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 육체와, 제 거친 붓 터치에서 풍기는 짐승 같은 날것의 냄새를 몹시 사랑하셨거든요. 관장님이 제 작업실에 오실 때마다 우리는 캔버스 앞에서 아주 깊고, 비밀스럽고, 끈적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고상한 세상의 시선 같은 건 다 벗어 던져버리고 말이죠."
이안의 문장 하나하나가 예리한 송곳이 되어 서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직접적인 '불륜'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남녀 간의 짙은 육체적 관계를 은연중에 완벽하게 암시하는, 소름 끼치도록 천박하고 노골적인 폭로였다.
"권이안…… 제발…… 그만해……."
서아의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모기만 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노가 아니었다. 제발 멈춰달라는, 지독하게 비참한 구걸이었다.하지만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서아의 완벽한 붕괴
스르륵-.육중한 세단이 미끄러지듯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작가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 김 기사가 시동을 끄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강도진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창밖으로는 빗물에 젖은 거대한 저택의 철문이 차가운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수고하셨습니다, 김 기사님."도진이 나직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기, 작가님."김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도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오늘 기념행사, 밖에서 차 대기하면서 유튜브 생중계로 봤습니다. 공식 연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작가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왜 그런 아픔을 겪으셔야 하는지, 참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사모님 일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다 작가님 편 아닙니까. 기운 내셔야죠. 위대한 작가님이신데."도진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위대한 작가.감동적인 공식 연설.이 늙고 순진한 운전기사조차 완벽하게 자신의 연극에 속아 넘어가, 가해자인 자신을 동정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강도진이 펜 하나로 빚어낸 거대한 권력이었다.하지만 도진은 짐짓 슬픔을 삼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위대하다니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아닙니다! 편히 쉬십시오, 작가님!"김 기사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도진은 묵직한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가 담긴 벨벳 상자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철문이 열리고, 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완전
도진이 테이블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저 사람이 강도진이래.""얼굴 상한 것 좀 봐. 하긴, 아내가 그 지경을 만들어놨으니.""소설이 완전 실화라며? 어린 화가랑 뒹구는 걸 남편이 다 알고 썼다는데, 멘탈이 보통이 아니야.""쯧쯧, 백서아가 몹쓸 년이지. 강 작가 같은 천재를 두고 발정 난 개처럼 굴었으니."귓속말이 끊이지 않았지만, 도진이 눈을 맞추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동정과 존경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진은 자리에 앉아 샴페인 잔을 가볍게 쥐었다.'다들 속으로는 내 불행을 안주 삼아 씹어대면서, 겉으로는 고상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 인간이란 참으로 역겨운 족속들이야. 물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역겹고 우월한 괴물이지만.'도진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홀 전면의 거대한 단상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저 제단 위에서 자신이 치를 완벽한 의식을 상상하며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졌다.기념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출간 첫날 판매 기록과 추가 인쇄 계획, 해외 판권 문의 현황이 차례로 소개되었고, 마침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 전달 순서가 다가왔다.단상에 오른 문학정신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출간 하루 만에 초판 10만 부 완판. 한국 출판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이 성취를 만든 작가와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장내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핀 조명이 대표를 비췄다.대표는 큐카드에서 시선을 떼고 객석 중앙을 바라보았다."문학정신 출판사, 강도진 작가님의 장편소설 《타인의 뮤즈》. 초판 10만 부 돌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와아아아아아-!!폭발적인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수백 대의 카메라가 도
"넥타이는… 블랙이 낫겠어."드레스룸의 거대한 전신 거울 앞.도진은 수십 개의 최고급 실크 넥타이 중, 가장 광택이 없고 차분한 무광 블랙 타이를 골라잡았다.평소 공식 행사라면 화려한 샴페인 골드나 딥 버건디 컬러를 매치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그가 연기해야 할 배역은 '최고의 영예를 안았음에도, 아내의 스캔들로 인해 깊은 슬픔과 고뇌에 빠진 비운의 천재 작가'였다.사각, 사각.빳빳한 흰 셔츠 깃 사이로 블랙 타이를 조여 매는 도진의 손길은 정교하고 우아했다.거울 속에 비친 사내는 완벽했다.흠잡을 데 없이 빗어 넘긴 머리,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이목구비, 은은하게 풍기는 톰 포드의 우디 향수까지.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가, 이내 슬픔에 잠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 표정 연습을 반복했다."조금 더… 수척해 보여야 하나."도진은 혀를 차며 서랍에서 아내가 쓰던 창백한 톤의 파우더를 꺼냈다. 눈 밑에 얇게 펴 바르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묘한 다크서클이 만들어졌다.지잉, 지잉-!그때, 화장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에 뜬 이름은 '문학정신 김 편집장'이었다."네, 편집장님. 강도진입니다."도진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추고, 짐짓 피곤한 듯한 기색을 섞어 전화를 받았다.[작, 작가님! 아유,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시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네… 뭐.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수화기 너머로 김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게…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요. 