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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송년 행사 기획안

Autor: Jino
last update Data de publicação: 2026-10-22 12:05:58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

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

“일정 짜고 있습니다.”

“누가요?”

“내가요.”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

“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

“그날은 일 안 합니다.”

“일정 검토도요?”

“안 합니다.”

‘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

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

“팀장입니다. 지금도.”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

뒤에서 시환이 말했다.

“천천히 가십시오.”

“알아요.”

‘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

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

«▲»

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

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

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

“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

“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

“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

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

“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

“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

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

“아직 넣지도 않았어요.”

“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

『진행 내용』

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

‘확인. 빈칸도 조심하자.’

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

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토 두 알이 남아 있었다. 시환이 책상에서 일어나 가까이 갔다.

“익었습니까?”

“잘 익었어요.”

“그럼 따십시오.”

채 대표는 꼭지 가까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두 알을 그릇에 넣더니 빈 화분을 내려다봤다.

“얘는 의장님이 키웠는데 내가 가져가네.”

“같이 쓰십시오.”

“잼 만들 거예요. 마지막 거라 그냥 먹기 아까워서.”

은채가 의자를 돌렸다.

“잼으로 만들어도 먹는 건 똑같잖아요.”

“병에 담아 놓으면 조금 더 오래 보잖아.”

“그러다 아까워서 못 드시는 거 아니에요?”

채 대표가 잠깐 생각했다.

“그럼 다 나눠 줘야겠다.”

결정이 빠른 쪽은 늘 제품과 음식이었다.

시환은 비어 있는 자기 화분을 창가 안쪽으로 옮겼다. 바닥에 떨어진 잎도 주웠다. 채 대표는 그릇을 들고 탕비실로 올라갔다.

나는 기획안에 다시 눈을 내렸다. 직원 의견을 받는 시간, 간단한 식사, 올해 만든 제품을 함께 보는 자리.

그 사이에 쓸 수 없는 항목이 하나 있었다.

공개할 일.

‘아니. 행사 내용은 아니지.’

나는 빈칸을 남겨 두고 서류를 덮었다.

«▲»

탕비실에서 채 대표가 씻은 토마토를 냄비에 넣는 동안, 나는 회의 참석 명단을 확인했다.

창고 직원들도 빠짐없이 올라올 수 있게 출고를 잠시 멈출 시간을 맞췄다. 포장 중인 상자는 먼저 끝내고, 급한 문의는 회의가 끝난 뒤 답하기로 했다.

“다 모여요?”

채 대표가 물었다.

“네. 행사 날짜는 다 같이 확인해야 하니까요.”

“잘됐다. 잼도 오늘 다 주면 되겠네.”

작은 유리병들이 탕비실 작업대에 엎어져 있었다. 물기가 빠지는 동안 채 대표는 냄비를 저었다.

나는 병 사이를 조금 벌려 놓았다.

“덜 식었을 때 뚜껑 닫아도 돼요?”

“이따 내가 할게. 지유 씨는 회의 준비해요.”

“병 붙일 이름표는 제가 출력할게요.”

“그냥 토마토 잼이라고만 써요. 누구 건지 다 아니까.”

누구 건지.

나는 손에 든 참석 명단을 한 번 접었다가 폈다.

종이달 사람들은 시환이 자기 화분에 물을 주는 걸 봤다. 내 야근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도 봤고, 내가 퇴근길에 창가 쪽을 먼저 보는 것도 봤다.

그런데 나는 아직 한 번도 직접 말하지 않았다.

채 대표가 불을 줄였다.

“지유 씨, 회의에서 또 말할 거 있어요?”

“왜요?”

“명단을 계속 보고 있어서.”

나는 접힌 곳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있어요. 날짜 정하고 나서 말씀드릴게요.”

“어려운 거예요?”

“제가 말하면 되는 거예요.”

채 대표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냄비 뚜껑을 옆으로 치워 내가 내려갈 자리를 비워 줬다.

«▲»

시환은 창가 책상에서 온빛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 자리 사이를 지나 책상 옆에 섰다. 시환이 서류를 뒤집어 놓고 나를 봤다.

“확인할 것 있습니까?”

“네. 잠깐요.”

뒷문 계단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사무실의 인쇄기 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나는 참석 명단을 가슴 앞에 들고 말했다.

“종이달 사람들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시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든 종이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사귀는 거요.”

“알겠습니다.”

“오늘 회의 끝나고요.”

“같이 서 있으면 됩니까?”

“네. 대신 제가 먼저 말할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의는 받았다. 그런데 내 입은 더 움직였다.

“성과 나기 전에 말하면 혹시 다른 얘기가 붙을까 봐 기다렸어요. 이제 직거래도 자리 잡았고, 다음 주문도 들어오고 있으니까.”

