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판 / 천년의 기억 / 10. 이름을 가둔 가슴

Share

10. 이름을 가둔 가슴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1:23:45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

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

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

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

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

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무사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가장 크게 흔들렸다.

이유는… 이유는 분명했다.

왜…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토록 가슴이 뛰었던가.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좀 전, 이수가 찻잔을 내려놓고 창호를 바라보던 모습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저 마마께서 첫날이라… 도리를 다해 조심히 모신 것뿐이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변명 같았다.

바람이 스쳤다.

달빛이 어딘가 일렁였다.

그 순간,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다가왔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궁인도, 무관도 아닌 조금 더 조심스러운,

조금 더 무겁고 깊은 걸음을 가진 발자국.

도진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세자 현이 서 있었다.

달빛 아래 선 현의 얼굴은 낮보다 더 선명하게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고요해 보이지만, 고요함 속에 ‘덮여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 그리 멀리 나와 있느냐, 도진.”

그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그 속에는 이유를 묻는 것 이상의 뜻이 있었다.

도진은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

“저하의 분부에 따라 근처를 살피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현은 도진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오늘은… 여러모로 낯선 일들이 있었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도진의 심장은 묘하게 조여왔다.

마치 그 ‘낯선 일들’이 방금 전 이수의 처소에서 있었던 대화

특히 그녀가 자신을 부른 그 순간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

현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도진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도진.”

현은 그를 오랫동안 봐왔다.

동무로서, 벗으로서,  그리고 누구보다 신뢰하는 무사로서.

그러나 지금의 시선은 과거의 어느 시선과도 닮지 않았다.

그 안에는 말로 하지 않는 불안, 알 수 없는 소유욕,

그리고 묘하게 잘못된 방향으로 기울어가는 감정이 어둠처럼 스며 있었다.

“네가 말이야…”

현의 음성이 아주 낮게 흘렀다.

“요즘… 나와 다른 어떤 생각을 품는 것은 아니겠지.”

순간, 달빛이 크게 흔들린 듯했다.

도진은 단칼에 답했다.

“저하, 감히 무슨 말씀을…”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 현의 시선이 정면으로 도진을 꿰뚫었다.

“나는 네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도진.”

그 말에는 명령도, 부탁도 아닌 어딘가 불길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비극의 그림자처럼.

도진은 그제야 똑바로 고개를 들어 현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현 역시 오늘 밤 어딘가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흔들림은 아직은 아주 미약하지만

언젠가 이 궁 전체를 삼킬 만큼 거대한 파동으로 자라날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현은 도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자. 네가 없으면 궁이 조용해지니.”

그 말은 농담 같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어갔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세 사람의 운명은 이미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엇갈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현이 처소를 떠난 뒤, 방 안은 갑작스러운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촛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사람들의 온기는

매듭이 갑자기 끊긴 실처럼 허공 속으로 퍼져 사라지고 있었다.

이수는 천천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라  아까 그 순간, 도진이 문을 나서기 전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때문이었다.

 아주 짧았던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

규범을 벗어난 감정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 같은…

그러나 그 누구도 인정해서는 안 되는 순간.

이수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왜… 내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궁에 들어오면서 이미 결심했던 것들이 있다.

가문의 뜻, 세자의 곁에서 살아야 하는 삶,

감정을 함부로 기울이지 않겠다는 다짐.

그러나 그 다짐은 낯선 남자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흔들리고 말았다.

도진.

이름을 마음속에서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조여 왔다.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되는 사람.

그러나 그 이름만 떠올려도 알 수 없는  떨림이 밀려온다.

그 떨림은 애틋함도, 설렘도 아닌 어디에 닿아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천년의 기억   204. 서로에게 남긴 빈자리는 여지였다

    아침은 전날의 여운을 말없이 이어받았다.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열지 않았다.빛이 들어오기 전의 방은 아직 밤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고,그 고요가 잠에서 막 깨어난 생각들을 천천히 정렬해 주고 있었다.침대 끝에 걸터앉아 잠시 손을 모았다.손끝에는 어제의 온기가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닿지 않았음에도 남아 있는 감각은 때로 확실한 접촉보다 더 오래 머문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컵을 들고 창가에 서자 도시는 이미 자신의 리듬을 되찾고 있었다.차들이 지나가고,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이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속도로 움직였다.

