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한씨 저택 거실.시터가 이안을 안고 있었고, 권영자는 그 옆에서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해인은 자신을 조금 닮은 아들의 통통하고 하얀 볼을 보자, 참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봤다.옆에 있던 유호가 말했다. “이안아, 엄마 해 봐.”5개월 된 아기는 한창 귀여울 때였다. 본가에서 잘 먹고 잘 자란 이안은 볼이며 팔다리가 통통했다. 날씨도 따뜻해져서 얇은 옷을 입혔더니, 아이의 작은 몸이 더 활발하게 움직였다.이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사람을 볼 때마다 세상이 신기한 듯 호기심이 가득했고, 가끔 짧고 통통한 다리를 힘차게 차며 넘치는 기운을 뽐냈다.유호의 목소리를 들은 이안은 천천히 아빠 쪽을 보더니 입을 벌리고 해맑게 웃었다. 입가에 침을 흘리면서 바보처럼 환하게 웃기만 하고 ‘엄마’ 소리는 낼 생각도 하지 않자, 유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얘 진짜 내 아들 맞아? 왜 아빠 말을 하나도 안 듣지? 설마 좀 둔한 건 아니겠지?”권영자가 유호를 매섭게 흘겨봤다. “5개월 된 애가 네 말 알아듣고 그대로 하면 그게 신동이지. 우리 증손자가 얼마나 똑똑한데. 너 어릴 때보다 훨씬 영특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이안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호는 권영자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였다.하지만 이제 이안이 생기자 유호조차 한발 물러나야 했다.해인도 누가 자기 아들을 좋지 않게 말하는 건 듣기 싫었던지 곧바로 거들었다. “아들은 아빠 닮는대. 이안이 둔한 거면 당신도 똑같은 거지.”유호는 졸지에 두 여자에게 양쪽에서 공격받는 신세가 됐다.할머니야 그렇다 쳐도 해인까지 자기 편을 들지 않자, 유호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들이 남편보다 더 중요해?”해인의 뺨이 붉어졌다. 가족들이 다 있는 데서 그런 질문을 받으니 괜히 민망했다.어떻게 대답해도 한쪽은 섭섭해질 것 같은 질문이었다.결국 권영자가 해인을 구해 줬다. “다 큰 놈이 자기 아들한테 질투까지 하냐? 너희 사이 좋은 건
교도소.젊은 여성 교도관은 막 사망 판정을 받은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봤다.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다른 수용자들과 충돌하면서 심하게 맞은 얼굴은 원래 생김새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부어 있었다.그래도 교도관은 이 여자가 원래 꽤 아름다운 외모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죽기 전 입에서 피가 쏟아지면서 출혈이 멎지 않았다. 몸 안쪽 장기까지 크게 다친 끝에 숨진 게 분명해 보였다.이 수용자가 처음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같은 구역을 관리해 온 교도관은 그녀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차희정, 수감번호는 912번이었다.정식으로 수감되기 전부터 교도관들은 912번의 신상 기록을 받아 봤고, 살인죄로 들어온 죄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시장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딸이 친아버지를 직접 죽인 데다가, 재판정에서는 판사가 보는 앞에서 내연남까지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어릴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그렇게 잔혹한 면을 갖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범행만 놓고 보면 망설임조차 없는 흉악범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처음 자료를 봤을 때는 젊은 교도관도 희정을 곱게 보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교도관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만큼 새 일에 의욕도 컸고, 담당 수용자들의 생활도 꼼꼼히 챙겼다.교도관은 이런 여자라면 잘사는 집에서 자란 특유의 까다로운 성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912번은 대부분 혼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평소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가끔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웃는 때가 있었다.지켜보다 보니 912번이 다른 수용자들을 일부러 자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상대들이 주먹과 발을 휘두르는데도 전혀 반격하지 않았다. 머리조차 감싸지 않고 바닥에 누운 채 맞기만 했다.이런 충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912번의 몸에는 늘 크고 작은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앞으로 다가간 교도관이 시신 위에 흰 천을 덮고 안치실로 옮기도록 했다.몇 시간 뒤 다른 직원이
해인은 눈을 크게 떴다. “말도 안 돼. 이안이는 이제 겨우 다섯 달이야!”5개월 된 아기가 엄마라고 부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힘들었다.“딱 한 번 했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고.”유호는 말을 하며 시동을 걸었다. “가자. 본가로.”자기 아이가 처음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특별했다. 유호도 해인이 그 기쁨을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차가 본가로 들어설 때, 조금 떨어진 길가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차 안에서는 주름진 눈매의 남자가 오랫동안 본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택시기사가 앞을 보며 말했다. “방금 들어간 차, 한유호 대표님 차 같은데요.”“그래.”뒷좌석의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기사가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는 한원랑 회장이 아들을 별로 아끼지 않았다더군요. 어릴 때부터 심하게 맞아서 몸에 상처가 많았다고요.”이선보가 묘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제 먼 친척 하나가 그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술 한잔하다 취해서 무심코 흘린 이야기예요.”