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
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
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
명분 있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도진은 눈을 내렸다.
“…예, 저하.”
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은 쉽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수는 그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촛불이 세자빈의 얼굴을 반쯤 밝히고, 현의 얼굴은 그 절반쯤을 어둠이 덮고 있었다.
“마마.”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말의 한 끝은 어딘가 단단히 잠겨 있는 듯했다.
“오늘… 낯선 것이 많았을 터이다.”
이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낯설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어떤 것이 가장 마음을 흔들었는지 말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은 조금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으나
그 조심 속에 감춰진 소유하려는 마음이 이수에게는 아주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두려움이 있다면… 전하시오. 마마를 지키는 것은 제 몫이니.”
그 말은 본래라면 위로가 될 말이었다.
그러나 이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조용히 문 뒤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듯한 불안.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염려해주어 고맙소.”
그 말 너머로 둘 사이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현의 눈빛은 잠시 이수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 표정에는 ‘알고 싶다’는 욕망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는 깨달았다.
이 밤, 이 조용한 순간부터 세 사람의 운명은
아무도 모르게 다른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촛불이 길게 흔들렸다.
방 안의 공기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도진이 처소의 문을 나서는 순간, 밤공기가 한꺼번에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언뜻 차갑다고 느껴졌지만, 그 차가움 속 어딘가에 낯선 온기가 섞여 있었다.
마치 방금 전, 촛불 아래에서 마주했던 이수의 시선이 아직도 어딘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듯한 기분.
그는 한동안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온 뒤에도 누군가의 시선이 등 뒤에 닿아 있는 듯했고,
그 시선이 이수에게 닿기 전에 스스로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묘한 긴장감이 그의 몸을 감쌌다.
‘이상하군.’
도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세자의 호위무사로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기척을 감지해 왔다.
칼을 드는 사람의 손끝,
음모를 품고 접근하는 자의 숨결,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의 떨림
그 모든 것을 몸으로 알아차리는 사람.
그런 그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그 어떤 적의 기척도 아니었다.
그저…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울림.
그 울림은 처소의 문 안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수…
도진은 그 이름을 마음속에서 불러보았다.
그 이름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더 깊이 눌러 담았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방 안의 공기조차 잠시 멈춘 듯했다.
‘도진.’
그렇게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세자빈이 감히 한 무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모든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걸 도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알고 있었다.
그 짧은 호명 한 번에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깨어난 것을.
그는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어둠이 드리운 회랑의 끝을 향해.
그는 더 묻지 않았다.지금 묻는 질문은 모두 기록으로 남을 질문이었기 때문이다.근위는 예를 갖추어 물러났고, 도진은 그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빈의 처소.그곳을 떠나며 택한 선택이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녀를 향한 가장 가까운 길이되었다는 사실을 도진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그 시각, 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상궁은 조용히 등을 걷어 올려 촛불을 하나 더 밝혔으나,이수는 그 불빛조차도 너무 또렷하다고 느꼈다.“마마.”“말해 보아라.”“오늘 밤, 근위의 교대가 잦아졌사옵니다.”“어느 쪽이냐.”“서쪽 회랑과… 군영으로 이어지는 길이옵니다.”이수의 손끝이 잠시 멈췄다.서쪽 회랑은 도진이 가장 자주 지나는 길이었다.“저하의 뜻으로 보이느냐.”“예.”상궁은 잠시 말을 골랐다.“아직은 ‘감시’라기보다는 ‘정리’에 가깝사옵니다.”정리. 그 단어는 이수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정리는 늘 사람을 지우기 전 단계에서 사용되는 말이었다.“김 상궁.”“예, 마마.”“지금부터는 내 처소에 드나드는 사람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두어라.”“예, 마마.”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말은 언제든 바뀐다. 그러나 기록은 나중에라도 진실이 된다.”상궁은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이수가 무엇을 대비하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이수가 잠시 말을 멈췄다.“도진 경이 이곳을 오가게 되는 날이 있거든.”상궁의 숨이 짧아졌다.“…그날은 나에게 먼저 알리되,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아라.”“예, 마마.”이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닫힌 문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눈과 귀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그녀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피하는 순간, 의심은 사실이 된다.대신 그녀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기로 했다.그 시각, 세자의 침전에서는 한 장의 종이가 조용히 접혔다.현은 종이를 내려놓고 촛불을 오래 바라보았다.불꽃
