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바람꽃 엔터에 예정됐던 흑룡그룹의 모든 투자는 이 시간부로 전면 철회야. 그리고 그동안 지원했던 투자금 전액, 위약금 포함해서 당장 상환 청구 들어갈 거니까 파산 준비나 잘하고 있으라고.”
“채 이사님! 한 번만,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저희가 정말 몰랐습니다!” 강 대표가 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절규했다. 하지만 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비정하게 그의 손을 털어냈다. 율의 시선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아 있는 강이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몰랐다는 게 면죄부가 되나? 남의 인생 망가뜨릴 때는 즐거웠겠지. 네 그 가벼운 손가락질 하나에 네 형 인생이랑 이 회사 전체가 날아간 거야. 원망하려면 네 자신을 원망 해.” 율은 침을 뱉듯별이가 대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지안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젖은 정원의 흙 내음이 코끝을 스쳤고 손바닥엔 방금 전까지 맞잡았던 별이의 온기가 남아 화끈거렸다.3년 동안 차가운 얼음장 같았던 그의 가슴에 처음으로 뜨거운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그때,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구두 소리와 함께 검은 우산 하나가 지안의 머리 위를 덮었다. 쏟아지던 빗줄기가 멎자 지안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들었다.그곳엔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채율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지안은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툭 내뱉었다. “…안 가고 여기 있었냐?” “표정 보니까 죽다 살아난 얼굴은 아니네. 사람 걱정시킨 보람도 없게.” 채율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지안은 대문 쪽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낮게 읊조렸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거창한 고백 대신 3년 동안 짓눌렸던 가슴이 이제야 뚫렸다는 짧은 안도였다.지안의 반응을 확인한 채율이 피식 웃으며 지안의 젖은 어깨를 툭 쳤다. “가서 한잔할까?” 지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3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눈에서 살기가 아닌 무언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기가 돌았다.두 사람은 각자의 차를 몰아 외곽의 한적한 위스키 바로 향했다.가라앉은 조명과 잔잔한 재즈가 흐르는 구석진 자리 지안이 잔 속의 얼음을 흔들며 먼저 침묵을 깼다. “준휘 형이랑 서희 기획전략실장, 둘이 제대로 짰더라. 유통 라인부터 막아버릴 생각인가 봐.”
채 율의 지시에 따라 두 대의 검은 세단은 도심의 소음을 벗어나 빗줄기를 뚫고 외곽으로 내달렸다.마침내 차는 별이의 저택이 보이는 한적한 골목 끝에 멈춰 섰다.채 율이 탄 호위 차량은 헤드라이트를 끈 채 암흑 속에서 외부의 접근을 완벽히 차단하며 거리를 두었다.지안과 별이가 남겨진 차 안은 숨소리조차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가슴을 찌를 듯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장대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 차창을 두드리는 거친 타격음만이 두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을 세상의 끝인 양 분리해내고 있었다.지안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3년 동안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아니 죽어서도 가져가려 했던 진실이준휘의 비릿한 입술을 통해 별이에게 쏟아졌다.지안은 차마 고개를 돌려 별이를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핸들을 쥔 손에 하얗게 피가 안 통할 정도로 힘을 주었다.늘 오만할 정도로 꼿꼿했던 그의 어깨는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초라하게 내려앉았고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아니면 3년을 참아온 회한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3년 동안 죽어서도 가져가려 했던 진실이 준휘의 비릿한 입술을 통해 별이에게 쏟아졌다.지안은 차마 고개를 돌려 별이를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선배.” 별이가 먼저 정적을 깼다.그 낮은 부름에 지안은 심장이 도려내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핏발 선 채 잘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룸미러 너머 옆자리의 별이에게로 향했다.그 눈에는 모든 것을 들켜버린 자의 절망과 처절한 연정이 뒤섞여 있었다. “나… 총지배인님이 던진 서류 보면서 다 알았어요. 선
“그 손 치워, 천준휘.” 지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3805호실 전체를 짓눌렀다.준휘는 뻗으려던 손을 멈추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문턱에 선 지안의 처참한 몰골을 확인한 준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뭐가 궁금해서? 뭘 막고 싶어서 온 건데?”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아니,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그는 준휘를 지나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별이에게로 달려갔다. “별아, 한별…!” 지안이 떨리는 손으로 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3년 전 차가운 수영장에서 그녀를 안았을 때처럼 지안의 온몸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별이는 멍한 눈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지안을 바라보았다.기억 속에서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던 그 남자와 지금 제 앞에 땀에 젖어 서 있는 남자가 겹쳐졌다. “…지안 선배.” 별이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한마디에 지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기억을 잃은 별이가 줄곧 자신을 불러왔던 그 담백한 호칭.하지만 지금 별이의 음성에는 이전에는 없던 깊은 슬픔과 원망,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리움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지안은 그 짧은 부름만으로도 단번에 깨달았다.별이가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을.자신이 그토록 처절하게 가려왔던 3년 전의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났음을.지안은 별이를 품에 더 세게 끌어안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과 그럼에도 그녀를 다시 품에
