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어!”그는 화를 참으며 피가 멈추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강태화가 두고 간 구급상자를 찾았다.민여진의 손에는 그의 입술 온기가 남아 있었고 따끔거리던 손가락은 이상하게 뜨거워졌다.박진성은 결벽증이 심했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돌았나...’“손 줘 봐.”박진성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였지만 꾹 참고 민여진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었다.밴드를 다 붙이고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민여진은 당황하며 물었다. “진성 씨, 화났어?”“그런 질문 말고 할 말 없어?”박진성의 대답은 날카로웠고 억눌린 분노가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화가 난 것 같은데... 예전처럼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 같아서.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어.”민여진의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에 박진성은 심호흡을 했다. 민여진에게 괜히 화를 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녀가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3년 전에도 다칠 걸 망설였다면 그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보고 걱정하지 말라며. 병원에서 애들 옷도 많이 만들어 봤다고 큰소리치더니 이제 와서 손에 상처가 난 건 어쩐 일이래?”민여진은 당황하며 손가락을 감추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뭐. 바느질하다 보면 다치기도 하지.”“그럼 내가 예민하게 군다는 거야?”“그게 아니라...”민여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박진성이 이렇게까지 걱정할 줄은 몰랐다.“병원에서 바느질할 때도 가끔 다쳤어. 바늘을 들고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안 괜찮아!”박진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말에 민여진과 박진성 모두 깜짝 놀랐다.민여진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박진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걱정되고 마음 아프다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던 것이다.결국 박진성은 아
그가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했다.곧 민여진의 텅 빈 눈에 반짝이는 빛이 떠올랐다. 박진성이 덧붙였다.“서원은 따라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두 사람만 나가. 6시 전에 돌아오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알았어.”민여진은 기뻐하며 대답했다.“일찍 돌아올게.”“그래.”박진성은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떠나기 전, 그는 민여진 앞에 카드를 놓으며 말했다.“여기60억이 들어있어. 오늘 하루 쓰기에는 충분할 거야. 부족하면 전화해. 내 번호 알잖아.”“아니...”민여진은 거절하려다가 말을 멈췄다.지금 그들은 부부이니 남편인 박진성이 아내에게 돈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거절하면 오히려 어색해질 뿐이니 민영미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그래.”박진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서원과 함께 나갔다.민여진과 정수향은 날이 좀 더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외출했다. 한낮이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민여진은 햇살 아래서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오랜만에 느끼는 자유,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이 순간, 그녀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했다.‘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여진아.”정수향이 웃으며 다가왔다.“힘들어?”민여진은 눈을 떴다. 세상은 까맣지만 둔해졌던 마음은 선명하게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요.”정수향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그럼 이따가 다시 햇볕을 쬐자. 지금은 네가 사고 싶은 게 있는지부터 얘기해 보렴.”“옷이요.”정수향이 물었다. “무슨 옷을 사고 싶은데?”“내 옷이 아니고.”민여진이 대답했다.“엄마 옷을 사 드리고 싶어요.”박진성의 돈으로 사는 것이었지만 나중에 갚을 생각이었다. 어렵게 어머니와 함께하게 된 시간이었으니 더 이상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양성은 다른 도시보다 추워요. 엄마 옷이 너무 얇으니까 두꺼운 옷을 사서 입으세요. 그래야 따뜻할 거예요.”정수향
“저 사람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었나요?”점원은 고개를 저었다.“모녀 두 분뿐이었어요. 다른 사람은 못 봤어요.”문채연은 순간 동공이 수축되며 점원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모녀? 모녀라니!”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점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문채연의 어떤 부분을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지금 문의하신 두 분 말씀이시죠? 두 분은 모녀 사이세요... 얼굴에 흉터가 있는 젊은 여성분이 매장에 들어오자마자 어머니께 옷을 골라드리겠다고 하셨는데, 모녀가 아니면 뭐겠어요...”문채연의 눈에 엄청난 충격이 어렸다. 민영미가 1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문채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으니까.그러니 민여진에게 어머니는 있을 수 없었다.문채연은 음침한 표정으로 점원에게 다가가 말했다.“확실해요? 젊은 여자가 저 여자를 자기 어머니라고 인정했다는 게 확실하냐고요?”점원은 마늘 찧듯 고개를 끄덕였다.“백 퍼센트 아주 확실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젊은 여자분은 매장에 들어온 후로 계속 옆에 있는 분을 엄마라고 불렀어요. 거짓일 리가 없어요.”“알겠어요...”문채연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흔들리며 민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정수향은 문채연을 몰랐고 민여진은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문채연은 전혀 거리낌 없이 민여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와 낯선 여자에게 의지하는 모습, 행동거지와 말투까지 모두 어머니를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민여진이 하는 말을 들었다.