상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이수의 음성에는 이미 결론을 받아들인 사람의 고요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 세자의 침전에서는 불이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서책은 펼쳐져 있지 않았다.손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고, 손가락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도진.’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가슴 아래 어딘가에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올라왔다.믿고 싶은 마음과 믿을 수 없다는 감각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나는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빈을 믿고자 했다.’그러나 그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마다 도진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침전 안을 몇 걸음 오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확인해야겠다.”그 말은 혼잣말이었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여러 갈래의 길이 정리되고 있었다.누구를 불러야 할지,무엇부터 살펴야 할지,어디까지 허용할지.그는 조용히 결심했다.‘아직은… 칼을 들 때가 아니다.’‘그러나 칼을 꺼낼 준비는 해야 한다.’그 순간, 침전 밖에서 내관의 발소리가 들렸다.“저하.”“말하라.”“오늘 밤, 도진 나으리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잦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사옵니다.”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졌다.“…어디를 오갔다더냐.”“빈마마의 처소 인근을 포함하여 궁의 여러 통로를”“그만하라.”현은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지켜보라. 아직은… 지켜보기만 하라.”그 말 속에는 ‘아직’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무겁게 실려 있었다.내관이 물러나고 침전은 다시 조용해졌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결코 평온함이 아니었다.그날 밤, 궁은 누구도 잠들지 않았다.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를 지키려 하고,서로를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은 조
문을 닫고 난 뒤에도, 도진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문 안쪽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고, 복도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그러나 그 고요는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숨을 고른다고 해서 사라질 기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 속에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궁의 벽과 기둥, 처마의 그림자가 모두 조금씩 달라 보였다.어제까지는 단순한 구조물이었고,그저 지켜야 할 공간이었을 뿐인 곳들이오늘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숨기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지금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서는 안 된다.이수의 처소를 등지고 몇 걸음 물러났을 때, 도진은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더 이상 기척도 말소리도 없었다.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그 안에서 이수는 결코 편히 쉬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세자의 의심은 말로 끝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한 번 시작되면 사람을 시험하고,사람을 고립시키고, 마침내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라났다.도진은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세자의 곁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바뀌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빈의 처소 근처를 도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기록에 남을 수 있고, 누군가의 입에 오를 수 있었다.그 순간, 멀리서 낮게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도진은 즉시 몸을 낮추었다.기둥의 그림자 안으로 반 발짝 물러나 소리가 나는 방향을 주시했다.근위 둘이 조심스레 걸어오고 있었다.평소와 다르지 않은 순찰처럼 보였으나, 걸음의 속도와 간격이 미묘하게 달랐다.둘 다 말을 하지 않았고, 서로를 확인하는 눈빛만을 주고받고 있었다.도진은 그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그 시선은 자연스러웠으나, 마음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었다.세자의 명이 내려간 것이다.직접적인 명령일 수도
