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피가 뚝뚝 떨어졌다.유리 조각에 깊게 찔린 맨발에서 붉은 선혈이 배어 나왔다. 차갑고 매끄러운 대리석 복도 위로 서아의 발자국이 점점이 찍혔다.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아니, 발바닥의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 따위는 지금 그녀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끔찍한 공포와 배신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오른손에는 크리스털 와인잔의 날카로운 파편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너무 꽉 쥔 탓에 손바닥마저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서아는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파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만이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느껴졌다.복도 끝.굳게 닫힌 거대한 마호가니 원목 문.강도진의 서재.그 문틈 아래로 새어 나오는 은은하고 따뜻한 노란빛이, 지금 서아에게는 지옥불의 아가리처럼 보였다."하아… 하아…."서아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땀과 눈물에 젖어 뺨에 들러붙어 있었고, 샴페인 골드 컬러의 실크 슬립은 붉은 와인과 선혈이 뒤엉켜 기괴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머릿속에서 강도진이 쓴 소설의 문장들이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희수는 류의 목에 팔을 감았다.][다리 더 벌려. 당신 남편이 이 꼴을 보면 얼마나 즐거워할까?][희수는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었다.]서재로 향하기 직전까지 서아의 머릿속에는 책의 문장들이 순서 없이 겹쳐졌다. 침실에 펼쳐 둔 양장본을 다시 들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대목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나치게 선명했다.첫 번째는 옷이었다. 대학 동기 모임을 핑계로 이안의 작업실에 갔던 날 입은 블라우스와 스카프의 색, 자개 단추가 뜯어진 위치까지 소설 속에 남아 있었
적어도 서아의 눈에 드러난 기계 장치는 없었다.그렇다면 강도진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장치를 숨기고, 그 기록 너머의 감정까지 알아낸 것인가?불현듯, 서아의 시선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설책의 끄트머리에 꽂혔다.책은 후반부가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서아는 홀린 듯이 기어가 그 책을 다시 뒤집었다.이 책의 결말.자신과 이안의 끝. 도진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 놓았을까.이안이 화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보았을 때, 도진은 자신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었을까.서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문장을 읽었다.[류의 작업실이 불탔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거실 바닥에 주저앉은 희수는 처음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청년의 비극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작업실에 남은 그림과 저장 장치가 타버렸다. 남편에게 도착한 대표작은 미치광이의 망상으로 받아들여졌고, 남아 있는 자료도 원본을 잃었다.'남은 증거마저 조작과 집착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희수의 입술 끝이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그녀는 변기통을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 그것은 안도감이라는 이름의 구역질이었다. 결정적인 진실의 원본을 불태워버리고 살아남았다는, 짐승 같은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가장 역겨운 안도감.희수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 완벽한 위선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서아의 호흡이 완전히 멎었다.'변기통을 부여잡고 속을 게워냈다.''거울 속 자신을 보며 미소 지었다.'이 문장을 읽는 순간, 서아의 이성은 완벽하게 붕괴되었다.이안의 화재 소식을 뉴스로 접했던 건, 불과 6개월 전이었다.하지만 문제는 출간 공정이 아니었다. 기사에는 서아
[그래서 희수는 류를 선택했다.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이자 군림이었다. 남편 앞에서는 늘 굽신거려야 했던 희수가, 그 지독한 테레빈유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작업실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여왕이었다. 류가 희수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등에 입을 맞출 때, 희수는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아찔한 권력의 쾌감을 느꼈다.'나는 이 천재적인 젊음을 지배하고 있다. 내 남편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세계에서, 나는 신이다.']"아악…!"서아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정확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자신이 이안과 몸을 섞으며 느꼈던 쾌락의 본질은, 육체적인 만족이 아니었다. 강도진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살던 자신이,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쥐락펴락한다는 그 가학적인 우월감.자신조차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던 그 은밀하고도 천박한 심리를, 도진은 메스로 생살을 해부하듯 적나라하게 파헤쳐 놓았다."도, 도대체… 어떻게…."서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책장 위를 적셨다.단순히 사람을 붙여 미행을 하거나 카메라를 달아놓은 수준이 아니었다. 강도진은 마치 서아의 뇌 속에 칩이라도 심어놓은 것처럼, 그녀가 찰나의 순간에 느꼈던 감정의 파동까지 모조리 활자로 엮어내고 있었다.서아는 책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중반부를 향해 책장을 미친 듯이 넘겼다.[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새벽. 희수는 남편이 잠든 침실로 숨죽여 들어갔다. 고르게 숨을 쉬고 있는 남편의 등짝을 바라보며, 희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이 멍청한 인간. 밖에서는 문단의 제왕이라며 떠받들어지지만, 자기 마누라가 방금 전까지 어린놈의 밑에서 헐떡이다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지.
