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적어도 서아의 눈에 드러난 기계 장치는 없었다.
그렇다면 강도진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장치를 숨기고, 그 기록 너머의 감정까지 알아낸 것인가?불현듯, 서아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설책의 끄트머리에 꽂혔다.
책은 후반부가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서아는 홀린 듯이 기어가 그 책을 다시 뒤집었다.
이 책의 결말.
자신과 이안의 끝. 도진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 놓았을까.이안이 화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도진은 자신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서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문장을 읽었다.
[류의 작업실이 불탔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희수는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청년의 비극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작업실에 남은 그림과 저장 장치가 타버렸다서아는 뒷걸음질을 쳤다.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기계 장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카메라와 녹음기가 그녀의 행동과 목소리를 포착했다면, 강도진은 그 기록 사이의 공백을 괴물 같은 통찰력과 직관으로 메우며 백서아라는 인간의 껍데기 너머에 있는 진짜 본성을 해부해 왔던 것이다."그… 그럼…."서아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장 두렵고 끔찍한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질문의 답을 듣는 순간, 자신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이안은….""…….""이안의 작업실에 불이 난 건…."서아의 눈동자가 극도로 팽창했다.숨이 턱턱 막혀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내 누드화… 이안이 당신 앞으로 그 대표작 한 점을 보내고, 나머지 그림 사진까지 뿌리겠다고 협박한 날. 내가 당신 바짓가랑이 잡고 스토커라고 거짓말하며 울고불고 매달렸지.""그랬지. 아주 훌륭한 연기였어. 조금 작위적이긴 했지만.""그리고… 바로 그날 새벽, 이안의 작업실에 불이 났어. 그 새끼 손이 다 타버렸다고."서아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너무 추웠다. 서재 안의 공기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기사에도 없던 내 구토와 거울 속 미소를 어떻게 썼어? 그날 당신은 출판사와 화상 미팅을 한다며 서재에 있었지. 나를 보고 있었던 거야?"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서재의 적막을 채웠고,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그리고 그날 밤 이안에게 무슨 말을 했어? 그 새끼가 제 손
"소란스럽네. 책은 다 읽은 거야?""닥쳐! 그딴 쓰레기 같은 소설! 그게 소설이야?! 그게 글이냐고!"서아는 양손으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도진의 원고 뭉치와 책들을 바닥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우당탕탕!수십 권의 책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난장판이 되었다."쓰레기라니. 섭섭한데."도진이 손수건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픽, 헛웃음을 흘렸다."출판사에서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취라고 극찬했어. 평론가들도 올해 가장 충격적인 화제작이라고 입을 모으던데. 내 최고의 역작을 그렇게 폄하하면 작가로서 좀 상처받아, 여보.""여보? 여보오?! 입 찢어버리기 전에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날 부르지 마!"서아의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그녀는 도진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책상의 폭이 너무 넓어 닿지 않았다. 서아는 허공을 휘젓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을 거두며, 숨을 헐떡였다."말해. 당장 말해.""뭘 말일까.""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고!"서아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 뒤! 대학 동기 모임이라고 거짓말하고 이안과 처음으로 몸을 섞은 날! 내 블라우스 자개 단추들이 뜯어진 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당신이 아침에 직접 매어준 아이보리색 에르메스 스카프! 이안이 수장고에서 그 안쪽에 붉은 물감을 짓이긴 것! 내가 세면대에 빠뜨려 버렸다고 거짓말한 것까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서아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자신이 뱉어내는 말들이 스스로의 치부를 완전히 까발리는 짓이라는 것도 잊은 지 오래였다. 이미 도진의 책 속에 모든 것이 활자로 박제
피가 뚝뚝 떨어졌다.유리 조각에 깊게 찔린 맨발에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 차갑고 매끄러운 대리석 복도 위로 서아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아니, 발바닥의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따위는 지금 그녀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끔찍한 공포와 배신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오른손에는 크리스털 와인잔의 날카로운 파편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너무 꽉 쥔 탓에 손바닥마저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서아는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파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만이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복도 끝.굳게 닫힌 거대한 마호가니 원목 문.강도진의 서재.그 문틈 아래로 새어 나오는 은은하고 따뜻한 노란빛이, 지금 서아에게는 지옥불의 아가리처럼 보였다."하아… 하아…."서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땀과 눈물에 젖어 뺨에 들러붙어 있었고, 샴페인 골드 컬러의 실크 슬립은 붉은 와인과 선혈이 뒤엉켜 기괴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에서 강도진이 쓴 소설의 문장들이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희수는 류의 목에 팔을 감았다.][다리 더 벌려. 당신 남편이 이 꼴을 보면 얼마나 즐거워할까?][희수는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었다.]서재로 향하기 직전까지 서아의 머릿속에는 책의 문장들이 순서 없이 겹쳐졌다. 침실에 펼쳐 둔 양장본을 다시 들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대목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나치게 선명했다.첫 번째는 옷이었다. 대학 동기 모임을 핑계로 이안의 작업실에 갔던 날 입은 블라우스와 스카프의 색, 자개 단추가 뜯어진 위치까지 소설 속에 남아 있었