시환이 계단 난간에서 손을 뗐다.

“지유 씨가 정할 일입니다.”

“의장님 생각도 물어보려고 나온 건데요.”

“나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종이를 내렸다.

“언제부터요?”

“사귀기로 했을 때부터입니다.”

‘아니. 그렇겠지. 저 사람이 조용히 숨기는 쪽은 아니지.’

“그런데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지유 씨 일터입니다. 먼저 정할 사람은 지유 씨입니다.”

명단 아래쪽이 바람에 들렸다. 나는 두 손으로 종이를 잡았다.

시환은 내 손을 보다가 다시 얼굴을 봤다.

“오늘 아니어도 됩니다.”

“오늘 할 거예요.”

“그럼 옆에 있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려다가 다시 돌아봤다.

“이건 회의 안건은 아니에요.”

“압니다.”

“결재도 안 받아요.”

“업무 아닙니다.”

‘확인. 이 말은 여전히 잘한다.’

사무실로 들어갈 때는 종이를 접지 않았다.

«▲»

회의실에는 평소보다 의자가 많았다.

나는 벽 쪽에 놓인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창고에서 올라온 직원이 자기 작업복을 내려다보자 채 대표가 옆자리를 짚었다.

“그대로 앉아요. 나도 앞치마 했잖아.”

은채는 맨 앞에 앉았다가 참석 명단을 보고 뒤로 자리를 옮겼다.

“뒤에서도 잘 들려요.”

“앞자리가 싫은 거예요?”

“장기 자랑 시킬까 봐요.”

“안 한다니까요.”

규민이 기획안을 돌렸다. 직원들은 날짜 후보를 확인하고, 납품 일정과 개인 일정을 차례로 말했다.

나는 겹치는 날짜에 표시했다. 빠지는 사람이 생기면 시간대를 바꿔 보고, 창고 출고가 몰리는 날은 후보에서 뺐다.

채 대표는 식사 메뉴를 묻다가 행사 비용부터 확인하라는 내 말을 듣고 계산기를 꺼냈다.

“맞다. 순서가 있었지.”

“지난번에 정리한 비용표 기준으로 보시면 돼요.”

“이제 알아요.”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기획안 빈칸이 꽤 채워졌다. 규민이 정리한 내용을 읽었고, 나는 참석이 어려운 직원에게 의견을 따로 받겠다고 덧붙였다.

종이가 걷히기 시작했다.

나는 내 앞의 기획안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직원들이 손을 멈췄다. 시환은 벽 쪽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너무 가깝지도, 따로 떨어져 있지도 않은 자리였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려던 손을 책상 위에 놓았다.

‘아니. 시간 확인할 일 아니다.’

“의장님과 저, 사귀고 있습니다.”

뒷자리에서 누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옆에서도 대답이 나왔다.

“네. 알았어요.”

채 대표는 걷힌 기획안을 가지런히 맞췄다. 규민은 입가를 누르며 물을 마셨다.

나는 직원들을 한 번 쭉 봤다.

“잠깐만요.”

은채가 손을 들었다.

“질문 받아요?”

“받아요.”

“오늘부터 사귀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그렇죠.”

은채가 손을 내렸다. 질문이 끝났다.

나는 시환을 봤다가 다시 직원들을 봤다.

“다 알고 계셨어요?”

채 대표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지유 씨, 의장님이 여기 와서 토마토만 돌본 건 아니잖아.”

“일도 하셨어요.”

“온빛 일을 여기서 하셨지.”

규민이 결국 웃었다.

“팀장님 퇴근 준비하면 의장님도 서류를 넣으시던데요.”

창고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는 날에는 두 분 다 늦게 내려오시고요. 같이 가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 출고만 확인한 게 아니었구나. 나도 확인당했네.’

은채는 제일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은채 씨. 짧게요.”

“팝업 날 토마토 익는 소리 들었어요.”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토마토는 소리가 안 나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규민이 고개를 숙였고, 채 대표는 아예 웃었다.

내 옆에서 시환이 말했다.

“내가 말을 했습니다.”

은채가 눈을 크게 떴다.

“의장님, 그건 제가 모르는 내용인데요.”

‘아니. 보고하지 마세요. 지금은 보고하지 마세요.’

나는 시환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거기까지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빨랐다. 얼굴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나만 귀가 뜨거웠다.

채 대표가 손뼉을 한 번 쳤다.

“그러면 됐네. 우리 알고 있었고, 지유 씨가 직접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시환도 직원들을 봤다.

“내 업무와 원 팀장 업무는 지금처럼 구분합니다. 종이달 업무 보고와 결재는 채 대표에게 하시면 됩니다.”