“그런 재벌가 집안 사정을 저 같은 사람이 달리 어떻게 알겠습니까? 평소에는 입이 무거운 사람인데 그날 실수한 거죠.”이선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택시기사는 점점 말하면서 재미가 붙었다.“한원랑 회장이 아들이 자기 핏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첫 부인이 회장 만나기 전에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더라고요.”이선보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럼 한유호가 첫 부인과 전 남자친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뜻인가?”기사가 웃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추측이지요. 그래도 친아들이라면서 그렇게까지 때린 걸 보면 뭔가 있었던 거 아닐까요?” “자기 아들이 아닌데 체면 때문에 밖으로 드러내지도 못했을 수도 있고요.”“저런 집안 사람들은 체면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잖습니까. 친아들한테 그렇게 독하게 할 아버지가 흔하겠어요?”이선보는 입가에 담배를 문 채
차씨 저택을 나온 유호는 해인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해인이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는 걸 보고 물었다. “무슨 생각해?”희정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은 셈이었다. 마지막에 가족 누구도 유해를 찾으러 가지 않게 된 것 역시 스스로 불러온 결말이었다.차장섭도 도수희도 희정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줬다. 하지만 희정은 그 기회를 걷어차고 자신의 불륜을 숨기기 위해 친아버지까지 죽였다.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일이었다.이제 희정이 죽었다고 해서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결과는 희정 자신의 선택에서 시작됐다.해인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유호는 해인이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죽음이나 이별을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해인은 희정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지난 일을 아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남기는 씁쓸함이 있었을 뿐이다.둘은 차에 탔다. 유호가 해인의 손을 한 번 꼭 잡아 주었다.“차희정한테 아무도 안 찾아가서, 그렇게 끝나는 게 마음에 걸리면 내가 같이 가 줄게. 교도소에 한 번 다녀오자.”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얽힌 원망과 빚도 더 이어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그저 좋은 일 한 번 한다고 생각하면 됐다.해인은 고개를 저었다. “차희정 성격이면 우리가 챙겨 줘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쓸데없는 짓 한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이미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을 것 같아.”유호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잠깐 생각하던 유호가 물었다. “천서진 말하는 거야? 천서진이 차희정 유해를 찾아간다고?”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둘은 진작 끝난 사이 아니야?”희정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안 뒤 서진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듯 굴었다.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크게 남은 것처럼 보였다.해인이 낮게 말했다. “정말 마음이 끝났으면 아무 감정도 없어야 해.
가사도우미가 문을 열었다가 밖에 서 있는 공무원들을 보고 멈칫했다. “실례지만 어디에서 오셨습니까?”상대가 정중히 말했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여기가 차희정 씨 가족이 거주하는 곳이 맞습니까?”가사도우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그럼 가족분이십니까?”가사도우미는 자기가 함부로 대답할 수 없어서 곧바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모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가사도우미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 도수희에게 그대로 전했다. “밖에 공무원들이 찾아왔습니다. 희정 아가씨 일로 온 것 같습니다.”희정이 이 집에서 살던 시절부터 가사도우미는 늘 ‘희정 아가씨’라고 불렀고, 오랜 습관이라 지금도 그 호칭이 입에 붙어 있었다.하지만 희정은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관련 기관끼리 기록이 공유될 텐데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집까지 찾아온 걸까?도수희가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가사도우미가 사람들을 안내하러 가자 해인은 무심코 유호를 바라봤다.유호가 물었다. “왜?”“괜히 찾아온 건 아닌 것 같아.”유호는 별다른 말 없이 상황을 지켜봤다.공무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용건부터 꺼냈다. “차희정 씨 가족분들이 맞으시죠? 수용자가 사망해서 유가족 확인과 인계 절차가 필요해서 방문했습니다.”도수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죽었다고요?”“차희정 씨입니다.”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도수희는 바로 반응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해인이 물었다. “사인은 뭔가요?”희정은 재판 도중 법정에서 흉기를 휘두른 사건까지 더해져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였다.처음에는 사형까지 거론됐지만, 피해자 건훈의 부모가 이례적으로 선처 탄원서를 제출했고 결국 무기징역이 확정됐다고 들었다.외아들을 잃은 진씨 집안이 선처를 요청했다는 것 자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해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예전에 차장섭의 비서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해인은 건훈의 부모가
