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달칵.서재 문이 닫히는 소리는 너무나도 작고 경쾌했다.하지만 바닥에 엎드린 서아에게 그 소리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를 영원히 폐쇄해버리는 거대한 철문의 파열음처럼 들렸다."아… 아아…."서아의 입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강도진은 떠났다.자신을 향해 '최고의 뮤즈'라는 비릿한 찬사를 남긴 뒤, 서아가 나가라고 하자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피 묻은 셔츠 차림의 뒷모습은 문 너머로 사라졌고,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피비린내 나는 지옥 한가운데에 혼자 남겨진 것은 서아뿐이었다."거짓말… 이거 다 거짓말이야…."서아는 바닥에 흩어진 원고지들을 미친 듯이 긁어모았다.피와 잉크가 뒤섞인, 도진의 소설. 아니, 백서아의 관찰 일지.덜덜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눈앞으로 끌어당겼다.[희수는 해방촌 옥탑 작업실의 매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테레빈유 향과 거친 먼지가 섞인 그곳에서,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류의 거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을 때, 희수는 남편의 정갈하고 차가운 서재를 떠올리며 묘한 승리감에 젖었다.]"아아아악-!"서아는 원고지를 갈기갈기 찢어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아니야! 승리감 아니었어! 그냥… 그냥 끌린 것뿐이었어! 네가 뭔데 내 감정을 단정 지어! 네가 뭔데!"허공을 향해 악을 썼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서아는 피투성이가 된 무릎으로 기어가 다른 원고지를 집어 들었다. 읽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시선은 이미 활자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희수는 남편이 직접 매어준 아이보리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갤러
도진이 담담하게 인정했다."그래서 모르는 건 비워 뒀어. 나중에 당신 반응이나 이안이 스스로 한 말로 채웠고. 소설에서는 필요한 만큼 재구성했고."그 말에 서아의 분노가 잠시 멎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전지적인 감시는 아니었다. 더 나빴다. 도진은 적은 정보만으로도 자신의 행동을 예측했고, 빈칸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한 번이라도 그 노트를 덮을 생각은 안 했어?""했어.""언제."도진은 대답하기 전에 처음으로 시선을 피했다."당신이 실제로 다칠 가능성이 커졌을 때."서아는 헛웃음을 흘렸다."그 전에는? 내가 거짓말하고, 죄책감에 미쳐가고, 내 인생이 무너지는 건 다 괜찮았고?"도진은 침묵했다.그 침묵이 서아에게는 가장 정확한 답이었다. 도진의 기준에서 ‘위험’은 신체가 망가지거나 사건이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감정이 닳고 자존감이 무너지는 과정은 관찰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었다.서아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경찰, 변호사, 비서의 이름이 차례로 떠올랐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든 첫 문장은 자신이 만들어야 했다. 남편이 자신을 관찰해 소설을 썼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숨겨 온 관계 역시 함께 설명해야 했다.도진은 막지 않았다."전화해도 돼."그 태도가 더 무서웠다. 이미 법적·사회적 경계까지 계산했다는 뜻처럼 들렸다.서아는 화면을 껐다. 신고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당신한테 나는 사람이었어?"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아내였어? 아니면 처음부터 원고였어?"그제야 도진이 천천히 말했다."둘 다였어. 그래서 더 쓸 수 있었어."
