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성은 회피하지 않고 이정화 앞에 마주 앉았다.“그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세요?”“누가 민여진한테 약을 먹여서 강간까지 당할뻔했어요. 몸에 치명적인 해가 되는 그 약 때문에 방금 죽다 살아났다고요. 좀 전에 수술실에서 나왔고 아직도 의식을 못 찾는 상태예요.”“뭐라고?!”박진성이 애써 화를 참으며 사실을 서술하자 이정화도 깜짝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어!”“어머니가 모르신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에요.”날이 선 박진성의 말투에 이정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내 탓이라고 나한테 화내는 거야? 걔는 너랑 채연이 사이를 갈라놓고 또 채연이 다리도 다치게 한 애야. 도대체 왜 걔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뭐 그럼 내가 내쫓기 전에 집도 해주고 간병인도 붙여줬어야 하는 거니?”“어머니, 민여진이 사실은...”“진성 씨!”모든 걸 다 털어놓으려는 듯한 박진성의 말에 문채연은 다급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여기서 사실을 말하면 문채연의 처지가 곤란해지기에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가까스로 진정한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머니 탓하지 말이요. 그냥 다 내 탓 해요. 여진 씨 안 잡은 내 잘못이죠. 여진 씨랑 당신 사이 방해한 내가 잘못한 거예요.”“채연아, 무슨 그럴 말을 해.”문채연의 말에 가슴이 아파 난 이정화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민여진 씨가 그런 일을 당한 건 내 잘못 맞아. 그런데 너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거야?”“채연이가 널 구해준 뒤로 나는 보상만 해주려고 했어. 네가 2년 동안 채연이를 집에 데려오면서 날 감동시킨 거잖아. 그렇게 받아낸 허락인데, 내가 어떻게 인정한 며느리인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도 처자식 버리는 네 아빠 닮아서 다른 여자랑 살림 차리겠다는 거야?”안 좋은 일을 꺼내자 이정화도 더는 우아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말에 기운이 빠진 박진성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
“걔는 나 못 떠나요.”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예전에는 민여진이 박진성을 떠나지 못했던 게 맞았다.매일 저녁 박진성만을 기다리며 전화도 몇 통씩하고 박진성이 귀찮아할 때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던 민여진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나가라는 말 한마디에 미련 없이 떠나고 그러다가 누가 약을 먹여도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다.둘 사이에 일어난 그 변화들이 박진성을 불안하게 했다.“정신 차려 박진성!”머리가 어지러웠던 이정화가 소리를 치자 잠시 당황하던 문채연이 다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어머니, 괜찮으세요?”“진성 씨, 그만하고 나가요. 어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러다가 입원까지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말을 하고 난 문채연도 불안감에 휩싸였다.평소에는 누구보다 이정화의 건강을 걱정하던 박진성이 민여진을 위해 그녀에게 반기까지 드니 민여진이라는 존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전 이만 나갈게요. 어머니 화나게 한 건 제 잘못 맞으니까 해 뜰 때까지 밖에 서 있을 게요. 하지만 제 대답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희 일에 그만 신경 쓰시고 엄마 몸부터 챙기세요.”말을 마친 박진성이 밖으로 나가자 문채연은 이정화를 방으로 모셨다.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아래를 보니 정말 박진성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쌩쌩 부는 날에 오직 민여진을 위해 그렇게 서 있었다.민여진을 박진성의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정화를 끌어들인 건데 오히려 박진성의 결심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두려웠던 문채연은 다급히 옷을 가지고 내려갔다.“밖에 추우니까 옷이라도 걸치고 있어요. 진성 씨까지 아프면 나 진짜 마음 아플 것 같아서 그래요.”박진성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한 채 문채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민여진 때문에 다리 다친 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네가 말한 거야?”갑자기 들어온 남자의 질문에 문채연은 당황하기
