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보호자분······.”
그 정적인 음성이 복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시간의 실타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땀에 절어 검게 변한 수술복 차림의 강진욱 박사가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뒤늦게 달려온 선우현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내 망막은 그 어떤 장면도 포착하지 못한 채 하얗게 점멸했다. 오직 강진욱의 입술이 그리는 미세한 떨림과 그 너머에 머무는 진실만이 나의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선 췌도 이식 수술 자체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초기 주입 반응도 양호합니다. 다만, 두 분 모두 전신 마취와 수술의 여파가 커 의식을 회복하시기까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rdq
깊게 가라앉았던 의식의 수면을 뚫고, 마침내 차준호라는 고요한 섬이 보였다.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햇살이 번져왔고,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귓가를 따라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그동안 꽤 많은 눈물을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속에는 여전히 흘릴 수분이 남아 있었는지 얼굴이 다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그가 눈앞에 반드시 나타날 거라는 단 하나의 확신으로 버텼던 시간들이 의식 바깥 어딘가에서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아득히 빠져나갔다.“······신하늘은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늘 예상 밖이야.”누가 할 소리. 그 재주는 차준호가 넘버원인 것을.그의 말에 그래도 심장이 일렁거렸다.불과 얼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피 말리는 사투를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은 해사했고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기개를 품고 있었다.온 세상을 발 아래 두고도 지루하다는 듯 오만하게 흘겨보는 그.그 어떤 가혹한 운명도 감히 자신을 꺾을 수 없다고 믿는 특유의 눈빛.다시는 마주하지 못할까 봐 차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삼켰던 애틋한 존재가, 지금 내 눈앞에 온전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주었네요, 정말로······.”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멋진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고작 그 한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건강해진 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홀로 남아 얼마나 아득한 공포에 떨었는지, 그리고 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가장 기쁜 날, 가장 많은 걱정과 슬픔 속에 나는 잠겨 있었다.내가 휴게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자,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왔다.고미주 여사가 초췌한 안색으로 내 손을 잡았다.“얼굴이 그게 뭐야? 웃어야지. 처음 볼 때부터 남다르다 생각했지만,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을 곁에 두고도 몰라봤어. 신 비서······ 진심으로 축하해.”그녀의 안색은 어두웠지만, 나를 향한 축복만큼은 진실했다. 차진아 역시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에 힘을 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정말 축하해요, 언니. 그리고······ 우리 오빠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많이 울어서인지 눈이 붉어진 애처로운 차진아의 얼굴을 보며 위로의 말을 고르던 찰나, 새벽의 정적을 찢는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휴게실 안으로 들려왔다.“······하늘아.”“신하늘.”그곳엔 도국과 이아준이 서 있었다. 휴게실에 내가 보이지 않자 찾아온 모양이었다.나는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억지로 추슬렀던 내 표정은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바쁜데 너희까지 걱정 끼치고. 고마워, 함께 있어줘서. 어서 가.”이아준이 가장 먼저 다가와 내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 온기 속에서 나조차 몰랐던 몸의 비명이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듯했다.“차 대표는 이
“보호자분······.”그 정적인 음성이 복도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시간의 실타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땀에 절어 검게 변한 수술복 차림의 강진욱 박사가 피로가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뒤늦게 달려온 선우현이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내 망막은 그 어떤 장면도 포착하지 못한 채 하얗게 점멸했다. 오직 강진욱의 입술이 그리는 미세한 떨림과 그 너머에 머무는 진실만이 나의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우선 췌도 이식 수술 자체는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초기 주입 반응도 양호합니다. 다만, 두 분 모두 전신 마취와 수술의 여파가 커 의식을 회복하시기까지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적막을 찢고 들려온 그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의 심장을 울렸다.그토록 갈구하던 기적의 언령이자 희망의 신호가 고막을 때리자, 꼿꼿이 버티고 있던 다리의 신경이 일제히 풀려나갔다.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그것은 차마 무너지지 못한 지독한 긴장의 잔여물이자, 아직은 쓰러질 수 없다는 강력한 본능이었다.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탄식과 깊은 숨소리가 아득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불이 꺼진 수술방의 육중한 문을 멍하니 응시했다.오랫동안 내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강진욱 박사는 무겁게 헛기침을 하며 설명을 이어갔다.“회장님의 췌도 세포가 차 대표님의 간문맥을 통해 성공적으로 주입되었습니다. 회장님의 체력이 다소 우려스럽긴 하나, 수술 자체는 기대 이상으로 잘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대한민국 선거일은 국민들에게 단순한 투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국가의 명운이 좌우되는 거대한 이벤트이자, 격동하는 대한민국 정치의 맥박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날일 터.특히 이번 선거는 세종동을 중심으로 한 ‘신하늘 신드롬’으로 인해 전 세계 외신의 이목까지 집중된 상태였다.평소 적막과 알코올 냄새만 가득하던 대형 병원 로비는 이제 거대한 광장으로 변모해 있었다.“오늘 신하늘 후보랑 차준호 대표가 들어왔다던데, 진짜야?”“차 대표가 선거운동 내내 아내 외조한다고 무리하더니 결국 탈진해서 실려 왔대요. 그 서슬 퍼런 기운은 어디 가고 아내 옆에선 영락없는 사랑꾼이던데.”사람들의 대화는 개표 방송의 요동치는 숫자만큼이나 뜨거웠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차준호의 헌신을 ‘세기의 외조’라 칭송했고, 누군가는 신하늘을 향해 경탄과 축복의 덕담을 보냈다.“처음엔 그냥 운 좋은 신데렐라인 줄 알았지. 근데 저 여자, 다 죽어가던 세종동 민심 뒤집어놓는 거 보니까 보통 내기가 아니더라고.”“그러니까 사람들이 투표했겠죠. 새로운 세상에 거는 기대가 오죽 크겠어요?”각 지역구별로 형형색색의 그래프가 오르내리며 전국이 들썩이던 순간, 장내를 일순간 정지시키는 날카로운 긴급 속보음이 로비를 찢어발겼다.[특보: 김희주 후보 검찰 자진 출두, 모든 과오 인정한다고 밝혀.][김희주 의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및 신하늘 후보를 향한 갑질·폭행 모두 시인]화면 속 김희주는 이전의 서슬 퍼런 여장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초라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포토라인에 섰다.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속에 그녀가 힘겹게 마이크를 잡았다.
