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손끝에 와닿는 절인 배추의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에 순간 내 손길이 굳은 듯 딱 멈춰 섰다.
모든 선자리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차준호.
그 소식이 왜 이토록 가슴 밑바닥을 무겁게 흔들어 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닿는 세상의 모든 호의와 타협을 당연하게 거부해 버리는 남자의 오만한 기개는 역시 그와 어울린다고 여겨졌다.
매일 저녁 9시 뉴스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진철 회장이나 이왕춘 회장 같은 재벌가의 거두들인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차준호나 이아준 역시 그 엄숙하고 냉혹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인생을 손쉽게 휘두르고 있을 터였다.
현재 느껴지는 이 신분의 격차는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메워질 수 없는 아득한 절벽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서늘한 상실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세종동을 떠나게 되면······
손끝에 와닿는 절인 배추의 서늘하고 축축한 감촉에 순간 내 손길이 굳은 듯 딱 멈춰 섰다.모든 선자리를 단칼에 거절했다는 차준호.그 소식이 왜 이토록 가슴 밑바닥을 무겁게 흔들어 놓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자신에게 닿는 세상의 모든 호의와 타협을 당연하게 거부해 버리는 남자의 오만한 기개는 역시 그와 어울린다고 여겨졌다.매일 저녁 9시 뉴스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차진철 회장이나 이왕춘 회장 같은 재벌가의 거두들인데.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차준호나 이아준 역시 그 엄숙하고 냉혹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 누군가의 인생을 손쉽게 휘두르고 있을 터였다.현재 느껴지는 이 신분의 격차는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메워질 수 없는 아득한 절벽이었다.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서늘한 상실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세종동을 떠나게 되면······ 당연히 아준이나 도국이와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어쩌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먼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친구라는 다정한 이름표를 달고 있어도, 결국 우리가 서 있는 바닥의 높이는 완전히 달랐으니까.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방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 구석, 오래전 불타버린 보육원 건물 터에 위태롭게 얹혀 있는 이 낡고 작은 집이 내 초라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낮 동안 차마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담벼락의 붉은 낙서들과, 대문 철판 위에 거칠게 칠해진 빨간 페인트 자국들이 환영처럼 뇌리를 스쳤다.“당장 이곳을 떠나야 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진 것도 아닌데, 회사 몇 년만 더 바짝 다니면 이 지긋지긋한 빚도 다 갚을지 모르고.”나는 짐짓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속을 짓누르던 답답한 공기를 한꺼번에 내뱉었다.
금요일 밤, 어두운 세단 차 안.시트 깊숙이 몸을 묻은 강소희가 살짝 거친 숨을 내쉬며 주원형을 살며시 밀어냈다.“대표님, 메이크업 무너져요. 너무 짓뭉개지 마세요.”주원형이 낮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강소희의 턱끝을 감싸 쥐었다.“고맙다고 먼저 키스한 건 너잖아. 사람 흥분시켜 놓고 무슨.”입을 삐죽인 강소희는 이내 두 팔을 넓게 벌려 주원형의 목을 꽉 껴안았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치마를 위로 말아 올리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애교라는 것을 부리고 있었다.“대표님, 나 백 감독님 새로 들어가는 로코 영화 주인공 하고 싶어요. 그것 좀 꼭 따주세요, 네?”이제 내년이면 30살이라 로코는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찍어 두고 싶은 그녀였다. 10년째 주원형을 이렇게 길들여온 그녀였기에 오늘도 그리 칭얼거려 보았다.강소희의 애교 섞인 떼쓰기에 주원형이 쯧, 소리를 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너 진짜 사람 너무 굴리네. 아주 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들지.”강소희는 주원형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그의 목덜미에 야릇하게 입을 맞추었다.“대신 흥행도 제대로 내줄게요. 나 연기력 대단한 거 대표님이 제일 잘 알잖아요?”주원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예능 나가.”그 말에 강소희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대신 딱 두 군데만 나갈 거예요. 나는 T 프로그램이 좋아요. D 방송국은 패스. 거기 PD들은 너무 공격적이라 기분이 별로거든요.” “알았어. 그럼 도국이랑 같이 예능 한 번 나가.”도국의 이름이 나오자 강소희의 얼굴에 금세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어머, 그건 너무 좋아요!”대세 아이돌 도국이니 저번에 키스신도 찍었고 화제성도 좋고 도국과 친해져서 나쁠 것 같지 않은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놀라긴 놀랐다.지금 이건 명백히 위험한 기류였다. 차준호는 그저 친절하고 매혹적인 상사일 뿐인데, 그 손끝이 닿았던 팔뚝의 감촉과 피부로 느껴지던 열기가 잔상처럼 남아 뇌리를 어지럽혔다.“신하늘이 지금 왜 당황하고 있을까.”“어쩌다 그렇게 되었네요. 어쨌든 저 여학생이 오늘 축제의 주인공 같아요. 대표님, 제가 만나보고 올까요?”나는 태연한 척 새침하게 말을 내뱉으며 얼른 차준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하지만 차준호는 무심하게도 무대 위 여학생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슬쩍 돌려, 오직 내 얼굴만을 짙은 시선으로 빤히 담아낼 뿐이었다.“좋네.”좋기는 뭐가 좋다는 건지.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속을 알 수 없게 굴까.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 세차게 뛰어 도저히 그와 눈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차준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뚫어져라 무대 위 여학생에게만 눈길을 고정했다. 마침 전광판에 그녀의 이름이 '세나'라고 떠오르는 것을 확인하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메모해 두었다.무대에서 내려오면 바로 스카우트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차준호에게 말을 건네려 했지만, 여전히 그 깊고 고요한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향해 있었다.“대표님, 사람 헷갈리게 자꾸 그러지 마세요.”나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불쑥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그러자 차준호의 매끄러운 입꼬리가 호를 그리며, 선이 고운 얼굴 위로 환하고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아, 이제 알았다.”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나는 화끈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볼을 숨기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한계였다. 더 이 남자의 유려한 시선 안
