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야! 우리 드디어 한 방 터뜨릴 것 같아! 곧 부자가 될 수 있다고!”멍한 표정을 짓던 한이나가 곧 냉소 지었다. “너 또 무슨 헛소리하는 거지? 미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아냐!”표찬이 잔뜩 기대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나야. 내가 오늘 병원에서 누굴 만났는지 알아?”호기심이 생긴 한이나가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누구?”“박진성의 전 아내. 문채연!”“뭐?”한이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박진성의 자료는 한이나가 돈을 주고 찾아낸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 역시 문채연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이나가 말을 이었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문채연은 지금 감옥에서 복역 중이잖아.”“그러니까. 그러니까 빅뉴스라는 거지.”표찬은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생각해 봐. 박진성의 전 아내가 감옥이 아닌 병원에 나타났어. 그렇다면 가능성은 딱 하나. 그건 박진성이 집안의 세력을 이용해 문채연을 감옥에서 꺼냈다는 얘기겠지.”“박씨 가문이 법을 무시한 채 살인범을 석방했고 심지어 살인범인 전 아내와 여전히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입수하면 앞으로 돈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을 거야.”“자기야, 역시 대단해!”소리를 지르던 한이나가 곧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박진성의 전 아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해?”“틀림없어.”표찬이 여전히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넌 좋은 소식만 기다리면 돼.”...민여진은 또다시 꿈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그제야 굳게 닫히지 않은 창문에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잔 탓인지 왼쪽 볼이 차가웠다. 얼굴을 만지던 민여진이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닫았다. 그러다 또 임재윤도 잠을 설쳤을까, 그의 침대맡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이불 끝을 잡고 끌어올려 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뭔가를 느낀 듯 침대를 만졌다. 비어 있었다. “재윤아?”민여진이 침대의 이곳저곳을 만졌다. 이불엔 진작 온기가 없었다
민여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뒤에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이 고개를 돌리려던 그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에는 아직도 갓 샤워한 향기가 남아있었다. 분명 수술이 코앞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민여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수술 준비는 다 됐어?”임재윤이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놓으며 휴대폰을 가져왔다. “왜? 걱정돼?”“응.”민여진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리스크가 적다고 해도 수술은 수술이니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작다는 거지, 없다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한 거지.”“걱정하지 마.”임재윤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승리의 여신은 이미 우리 편이야. 이번 수술, 아무 문제 없이 끝날 거야. 그리고 회복하면 우리 여기 떠나자.”임재윤이 민여진의 귀에 입을 맞추었다. “첫 목적지로 남연 어때?”“남연?”“응. 거기 맛집 많잖아. 너랑 같이 먹으러 다니고 싶어. 너 너무 말랐어. 나도 남자친구의 책임을 다해서 널 포동포동 살찌울 거야.”임재윤이 휴대폰 음성 기능을 이용해 남연을 묘사했다. 그 덕분에 민여진은 남연을 가본 적이 없었음에도 이미 그곳에 도착한 듯 남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민여진은 심지어 퇴원 후 박진성이 다시는 그녀를 찾을 수 없도록 임재윤과 조용히 이곳을 떠나는 장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남연으로 가자.”민여진의 말투가 기대로 가득했다. 임재윤이 민여진의 손을 감쌌다. “그다음엔 독엔에 우리 부모님 뵈러 가는 거야.”그 말에 멈칫한 민여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임재윤 역시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왜 그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준비 안 됐으면 나중에 가. 내가 너무 급했어. 너무 일찍 그런 말을 꺼냈어.”“아냐.”민여진이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재윤아, 부모님을 뵌다는 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아?”임재연이
민여진은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혼자 병실 침대에 웅크린 채 이불을 덮었다. 그녀는 그런 이정화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혹여 이정화가 또다시 박진성을 만나달라고 부탁할까 봐 겁이 났다. 이정화가 체면 따위는 뒤로한 채 다시 한 번 부탁한다면 어쩌면 민여진의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후로는 별다른 소란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끔 세탁실에서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수군거리는 간호사의 얘기가 들려올 뿐이었다. “하늘이 질투한다는 말이 이런 거겠지? 아니면 젊은 나이에, 능력도 좋은 사람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겠어?”“오늘 출근하면서 보니까 병원 입구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 아마 소식이 새어 나가서 기자들이 몰려온 것 같아.”“그래? 정말 웃기지 않아? 한쪽에선 쉬지 않고 수술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몰래 특종 하나 낚아서 돈 벌 궁리만 하는 꼴이라니.”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가려는 민여진에게 갑자기 누군가 바짝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뭐 좀 여쭤볼게요. 박진성 씨 병실이 어딨는지 아세요?”일부러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발견되면 안 되기라도 하듯 수상한 모습에 민여진이 입술을 짓이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저도 잘 몰라요.”민여진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정말 몰라요? 박진성은 그쪽과 같은 병동에 입원했어요. 평소 한 번쯤은 마주치지 않아요? 아니면 돈 필요해요? 정확한 병실을 알려주기만 하면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그 말에 민여진은 그 사람이 기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는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직접 특종을 잡으러 올라온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봐서요. 병실 밖을 자주 드나드는 편도 아니라 도움을 못 드릴 것 같네요. 다른 분께 여쭤보세요.”“시각장애인?”남자는 그제야 민여진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의 말대로 민여진의 두 눈은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티가 나지는 않는 수준이었다. “