  • 천년의 기억   203. 닿지 않아도 남는 온기

    밤은 서둘러 내려오지 않았다.해가 완전히 지기 전의 공백이 도시 위에 얇게 걸려 있었고,그 틈에 사람들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은 표정으로 머물러 있었다.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잠시 서 있었다.불을 켜지 않은 채, 창밖에서 스며드는 빛만으로 거실의 윤곽을 확인했다.어둠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의 시간은 생각을 붙들기에 딱 알맞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까의 걸음과 그 사이에 오간 침묵이 몸에 남아 있었다.손에 남은 공기, 어깨에 얹힌 시선,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고 있던 거리.이수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걸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 천년의 기억   202. 조금 느려져도 불안하지 않다

    아침은 언제나 같은 순서로 시작되었지만, 그날의 공기는 조금 달랐다.이수는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물이 끓는 소리를 들었다.기다림이라는 말이 이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자주 실감하고 있었다.기다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붙잡고 서성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일일지도 모른다.컵에 커피를 따르며 이수는 어제의 메시지를 떠올렸다.별다를 것 없는 안부였고, 의미를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었다.그럼에도 그 문장은 밤의 끝을 부드럽게 닫아주었다.출근길, 지하철 안은 여전히 붐볐다.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고, 휴대폰 화면이 같은 각도로 기울

  • 천년의 기억   201. 서로의 속도

    도시는 언제나 빠르다.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그 속도를 늘 따라가지 못한다.이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확인하다 말고 손을 내렸다.숫자가 바뀌는 동안 자신의 호흡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조용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어제의 점심은 아무런 선언도 없었고, 어떠한 약속도 남기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운은 이상할 만큼 길게 남아 있었다.말하지 않은 것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는 확신.그것이 관계의 시작인지,아니면 잠시 스쳐 가는 평온인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사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켜자 익숙한 업무 화면이 떠올랐다.이수는 의도적으로 집중하려 애썼다.집중은 생각을 밀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으니까.그러나 글자 사이로 자꾸만 어제의 장면들이 스며들었다.창가 자리, 낮은 목소리, 잠시 멈췄던 시선.그 모든 것이 일처럼 쌓여 지워지지 않았다.그때 메시지 알림이 짧게 울렸다.도진.‘어제, 불편하진 않으셨죠.’질문은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는 듯했지만,사실은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방식처럼 보였다.이수는 잠시 생각하다 답장을 썼다.‘아뇨. 오히려 편했어요.’보내고 나서 한 줄을 더 적을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멈췄다.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답장은 곧 도착했다.‘그럼 다행입니다.’그 짧은 문장에는 과한 안도도, 불필요한 기대도 없었다.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그날 오후, 도진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완전히 남지는 않았다.그는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도 조금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여운은 곧바로 정리했을 것이다.불필요한 감정이라고 결론짓고 깔끔하게 접어두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억지로 서두르지도, 의미를 과대 해석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이 상태를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었다.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동안 도진은 창가에 잠시 섰다.유리 너머로 보이

  • 천년의 기억   200. 나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아침은 늘 같은 방식으로 시작되지만, 사람의 마음은 결코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천장을 한참 바라보았다.빛이 스며드는 속도와 호흡이 고르게 돌아오는 감각을 의도적으로 느끼며 잠에서 현실로 천천히 옮겨왔다.어젯밤의 메시지는 이미 읽은 문장이었지만, 몸 안 어딘가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짧았고, 담백했고, 그렇기에 더 오래 머무는 말들.그녀는 이불을 정리하고 조용히 일어났다.아침 루틴은 언제나 정확했지만, 오늘은 손의 움직임이 조금 느렸다.커피를 내리는 동안 창밖을 보았다.도시는 이미 깨어 있었고,사람들은 자신의 방향을 향해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천년의 기억   199. 잠들지 않는 온도

    새벽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하루를 끝내기에는 너무 솔직해지고, 다음 날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감정이 덜 식어 있는 시간.도진은 완전히 잠들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잠과 각성의 경계에서 의식은 가볍게 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낯설지 않은 감각이 스며들었다.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온기.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심장은 평소보다 느리게 뛰고 있었지만,그 박동 하나하나가 유난히 또렷하게 느껴졌다.이상했다. 불안은 없었다. 악몽도 없었다.가슴을 죄던 그 설명할 수 없는 통증도 오늘은 찾아오지 않았다.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 천년의 기억   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