별장을 나설 때 민여진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분명 드디어 자신에게서 벗어나 방현수를 찾을 수 있다고 좋아했을 것이다.하지만 재수 없게도 방현수에게 연락도 하기 전에 이상한 사람들에게 잡혔을 뿐이지.가슴이 이렇게나 먹먹한데도 박진성은 웃음이 나왔다.칼바람과 함께 전해지는 추위도 차가워진 심장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온몸에 뿌리를 내린 한기에 박진성은 입술을 덜덜 떨었다.끓어오르는 분노를 눈에 가득 담은 박진성은 당장이라도 큰일을 저지를 사람 같아 보였다.“진성 씨, 괜찮아요?”민여진이 떠나길 원했다는 말을 듣고 이런 표정을 짓는 박진성에 문채연 또한 화가 치밀어올랐다.“괜찮아.”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던 박진성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냥 전처럼 차갑고 매정한 눈빛이 전부였다.“얼른 들어가. 너 몸도 안 좋은데 추운 데 있다가 더 아파.”“같이 들어갈 거죠?”문채연은 박진성의 마음에 정말 자신이 있는지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그를 시험해보려 했다.“민여진 씨가 그렇게 가고 싶다는 데 왜 안 놔주는 거예요? 당신이 빚진 건 두 눈뿐이잖아요. 그런데 민여진 씨가 보상을 바라지 않는데 왜 굳이 옆에 두냐고요.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요. 난 항상 당신 옆에 있을 거예요.”문채연은 이내 박진성의 손을 잡으며 발그스레한 얼굴로 말했다.“난 영원히 당신 안 떠날 거예요.”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가, 고백하는 건 문채연인데 박진성의 머릿속에는 민여진뿐이었다.똑같은 말을 민여진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오늘날의 민여진은 방현수를 위해서, 고작 방현수 따위를 위해서 박진성을 버리려 하고 있다.“들어가.”“엄마한테 이미 한 말은 지켜야지.”“진성 씨...”“들어가 얼른.”정면적인 대답은 회피했지만 박진성이 전하려는 의도는 명백했다.그 말을 듣는 문채연도 표정이 얼어버렸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럼... 난 들어가서 어머니 좀 말려볼 테니까 몸조심해
“저 좀 더 쉬고 싶어요.”민여진이 대답을 피한다는 걸 알아챈 서원은 몇 마디 당부만을 남기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그가 병실 문을 닫고 나올 때 박진성이 온몸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있었다.어제 옷차림 그대로 다시 나타난 박진성의 얼굴에는 피곤이 가득했고 눈도 빨간 것이 꼭 어디 아픈 사람 같았다.“대표님.”“민여진은 깨어났어?”“네, 방금요.”오자마자 민여진의 안부부터 묻는 박진성이었지만 그런 그가 걱정되었던 서원은 한마디 더 할 수밖에 없었다.“혹시 어제 못 주무셨어요? 어디 아프신 분 같아요. 진료 예약 잡을까요?”“괜찮아. 난 민여진 좀 보고 올게.”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들어가던 박진성은 눈을 감고 있는 민여진을 보고는 바로 문을 닫아주었다.“자?”민여진이 안 잔다는 걸 알고 물은 거지만 그녀의 대답이 들리지 않아도 박진성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이틀 밤을 지새운 채로 가을밤의 바람까지 고스란히 맞고 나니 몸살이 난 것만 같았던 그는 겉옷을 벗고 민여진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좁은 1인용 침대에 굳이 올라가 민여진을 품에 안자 박진성은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거리에 남자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게 된 민여진은 온몸이 굳어버렸고 그녀의 심장도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코끝으로 전해지는 박진성과 문채연의 향기에 민여진은 몸을 떨었다.문채연과 한번 하고 나서 또 자신에게로 오는 박진성의 저의를 몰라서, 도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어이가 없어서 모든 게 역겨워 났던 민여진은 더는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어 박진성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곧이어 눈을 번쩍 뜬 박진성이 화난 듯한 얼굴로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민여진, 나 지금 많이 참고 있으니까 나 열 받게 하지 마.”차가운 음성에는 협박의 의미가 다분히 담겨있었다.그에 민여진도 하는 수 없이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하지만 그녀는 박진성이 화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분명 죽다 살아난 건 민여진인데 왜 박진
마음속에서 화가 끓어오를수록 민여진의 얼굴을 잡고 있는 손에도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가고 싶다는 말을 어쩜 저리도 당당하게 하는지.“너 미쳤어?”턱을 조여오는 손길이 아팠던 민여진이 몸부림을 치자 박진성은 그녀를 침대에 눕힌 뒤 두 손을 고정시키고 마음껏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미쳤냐고? 민여진, 호텔에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을 때 거기서 널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그 남자가 이미 네 몸을 손도 댔었다고! 나가란다고 어떻게 진짜 나가! 죽어서 내 손아귀를 벗어나면 아주 더 좋아하겠네?”“미친놈...”이번 일도 자신을 탓하는 박진성이 너무도 야속해 민여진은 그에 대한 증오를 점점 더 키워가고 있었다.“네 엄마가 나한테 나가라고 한 거야! 나보고 내연녀라고 하면서 내가 너랑 문채연 사이를 훼방 놓았다는 데 내가 그 말을 듣고도 거기 있었어야 했어?”“그런다고 그냥 가? 내 말은 언제 한번 제대로 들은 적도 없으면서, 네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분간을 못 하는 거야?”“넌 나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고!”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흥분하는 박진성을 더 이상 상대하기 싫었던 민여진이 소리쳤다.“이거 놔!”“왜, 놓으면 그거 핑계 삼아 또 나가게? 그 사람들이 너 납치 안 했으면, 내가 너 바로 못 찾았으면 넌 지금쯤 다 벗고 방현수 품에 안겨있겠지.”점점 도를 넘어가는 폭언에 민여진은 박진성의 뺨을 내리쳤다.“꺼져 당장!”그냥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 건데 그걸 두 번 세 번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방현수까지 끌어들이니 민여진도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때린 뺨에 박진성은 정말 정신줄을 놓아버린 사람마냥 서늘한 눈으로 민여진을 노려보았다.“꺼지라고? 네가 뭔데 감히 나한테 그딴 소릴 해.”“그만해! 박진성, 너 진짜 미친 거야?!”“네가 누구 여잔지 내가 오늘 똑똑히 알려줄게.”입술까지 떨며 반항도 못 하고 누워있는 민여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박진성은 또 강압적인 관계를 맺었다.하룻밤 동안