"내 소설, 마음에 안 들어?"역광을 받으며 침실 문턱에 선 강도진의 실루엣은 거대한 절벽 같았다.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낮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다정한 음성이 서아의 고막을 때리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어… 어어……."서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짐승처럼 헐떡였다.입술이 바짝 말라붙어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하얀색 최고급 페르시안 카펫 위로 섬뜩하게 번져나간 붉은 와인 자국. 산산조각이 난 크리스털 와인잔. 그리고 그 옆에 흉측하게 내동댕이쳐진 가죽 양장본 소설책.마지막으로, 온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아내 백서아의 창백한 얼굴.모든 정황이 그녀의 공포를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쓴 소설을 읽고 그녀가 완벽한 패닉에 빠졌다는 사실을.하지만 도진은 그 모든 것을 보고도,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서아야. 왜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 위험하게."도진이 천천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저벅, 저벅.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서아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오, 오지 마…!""발밑 조심해. 유리 파편 있잖아."도진은 서아의 비명 같은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구두를 신은 채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무참히 짓밟으며 다가왔다.빠지직, 뽀각.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마치 서아 자신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처럼 섬뜩하게 울렸다.도진은 서아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진 책을 주워 들었다."소중한 책이라고 했잖아. 이렇게 던지면 어떡해."그는 책 표지에 묻은 먼지를 긴 손가락으로 툭툭
[류의 집착은 극에 달했다. 그는 희수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담은 거대한 나체화 한 점을 남편 앞으로 보냈다. 희수의 위선적인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류의 최후의 통첩이었다.그림을 확인한 남편 앞에서, 희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부짖었다."여보, 살려줘요! 저 미친 스토커 새끼가 날 협박하고 있어요! 나는 피해자예요!"]"아아… 아아아악!!"서아는 결국 책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그녀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화재가 나기 직전의 밤.이안이 보낸 누드화 앞에서 자신이 도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놓았던 변명과, 소설 속 희수의 변명은 표현만 달랐을 뿐 핵심이 정확히 같았다.'스토커가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자신은 일방적인 피해자다.'도진은 속은 것이 아니었다.그는 그날 밤, 자신의 발밑에서 거짓 눈물을 흘리며 뻔뻔하게 자신을 변호하던 아내의 꼴을 보며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자신이 쓴 소설의 대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보며 얼마나 희열을 느꼈을까.[희수는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었다. 자신의 더러운 육욕이 청년의 인생을 짓밟았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우아한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그 청년을 스토커라는 이름의 제단 위에 바쳤다. 그것은 희수가 완성한 가장 완벽하고도 추악한 위선이었다.]바닥에 엎어진 책의 펼쳐진 페이지에서, 이 문장이 서아의 눈을 잔인하게 찔러왔다."도진 씨가… 다 알고 있었어…."서아의 턱이 덜덜 떨렸다.치아끼리 부딪히는 딱딱 소리가 침실의 적막을 채웠다.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내가 이안과 눈이 맞은 첫날부터. 작업실과 갤러리의 사각지대를 오가
서아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쫙 돋아났다."그 가을밤…?"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그날은 서아가 이안의 끈질긴 구애에 넘어가, 남편에게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고 거짓말하고 오후 일곱 시에 해방촌 옥탑 작업실을 찾아가 이안과 처음으로 완전한 육체관계를 맺었던 바로 그날 밤이었다.'대학 동기들이 오랜만에 모이기로 했다.'그것은 서아가 도진에게 둘러댔던 변명의 핵심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옮겨놓은 문장이었다."우, 우연일 거야… 그냥 날짜가 우연히…."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미친 듯이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해방촌 옥탑 작업실의 녹슨 철문이 닫히자, 류가 굶주린 들개처럼 희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희수를 캔버스 더미 쪽으로 밀어붙이고 짐승처럼 입을 맞췄다."아, 읍… 류, 잠깐만…!"희수가 반항할 새도 없이, 류의 거친 손길이 그녀의 비싼 실크 블라우스를 움켜쥐었다. 투둑, 투두둑. 자개 단추들이 뜯겨 나가 바닥과 캔버스 사이로 사방에 흩어졌다.]쨍그랑-!!서아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잔이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며 박살이 났다.붉은 와인이 하얀색 카펫 위로 섬뜩하게 번져나갔다.하지만 서아는 깨진 유리 조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갈비뼈를 부숴버릴 듯 뛰기 시작했다."이게… 이게 뭐야…."비싼 실크 블라우스.사방으로 뜯겨 나간 자개 단추들.그날 밤 이안이 거칠게 자신의 옷을 벗기며 캔버스 사이로 흩뜨린 바로 그 단추들이었다. 그 장면은 자신과 이안
제5화 완벽한 세계에 떨어진 불씨(1)오전 9시 30분.갤러리 ‘아르테’의 아침은 서아의 구두굽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또각, 또각.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10센티미터 스틸레토 힐의 마찰음. 그 소리는 갤러리 내부의 모든 스태프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신호였다.서아가 메인 전시홀에 들어서자, 작품을 닦고 조명을 맞추던 직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수석님, 안녕하십니까.""좋은 아침입니다."서아는 눈으로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이 아니라, 갤러리 벽면에 걸린 억대의 작품들
제3화 마침표가 없는 방(1)계단을 오르는 도진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규칙적으로 부딪히며 서재 앞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차갑게 식은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서재는 그의 성소이자, 거대한 감옥이었다.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고전부터 현대 소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장편 소설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넓고 묵직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기분 좋은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도진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부잉-, 하는 기계음과
"저는 그때의 거친 문장들도 참 좋아했는걸요.""지금의 내 문장이 더 완성도가 높다는 게 평단의 일관된 의견입니다. 서아 씨도 알다시피.""물론이죠. 지금의 당신은 완벽해요. 의심할 여지 없이."서아는 부드럽게 맞받아쳤다. 대화의 흐름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곡선을 그리려 하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알아서 수위를 조절하고 안전한 평지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결혼 생활을 5년 동안 파탄 없이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서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 식사 시작 후 정확히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오늘
제1화 완벽한 식탁의 조건(1)오전 6시 50분.정확히 조율된 스위스제 벽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거실의 공기를 갈랐다.서아는 눈을 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아침 햇살이 정돈된 침대 위에 일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시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도진은 언제나 자신보다 20분 먼저 일어났고, 그가 머물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눕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서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크 가운의 끈을 단정하게 묶고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의 얼굴은 흐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