“엄마, 이 옷 괜찮은 것 같아요. 한번 입어봐요. 잘 맞는지.”“하...”문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차갑게 웃었다.박진성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낯선 여자까지 데려와 민여진을 속였다는 사실이 문채연은 믿기지 않았다.어쩐지, 민여진이 민영미의 죽음에 대해 갑자기 침묵하고 박진성이랑 나가는 것도 받아들이더라니. 처음에 그녀는 민여진이 어머니의 죽음에 무덤덤해진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문채연은 혀를 찼다.“민여진, 너 설마 저기 너랑 웃고 떠드는 여자가 민영미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도 그렇게 순진해? 박진성이 아무 여자나 데려다 놓으니까 진짜인 줄 알겠지?”“진짜 민영미이면 너보다 키가 이렇게 크고 이렇게 젊고 정상인처럼 너랑 같이 옷을 사러 다니겠어? 게다가 외모는 네가 눈이 안 보인다고 해도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저 여자는 관리를 잘해서 주름 하나 없어. 네가 손으로 만져보면 몰라? 저런 여자가 너랑 같이 빈민가에서 고생했던 엄마일 리가 없잖아!”“닥쳐!”민여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지만 가슴은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뭐라고? 문채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방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여자가 엄마가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분명 길에서도 함께 웃고 다정하게 이야기했잖아. 어색한 부분도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낯선 사람일 수가 있지?’민여진은 눈이 붉게 충혈된 채 문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만해, 문채연! 이런 수작, 언제까지 부릴 거야! 내가 또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엄마는 멀쩡히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돌아가셨겠어! 넌 그저 나랑 박진성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거잖아. 꿈 깨!”민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너한테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내가 엄마라고 부른 사람이 누군지!”문채연은 동정하는 어조로 말했다.“정말 알고 있는 거야? 민여진, 너 정말 우스워. 박진성 말은 믿으면서 내 말을 안 믿다니. 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민여진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잊었어? 널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건 박진성이라고!’순간, 한기가 온몸을 휘감으며 민여진의 오장육부를 짓눌렀다.민여진의 눈은 붉게 달아올랐고 문채연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네가 날 안 믿는 건 당연해. 하지만 네가 확인할 방법은 많다는 걸 알아. 눈은 안 보이지만 손과 입은 있잖아? 결과가 나오면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되겠지. 나와 박진성 중에.”문채연은
민여진은 떨리는 입술로 애써 손을 뻗으며 말했다.“엄마, 손... 한번 만져 봐도 돼요?”민영미의 손은 알고 있었다. 굳은살이 박인 그 손을 어렸을 때 잡았던 느낌은 지금과는 달랐다.특히 몇 군데는 유난히 달랐다.전에는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문채연의 말 때문에 의심이 생겼다.정수향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무슨 일이야? 여진아... 왜 그래?”“아니에요...”민여진은 심호흡을 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예전에 엄마 손을 자주 잡았었잖아요. 그때가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다닐 때 엄마가 손잡고 집에 데려다주던 게 그리워요...”“그랬구나.”정수향은 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민여진이 뭔가를 눈치채고 불안해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다.“그래, 우리 여진이 손잡아 줘야지.”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하지만 민여진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혹시나 매끄럽고 부드러운 마치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손을 잡게 될까 봐 말이다.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민여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정수향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에 느껴지는 거친 감촉에 민여진은 순간 멍해졌다. 문채연의 말과는 달리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젊은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기쁜 동시에 민여진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민영미의 손에 비하면 이 손은 너무 부드러웠다.“왜 그래?”정수향의 마음은 불안했다. 민영미의 영상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손을 눈여겨봤었다.늙고 메말랐으며 굳은살이 가득하고 누렇게 변색된 손이었다.영상 속 민영미는 50대처럼 보였지만 그 손은 마치 말라 죽은 나무처럼 흔적투성이였다.정수향은 그 손을 재현하기 위해 며칠 동안 사포로 자신의 손을 문질렀다. 하지만 민영미의 손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에요...”민여진은 손가락으로 민영미의 손에서 익숙한 굳은살을 찾았다. 딱딱하고 거친 굳은살이 손끝에 닿자 민여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민영미다. 틀림없는 엄마야!’이곳은 오랫동안