“고 여사님, 진아 양.”나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긴 의자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붙였다.그때 눈시울을 붉히던 고미주 여사가 먼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참, 신 비서······ 고생 많았지? 우리 차 대표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오늘 수술받을 수 있게 데리고 와줘서,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어.”내가 한 게 대체 뭐가 있다고.밖으로 쏘다니며 야망을 위해 선거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저지른 일들의 뒷수습을 아픈 몸으로 해준 건 언제나 차준호였는데.당당하게 두 사람을 위로하러 갔다가 나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묻어버렸다.그가 제 생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알면서도 내 앞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며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여준 것을 떠올리니, 가슴 깊이 참아왔던 감정이 끝내 폭주하고야 말았다.눈물을 더는 억누를 수 없어 후두둑 메마른 얼굴을 적실 뿐이었다.그래도 세상일 참 알 수 없다고.지난 1월 1일, 강소희를 향해 그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이고, 나에 대해서도 마뜩잖게 보았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일 의지가 되는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사람 인연은 참 얄궂고, 앞으로 맞이할 운명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나약한 인간의 숙명으로 여겨졌다.***그 시각, 이아준은 도국과 함께 정신없이 잠실을 벗어나 막 대한종합병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신하늘 후보님이 차준호 대표님께 이식을 감행하시려다, 현재는 차진철 회장님이 대신 수술대에 누워 계신다고 합니다.]김정규가 선우현과 정보를 주고받자마자 전해 온 메시지였다.이아준은 한강 주
차준호, 내 남자의 생사가 걸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비정할 만큼 선명한 빛을 토해내며 벌써 한 시간째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폐쇄적인 병원의 적막 속에서 그 붉은 빛은 마치 누군가의 쏟아진 혈흔처럼 내 망막에 눌어붙었다.손바닥에는 식은땀이 차올랐고, 이유 없는 메스꺼움이 명치끝을 비틀어댔다. 기분 나쁜 축축함과 울렁거림이 가시지 않았다.아직 갈아입지 못한 선거용 점퍼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조차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내 신경을 긁어댔다.인간이 절대자에게 무릎을 꿇고 의지하는 순간은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항상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외면만 당해온 처지였다.축복보다는 저주에 익숙했고, 온기보다는 서늘함에 길들여진 삶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라, 사투를 벌이고 있을 차준호에게 빌고 또 빌었다.‘대표님, 제발······.’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따가운 햇살이 가득할 때는 그의 넓은 그늘에 머물며 안식하고 싶었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가 막아주는 튼튼한 우산 속에서 비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보호받고 싶었다.눈물이 나고 슬픔이 넘쳐흐를 때는, 오만하리만큼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직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그 특별한 위로에 젖고 싶은데.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그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무소불위의 남자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다. 그러니 절대자를 믿지 않던 오만한 생(生)이 고작 붉은 등 하나에 명줄을 잡힌 채 바닥까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차준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사로잡혀 있었다.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
‘이 나쁜 자식!’지난 3년간 내게 보인 그 모든 다정함은 한낱 유희였을까? 차준호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문드러져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부서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자존심을 끌어모아,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도도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대표님은 그동안 절 어찌 보셨는데요?”나는 유리창 너머로 썰물처럼 번지는 화려한 야경을 사납게 응시하며, 심장에 박힐 날 선 말을 뱉어냈다.“네 주변에 남자가 들끓어 보였거든.”뻔질나게 전화를 걸어오는 남사친 둘을 두고 한 오해였을까. 설령 그렇다 해도, 그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