민여진의 질문에 진시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소파에 앉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녜요. 박진성 씨 상태가 안 좋아서요. 피를 계속 토하고 있어서 이미 보호자에게 위독하다는 통보를 내렸어요. 그러니 병원이 소란스러운 것도 당연하죠.”“아무래도 박진성 씨가 일반인도 아니고 정말 병원에서 사망이라도 했다간 뉴스에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니까요.”‘위독...’민여진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심각해진 거예요?”“너무 예상 못 한 일은 아녜요.”진시우가 말했다. “박진성 씨는 줄곧 건강이 그리 좋진 않았던 거로 기억해요. 그게 아니라면 입원하고 나서 한 번도 병실을 나온 적이 없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지금 이 상황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죠.”민여진이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건 어쩌면 박진성에겐 당연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민여진은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옆에 있던 임재윤이 휴대폰을 두드렸다. “박진성이 죽으면 오히려 좋은 일이지.”의외의 말에 민여진이 멍해졌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임재윤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적의를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연적으로 여겼던 조현준도 도와주려 했던 사람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민여진이 의문스럽게 물었다. “재윤아, 너 박진성과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원한은 무슨. 그냥 그 사람이 싫은 것뿐이야.”진시우가 말했다. “재윤은 박진성 씨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요. 그것도 동진 연회장에서요. 태도가 아주 나빴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은근히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라 재윤이가 당연히 못마땅하게 여겼죠.”“그렇군요.”민여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임재윤과 박진성 사이에 이런 인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임재윤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 잠시 나갔다가 올게.”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재윤이 병실을 나서자 진시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진 씨, 무슨 생각 해요?”조금 전 민여진은 계속 멍한 표정으로
“재윤아, 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민여진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어지러운 감정의 근원을 원망했다. 임재윤은 민여진의 등을 쓸어내리며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죽음을 기대하지 않는 건, 네가 착해서 그런 거야. 넌 다른 사람의 불행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니니까.”“하지만 기뻐해야 맞는 거잖아...”“여진아.”임재윤이 민여진의 얼굴을 감싸 쥐고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직 사랑해?”“... 누굴?”“그 남자를 말이야.”민여진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통의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난 그 사람이 미워! 이제 더 이상 미워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원망스러워.”“그러니까 넌... 그 사람을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지?”민여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칼같이 딱 잘라 대답한 민여진에 멈칫한 임재윤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민여진이 불안한 듯 물었다. “왜 그래?”임재윤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네 마음이 이렇게 확고한데 뭘 고민해?”그 말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민여진 역시 그의 씁쓸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임재윤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임재윤이 말을 이었다. “네가 신경 쓰는 건 단지 네 마음이 아직도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을까 봐, 그래서 그 남자에게 조금의 연민이라도 남아있을까 봐 의심이 들어서 그래. 그렇다면 네가 방금 나에게 준 대답이 네 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정답 아닐까?”“넌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안타까움이나 미련도 느끼지 않았어. 넌 그 사람을 원망해. 더 이상 미워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을 만큼 많이. 더 이상 그 사람과는 그 어떤 식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그래.’민여진이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그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은 박진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하지만 이정화의 부탁을 거절한 후 민여진은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
민여진의 부름에도 임재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민여진이 침대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화장실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여진은 임재윤이 대체 언제 나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세탁실로 향했을 땐 침대에 있던 사람을 확인하지 않았다. ‘날도 이렇게 추운데, 어디 간 거야?’임재윤이 갈만한 곳을 떠올리고 있던 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 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남자 특유의 향기가 묻어있었다. 민여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임재윤?”“응, 나야.”순간 민여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어디 갔었어?”민여진의 손을 잡는 남자의 손이 조금은 차가웠다. 남자가 다른 한 손으로 설명했다. “교수님이 많이 움직이라고 하셔서 일찍 일어났던 참에 산책 좀 하고 왔어. 왜?”“아냐.”민여진은 순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에 불안한 것이지 분명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진성이 임재윤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고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불안한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다음에 산책하러 갈 땐 나도 같이 가.”“안 힘들어?”임재윤이 장난스레 말했다. “너 어제 오랫동안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잖아. 나중엔 내 말에 대답도 안 하고.”그 말에 민여진은 괜히 창피해졌다. 얼마 전까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찜찜한 부분이 있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이미 그 어느 때보다 임재윤은 그저 임재윤일 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았다. “어젠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 이젠 충분히 쉬었어. 오늘 나 엄청 일찍 일어난 거 못 봤어?”빨래 바구니의 옷을 힐끔 쳐다본 임재윤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심지어 부지런하게 빨래도 하고. 여자친구가 되더니 점점 더 다정해진 것 같아. 그나저나 여자친구의 의무는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