5월 초, 녹음이 싱그러운 계절.목요일 오후 5시. 지성과 청춘의 열기가 가득한 우리나라 굴지의 명문대, S대학교 축제 현장.캠퍼스는 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와 경쾌한 음악 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나 역시 처음으로 차준호가 직접 운전하는 세단 조수석에 올라 이곳에 도착했다.오늘 축제를 위해 그가 준비해 준 옷은 깔끔한 카라가 달린 흰색 반팔 티셔츠와 핏이 딱 잘 맞는 청바지, 그리고 넓은 캠퍼스를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단정한 슬립온이었다.이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 오늘도 회사와 차준호의 이미지에 맞게 입어야 하는 날인 걸까. 가볍게 생각하면 근사한 캐주얼 한 벌이 생겨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그가 안겨준 이 모든 것들은 또 가격표가 가공할 만한 액수일 텐데 은근한 부담으로 다가왔다.옆을 보니 차준호 역시 나와 커플룩처럼 카라가 있는 흰색 폴로 긴팔 셔츠에 청바지를 맞춰 입고 있었다. 탄탄하게 다져진 어깨 라인과 훤칠한 이목구비가 받쳐주니 청량하고 감각적인 대학생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하긴, 그도 20대 후반의 청춘이었다. 짙고 차가웠던 눈빛에 부드러운 봄 햇살이 머물자 주변 풍경마저 숨이 죽을 만큼 눈부셨다.푸른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캠퍼스 한복판, 청춘들의 환호와 즐거운 웃음소리에 둘러싸이자 나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연신 입꼬리가 올라갔다.“신하늘, 예쁘네. 그런데 기분이 그렇게 좋아?”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이제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직진형 칭찬에 제법 면역이 생겼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축제잖아요. 신날 수밖에 없죠.”“그동안 많이 즐겨봤을 거 아니야.”“매년 축제 기간만 되면 과외하고 알바 뛰느라 단 한 번도 참여하거나 친구들과 놀아본 적이 없
내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게 300만 원짜리 명품이라니.그때, 내 등 뒤에 메인 백팩을 가만히 살피던 도국마저 기가 차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하늘아, 백팩도 회사에서 제공해 준 거냐? 그거 컬렉션 한정판이라 최소 1~2천은 줘야 구하는 건데.”“뭐······?”순간 숨이 턱 막히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주 3~4번은 집이나 회사로 배달되던 수많은 상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물론 원단이나 봉제 마감이 워낙 훌륭해 상당한 고가 제품일 거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차준호가 소유한 C백화점 쇼핑백에 가격표 없이 담겨 온데다, 명품 로고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은 디자인이었기에 그저 '품위 유지용 협찬품' 정도로만 치부했던 나였다.학비와 생활비를 계산기 두드리며 독하게 버텨오느라, 브랜드를 따지는 가치보다는 실용성과 생존이 훨씬 중요한 수식이었던기에 명품 브랜드도 잘 모르는 나였다.그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 입고 멨던 옷과 가방의 진짜 정체를 깨달은 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단순한 비서 복지라고 하기엔 선을 한참 넘어도 넘어선 액수였다.차준호는 대체 나한테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부자들은 그저 경제 감각이 남달라 그런가 현기증이 밀려왔다.통유리창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야경을 내려다보았다.저 화려한 불빛 사이 어딘가, 이 시간에도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차준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스치는 듯했다.***늦은 밤.이아준의 펜트하우스 손님방에 들어와 대형 모니터 앞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차준호가 내게 안겨준 물건들의 가공할 가격들로 가득
도대체 차준호는 왜 내가 만우절에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애초에 그와 나눈 대화도 정말 별것 없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대표님, 정말 한가하신가 봐요. 저는 그날 정신없어서 별로 대화도 안 나눈 것 같은데요.”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딱히 그렇게까지 노력해서 답을 찾고 싶지도 않았다.“신하늘 고단수네. 어쨌든 걸그룹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어. 신하늘이 비주얼 센터로 선다고 해도 진지하게 생각해 줄게.”이 남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날 놀리는 게 분명했다.그때, 나는 대표실 테이블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아, 마침 모교 대학 축제가 다가오네요. 제가 한번 다녀올게요. 거기 보석 같은 여대생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즉흥적인 내 제안에, 차준호의 입가에 느른하고 지독하게 매력적인 미소가 번져 나갔다.그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같이 가. 나랑.”지체 없는 즉답에 순간 의아함이 몰려왔다. 지금 대표라는 사람이 일은 안 하고 나랑 대학 축제 구경이라도 가겠다는 건가?순간적으로 머릿속 회로가 엉켰지만, 이성을 끌어올려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하긴 이 회사 대표인 데다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 걸그룹 사업이니, 직접 캐스팅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는 문제였다.“뭐 그러시던지요.”그러자 느긋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의 짙은 눈동자가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나를 향한 시선이 한층 깊어지더니, 그가 상체를 슬며시 기울이며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자꾸 그렇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정적을 깨우는 밤 11시 반 무렵.창밖으로는 하얀 눈꽃이 송이송이 흩날리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남 C 호텔 25층 로열 스위트룸 내부는 숨 막힐 듯 팽팽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조도를 최대한 낮춘 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차준호라는 거대한 포식자에게 온전히 잠식당한 채, 밤을 녹여내는 은밀하고도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내 몸의 지도를 그보다 더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었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그의 뜨겁고도 습한 숨결이 예민한 목덜미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