백서아 관장님 말입니다… 오늘 아침 이사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져버린 도진은 고개를 젖히고 폭소를 터뜨렸다.웃음소리가 텅 빈 거실 벽을 타고 찌렁찌렁하게 울렸다."굳건한 믿음? 하하하! 미치겠군, 정말."도진은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배를 부여잡았다.세상 사람들은 지금쯤 밤을 새워가며 백서아의 뒤를 캐고 있을 것이다.아니, 이미 갤러리 홈페이지는 마비가 되었을 것이고, 이안의 인스타그램에는 수만 개의 악플이 달리고 있겠지.내일 아침이 밝으면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이 집과 갤러리 앞으로 몰려들 것이다.그 모든 사냥개들을 풀어놓은 주인이 바로 자신인데, 사람들은 강도진을 향해 '아내를 굳건히 믿는 대인배 남편'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완벽해."도진은 글라스에 담긴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알코올의 뜨거운 열기가,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가학적인 승리감과 섞여 온몸을 짜릿하게 태웠다.지잉-!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이번에는 발신자가 달랐다.[백서아 관장님 갤러리 - 최 부관장]도진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아, 강 작가님!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다급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최 부관장의 목소리는 아까 편집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급하고 처절했다.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저… 혹시 관장님 옆에 계십니까?! 제가 아까 통화를 하다가 중간에 끊어졌는데, 그 뒤로 전원이 꺼져 있어서요!]"아. 제 아내 말입니까?"도진은 부서진 거실 바닥의 액자 조각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여유롭게 대답했다."제 아내는 지금 집을 나갔습니다."[
쏴아아아-.거침없이 쏟아지는 폭우 소리가 대저택의 두꺼운 방음 유리를 뚫고 희미하게 스며들었다."후우."강도진은 마스터 욕실의 거대한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뜨거운 물에서 피어오른 하얀 수증기가 그의 탄탄한 상반신을 감쌌다. 최고급 히노끼 나무의 은은한 향이 욕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우아한 동작으로 수건을 집어 들어 젖은 머리칼을 닦아냈다.방금 전까지 이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명을 지르고,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고, 결국 미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도망쳐 나간 그 모든 소동은 마치 다른 세계의 일인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정말이지… 수고했어, 서아 여보."도진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입가에 걸린 미소는 지극히 부드러웠으나, 눈동자에는 파충류 같은 서늘한 이채가 번뜩이고 있었다.욕실을 나온 그는 짙은 네이비색 실크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향했다."……."안방 문을 여는 순간, 도진의 발걸음이 멈췄다.침실은 처참했다.수천만 원짜리 페르시안 카펫 위에는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고, 아내가 아끼던 화장대 위는 온통 난장판이었다.그리고 도진의 시선이 화장대 거울에 가닿았다.[희수]시뻘건 립스틱으로 짓이기듯 써 내려간 두 글자.글씨의 끝자락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액체와 섞여 섬뜩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도진은 천천히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하하."거울에 적힌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던 도진의 입에서, 결국 참지 못한 낭랑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기대 이상이야. 정말 기대 이
'포르쉐.'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차의 엠블럼이 눈에 들어왔다.강도진의 돈으로 산 포르쉐. 이 차에 달려 있는 GPS가, 강도진의 서재 모니터에 자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이 차도 안 돼… 버려야 해…."서아는 외곽순환도로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를 지났다.비가 쏟아지는 경기도 외곽의 어느 한적한 국도변.서아는 잡초가 무성한 공터에 포르쉐를 거칠게 세웠다.시동도 끄지 않은 채, 그녀는 크로스백 하나만 달랑 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폭우가 서아의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검은색 트레이닝복이 순식간에 젖어 살에 들러붙었고, 깊게 눌러쓴 캡모자 창 위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강도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이 들리지 않는 아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고 싶었다.얼마나 걸었을까.칠흑 같은 국도를 따라 한 시간 넘게 빗속을 헤매던 서아의 눈앞에, 녹슨 간판 하나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청수 여관 - 숙박 30,000원]간판의 불빛은 반쯤 나가 '청 여 '라고만 기괴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 주변에는 버려진 폐타이어와 쓰레기봉투들이 뒹굴고 있었다.평소의 백서아라면 숨을 쉬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고개를 돌렸을 끔찍한 빈민가 여관.하지만 지금의 서아에게는 그곳이 유일한 도피처였다.서아는 물귀신처럼 젖은 몸을 이끌고 여관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끼기긱-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지독한 곰팡내와 담배 찌든 내가 훅 끼쳐왔다.카운터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제7화 불협화음의 침입자(1)오후 2시 30분.서아는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시곗바늘이 초 단위로 움직이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약속 시간은 오후 2시 정각이었다.서아의 사전에서 '지각'이란 허용되지 않는 단어였다. 갤러리 아르테의 수석 큐레이터인 그녀와의 미팅을 위해 내로라하는 작가들도 30분 전부터 로비에서 대기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그런데 이름 없는 무명 작가, 이안이라는 남자는 무려 30분이나 약속 시간을
제4화 마침표가 없는 방(2)그는 연기 속에서 잠시나마 안도감을 느꼈다.하지만 담배가 타들어갈수록, 그의 불안감은 다시 피어올랐다.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지자, 그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그는 다시 키보드 앞으로 다가갔다.'한 문장이라도 쓰자. 딱 한 문장만.'그는 눈을 질끈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타닥, 타닥, 타닥.[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그는 또다시 'Back Space' 키를 눌렀다.투투투툭.햇살? 너무 흔해. 오후? 그래서?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가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