박진성이 결정권자라면 그에게 진심으로 부탁하면 될 일이지만 민여진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임신 여부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도구가 돼버린 것 같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박진성은 잠들기 전보다 더 아파진 머리와 전혀 내리지 않는 열어 몸이 더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머리가 깨지는 고통에 힘겹게 눈을 떠보니 비어있는 옆자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던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소파에 앉아있는 민여진을 발견하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소파에 멍하니 앉아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그녀를 보니 작고 왜소한 체구가 한눈에 들어와 민여진이 더 불쌍하게 느껴졌다.그에 마음이 약해진 박진성은 수술실에서 갓 나온 사람한테 자신이 너무 충동적으로 굴었다는 걸 인지하고는 협탁에 놓인 자신의 외투를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안 추워? 나랑 같이 자기 싫으면 담요라고 덮지 그랬어?”만져보니 더 얼음장 같은 손에 박진성의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졌고 머리도 더 아파왔다.그런데 그때, 민여진이 놓으려던 박진성의 손을 갑자기 꽉 잡아 왔다.“서원 씨한테 피임약 사달라고 하면 안 돼?”잠시 느려졌던 심장박동이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고 가슴에 잠시 자리했던 따스함과 설렘, 기쁨이라는 감정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차디찬 실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높은 곳까지 날아올랐다가 한순간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박진성은 화를 참으며 물었다.“이 말 하려고 아까부터 여기 앉아서 나 깨기만을 기다린 거야?”박진성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린 민여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서원 씨한테 말 한마디만 해줘. 제발 부탁이야. 조금만 더 늦으면 진짜 안 된단 말이야.”“잘됐네 그럼.”민여진의 손을 뿌리친 박진성은 어두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피임약 몸에도 안 좋잖아. 임신 안 되면 마는 거지만 임신 된다면 그냥 낳는 것도 나쁘지 않지.”아이를 낳으라는 저 말이 박진성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그녀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말 박진성이 죽기만을 바랐다.“진성 씨가 전에 했던 말 다 잊었어? 나보고 헛된 망상 따위 버리라며? 진성 씨 아이를 갖는 건 꿈도 꾸지 말랬잖아! 내가 임신만 하면 그 즉시 목 졸라 죽이겠다더니 지금 이러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박진성은 표정이 싸늘해지고 눈가에 복잡한 심경이 스쳤다.전에 그는 확실히 민여진이 주제 파악 못하고 헛된 망상에 빠진 게 싫었다.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다.하지만 그녀가 떠난 후 2년 동안 자꾸만 꿈속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딱히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죄책감과 연민의 감정이 뒤섞인 것인지 아무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쉼터를 마련해주고 싶고 둘만의 아이도 갖고 싶었다.“전에 네가 헛된 망상에 빠진 건 맞지만 지금은 너무 가여워 보여. 이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당연히 내가 마련해줘야지. 아이 한 명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너랑 함께해줄 수도 있고... 일종의 보상이지.”‘네 엄마의 죽음에 대한 보상, 그리고 너의 두 눈에 대한 보상이야...’“보상?”민여진은 피식 웃더니 그의 말을 자르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걱정 마. 내가 임신하거든 아이랑 함께 죽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넌 꿈 깨. 평생 네 아이를 낳을 일은 없어! 헛된 망상에 빠진 건 너라고!”박진성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버럭 소리 질렀다.“민여진, 다시 한번 말해봐!”“약 내놔.”그에 비해 민여진은 아주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약 안 줘도 돼. 임신하면 바로 죽어버릴 거야.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해보든가.”“너 미쳤어?”민여진에게 이보다 더 큰 혜택은 없을 것이다.이때 박진성이 별안간 무언가 생각난 듯 목이 확 메고 가슴을 쿡쿡 찌르듯 아팠다.“하긴! 우리 첫 아이도 그렇게 무참하게 죽였으니 당연히 내 핏줄을 원치 않겠지. X발, 그래서 방현수 애만 달갑게 낳아준다 이거야?
