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지호야, 이쪽으로 와!”
유진이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에 지호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시작은 그저 조별 과제 뒤풀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진이 다른 과 동기들과 미리 짜 둔 과팅 자리였다. 좁은 룸 안에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가득했고, 다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소개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진아, 나 이런 얘기 못 들었는데.”
지호가 작게 속삭이자, 유진이 눈을 찡긋했다.
“그냥 밥만 먹고 가면 돼. 재밌을 거야.”
재밌을 리가.
지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남학생이 뭔가 열심히 말을 걸어왔지만,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숨이 막혔다. 웃어야 할 타이밍에 웃고, 대답해야 할 타이밍에 대답했지만, 정작 머릿속은 텅 빈 것 같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지호는 결국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유진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한 뒤, 지호는 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장실 대신 곧장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지호는 닫힘 버튼을 다급하게 눌렀다. 문이 절반쯤 닫히려던 순간이었다.
“어.”
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다시 열었다.
지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휘웅이었다.
“오빠가 여긴 왜…….”
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휘웅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동학을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에 둘만 남았다.
휘웅은 대답 대신 지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짧게 물었다.
“왜 혼자 나와.”
“그냥… 답답해서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휘웅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 과팅 같은 거 나가지 마.”
“…네?”
지호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휘웅은 이미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뒤였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도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동안, 지호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마자, 지호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한 채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그런데도 얼굴은 식을 줄 몰랐다.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다음부터 과팅 같은 거 나가지 마.'
장난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빨라.”
지호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휘웅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내린 뒤 자연스럽게 헤어질 줄 알았는데, 그는 어느새 지호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안 가셨어요?”
“가야지.”
휘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보호자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안 심각한데요.”
“거짓말.”
그는 피식 웃으며 지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귀까지 빨개졌어.”
지호는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귀를 가렸다.
“안 빨갰거든요.”
“그래?”
“네.”
“그럼 다행이네.”
전혀 안 믿는 표정이었다.
지호는 괜히 앞만 보고 걸었다.
평일 오후 대학가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술집 간판 불빛이 골목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었고, 멀리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는, 지호 혼자 어색했다. 휘웅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걷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사람 심장을 뒤집어 놓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태평한 거야.'
지호는 슬쩍 휘웅을 올려다봤다. 가로등 아래 비친 옆모습은 여전히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높은 콧대와 짙은 눈매, 무심한 얼굴. 그런데 가끔 저 입꼬리가 올라갈 때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배고픈데.”
휘웅이 불쑥 말했다.
지호가 걸음을 멈췄다.
“네?”
“과팅 갔는데 제대로 먹은 게 없어.”
“그건 오빠가 늦게 와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
휘웅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지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웃네.”
“…안 웃었거든요.”
“또 거짓말.”
그가 작게 웃었다.
이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이 막힐 것 같았는데, 밖으로 나오니 다시 평소의 휘웅이었다. 장난을 치고, 툭툭 놀리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웃게 만드는 사람.
“떡볶이 먹을래?”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길 건너 포장마차를 가리키며 휘웅이 물었다.
“갑자기요?”
“갑자기는 아니고.”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먹고 싶었어.”
“그럼 친구들이랑 드시지.”
“싫었는데.”
“왜요?”
휘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너랑 먹고 싶어서.”
너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호의 심장은 전혀 아무렇지 못했다.
그는 그런 지호의 반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횡단보도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안 와?”
지호는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포장마차 안은 따뜻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마주 앉자, 아주머니가 메뉴판도 가져다주지 않은 채 물었다.
“학생들, 떡볶이랑 튀김?”
휘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순대도 주세요.”
“내 거예요?”
지호가 묻자, 휘웅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응.”
“제가 순대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몰랐는데.”
익숙한 대답이었다. 지호가 피식 웃었다.
“또요?”
“왠지 좋아할 것 같았어.”
며칠 전 복숭아 음료를 건네던 날과 똑같은 말이었다. 지호는 괜히 종이컵만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휘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떡볶이 접시를 지호 쪽으로 밀어줬다.
“많이 먹어.”
“오빠도 드세요.”
“응.”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한참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휘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네?”
“너 과팅 체질은 아닌 것 같아.”
지호가 떡볶이를 먹다 말고 그를 바라봤다.
“왜요?”
“아까 나올 때 표정 봤거든.”
“무슨 표정이었는데요?”
휘웅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전교 1등이 갑자기 강제로 MT 끌려온 표정?”
“뭐예요, 그게.”
“딱 그랬어.”
지호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과 억지로 웃고 떠드는 것보다, 지금처럼 둘이 앉아 떡볶이를 먹고 있는 시간이 훨씬 편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지호는 괜히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때였다. 휘웅이 문득 물었다.
“윤지호.”
“…네?”
“너 원래 다 이렇게 경계해?”
“제가요?”
“응.”