적어도 서아의 눈에 드러난 기계 장치는 없었다.그렇다면 강도진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장치를 숨기고, 그 기록 너머의 감정까지 알아낸 것인가?불현듯, 서아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설책의 끄트머리에 꽂혔다.책은 후반부가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서아는 홀린 듯이 기어가 그 책을 다시 뒤집었다.이 책의 결말.자신과 이안의 끝. 도진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 놓았을까.이안이 화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도진은 자신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서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문장을 읽었다.[류의 작업실이 불탔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희수는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청년의 비극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작업실에 남은 그림과 저장 장치가 타버렸다. 남편에게 도착한 대표작은 미치광이의 망상으로 받아들여졌고, 남아 있는 자료도 원본을 잃었다.'남은 증거마저 조작과 집착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희수의 입술 끝이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 그것은 안도감이라는 이름의 구역질이었다. 결정적인 진실의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살아남았다는, 짐승 같은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가장 역겨운 안도감.희수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완벽한 위선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서아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변기통을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거울 속 자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이 문장을 읽는 순간, 서아의 이성은 완벽하게 붕괴되었다.이안의 화재 소식을 뉴스로 접했던 건, 불과 6개월 전이었다.하지만 문제는 출간 공정이 아니었다. 기사에는 서아
[그래서 희수는 류를 선택했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이자 군림이었다. 남편 앞에서는 늘 굽신거려야 했던 희수가, 그 지독한 테레빈유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작업실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여왕이었다. 류가 희수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출 때, 희수는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아찔한 권력의 쾌감을 느꼈다.'나는 이 천재적인 젊음을 지배하고 있다. 내 남편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세계에서, 나는 신이다.']"아악…!"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정확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자신이 이안과 몸을 섞으며 느꼈던 쾌락의 본질은, 육체적인 만족이 아니었다. 강도진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살던 자신이,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쥐락펴락한다는 그 가학적인 우월감.자신조차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던 그 은밀하고도 천박한 심리를, 도진은 메스로 생살을 해부하듯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았다."도, 도대체… 어떻게…."서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책장 위를 적셨다.단순히 사람을 붙여 미행을 하거나 카메라를 달아놓은 수준이 아니었다. 강도진은 마치 서아의 뇌 속에 칩이라도 심어놓은 것처럼, 그녀가 찰나의 순간에 느꼈던 감정의 파동까지 모조리 활자로 엮어내고 있었다.서아는 책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중반부를 향해 책장을 미친 듯이 넘겼다.[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 희수는 남편이 잠든 침실로 숨죽여 들어갔다. 고르게 숨을 쉬고 있는 남편의 등짝을 바라보며, 희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이 멍청한 인간. 밖에서는 문단의 제왕이라며 떠받들어지지만, 자기 마누라가 방금 전까지 어린놈의 밑에서 헐떡이다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지.
"내 소설, 마음에 안 들어?"역광을 받으며 침실 문턱에 선 강도진의 실루엣은 거대한 절벽 같았다.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낮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음성이 서아의 고막을 때리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어… 어어……."서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짐승처럼 헐떡였다.입술이 바짝 말라붙어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하얀색 최고급 페르시안 카펫 위로 섬뜩하게 번져나간 붉은 와인 자국. 산산조각이 난 크리스털 와인잔. 그리고 그 옆에 흉측하게 내동댕이쳐진 가죽 양장본 소설책.마지막으로, 온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아내 백서아의 창백한 얼굴.모든 정황이 그녀의 공포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그녀가 완벽한 패닉에 빠졌다는 사실을.하지만 도진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서아야. 왜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 위험하게."도진이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벅, 저벅.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서아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오, 오지 마…!""발밑 조심해. 유리 파편 있잖아."도진은 서아의 비명 같은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구두를 신은 채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다가왔다.빠지직, 뽀각.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서아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울렸다.도진은 서아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진 책을 주워 들었다."소중한 책이라고 했잖아. 이렇게 던지면 어떡해."그는 책 표지에 묻은 먼지를 긴 손가락으로 툭툭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