었다.그들은 알았다.이 말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란 것을.궁을 뒤흔들기 충분한 위험한 말이라는 것을.그러나 말은 이미 튀어나왔다.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조금 떨어진 곳, 우물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속삭여지고 있었다.“저하랑 빈마마께서… 예전보다 가까워지신 것 같대요.”“전하께서 직접 빈마마를 부르신다더군요.”“혹시… 중전마마께서 들으시면…”“쉿!”그들의 말은 어느새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류로 바뀌고 있었다.소문은 방향이 없었다.그러나 속도는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 속도는 위험할 만큼 빨라졌다.한편, 대비 쪽 전각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슬
깊은 밤. 궁 전체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달은 높이 떠 있었고, 빛은 너무 밝아서 어둠조차 얇은 막처럼 비쳐 보이는 밤이었다.그 고요함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현이었다.세자의 처소 안은 촛불을 모두 끄고도 달빛만으로 충분히 밝았다.현은 침상에 몸을 뉘었지만 눈을 감아도 마음은 잠들지 않았다.누우면 누울수록 머릿속에서 어젯밤의 장면이 더 선명하게 피어올랐다.이수. 달빛 아래 선 모습.서늘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눈동자.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도진.그들은 단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았다.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형식도 어기지 않았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 흐르던 그 공기. 현은 그 공기가 잊히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너무 많은 말을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현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숨이 너무 답답했다.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아픈 게 아니었다. 가슴이 아팠다.그는 한동안 숨을 골랐다.그러나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았다.현은 천천히 처소 안을 걸었다.발소리는 옅고 조용했으나 그 발걸음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혼란이 스며 있었다.그는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다.'왜 그 장면이… 이토록 마음을 울리는가.'경계? 걱정? 책임감?아니었다.그 감정은… 그 어느 단어로도 맞지 않았다.현은 이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다.그러나 부정할수록 그 감정은 더 또렷해졌다.그는 결국 창가로 걸어갔다.달빛이 방 안으로 길게 흘러 들어와바닥에 고요한 물결처럼 퍼져 있었다.현은 그 빛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내가 왜… 그 장면 앞에서 마음이 이토록 요동치는가.'답은 나오지 않았다.나올 리 없었다.세자가 감정을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은 ‘이수’가 아니라 ‘둘 사이에 감지된 설명할 수 없는 조짐’이다.그리고, 그 조짐에 흔들리는 자신을 세자는 가장 두려워했다.그러나 그 모든 금기 속에서 이수라는 존재가 현의 마음 한가운데에 아주 조용히 발을 들이고
새벽의 궁은 하루 중 가장 맑고 가장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아직 해가 뜨지 않은 흙빛 하늘 아래에서 살짝 하얀 물안개가 땅 위를 흐르는 듯 피어오르고,대나무 숲은 서늘한 바람에 조용히 몸을 떨었다.이 시간은 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잡념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검과 하나가 되는 시간.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던 시간.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련장은 아직 텅 비어 있었고, 도진은 홀로 검을 들고 서 있었다.그의 손끝에 닿은 검의 감각은 늘 같아야 했다.단단하고, 차갑고, 정확한 감각.하지만 오늘, 그 감각이 이상하게 생경했다.마치 손이 아닌 마음이 먼저 흔들리는 듯한 기분.도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요란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미묘한 흔들림이었다.그런데도 그 흔들림은 심장을 아주 조용히 휘감으며 검을 쥔 손까지 퍼져갔다.그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칼끝이 새벽 안개 속에서 반짝였고, 몸을 낮게 숙이며 발을 굴렀다.첫 동작은 정확했다.둘째 동작도 흠잡을 데 없었다.그러나 셋째 동작에서 칼끝이 흔들렸다.아주 미세한 흔들림.하지만 도진에게는 치명적인 흔들림이었다.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그는 눈썹을 좁히며 자세를 고쳤다.다시 한 번. 검을 높이 올리고, 허공을 가르며 내리쳤다.휘익~소리는 정확했지만 동작의 맥이 끊겼다.도진의 숨이 깊게 흔들렸다.'왜 이리… 집중이 되지 않는가.'평생 칼을 잡아온 사내에게 이 정도의 흐트러짐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그는 검을 들고 선 채 가볍게 눈을 감았다.그리고 아주 느린 속도로 어젯밤의 장면이 떠올랐다.달빛 아래에 선 이수.바람결에 흔들리던 그녀의 머리카락.가볍게 떨리던 목소리.“…유난히 긴 밤이옵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의 눈.그 눈 속에서 자신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결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었다.도진은 숨을 내쉬었다.그 순간 현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렸다.‘호위관은… 자리를 지키는 법을
밤은 이미 궁을 완전히 삼켜버렸다.달빛은 높고 얇아서 궁의 지붕들을 희미하게 빛으로 두드릴 뿐, 회랑에는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바람조차 살금살금 스치는 듯한 고요한 밤.그 고요 속에서 한 사람의 방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세자의 처소였다.현은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은 불씨처럼 흔들렸고, 그 불빛 아래에서 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하루 내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전날 밤 회랑에서 보았던 이수와 도진의 모습.정확히 무엇을 본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그 침묵 속의 떨림, 눈빛의 잔해,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맴돌음.그 모든 것이 현의 마음 한 부분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깨워냈다.그는 하루 종일 그 감정을 억눌렀다.'빈이 흔들린 마음을 숨기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인가.'그 질문은 현 자신에게조차 위험한 것이었다.그는 책상 위 술잔을 집어 들었지만 입에 대지 못했다.