그는 턱을 괸 채 지호를 바라봤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잘 안 웃잖아.”
지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다. 친해지는 데도 오래 걸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강휘웅 앞에서는 자꾸 웃게 됐다.
“잘 모르겠어요.”
지호가 작게 중얼거리자, 휘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다행이다.”
“뭐가요?”
그가 콜라 컵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했다.
“나한테는 조금 풀린 것 같아서.”
순간, 지호의 심장이 아주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내려앉았다.
포장마차 밖으로 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멀리서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호는 문득 깨달았다. 놀이공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잘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터미널에서는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강휘웅은 점점 더 특별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자기만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나란히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아까보다 한산해진 거리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나직하게 울렸다.
정류장 앞에 다다랐을 때, 휘웅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지호도 덩달아 멈춰 섰다.
“왜요?”
휘웅은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장난기도, 나른함도 아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지호야.”
“…네?”
그가 입을 열려다, 잠시 멈췄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서,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휘웅은 끝내 말을 삼키듯 픽 웃어 버렸다.
“아니다.”
“…네?”
“다음에 말할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호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선 채, 방금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지호의 발목은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졌다.하루 정도 차가운 찜질을 하자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고, 발목도 처음처럼 욱신거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나은 건 아니어서 무리하면 안 됐고, 아직 눈길은 미끄러워 다시 넘어질 위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진섭은 지호를 어린아이 다루듯 챙겼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먼저 나서서 말렸고, 식재료가 떨어져 마트를 다녀와야 할 때도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처음엔 그 호의가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친절은 언제나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진섭은 그런 지호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친 사람은 가만히 쉬어야 한다는 듯, 그는 지호를 공주 모시듯 대했다. 덕분에 지호는 방 안과 거실 사이를 오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오르디노는 날씨에 따라 인터넷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했다. 틈틈이 대본을 써도 전송이 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작업을 핑계 삼아 시간을 보내기엔 이곳은 너무 조용했고, 조용한 만큼 지호의 생각도 자주 같은 곳으로 흘렀다. 이 추운 겨울은 매 순간 휘웅을 떠올리게 했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어도, 창밖의 눈을 바라보고 있어도, 결국 마음 한구석은 그 사람에게 닿아 있었다.지호는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진섭의 호의가 불편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 마을은 지호에게 너무 많은 기억을 불러냈다. 머무는 동안마다 휘웅의 흔적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럴수록 지호는 더 지쳐 갔다. 잠깐 머물다 가려고 온 여행이었지만, 지금은 여기서 더 버티고 싶지 않았다.그날은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인터넷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지호는 노트북을 켜고, 무심한 표정으로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했다.우유니 사막.화면에 뜬 사진을 보는 순간, 예전에 바탕화면에 띄워 두었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기억도 함께 따라왔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풍경. 끝이 보이지 않는 소
진섭은 늦잠을 잤다.밤새 뒤척인 탓인지 몸은 무거웠고, 눈을 떠도 한동안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다. 어제 본 지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울음을 삼키다 나온 듯한 붉은 눈가, 불빛 아래에서 유난히 하얗게 보이던 얼굴, 그리고 문 앞에 서서도 쉽게 안으로 들이지 않던 그 경계심까지. 그는 괜히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방 안은 조용했다. 진섭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어디선가 스미듯 퍼져 오는 커피 향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거실을 지나 주방 쪽으로 걸어가자, 지호가 서 있었다. 커피 포트가 끓고 있었고, 지호는 그 옆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이 집의 원래 주인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꺼내고 접시를 챙기고 있었다.진섭은 잠깐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잠옷 위로 겉옷을 대충 걸친 모습이 영 성의 없어 보여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고쳤다. 그 뒤에야 지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굿모닝이요.”지호는 고개만 아주 조금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거절도 아니었다. 그냥 그 정도만 허락하겠다는 식의 표정이었다.진섭은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주방 쪽을 기웃거렸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아침상이 하나씩 차려지고 있었다. 계란프라이, 살짝 구운 베이글 반쪽, 베이컨 두 줄, 커피, 그리고 바나나와 사과가 담긴 작은 바구니까지.“아침은 각자 해 먹는 게 룰이긴 한데요.”지호가 짧게 말했다.“하는 김에 조금 더 했어요.”그 말에는 별다른 온도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지호는 다시 말이 없었다. 진섭은 그 침묵이 어색해서, 또는 어색한 걸 못 견뎌서였는지 곧바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와, 이 집 아침 되게 괜찮네요.”그는 식탁을 한 번 훑어보고는 웃었다.“원래 이렇게 잘 차리세요?”지호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말이 많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던지는 말들은 가볍고 빠르지만, 귀에 거슬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지호는 심장이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길게 떨어지는 코트 자락과 목도리까지.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던 사람과 너무 닮아 있었다. 휘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그 짧은 순간, 지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몇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그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 휘웅을 닮아 있었다. 지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실 불을 켰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며 문 앞의 남자를 드러냈다.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휘웅이 아니었다.낯선 남자는 키가 컸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이 단단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체격은 한눈에 봐도 운동을 오래 해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언가에 주눅 들거나 숨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유롭고 단단한 분위기였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선명한 타입의 남자였다.지호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애매한 얼굴. 그건 묻고 싶은 기색과 모른 척하고 싶은 기색이 동시에 섞인 표정이었다. 지호는 그가 왜 저렇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누구세요?”지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진섭은 아주 잠깐 지호를 바라보다가, 시선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듣기 편한 톤이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저도 이 숙소에 묵으려고 왔어요.”짧은 대화가 오갔고, 몇 마디 더 나누는 동안 둘은 금세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국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지호는 묘하게 더 당황했다. 낯선 나라의 조용한 민박집에서 한국어를 듣게 될
