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복도 끝에서 세자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이수의 처소 안은 더 깊은 밤으로 가라앉았다.촛불은 방금까지 현이 다녀간 방향을 향해 아직도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마치 방금 스쳐 지나간 무언가가 촛심을 건드리고 간 듯 흔들림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상궁은 바싹 마른 숨을 내쉬었다.“마마… 방금 저하의 말씀이… 너무…”“김 상궁.”이수가 조용히 불렀다.그 한마디에 상궁은 놀란 듯 입을 닫았다.“저하는 오늘, 나를 꾸짖으려 오신 것이 아니었다.”“그러하온데… 눈빛이… 너무 서늘하셨사옵니다.”“서늘한 것이 아니다.”이수는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두려우신 것이다.”상궁은 고개를 들었다.이수의 말은 비난도, 원망도 아니었다.그저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조용한 관찰에 가까웠다.“두렵사옵니까… 저하가?”“그래...”이수의 음성은 부드러웠다.“내가 잃어버릴까 두려우신 것이다.”“…무엇을 말씀이옵니까.”“자신이 가진 모든 것 중에, 가장 잃기 쉽고 가장 흔들리는 것을.”그 말은 상궁의 심장을 한순간 멈추게 했다.이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그녀조차도 그 문장이 가진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바로 그때 멀리서 아주 낮은 북소리가 들려왔다.밤을 지키는 북이었으나, 오늘의 북소리는 ‘지킴’보다는 ‘경고’에 가까웠다.도진은 궁의 어둠 속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걷는 것만으로도 상처 부위가 묵직하게 당겼다.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무언가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예감을 등 뒤에서 계속 밀어붙이는 듯했다.그의 발걸음이 복도 끝에 이르렀을 때 근위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도진 경.”도진은 고개만 살짝 돌렸다.“저하께서 방금… 빈마마의 처소에서 나오셨습니다.”그 말은 단순한 사실이었지만, 사실이 때로는 칼날보다 더한 위협이 되기도 했다.“…혹, 빈마마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도진의 음성이 낮게 내려갔다.근위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저하께서… 마음을 억
“…왜 대답하지 못하십니까.”“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의미가 아니옵니다.”“그런 의미가 아니라?”현의 음성이 낮게 꺾였다.“빈.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빈이 안다는 듯이 들리는구려갑작스런 공기가 곤두섰다.상궁이 숨도 쉬지 못한 채 두 사람 사이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주었다.“저하는… 이 몸과 도진 경이 불경한 연을 맺었다고 의심하시는 것이옵니까.”그 문장은, 궁 안에서 가장 금기인 문장이었다.그 순간 등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현의 표정이 잠시 굳어버렸다.“…빈.”그가 낮게 부른 이름이 칼끝처럼 방 안에 떨어졌다.“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마십시요.”“그러나 저하께서 지금”“그 입 다물라 했습니다.”현의 말은 이성을 잃지 않았으나,그 이성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의 얇은 막과 같았다.그리고 그 얇은 막 뒤에서 뜨거운 감정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차오르고 있었다.현은 고개를 돌려 상궁을 바라봤다.“빈.”상궁은 즉시 엎드리며 떨었다.“예, 전하…”“오늘 밤 이 처소에 드나든 모든 기척을 지금 즉시 아뢰십시요.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상궁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저하… 숨긴 것이 없사옵니다. 도진 경 말고는 아무도 들른 이가”현의 눈이 가늘어졌다.“…도진...”이수는 상궁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조용히 하게 했다.“저하. 도진 경이 여기 온 것은 이 몸의 명이 아니라 오히려 궁의 혼란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사옵니다.”“궁의 혼란을 막겠다고?”현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무사 하나가 감히 빈의 처소를 함부로 드나들며 궁의 혼란을 논한단 말입니까.”“저하, 그 말씀이 너무 과하옵니다.”이수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그러나 그 흔들림은 두려움이 아니라,지켜야 할 선이 무너질 것을 감각하며 생겨나는 긴장이었다.“도진 경은 저하의 생명을 지켜온 사람이옵니다. 그 충성을 어떻게...”현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충성이란 이름 아래 숨길 수 있는 것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바로 그때, 문 밖에서 누군가 낮게 말했다.“마마.”상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목소리…!”이수는 숨을 아주 길게 들이쉬었다.이번에는 상궁을 흉내 낸 목소리가 아니었다.그것은“…세자저하의 목소리이다.”상궁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잡았다.“저하께서… 왜 이 시간에 이곳에…”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문을 열어라. 이 밤…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상궁은 문을 열었다.달빛과 등불 사이로 세자 현이 서 있었다.겉으로는 침착했으나,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의심도, 분노도, 상처도, 모두 억누른 채 매끈하게 정리된 눈빛.그것이 도리어 더 위험했다.현은 이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빈.”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그 부드러움은 폭풍의 중심 같은 침묵이었다.“궁이… 소란스럽구나.”이수는 침착하게 맞절했다.“저하… 이 소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 몸도 알고 싶사옵니다.”현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그래서 왔습니다. 확인하러.”상궁이 숨을 삼켰다.‘확인하러’그 말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녀의 얼굴은 사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결연했다.“…혹 그 확인이 도진 경과 관련된 것이옵니까.”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도진이라…”그가 낮게 중얼거렸다.그 하나의 이름이 궁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가졌다.그리고 그 무게는 이미 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부식처럼 자라고 있었다.이수는 숨을 아주 길게 들이쉬었다.“저하. 도진 경은 오늘, 이 몸의 처소에서 물러갔을 뿐입니다.”현의 눈빛이, 아주 천천히 어둡게 가라앉았다.“물러갔다, 빈…? 그 말을 내가 믿어야 하는겁니까.”그 부드러운 말이 칼날이었다.이수의 손끝이 떨렸다.이 밤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궁은 지금, 매우 조용히 누군가를 겨누는 방향을 정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방향은 이미 이수와 도진,두 사