“아, 이거요.”강태화는 넥타이를 다시 매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민여진 씨가 오늘 쇼핑 나갔다가 선물을 사 왔어요. 제 거는 이 넥타이고 서원이한테는 휴대폰 액세서리를 사 줬어요.”박진성 뒤에 서 있던 서원은 순간 멍해졌다.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민여진이 쇼핑을 나가서 다른 남자들 선물까지 챙겨 오다니.“휴대폰 액세서리는 어디 있어?”강태화는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만...”“가 봐.”박진성은 짜증스럽게 손을 휘젓고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정말 귀여운 강아지 모양의 휴대폰 액세서리가 담긴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서원의 시선은 좀처럼 액세서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박진성은 뒤돌아 서원을 노려보며 차갑게 물었다.“마음에 들어?”서원은 고개를 저었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민여진 씨가 사 온 건데, 민여진 씨의 마음을 헛되게 할 순 없잖아요.”그 말인즉 그것은 자신의 것이니 갖고 싶다는 뜻이었다.박진성은 순간 불같이 화가 났다. 그는 휴대폰 액세서리를 상자에 담아 손에 들고 말했다.“내가 갖고 있을게. 그럼 마음이 헛되지 않겠지.”서원은 속이 쓰렸지만 감히 불평할 수 없었다.“민여진 씨는 아마 모두에게 선물을 샀을 거예요. 분명 박 대표님 선물도 있을 겁니다. 방에 있을지도 몰라요.”민여진은 꼼꼼한 성격이었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박진성이 맡긴 일은 항상 완벽하게 처리했다. 물론 이번 선물도 강태화와 서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박진성은 불쾌하면서도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민여진이 나에게 준 선물은 뭘까?’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박진성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다가 멈춰 서서 서원에게 말했다.“너는 이제 할 일 없으니까 일찍 돌아가 쉬고 내일 다시 와.”박진성은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하지만 침대, 소파, 책장, 어디에도 선물은 없었다.서재에도 없었다.설마 민여진이 직접 주려고 가지고 있는 걸
박진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돈? 무슨 돈?”“선물 산 돈... 나 지금 돈이 없어서 당신 카드를 썼어. 갚을게.”박진성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그는 돈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민여진이 자신의 돈을 쓰는 게 오히려 좋았다.“뭘 그렇게 선을 그어?”박진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겨우 몇백만 원 가지고 그럴 것 같아?”민여진은 침묵했다.‘돈 때문이 아니라면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박진성은 심호흡을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 건?”“뭐?”“태화랑 서원이한테는 선물을 사 줬잖아. 그럼 내 선물은 네가 갖고 있는 거야?”이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민여진의 멍한 표정을 본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음침하게 말했다.“민여진, 나한테는 안 사 준 거야?”“난...”민여진은 당황하며 입술을 깨물었다.“뭘 사 줘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은 부족한 게 없고 갖고 있는 건 다 비싸니까...”박진성은 탁자 위의 물건들을 바닥에 던졌다. 민여진은 깜짝 놀라 박진성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팔을 들어 올렸지만 박진성은 그녀의 옆을 지나쳐 차갑게 위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쾅 닫았다.민여진은 2층을 바라보았다. 박진성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선물을 사 주지 않았다고?하지만 재벌가로 도도한 박진성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을까? 분명 예전처럼 그 물건이 싸구려라고 생각하며 역겨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민여진, 꼴값 떨지 마. 이런 유치한 건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안 주워.”민여진은 멍하니 돌아갔다. 정수향은 침대를 정리하고 있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민여진을 보고 물었다.“여진아, 물 뜨러 간 거 아니었어? 왜 빈손으로 돌아왔어? 못 찾았어?”민여진의 표정을 본 정수향은 하던 일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정수향은 민여진에게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야?"“엄마, 아무 일도 아니에요.”민여진은 억지로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박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민여진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항상 마음을 졸였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물었다.“그래서 지금은? 아직도 의심하고 있어요?”정수향은 고개를 저으며 흉터투성이인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다행히 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바로 의심을 풀었습니다.”“다행이네요.”박진성의 얼굴은 어두웠다.“당신이 옷 갈아입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누군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을 거예요. 내가 알아볼 테니 당신은 당신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알겠습니다.”정수향은 눈치껏 나가려고 했다.“잠깐만.”박진성은 정수향을 불러 세우고 눈살을 찌푸렸다.“민여진이 선물 살 때 당신은 계속 옆에 있었나요?”“왜 그러세요?”“서원이랑 강태화 선물 말고 다른 것도 샀어요?”정수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잘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계산할 때 잠깐 밖에 나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민여진 씨 손에는 두 개밖에 없었으니 아마 그 두 사람 것뿐이었을 거예요.”박진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알았어요.”그 후 이틀 동안, 정수향도 별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박진성과 민여진의 사이가 갑자기 서먹해졌다. 아침에 마주쳐도 두어 마디 나누고 박진성은 나가 버렸고 밤늦게야 돌아왔다.꼭 싸운 연인 같았다.하루는 외식을 하다가 정수향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여진아, 엄마가 오지랖 넓게 참견하는 것 같지만 너 혹시 진성이랑 무슨 일 있었니?”민여진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아... 아니요...”정수향은 웃으며 말했다.“말 못 할 거 뭐 있어?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싸울 때가 있는데 너희는 아직 젊으니까 가끔 싸우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벌써 이틀째잖니. 나도 이유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이유요...”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혼란스러운 듯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나도 모르겠어요.”“네가 어떻게 몰라? 다투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지. 설마 진성이 혼자 꽁해 있는 거니?”민여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