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세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머릿속에는 신하늘을 떠올렸다.
차준호가 풍기는 그 느낌은 영락 없이 좋아하는 여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는데.
그렇게 몸만 즐기고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한다고? 잠시 검색해 보니 이미 차준호를 올해 안으로 결혼시킨다는 뉘앙스로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심지어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 총선도 다가오는 봄이기에 이미 정치 뉴스는 선거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다.
‘어쩌지······.’
차준호의 정략결혼 소식을 도국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세나는 이 짧은 시간에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당분간은 함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괜히 그 사실을 전했다가 도국의 마음만 사납게 들쑤셔질까 봐 두려웠던 탓이다.
그와 딱 50일만 사귀기로 약속했던 기한은 다가오는 봄이 되면 끝이 난다. 한시적인 연애라는 걸 알기에 하루하루 감질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깝고 또 아까
나는 차준호의 이름을 한참을 들여다 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즉시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내가 미쳤지. 물론 궁금한 것 투성이기는 하지만, 지금 연락해서 대체 뭐라 말한단 말인가.왜 입사 전부터 초콜릿을 나만 사줬냐고, 왜 나에게만 취향 따져가며 좋은 옷을 입혔냐고, 다정하게 군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물은 들, 달라질 게 무엇이겠는가.복잡하게 일렁이는 파문을 외면한 채, 은행 문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택시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찌는 듯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차준호라는 남자의 이름 세 글자가 온몸의 혈관을 흔들어놓은 탓인지, 옷 속 피부 구석구석으로 덥습하고 끈적한 열기가 은밀하게 고여들었다.오늘만큼은 버스에 시달리는 대신, 나를 가득 채운 이 아찔한 열기를 식혀줄 근사한 호사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다.“손님, 어디로 모실까요?”“성남 헤븐즈 힐 추모공원이요.”부모님이 계신 곳. 그 안식처로 어서 달아나 자랑하고 싶었다.열심히 잘 살았다고. 이제부터 차곡차곡 모으는 돈이 전부 진짜 ‘내 돈’이 된다니.늘 내 영혼과 몸을 짓눌러온 빚이라는 서글픈 굴레에서 벗어나 마침내 내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감격이 밀려왔다.게다가 차준호라는 남자와의 만남은 내 인생에 커다란 변곡점이 되었기에 이 흔들림 역시도 부모님께 알리고 싶어졌다. 이토록 감정이 묘한 날에는 부모님을 뵙는 것만이 어지러운 마음을 잠재울 유일한 해답 같았다.***늘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 부모님을 찾아뵐 때마다 서글픈 국화 두 송이만 딸랑 사 들곤 했는데, 오늘은 알록달록 어여쁜 국화 한 다발을 품 가득 묵직하게 안았다.찌는 듯한 7월의 폭염 속에서 추모관 계단을 올라가는
내가 세종동에 산다는 사실이 그토록 거창한 비밀이라도 되는 걸까.좋은 옷을 입고 세종동의 주상복합 단지에 산다고 잘 사는 줄 오해를 한 건지, 아니면 서쪽 동네에 살면서 제법 용됐다고 여긴 건지 알 길이 없었다.복잡한 마음에 차진철의 눈치를 살피던 체스 승부는 결국 1 대 1 무승부라는 아쉬우면서도 훈훈한 결과로 끝이 났다.차진철이 떠나고 난 뒤, 대표실에는 오롯이 나와 차준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은은한 우디 향이 밀폐된 공기 사이로 아찔하게 감돌았다. 우리는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조용히 서류를 들여다보았다.나는 각 부서에서 올라온 신규 사업 제안서들을 하나씩 검토하며 서머리 노트를 작성했고, 차준호는 가볍게 분류된 결재 서류에 묵묵히 서명을 해나갔다.서류를 읽던 나는 슬쩍 눈길을 올려 서류를 집중하고 있는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깎아지른 듯 단정한 턱선과 깃이 잘 세워진 셔츠 차림의 남자는, 여직원들이 왜 그토록 그를 신처럼 동경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 손꼽히는 성골 재벌가라면서도 내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은밀하게 대해주니 자꾸 바라보게 되는 수밖에.