술보다 더 뜨겁고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모실까요?”내관이었다.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작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문을 향해 말했다.“들라.”내관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예를 올렸다.형식적인 절차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공기 자체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듯한 긴장감이 있었다.내관은 재촉하지 않았고, 현은 서두르지 않았다.잠시,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그리고, 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오늘 궁의 움직임을 어찌 보았느냐.”내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특별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다만… 빈마마께서 밤에 잠시 회랑을 거닐었다는 정도만…”현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움직임은 발각될 만큼 크지 않았지만,내관은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늘의 대화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잠시 후, 현이 낮게 말했다.“도진은… 어디에서 경계를 섰느냐.”내관은 숨을 삼키듯 대답했다.“호위관 도진
다음 날 아침의 궁은 전날보다 훨씬 조용했다.바람은 느리게 흘렀고, 새벽 안개가 아직 회랑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햇빛은 비스듬하게 기와 사이를 파고들며 궁의 윤곽을 은근히 밝혀주고 있었다.이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세자의 아침 문안을 드리러 나섰다.어제의 밤을 잊으려 애썼지만,떨림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가벼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전날 밤 회랑에서 마주했던 도진의 모습이 어딘가에서 느리게 흔들렸다.'그의 눈빛이… 왜 아직도 떠오르는가.'그 이유를 스스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수는 더 괴로웠다.조금 흔들린 마음을 다잡으며 세자의 처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내관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빈마마를 들이라 하셨나이다.”문이 열리고, 이수는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아침 햇빛에 비친 그의 옆얼굴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침착했다.그러나 이수는 그의 침착함 아래 알 수 없는 기류가 숨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이수는 예를 올렸다.“전하, 평안하셨사옵니까.”현은 고개를 들었다.눈빛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이전과 달랐다.조금 더 깊었고, 조금 더 조용했으며,조금 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빈은 어제… 밤에 잘 들었소?.”평범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평범하지 않았다.이수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 떨림을 숨기기 위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네, 전하. 밤공기가 차가워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오나…이내 잘 들었사옵니다.”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진실 모두는 아니었다.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수의 얼굴을 향해 오랫동안 머물렀다.오늘따라 그 눈빛이 지나치게 깊어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잠시 후, 현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빈은 어찌하여 밤중에 혼자 거닐었느냐.”그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말의 결이 분명히 달랐다.이수는 놀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 마음
새벽녘의 공기는 저물지 않은 밤의 기운을 조금 간직하고 있었다.하늘은 아직 흐릿한 회색빛이었고, 새는 울지 않았다.궁의 아침은 원래 고요하지만, 오늘의 고요는 유독 가라앉아 있었다.빈의 처소 앞에 궁녀들이 분주히 오가며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였다.“저하 납시오”회랑 끝에서 울린 외침에 궁녀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현이 이른 아침에 빈의 처소를 찾는 일은 흔치 않았다.예고 없이 찾아온 발걸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현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눈빛은 평소처럼 담담했으나,그 담담함 아래 흐르는
현은 고개를 들었다.“아니다. 오늘은 그럴 필요 없다.”그러나 그 말과 달리 그의 눈빛은 이미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내관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허면… 빈마마께는…”현은 그 말을 끊었다.“빈에게도 아무 말 하지 마라. 내가 직접 살필 것이다.”그 말은 명령이었지만 그 속에는 또 다른 결이 들어 있었다.‘직접 확인하겠다’는 뜻.‘다른 누구도 개입하게 두지 않겠다’는 뜻.그리고, ‘이미 마음이 흔들렸다’는 뜻.내관은 그 뜻을 정확히 읽었다.현은 등불을 향해 다가가 불꽃을 잠시 바라보았다.촛불은 작은 떨림에
“말을 삼가야 한다. 빈마마께 누가라도 해를 입히면 안 된다.”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궁녀들 사이의 대화는 언제나 두 가지 역할을 한다.하나는 경계, 하나는 예언.그리고 지금의 대화는 분명 후자였다.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그 떨림은 마치 이들의 속삭임이 퍼져 나갈 방향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한편, 바깥 회랑에서는 잠시 쉬려고 모여든 하급 궁녀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고 있었다.“진짜라더라. 빈마마께서 호위관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셨다고.”“그것이 어찌 소문이 되었단
오히려 그 말을 뱉은 순간 낮 동안 마주했던 장면들이 더 또렷하게 되살아났다.-정원 앞에서 마주친 도진의 시선.-말 한마디 없이 스친 떨림.-금지된 거리 안에 머물렀던 그 짧은 침묵.그리고…-현의 눈빛.그 눈빛은 뜻을 알 수 없었기에 더 무서웠다.그 안에 담긴 감정이 의심인지, 질투인지,불안인지, 아니면 단순한 관찰인지.그 어느 쪽이든 빈으로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이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밤이 깊어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압박하는 감정이 이름을 갖는 듯했다.두렵다.그 두려움은 자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