김진섭이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안도라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오르디노는 그중에서도 더 한적한 마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겨울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사이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진섭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는 원래 겨울을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바삭한 눈, 하얗게 내려앉은 산맥의 풍경은 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도라는 스키로 유명한 나라였다. 진섭은 겨울 스포츠도 좋아했고, 작은 나라 특유의 아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며칠쯤 머무르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르디노는 겨울의 설경을 보기 위해 들른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스키를 타기 위해 솔데우로 옮길 생각이었다.이번 여행은 심기일전의 의미에 가까웠다.조연 배우로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진섭은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그는 늘 어딘가에 있었고 어딘가에 없었다. 누군가의 친구, 동료, 형, 스쳐 가는 행인, 이름 없는 술집 손님. 존재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중심에 선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연예인이라는 자부심을 버린 적은 없었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분명히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최근 1년은 유난히 길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았다. 오디션도, 섭외도, 연락도 뜸했다. 불려 갈 일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약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작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점점 무뎌졌다. 이러다 정말 연기를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진섭은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낯선 곳을 골랐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굳이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는 곳. 잠시라도 배우 김진섭이 아니라 그냥 여행객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오르디노는 그런 점에서 제격이었다. 사람이 많지
지호는 민박집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있었지만, 당장 노트북을 펼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마감이 아주 먼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바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지호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바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시간을 길게 끌어안은 채, 스스로를 조용한 곳에 가둔 채 버텨 왔다.벌써 10년이었다.유진은 결국 대학 시절 만난 동학과 결혼했다.지호는 학교를 그만둔 뒤, 드라마 작가라는 이름만 붙여 둔 채 사실상 은둔하듯 지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고, 세상과의 거리를 일부러 넓혔다. 그 와중에도 드라마 다섯 편을 성공시켜 얼굴 없는 유명 작가가 되었다. 써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지호 자신은 그 장르와는 정반대처럼 어둡고 가라앉은 사람이었다. 작업이 막히면 더 깊이 숨었고, 마음이 흔들리면 더 오래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생활은 오래된 버릇처럼 몸에 붙어 있었다. 조용한 시간은 편안한 동시에 잔인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어쩌면 지호는 그저 익숙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상처를 잊는 대신,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는 방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표정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식.그 무렵 한 번, 지호는 간신히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동학에게서 전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휘웅이 어쩌면 결혼식에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정확히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흘러나온 소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호는 그 한마디에 무너질 만큼 오래 휘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끝내 놓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지호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일도, 낯선 음악과 축하 인사들 사이에 서 있는 일도 모두 낯설었지만, 그날만큼은 꼭 휘웅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결
지호가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한겨울이었다.산맥의 능선은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피레네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얇았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양옆에는 짙은 초록빛 침엽수 숲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나뭇가지 끝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오르디노는 안도라 북쪽, 산기슭을 따라 낮고 조용하게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화려한 풍경보다도 묵직한 고요가 먼저 닿는 곳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낮고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거친 돌벽과 짙은 갈색 나무 창틀, 검은 슬레이트 지붕이 겨울빛 속에서 더 단단해 보였다. 골목은 넓지 않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딱 맞을 정도였고, 자동차 소리보다 바람이 벽을 스치는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지호는 작은 캐리어를 끌며 천천히 걸었다. 노트북과 잠옷, 속옷 몇 개, 외투와 여벌 옷 한두 벌. 정말 최소한의 짐만 챙긴 여행이었다.처음부터 어딘가를 보러 온 건 아니었다. 방송국 드라마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던 작업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막혀 버렸다.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한 줄이 써지지 않았고,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 갔다.지호는 10년 가까이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대학 시절 단짝이던 유진과 남편 동학이 가끔 들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지호에게는 쉽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아픈 기억과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늘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약속을 미뤘다.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생각은 더 굳어 갔다.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는 새로운 장면도, 새로운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호는 자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보다, 여행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았다.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마을을 골랐다.숙소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민박집이었다. 돌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