별이는 홀린 듯 다가가 서류를 꺼냈다. [환자명: 한 별][특이사항: 특정 인물(천지안)에 대한 선택적 장기 기억상실 및 인지 결여] “…이게 뭐야?” 별이의 목소리가 처참하게 떨렸다.3년 전, 7개월이라는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별이는 그저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다.비록 의식이 없던 그 긴 시간 동안 흑발의 남자가 나타나는 기이한 꿈을 반복해서 꾸긴 했지만 그저 깊은 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 여겼다.그래서였다.보롬의 소개로 지안을 처음 만났을 때 심장이 내려앉을 듯한 익숙함을 느꼈던 것도.별이는 그저 꿈속의 남자가 현실에 나타난 것 같은 기묘한 우연에 홀린 것이라 믿었다.그 남자가 사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강제로 도려내진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단 한 번도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의심 따윈 해본 적 없었다.그런데 준휘가 던진 서류는 별이가 발을 딛고 서 있던 땅이 사실은 거대한 구멍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특이사항: 특정 인물(천지안)에 대한 선택적 장기 기억상실 및 인지 결여] 서류에 박힌 자신의 이름과 기억상실이라는 단어가 끔찍하게 엉겨 붙었다.3년 전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온전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시간이 지안에 의해 정교하게 편집된 연극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지독한 락스 냄새가 역류해 올라왔다.방금 전까지 보롬과 웃으며 지안의 넥타이를 고르던 백화점 쇼핑몰의 쾌적한 공기는 일순간에 증발했다.혀끝에는 갑자기 비릿하고 짠 기운이 감돌았고 귓가에는 둔탁한 수중음이 울리며
평일 오후의 백화점은 화사한 조명과 은은한 향수 냄새, 그리고 쇼핑객들의 여유로운 소음으로 가득했다.그 평화로운 풍경을 깨뜨린 건 명품관 한복판에 나타난 검은 무리였다.칼같이 각 잡힌 검은 정장 차림에 험악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 셋, 그리고 그 중심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살기를 내뿜는 율.그들의 등장은 마치 순백의 캔버스 위에 튄 새카만 먹물 같았다.주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길을 터주며 수군거렸고 그 살벌한 시선 끝에는 잔뜩 뿔이 난 보롬이 서 있었다. “오빠,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오빠만 오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요란하게 오라고 했어?” 보롬의 날카로운 타박에 율의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방금 전까지 조직 업무를 처리하느라 잔뜩 날 서 있던 안광은 간데없고 율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제 뒤에 버티고 선 부하들을 힐끗 보더니 보롬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근처에서 일이 좀 늦게 끝나서 바로 오느라. 얘네도 금방 보낼 거야.” “보내긴 뭘 보내, 이미 다 쳐다보는데!” 보롬의 핀잔에 율은 그저 허허실실 웃으며 덩치 큰 사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율의 손가락 하나에 사람을 묻을 것 같던 남자들이 고분고분 보롬의 핑크색 쇼핑백들을 양손 가득 들었다.그 기괴하고도 웃픈 광경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카페 안쪽 구석진 자리로 옮겨 앉았다.보롬은 얼음 띄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그제야 율도 조금 전의 어색한 웃음을 지우고 보롬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오빠, 별이가 좀 이상해.”
같은 시각, 별이는 보롬과 함께 백화점 명품관에서 지안의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최상급 대리석 바닥이 아찔하게 빛나는 명품관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건조하고도 압도적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쇼윈도 너머로 보이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와 보석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눈부시게 번뜩였다.별이는 그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은 채, 오직 지안에게 가장 완벽하게 어울릴 만한 것을 찾는 설렘으로 가득했다.세련된 실크 넥타이를 매만지는 별이의 손길은 더없이 조심스러웠고, 지안의 냉철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을 떠올리는 그녀의 입가엔 내내 옅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보석도, 지금 지안을 생각하며 빛나는 별이의 눈동자보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별아, 이 패턴 어때? 지안 선배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지?” 보롬이 즐겁게 넥타이를 흔들어 보였지만, 별이의 시선은 매끄러운 유리 매대 위에서 요란하게 진동하는 휴대폰에 멈췄다.저장되지 않은 번호. 별이는 왠지 모를 서늘한 예감에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한 비서, 천지호텔 총지배인 천준휘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준휘의 낮고 묵직한 음성은 마치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덩이 같았다.별이는 반사적으로 주위의 시선과 보롬의 눈치를 살피며,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매장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 총지배인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 “3년 전 사고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줄 게 있습니다.” 별이는 순간 자신의 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