해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한마디 더 해 보려는데 유호가 눈짓을 보냈다.해인은 도와주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퇴원 짐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 뒤 병원 복도로 나왔다. “왜?”유호가 낮게 말했다. “장모님이 싫다고 하시면 그만하자. 네가 걱정되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골라서 곁에 붙여 둘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우리한테 연락하게 하고. 억지로 우리 집에 모셔와도 장모님께서 편하지 않을 수 있어.”“그래도 엄마가... 너무 과거에만 붙잡혀 있을까 봐 걱정돼. 아빠와의 기억이 가득한 집에서 계속 지내면 더 못 빠져나올 것 같아.”유호가 되물었다. “꼭 빠져나와야 해? 그 기억 속에 있는 편이 장모님을 더 편하게 해 준다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잖아.”해인은 조금 놀란 눈으로 유호를 봤다.유호가 설명했다. “누구나 자기가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할 권리가 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아니면 다 알 수 없는 거고.” “우리가 겉으로만 보고 그 삶이 행복한지 아닌지 단정할 권리도 없어.”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모두에게 맞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결혼하고 누군가는 혼자 살며, 아이를 여럿 낳는 사람도 있고 아이 없이 둘이 사는 길을 택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 틀렸다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었다.퇴원 수속을 마친 뒤 해인과 유호는 도수희를 차씨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다.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낸 탓에 도수희가 집으로 돌아온 것도 꽤 오래간만이었다.집 안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차장섭이 좋아하던 목련도 활짝 피어 있었다. 익숙한 집인데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도수희의 가슴 한쪽이 텅 빈 듯 쓰렸다.서재 책상 위에는 차장섭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책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절반을 넘게 읽은 낡은 책 사이에는 책갈피가 얌전히 끼워져 있었고, 여백에는 차장섭이 남긴 메모와 짧은 감상이 적혀 있었다.도수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정신이 잠깐 먼 곳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이소정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사설탐정? 사설탐정을 써서 태겸이를 조사했다는 거야? 해인아, 그런 건 하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상처만 남겨.”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서재 안까지 전해졌다.문이 열리며 고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인을 보자 자연스럽게 음성이 누그러졌다.“해인이, 왔구나.”고민건을 바라보던 해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저분처럼 머리가 희끗해졌을까?’그해,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있었다. 원래는 고민건이 직접 협력사와 만나기로 되어
밖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해인은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며 태겸이 들어왔다.실내로 스며든 발소리는 조심스러웠고, 점점 가까워지다가 해인 등 뒤에서 멈췄다.이어 단단한 남자의 팔이 해인 뒤에서 감겨 왔다.해인의 허리가 갑자기 조여 들었다.“여보...”태겸의 입술이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낮고 거친 숨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였다.“여보, 나 진짜 보고 싶었어.”밤공기를 머금은 태겸의 체온이 전해지자 해인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해인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달빛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버려진 제약 공장 안, 강해인의 몸은 거칠게 꼬인 밧줄에 묶여 있었다.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기댄 채, 여자의 가느다란 손목은 높이 들어 올려진 채 벽에 고정돼 있었다.그리고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해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얇은 여자의 허리가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움츠러들었고, 남자의 입가에는 음습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강해인 씨. 아무도 몸값을 들고 안 오면, 그땐 미안하지만 말이야.”해인의 뒤쪽에서 벨트를 푸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해인의 심
해인은 말문이 막혔다.오늘의 유호는 그날의 단정한 군복 차림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해인 앞에 있는 유호는 검은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친 상태였고, 언뜻 드러나는 가슴 근육의 선이 거친 생기를 더했다.해인이 앉은 자리에서는 그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음... 한유호... 몸은 정말 좋네...’유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별생각 없는 듯 물었다.“손은 왜 다쳤어?”해인은 멈칫했다. 고개를 숙이고서야 언제 그랬는지 모를 새, 유리컵에 베인 손바닥에서 선혈이 번져 나온 것을 알아챘다.입술을 살짝 다문 해인은 손등을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