세 존재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아주 잠깐, 도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멀어지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 믿사옵니다.'그 말이 밤의 촛불처럼 흔들렸다.“지키고 싶다는 마음과 지켜야 한다는 현실이… 왜 이리 서로 닿지 못하는가.”이수의 속삭임은 어둠 속에 부서져 사라졌다.그러나 그 사라짐 뒤에는 또 다른 파문이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궁 전체에 번지고 있었다.새벽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밤의 한가운데. 궁은 까마득한 적막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등불 너머의 바람은 잔잔했으나, 그 고요는 마치 무언가가 숨을 죽이고 숨어 있는 것만 같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이수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등 뒤의 병풍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는 가늘고 길었고,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 그림자는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다.상궁이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마마, 잠시라도 몸을 눕히시지요. 밤부터 아침까지 소문이 쉬지 않고 오르내렸사옵니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눕는다고 편해질 마음이 아니다.”그녀의 음성은 조용했다.그러나 그 조용함은 자신을 붙들기 위한 의지처럼 단단했다.상궁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마마… 궁에서 들리는 말들 가운데, 도진 경과 마마를 함께 엮는 이야기가… 점점 선을 넘고 있사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방 안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이수의 흉곽이 아주 느리게 들썩였다.“…그럴 줄 알았다.”그녀는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오늘 밤의 그 기척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 문을 열라 한 것도,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겠지.”상궁이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 그 모든 것이… 경을 향해 가고 있사옵니다.”이수의 눈빛이 촛불 위에 머물렀다.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마음도 함께 흔들리는 듯했다.“그 사람은… 내 곁에서 멀어지겠다고 했다.”상궁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도진 경이… 직접 그렇게 말씀을?”“그래.”이수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도진의 가슴 아래에 미세한 긴장이 일었다.세자가 밤에 움직인다는 것은 대개 ‘확인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난 밤이었다.그리고 그 확인이 향할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저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가.”“그저… ‘도진을 데려오라’ 하셨사옵니다.”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무게가 있었다.도진은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알겠다. 앞장서라.”세자 침전.현은 등불 하나만 켜두고 앉아 있었다.등불은 작았지만, 그 주변만은 기묘하게 밝게 빛났다.그 빛은 어디까지가 그림자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얼굴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빛이었다.도진이 문 앞에 다다르자 근위가 작은 기척을 내며 문을 열었다.“들라.”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 평온이 너무 단단해 오히려 위협처럼 느껴졌다.도진이 걸음을 옮기자 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그 시선은 화도 아니었고, 불신만도 아니었다.그저 무언가를 계산하려는 듯,혹은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도진아...”현이 부드럽게 불렀다.부드러움은 오히려 더 위험했다.“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와 함께 확인해 보고자 불렀다.”도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마마의 처소 근처에서 이상한 기척이 있었다 들었습니다.그것을 조사하고 돌아오던 중 저하께서 부르셨기에”“그렇지.”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기척이 있었다더군. 누군가 빈의 처소 주변을 살폈다지.”“예, 저하.”“그러나…”현의 시선이 도진의 얼굴을 아주 미세하게 스쳤다.“…그곳에서 그대를 보았다 하는 이도 있었다.”도진은 숨을 멈추었다.하지만 곧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예, 저하.”흔들림 없었다.“저는 빈마마의 안전을 위해 근처 순찰을 돌고 있었사옵니다.”“순찰이라.”현은 낮게 중얼거렸다.그 말은 의심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었다.“도진아...”현이 다시 불렀다.이번에는 목소리가 아주 조금 식어 있었다.“왜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도진은 눈을 들지 않았다.거짓을 말할 수 없
낙마한 날,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빈의 처소 앞을 지키듯 서 있었다.오늘은 누군가가 빈의 처소로 접근했다.그때도 도진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궁 안에서 빠르게 엮여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빈과… 도진.”현이 쓰게 중얼거렸다.목소리에서 피할 수 없는 불안이 번졌다.이 불안은 어떤 이유에서 온 것인지 그 스스로도 모르는 듯했다.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그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궁의 왕세자가 품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감정이라는 것.더 놀라운 것은 그 감정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현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었다.“지켜보라 했으니 지켜보겠지만…”그의 눈동자에 서늘한 그림자가 느리게 내려앉았다.“지켜보다가… 아무 일도 아니길 바라는 날이 점점 줄어드는구나.”내관은 그 말에 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밤은 더 깊어갔다.이수는 이제 잠을 청하려 방 안 깊은 곳으로 들고 있었지만 걸음마다 마음속 잔향이 따라붙었다.멀어지겠다는 그의 말.되돌아서지 않겠다는 자신의 말.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고, 어느 쪽도 옳지 않았다.그저 두 사람 모두 칼날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었다.침상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촛불 하나가 갑자기 작게 튀었다.이수는 걸음을 멈췄다.이상한 기척이 스쳤기 때문이었다.기척은 아주 작았다.사람이라면 낼 수 없는,그러나 생명이 있는 무언가가 스치는 듯한 소리.상궁이 급히 다가왔다.“마마, 무슨 일”“조용히 하라.”이수는 낮게 속삭였다.그녀의 눈이 문 쪽을 향했다.상궁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문 아래, 미세하게 그림자가 흔들렸다.바람 때문은 아니었다.누군가가 문 앞에서 아주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있다는 뜻이었다.상궁의 손이 떨렸다.“…또…입니까.”이수는 숨을 골랐다.오늘 밤, 두 번째였다.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그 누군가는 이수의 처소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등을 곧게 세웠다.“문을 열지 마라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