"네가 끝까지 갤러리와 체면을 붙들자, 이안이 제 손으로 CCTV 캡처본과 문자 일부를 이사회에 던졌지. 나는 그놈이 그렇게 움직일 걸 알고도 막지 않았고, 네 마지막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그대로 이용했어."도진이 서아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탁 놓으며 비웃었다."그렇게 판을 깔아주니까, 네가 아주 완벽한 대사를 쳐주더라."도진은 서아를 흉내 내듯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여보, 무서워. 저 미친 스토커가 나를 괴롭혀. 나 좀 살려줘.’ ……하하하."도진의 웃음소리가 서재 안을 울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건조하고 텅 빈 웃음소리였다."네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을 쥐어짜며 그 대사를 뱉을 때, 나는 속으로 기립박수를 쳤어. 인간의 위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였지. 내 상상력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완벽한 예술 그 자체였어.""아…… 아아……."서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모든 것이 강도진의 장기판 위였다.도진은 이안의 자존심을 짓밟아 폭주를 유도했고, 서아가 그를 스토커로 몰아세우도록 침묵으로 길을 열어두었다. 두 사람이 제 욕망과 공포로 내린 선택조차, 결국 저 남자가 예상하고 이용한 장면들이었다."그럼……."파랗게 질린 서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작업실에…… 불이 난 것도…….""말했잖아. 소설의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고."도진이 바닥에 흩어진 원고지 중 한 장을 집어 들며 무심하게 말했다."네 비밀을 쥔 남자가 이 세상에 멀쩡히 살아
스으윽- 스으윽-턴테이블의 바늘이 빈 레코드판을 긁는 소리만이 기괴하게 서재 안을 맴돌았다.도진의 멱살을 움켜쥔 서아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핏기가 가신 그녀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그 절박한 질문에, 도진의 입가에 서서히 옅은 미소가 번졌다.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소였다. 다정함도, 온기도 없는, 그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을 내려다보는 파충류의 서늘한 입꼬리."처음이라."도진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서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 차가운 체온에 서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네가 말하는 그 ‘처음’이 언제부터인지 묻고 싶네.""……!""네가 갤러리에서 그 애송이의 그림을 처음 본 날? 아니면, 대학 동기 모임을 핑계로 해방촌 옥탑 작업실에 제 발로 들어간 날? 그것도 아니면…… 내가 매어준 스카프가 이안의 붉은 물감으로 망가진 날?"도진의 입에서 나오는 적나라한 단어들에 서아의 숨이 턱 막혔다."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네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니까."도진이 서아의 손목을 천천히,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떼어냈다."그래. 네가 내게 뭔가를 숨기기 시작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네가 흘린 결정적인 흔적들은 한 번도 놓치지 않았지."쿵.서아의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거, 거짓말…….""거짓말?"도진이 짧게 실소를 터뜨렸다."서아야. 넌 거짓말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진실을 마주하는 법을 잊어버린 모양인데,
서아는 뒷걸음질을 쳤다.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기계 장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카메라와 녹음기가 그녀의 행동과 목소리를 포착했다면, 강도진은 그 기록 사이의 공백을 괴물 같은 통찰력과 직관으로 메우며 백서아라는 인간의 껍데기 너머에 있는 진짜 본성을 해부해 왔던 것이다."그… 그럼…."서아의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장 두렵고 끔찍한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이 질문의 답을 듣는 순간, 자신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이안은….""…….""이안의 작업실에 불이 난 건…."서아의 눈동자가 극도로 팽창했다.숨이 턱턱 막혀와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내 누드화… 이안이 당신 앞으로 그 대표작 한 점을 보내고, 나머지 그림 사진까지 뿌리겠다고 협박한 날. 내가 당신 바짓가랑이 잡고 스토커라고 거짓말하며 울고불고 매달렸지.""그랬지. 아주 훌륭한 연기였어. 조금 작위적이긴 했지만.""그리고… 바로 그날 새벽, 이안의 작업실에 불이 났어. 그 새끼 손이 다 타버렸다고."서아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너무 추웠다. 서재 안의 공기가 갑자기 영하로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기사에도 없던 내 구토와 거울 속 미소를 어떻게 썼어? 그날 당신은 출판사와 화상 미팅을 한다며 서재에 있었지. 나를 보고 있었던 거야?"서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서재의 적막을 채웠고,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그리고 그날 밤 이안에게 무슨 말을 했어? 그 새끼가 제 손
"소란스럽네. 책은 다 읽은 거야?""닥쳐! 그딴 쓰레기 같은 소설! 그게 소설이야?! 그게 글이냐고!"서아는 양손으로 책상 위에 쌓여 있던 도진의 원고 뭉치와 책들을 바닥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우당탕탕!수십 권의 책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난장판이 되었다."쓰레기라니. 섭섭한데."도진이 손수건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픽, 헛웃음을 흘렸다."출판사에서는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취라고 극찬했어. 평론가들도 올해 가장 충격적인 화제작이라고 입을 모으던데. 내 최고의 역작을 그렇게 폄하하면 작가로서 좀 상처받아, 여보.""여보? 여보오?! 입 찢어버리기 전에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날 부르지 마!"서아의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그녀는 도진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책상의 폭이 너무 넓어 닿지 않았다. 서아는 허공을 휘젓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을 거두며, 숨을 헐떡였다."말해. 당장 말해.""뭘 말일까.""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고!"서아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갤러리 VVIP·프레스 프리뷰 리셉션이 끝난 지 사흘 뒤! 대학 동기 모임이라고 거짓말하고 이안과 처음으로 몸을 섞은 날! 내 블라우스 자개 단추들이 뜯어진 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당신이 아침에 직접 매어준 아이보리색 에르메스 스카프! 이안이 수장고에서 그 안쪽에 붉은 물감을 짓이긴 것! 내가 세면대에 빠뜨려 버렸다고 거짓말한 것까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서아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자신이 뱉어내는 말들이 스스로의 치부를 완전히 까발리는 짓이라는 것도 잊은 지 오래였다. 이미 도진의 책 속에 모든 것이 활자로 박제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