‘하지만······ 선을 지켜야 해.’화장실에서 들었던 여직원들의 대화와, 얼마 전 찾아왔던 화려한 상대 강소희의 모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게다가 그의 아버지 차진철 회장을 직접 직면하고 나니, 그가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현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혼자 김칫국을 마시고 북 치고 장구 치고 해봤자, 우리는 그저 대표와 비서 사이일 뿐이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내가, TV 속 연예인을 동경하듯 차준호라는 독보적인 사람에게 잠시 마음을 뺏겼던 거라
월요일 아침 8시, 회사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보니 이런 거대한 이벤트가 터져 있을 줄이야.들어선 대표실에는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만 접하던 거대한 재벌가의 총수, 차진철 회장이 앉아 있었다.차준호와 꼭 닮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수려한 미중년의 외모였지만, 대단한 풍채와 더불어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는 범접할 수 없는 거물의 아우라가 서려 있었다.“어제 준호랑 통화하던 그 비서로군. 체스 좋아하나, 신 비서?”그냥 체스는 전혀 둘 줄 모른다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고 조용히 물러서면 될 일이었다.“저 체스 좋아합니다.”하지만 내가 미쳤지.사람을 은근히 시험하려는 듯한 차진철 회장의 묵직한 시선에 괜히 꼬리를 내리기 싫은 내 오기와 승부욕이 쓸데없이 터져 나왔다.그러자 차진철 회장의 얼굴이 단번에 환하게 밝아지더니, 맞은편 소파를 툭툭 내리치며 가벼운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아예 나를 상대로 제대로 판을 깔 기세였다.“잘됐군! 어서 앉게. 이 녀석이 안 놀아줘서 심심하던 참이었거든.”진짜 이 월요일 아침부터 나를 고용한 대표의 아버지와 체스 판을 벌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단순히 예의상 물어본 것에 그치지 않고, 진짜 실력을 확인해 보려는 것이 확실했다.황당함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차준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준호는 내 눈빛을 슬쩍 피하며 입꼬리를 나른하게 올렸다.“신하늘, 오늘 내 스타일이 아닌 옷을 입고 왔으니, 벌칙을 좀 받도록 해. 아버지를 즐겁게 해줘야 할 거야.”이 남자가 진짜······.내 속도 모르고 차진철 회장은 더욱 화통하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수화기 너머로 명확하게 스며드는 두 남자의 음성에 나는 숨을 턱 멈췄다. 너무 놀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만나는 여자? 내가? 설마······.’차진철 회장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당혹감에 휩싸인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자신은 지금 차준호와 그 어떤 사적인 관계도 아니었다.아무리 내가 연애에 무지하고 남녀 사이의 묘한 기류에 미숙하다 한들, 그와 나의 관계가 연인 따위가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명확했다. 그 남자는 그저 오만한 상사였고, 나는 그 아래서 일하는 비서일 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로 번지는 그 묵직한 '여자'라는 단어 하나에 목덜미부터 붉은 열기가 열병처럼 터져 올랐다.차준호가 내 머릿속에 남겨둔 그 사밀하고 다정한 행동과 나를 내려다보던 짙은 눈빛의 잔상이 아찔하게 뇌리를 스쳤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나는 수화기 너머 그 남자의 반응만을 숨조차 쉬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버지, 그냥 제 비서예요. 일요일에 여길 뭐 하러 불러요?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차준호의 음성은 지독하리만치 차분하고 서늘했다. 마치 단 한 치의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냉정하게 선을 긋는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귓가에 차갑게 내려앉았다.그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이 허무하게 무너지며 맥이 탁 풀려버렸다.그럼 그렇지.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와 나 사이에 무슨 특별할 게 있다고.기대한 적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 남자의 명확하고 서늘한 거절에 가슴 한구석이 시원섭섭하게 정리되는 기분
