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전 11시.
암막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서아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졌다."으음…."
서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마치 뇌수를 시커먼 진흙으로 꽉 채워놓은 것 같은 묵직한 두통이었다. 어젯밤 도진이 먹여준 수면제의 독한 기운이 아직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서아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최고급 구스다운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몸에서 흘러내렸다.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넓은 침실. 은은하게 풍기는 고가의 디퓨저 향기.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온했다.
어젯밤, 이안이 보낸 끔찍한 누드화 앞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던 일이 마치 전생의 악몽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덜컥.
그때, 침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도진이 들어왔그동안 그는 이 모니터 앞에 앉아 전지전능한 신처럼 서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그녀가 전화를 받으며 초조해하는 표정, 몰래 향수를 뿌리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눈빛, 그 모든 것을 훔쳐보며 문장을 길어 올렸다.그 관음의 시간이 도진에게는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쾌락이었다.하지만 이제 모니터 속에는 아무도 없다.자신이 조종할 꼭두각시도, 해부할 표본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끝… 난 건가."도진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이야기는 끝났다.결말을 지었고, 책은 출간되었으며,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까지 받았다.모든 목적을 달성했다.그런데 왜.도대체 왜 이렇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것처럼 무섭도록 서늘한 것일까.도진은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타닥, 타다닥.허공에 대고 무의미하게 타자를 쳐보았다.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내면에는 세상을 감동시킬 어떤 철학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다는 것을.강도진이라는 작가는 오직 타인의 고통과 치부를 뜯어먹고 사는 기생충이자, 관음증 환자에 불과했다.그의 영감은 철저히 백서아의 타락에 기대어 있었다.백서아라는 살아 숨 쉬는 제물이 있었기에, 괴물 강도진은 그 피를 빨아먹으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그 제물을 스스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벽하게 도살해 버린 것이다."아…."도진의 동공이 지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사냥감을 모두 죽여버린 괴물은, 결국 텅 빈 우리 안에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도진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웃음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배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일 정도로 광기 어린 폭소로 변했다."크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아, 미치겠군. 진짜 완벽해서 미쳐버리겠어!!"그는 부서진 거실 바닥을 뒹굴 듯이 웃어댔다.자신은 신이었다. 인간의 삶을 조작하고,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은 뒤, 그 파멸마저 예술로 포장해 세상의 찬사를 받아내는 전능한 신.도진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얼마나 그렇게 미친 듯이 웃었을까.목이 쉬어갈 무렵,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하아… 하아…."잔뜩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던 도진은, 다시 한번 기념패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이제 다음 작품을 구상해 볼까. 이번엔 어떤 사냥감을 골라서 밑바닥까지 발가벗겨 줄까…."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그런데.어딘가 이상했다."뭐지."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그 자리에 남은 것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깊고 무거운 '침묵'뿐이었다."……."도진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미세한 백색소음.창밖으로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 타이어 소리.그리고, 벽에 걸린 앤틱 시계의 초침 소리.똑. 딱. 똑. 딱.규칙적이고 건조한 그 소리들만이, 도진의 고막을 기분 나쁘게 긁어대고 있었다.평소라면 이 정적을 깨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했다.자신이 서재에서 글을 쓸 때,
스르륵-.육중한 세단이 미끄러지듯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작가님, 도착했습니다."운전기사 김 기사가 시동을 끄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강도진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창밖으로는 빗물에 젖은 거대한 저택의 철문이 차가운 위용을 뽐내며 서 있었다."수고하셨습니다, 김 기사님."도진이 나직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저기, 작가님."김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도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오늘 기념행사, 밖에서 차 대기하면서 유튜브 생중계로 봤습니다. 공식 연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작가님처럼 훌륭하신 분이 왜 그런 아픔을 겪으셔야 하는지, 참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사모님 일은…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다 작가님 편 아닙니까. 기운 내셔야죠. 위대한 작가님이신데."도진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위대한 작가.감동적인 공식 연설.이 늙고 순진한 운전기사조차 완벽하게 자신의 연극에 속아 넘어가, 가해자인 자신을 동정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강도진이 펜 하나로 빚어낸 거대한 권력이었다.하지만 도진은 짐짓 슬픔을 삼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위대하다니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십시오.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아닙니다! 편히 쉬십시오, 작가님!"김 기사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도진은 묵직한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가 담긴 벨벳 상자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철문이 열리고, 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완전