바람이 멈춘 듯 고요한 밤이었다.궁의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조차 지나치게 크게 들릴 만큼, 모든 기척이 조심스러웠다.이수의 처소에서는 촛불이 낮게 흔들리고 있었다.방금 전 세자가 문을 닫고 돌아선 여운이 아직 공기 속을 떠돌았다.그 여운에는 의심과 질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상처가 섞여 있었다.상궁은 여전히 긴장으로 굳은 어깨를 움츠린 채 서 있었다.말을 꺼낼 수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지금의 이수를 안정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고르려 했으나,숨이 생각처럼 고르지지 않았다.세자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얼마나 무겁게 마음을 흔드는지오늘 밤만큼 또렷하게 깨닫는 순간은 없었다.“상궁.”그녀가 아주 낮게 부르자 상궁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예, 마마.”“문을… 잠시 열어두어라.”상궁은 놀란 눈을 들었다.“마마, 혹여 밤공기가”“괜찮다. 이 밤의 공기가… 나를 더 차분하게 만든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문이 반쯤 열리자, 어두운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수의 소매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기척 하나가 문 안쪽의 기류를 약하게 흔들었다.바람도 아닌데 생긴 흔들림이었다.잠시 후, 복도 끝에서 낮게 들려오는 발걸음.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숨을 누르고 오는 걸음이었다.도진이었다.그는 문턱 앞에서 멈춰섰다.상궁이 그를 알아보고 조용히 말렸다.“마마께서… 지금은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압니다.”도진은 상궁의 손보다 먼저 말을 막았다.“문 앞까지만. 그 이상은 들지 않겠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으나, 그 낮음 안에서조차 깊이 가라앉은 우려가 흘러나왔다.상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러서며 이수를 돌아보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문 가까이로 한 발 다가왔다.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문턱이 있었지만 그 문턱은 오히려 서로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거리였다.도진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예를 갖추었다.“마마, 이렇게 밤중에 찾아
복도 끝에서 세자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이수의 처소 안은 더 깊은 밤으로 가라앉았다.촛불은 방금까지 현이 다녀간 방향을 향해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마치 방금 스쳐 지나간 무언가가 촛심을 건드리고 간 듯 흔들림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상궁은 바싹 마른 숨을 내쉬었다.“마마… 방금 저하의 말씀이… 너무…”“김 상궁.”이수가 조용히 불렀다.그 한마디에 상궁은 놀란 듯 입을 닫았다.“저하는 오늘, 나를 꾸짖으려 오신 것이 아니었다.”“그러하온데… 눈빛이… 너무 서늘하셨사옵니다.”“서늘한 것이 아니다.”이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두려우신 것이다.”상궁은 고개를 들었다.이수의 말은 비난도, 원망도 아니었다.그저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조용한 관찰에 가까웠다.“두렵사옵니까… 저하가?”“그래...”이수의 음성은 부드러웠다.“내가 잃어버릴까 두려우신 것이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자신이 가진 모든 것 중에, 가장 잃기 쉽고 가장 흔들리는 것을.”그 말은 상궁의 심장을 한순간 멈추게 했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조차도 그 문장이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바로 그때 멀리서 아주 낮은 북소리가 들려왔다.밤을 지키는 북이었으나, 오늘의 북소리는 ‘지킴’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도진은 궁의 어둠 속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걷는 것만으로도 상처 부위가 묵직하게 당겼다.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무언가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예감을 등 뒤에서 계속 밀어붙이는 듯했다.그의 발걸음이 복도 끝에 이르렀을 때 근위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도진 경.”도진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저하께서 방금… 빈마마의 처소에서 나오셨습니다.”그 말은 단순한 사실이었지만, 사실이 때로는 칼날보다 더한 위협이 되기도 했다.“…혹, 빈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도진의 음성이 낮게 내려갔다.근위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저하께서… 마음을 억
“…왜 대답하지 못하십니까.”“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가 아니옵니다.”“그런 의미가 아니라?”현의 음성이 낮게 꺾였다.“빈.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빈이 안다는 듯이 들리는구려갑작스런 공기가 곤두섰다.상궁이 숨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주었다.“저하는… 이 몸과 도진 경이 불경한 연을 맺었다고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그 문장은, 궁 안에서 가장 금기인 문장이었다.그 순간 등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현의 표정이 잠시 굳어버렸다.“…빈.”그가 낮게 부른 이름이 칼끝처럼 방 안에 떨어졌다.“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요.”“그러나 저하께서 지금”“그 입 다물라 했습니다.”현의 말은 이성을 잃지 않았으나,그 이성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의 얇은 막과 같았다.그리고 그 얇은 막 뒤에서 뜨거운 감정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차오르고 있었다.현은 고개를 돌려 상궁을 바라봤다.“빈.”상궁은 즉시 엎드리며 떨었다.“예, 전하…”“오늘 밤 이 처소에 드나든 모든 기척을 지금 즉시 아뢰십시요.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상궁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저하… 숨긴 것이 없사옵니다. 도진 경 말고는 아무도 들른 이가”현의 눈이 가늘어졌다.“…도진...”이수는 상궁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조용히 하게 했다.“저하. 도진 경이 여기 온 것은 이 몸의 명이 아니라 오히려 궁의 혼란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사옵니다.”“궁의 혼란을 막겠다고?”현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무사 하나가 감히 빈의 처소를 함부로 드나들며 궁의 혼란을 논한단 말입니까.”“저하, 그 말씀이 너무 과하옵니다.”이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그러나 그 흔들림은 두려움이 아니라,지켜야 할 선이 무너질 것을 감각하며 생겨나는 긴장이었다.“도진 경은 저하의 생명을 지켜온 사람이옵니다. 그 충성을 어떻게...”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충성이란 이름 아래 숨길 수 있는 것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