‘또?’민여진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에 혼란이 스쳤다.이정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진성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정말 몰라?”민여진은 정말 모르고 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내 탓이기도 하지. 하지만 네 책임도 있지 않겠니?”이정화는 한숨을 쉬며 쓴웃음을 지었다.“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가, 요즘 애들은 정말 이해가 안 돼. 어젯밤 진성이 본가에 와서 널 용납해달라고 나한테 애원했다.”민여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박진성이 어젯밤 본가에 갔다고? 문채연이랑 있었던 게 아니라?’이정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물론 쉽게 허락할 수 없었어. 그랬더니 진성이 현관 앞에서 밤새 부탁을 들어주기를 기다렸어. 바람 불고 추운 날이었던 터라 설마 끝까지 버티겠냐 싶었는데... 결국 아침까지 꼼짝도 안 했더라고...”“뭐... 뭐라고요?”‘박진성이 본가 문 앞에서 밤새 서 있었다고?’민여진은 믿기지 않는 듯, 문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대요?”“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이정화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스며들었다.“진성이는 어릴 때부터 내 말 한마디면 토 달지 않고 움직이던 애였어. 그런데 어젯밤은 처음으로 내 말을 거역하더라. 병이 날 때까지 버텨가면서까지... 널 위해서... 내가 그만 이 일에 손을 떼길 바라며. 그리고 네게 빚진 게 있다고 했어.”민여진의 손끝이 움츠러들었고 이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숨 막히게 아팠다.‘박진성이 나한테 진 빚이라면 한 두 가지가 아니지... 그 빚은 평생 갚아도 모자랄 거야. 그런데 정말 단순히 나 때문에 밤새 버틴 거라고? 대체 무슨 생각일까? 박진성...’머릿속이 엉망이 됐다. 미운 건 여전했지만 박진성이 이렇게까지 달라진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그때, 복도에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순간, 문채연이 성큼 들어오며 민여진을 세게 밀쳤다. 그녀는 몸이 휘청이며 문틀에 부딪혔다.“어머니, 진성 씨 괜찮
“여진아, 가지 마.”휴대전화를 손에 든 임재윤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던 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가다니? 나 계속 여기 있잖아. 어딜 간다는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꿈꿨어. 네가 나를 떠나는 꿈. 안진 마을로 돌아간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서 계속 너를 찾아 헤매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갔어.”간신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가락을 잡은 임재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가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까 봐.민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재윤아, 그건 그냥 꿈이야. 게다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너를 피하겠어.”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나서야 진정된 듯 답했다.“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웃음을 지었다. 임재윤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고 그래. 난 항상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해.”민여진의 말에 순간 임재윤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서렸다.“친구일 뿐이야?”실망이 묻어난 그의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급히 타자를 했다.“여진아, 혹시 내가 원망스러워? 너를 좋아한다면 지난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너한테 숨긴 거 때문에 많이 상처받았어?”민여진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기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미안해할 거 없어.”“하지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전 여자 친구 얘기잖아.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놔야 했어. 그래야 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을 거 아니야.”민여진이 부정하려는 순간 임재윤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타자를 이었다.“아니면 너는
민여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시우는 그제야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들이 홧김에 터져 나온 것 같았다.“여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임재윤과 그 여자 사이는 이미 끝난 일이에요.”진시우가 말을 이었다.“임재윤이 여진 씨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그 여자에 대한 마음은 정리했다는 거겠죠.”민여진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만약 임재윤이 정말로 그 여자를 정리했다면 자신이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렇게 반응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뭔가를 숨기는 듯 말을 흐리는 진시우도 의심스러웠다.하지만 민여진은 어차피 자신과 임재윤은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누군가를 품고도 왜 그녀한테 고백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오고 있었다.진시우는 재빨리 달려가 수술 경과와 치료 방향에 관해 물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되었지만, 앞으로 수술을 한 차례 더 진행해야 하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병실로 옮겨진 임재윤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진시우는 뒤처리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혼자 임재윤의 곁을 지키고 있던 민여진은 수술 부위가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 주려다 임재윤의 손과 맞닿았다.그 순간, 임재윤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임재윤?”민여진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임재윤이 힘을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한 진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의식이 없는 상태에도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어야 시름이 놓이나 봐요.”민여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신이 없는 상태로 손을 잡더니 놓지 않네요.”“여진 씨, 피곤하세요?”“아니요. 잠을 많이 자서 괜찮아요.”“다행이네요.”진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가 급하게 좀 할 일이 생겨서 아마 내일 아침이 돼야 돌아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