도진이 테이블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저 사람이 강도진이래.""얼굴 상한 것 좀 봐. 하긴, 아내가 그 지경을 만들어놨으니.""소설이 완전 실화라며? 어린 화가랑 뒹구는 걸 남편이 다 알고 썼다는데, 멘탈이 보통이 아니야.""쯧쯧, 백서아가 몹쓸 년이지. 강 작가 같은 천재를 두고 발정 난 개처럼 굴었으니."귓속말이 끊이지 않았지만, 도진이 눈을 맞추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동정과 존경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도진은 자리에 앉아 샴페인 잔을 가볍게 쥐었다.'다들 속으로는 내 불행을 안주 삼아 씹어대면서, 겉으로는 고상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 인간이란 참으로 역겨운 족속들이야. 물론,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역겹고 우월한 괴물이지만.'도진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며, 홀 전면의 거대한 단상을 바라보았다.오늘 밤, 저 제단 위에서 자신이 치를 완벽한 의식을 상상하며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졌다.기념행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출간 첫날 판매 기록과 추가 인쇄 계획, 해외 판권 문의 현황이 차례로 소개되었고, 마침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초판 10만 부 돌파 기념패 전달 순서가 다가왔다.단상에 오른 문학정신 대표가 마이크를 잡았다."출간 하루 만에 초판 10만 부 완판. 한국 출판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록입니다. 이 성취를 만든 작가와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장내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핀 조명이 대표를 비췄다.대표는 큐카드에서 시선을 떼고 객석 중앙을 바라보았다."문학정신 출판사, 강도진 작가님의 장편소설 《타인의 뮤즈》. 초판 10만 부 돌파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와아아아아아-!!폭발적인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수백 대의 카메라가 도
"넥타이는… 블랙이 낫겠어."드레스룸의 거대한 전신 거울 앞.도진은 수십 개의 최고급 실크 넥타이 중, 가장 광택이 없고 차분한 무광 블랙 타이를 골라잡았다.평소 공식 행사라면 화려한 샴페인 골드나 딥 버건디 컬러를 매치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그가 연기해야 할 배역은 '최고의 영예를 안았음에도, 아내의 스캔들로 인해 깊은 슬픔과 고뇌에 빠진 비운의 천재 작가'였다.사각, 사각.빳빳한 흰 셔츠 깃 사이로 블랙 타이를 조여 매는 도진의 손길은 정교하고 우아했다.거울 속에 비친 사내는 완벽했다.흠잡을 데 없이 빗어 넘긴 머리,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이목구비, 은은하게 풍기는 톰 포드의 우디 향수까지.그는 스스로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가, 이내 슬픔에 잠긴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 표정 연습을 반복했다."조금 더… 수척해 보여야 하나."도진은 혀를 차며 서랍에서 아내가 쓰던 창백한 톤의 파우더를 꺼냈다. 눈 밑에 얇게 펴 바르자,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묘한 다크서클이 만들어졌다.지잉, 지잉-!그때, 화장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진동했다.화면에 뜬 이름은 '문학정신 김 편집장'이었다."네, 편집장님. 강도진입니다."도진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추고, 짐짓 피곤한 듯한 기색을 섞어 전화를 받았다.[작, 작가님! 아유, 목소리가 많이 안 좋으시네요.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네… 뭐.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은 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수화기 너머로 김 편집장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그게…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는데요. 백서아 관장님 말입니다… 오늘 아침 이사
핸드폰을 소파 위로 던져버린 도진은 고개를 젖히고 폭소를 터뜨렸다.웃음소리가 텅 빈 거실 벽을 타고 찌렁찌렁하게 울렸다."굳건한 믿음? 하하하! 미치겠군, 정말."도진은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배를 부여잡았다.세상 사람들은 지금쯤 밤을 새워가며 백서아의 뒤를 캐고 있을 것이다.아니, 이미 갤러리 홈페이지는 마비가 되었을 것이고, 이안의 인스타그램에는 수만 개의 악플이 달리고 있겠지.내일 아침이 밝으면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이 집과 갤러리 앞으로 몰려들 것이다.그 모든 사냥개들을 풀어놓은 주인이 바로 자신인데, 사람들은 강도진을 향해 '아내를 굳건히 믿는 대인배 남편'이라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완벽해."도진은 글라스에 담긴 남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알코올의 뜨거운 열기가, 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가학적인 승리감과 섞여 온몸을 짜릿하게 태웠다.지잉-!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이번에는 발신자가 달랐다.[백서아 관장님 갤러리 - 최 부관장]도진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아, 강 작가님!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다급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최 부관장의 목소리는 아까 편집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급하고 처절했다.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사람 같았다."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저… 혹시 관장님 옆에 계십니까?! 제가 아까 통화를 하다가 중간에 끊어졌는데, 그 뒤로 전원이 꺼져 있어서요!]"아. 제 아내 말입니까?"도진은 부서진 거실 바닥의 액자 조각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여유롭게 대답했다."제 아내는 지금 집을 나갔습니다."[
제6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2)"지루해……."서아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완벽해서 지루했고, 안전해서 숨이 막혔다.그녀는 나른한 손길로 남은 포트폴리오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서류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가죽 바인더나 고급스러운 클리어 파일과는 전혀 다른, 구겨지고 낡은 크라프트지 서류 봉투였다.봉투 겉면에는 발신인의 이름조차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갈겨쓴 두 글자만이 전부였다.[ 이 안 ]"이안……? 성도 없이 이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