다음날 아침, 햇살이 이아준의 70층 잠실 레지던스 통창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여전히 지난밤의 소동으로 어지러웠다.나는 졸지에 세종동 터전을 잠시 떠나 이아준의 집으로 피신하듯 오게 되었다. 어제저녁, 예고도 없이 경찰차 여러 대가 붉은 사이렌 불빛을 번쩍이며 집 앞마당으로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신고자의 인적 사항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습적인 강력 범죄 가능성이 있다며 경찰관들이 호들갑에 가까운 신속함으로 움직여 준 탓에 얼떨결에 짐을 싸야 했다.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집 담벼락에 흉측한 낙서나 혐오스러운 문구가 칠해지는 일은 내게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매번 속으로 씁쓸함을 삼키며 페인트로 덮거나 친구들에게 위로받는 것이 전부였는데, 갑자기 형사들까지 현장 보존에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신하늘 씨, 상습적인 악의적 테러 및 신변 위협 건으로 즉시 수사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범인이 잡히고 현장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안전한 장소로 피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경찰관이 건넨 단호한 말이 아직도 가에 맴돌았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짐만 챙겨 들고 경찰서까지 다녀와 진술서까지 작성해야 했다.그때 이아준의 비서이자 변호사 출신인 김정규와, 산전수전 다 겪은 도국의 매니저 이동근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경찰서에 동행한 순간부터 수사는 막힘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나는 철저하게 보호받는 피해자가 되어 따뜻한 울타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법적인 보호 절차를 꼼꼼히 체크해 주라고 지시한 이아준도 고마웠고, 거주지 이동 및 동선 보안에 앞장서며 자신의 전담 경호원까지 붙여준 도국의 과분한 배려에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하지만 아무리 화려하고 근사한 펜트하우스라 해도 내 집만큼 편할 수는 없었다. 황당한 하루의 시작이었다.“하늘아, 잘 잤어?”이아준이 머리를 부스
어르신이 모두 돌아가고 쓰레기 정리까지 마친 나는, 멍하니 냉풍기 앞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눈을 감고 있었다.“하, 이게 행복이지.”큰 일을 마친 후련함과 해야 하는 의무를 마친 뿌듯함이 밀려와 몸은 나른해져갔다.냉풍기와 천막과 의자를 거두러 올 업자를 기다리던 그때.어수선한 소리가 들려 눈을 뜨고 보니, 텅 빈 운동장 저편에서 친구들이 오고 있었다.오늘 바쁘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간을 낸 걸까.“아준아! 도국아!”작렬하는 태양 아래, 숨이 차오르는지 이글거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둘을 발견한 순간,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하늘아! 많이 기다렸지? 수고했어!”“늦어서 미안하다, 신하늘!”나는 어린 시절 이 운동장을 누비던 그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가장 먼저 달려온 이아준은 이 폭염 속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린넨 슈트 차림이었다. 오늘은 무테안경을 쓰고 재벌가 막내 도련님 특유의 세련되고 고귀한 아우라를 전신으로 뿜어내고 있었다.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듯 깔끔한 얼굴로 다가온 이아준이 안도감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도닥도닥 토닥여 주었다.“혼자 고생하게 해서 마음이 계속 안 좋았어. 괜찮아? 지쳐 보여.”이어 도착한 도국은 그야말로 어디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받아 막 데뷔한 풋풋한 신인 아이돌 같은 차림새였다. 깊게 눌러쓴 검은색 볼캡 모자 아래로 조각 같은 턱선이 드러났고, 탄탄한 체형을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검은 반팔 티셔츠에 스타일리시하게 찢어진 청바지를 걸친 기럭지가 감탄을 자아냈다.도국은 무심한 듯 다정한 얼굴로 길쭉한 손을 뻗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