“그건 원래 그렇게 했잖아요.”

채 대표의 말에 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입니다.”

나는 기획안을 챙겼다. 누가 먼저 축하한다고 말했고, 여기저기서 같은 말이 이어졌다.

은채가 내 팔꿈치를 살짝 잡았다.

“팀장님, 표정 좀 풀어요. 거래 조건 설명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요?”

“네. 반품 안 된다고 하실까 봐.”

“그건 제품 얘기였어요.”

시환이 옆에서 짧게 말했다.

“압니다.”

‘아니. 왜 거기서 대답을 해.’

회의실을 나가면서도 직원들은 행사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창고 직원은 멈춰 둔 포장부터 끝내겠다며 내려갔다.

내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불러 주문서를 물었고, 나는 같은 자리에서 답했다.

«▲»

잼이 식은 뒤에는 병을 나누는 일이 남았다.

채 대표가 작은 병을 하나씩 내밀었다. 은채는 뚜껑이 잘 닫혔는지 확인했고, 규민은 창고에 내려갈 몫을 따로 담았다.

나는 출력한 이름표를 병 옆면에 붙였다.

『종이달 토마토 잼』

채 대표는 자기 몫을 마지막에 골랐다. 바닥이 조금 덜 찬 병이었다.

“대표님, 이건 양이 적어요.”

“냄비에 남은 거 내가 먹었어.”

은채가 손을 멈췄다.

“얼마나 드셨는데요?”

“맛을 봐야 하니까.”

“몇 번이나요?”

채 대표는 병 뚜껑을 닫았다.

“잘됐어. 우리 거 맛있어.”

‘확인. 답변 대신 품질 자신감.’

시환 몫의 병을 건네자 채 대표가 손가락으로 병 옆을 두드렸다.

“의장님 토마토 두 알도 여기 들어갔어요.”

시환이 병을 받았다.

“두 알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다 섞었죠. 누구 병에 들어갔는지는 몰라요.”

은채가 자기 병을 빛에 비춰 봤다.

“그럼 제 것도 의장님 지분이 있는 거네요.”

나는 이름표를 붙이던 손을 멈췄다.

“오늘은 그 말 쓰지 말아요.”

“네. 그냥 잼.”

은채는 병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들었다.

시환이 내 앞에 남은 이름표를 집어 들었다. 나는 병을 돌려 빈 면을 보였다. 시환이 붙인 이름표는 조금 기울었다.

손끝으로 모서리를 눌러 고쳐 줬다.

“이건 검수해야겠네요.”

“부탁합니다.”

옆에서 은채가 조용히 물러났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요?”

“제 자리요. 아직 근무시간이니까요.”

병을 든 은채가 빠르게 내려갔다. 규민도 창고 몫을 들고 뒤따랐다.

채 대표는 냄비를 씻으며 웃기만 했다.

«▲»

퇴근할 때까지 축하한다는 말을 몇 번 더 들었다.

답을 할 때마다 처음보다 목소리가 편해졌다. 마지막 직원이 나간 뒤에는 책상 위에 남은 기획안을 정리했다.

시환이 빈 의자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돌아왔다.

“힘들었습니까?”

“말하기 전까지만요.”

나는 행사 날짜를 정리한 서류를 결재판에 끼웠다. 채 대표 책상에 올려 두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시환이 내 잼 병을 가방 옆으로 밀어 줬다.

“잊지 마십시오.”

“의장님 것도 챙기세요.”

“챙겼습니다.”

나는 가방을 열다가 손을 멈췄다. 사무실에는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시환 씨.”

시환의 손이 멈췄다.

나는 가방 끈을 내려놓았다.

“이제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를게요.”

“다시 불러도 됩니다.”

“지금요?”

“네.”

‘아니. 확인 절차가 있네.’

나는 웃다가 숨을 골랐다.

“시환 씨.”

시환이 내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걷은 셔츠 소매 끝이 조금 접혀 있었다. 나는 접힌 부분을 손끝으로 펴 줬다.

시환은 팔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자꾸 부르라고 하세요.”

“듣고 싶습니다.”

손을 놓자 시환이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편 채 기다리기에, 내가 먼저 손가락을 굽혔다.

시환이 조금 몸을 숙였다. 나는 얼굴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시환은 잡은 손을 그대로 두고 나를 봤다. 나는 셔츠 소매에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오늘은 저도 말했어요.”

“들었습니다.”

“직원들한테도요.”

“네.”

시환의 손가락이 내 손을 한 번 가볍게 감쌌다.

“고맙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을 조금 더 꽉 잡았다.

창가에는 빈 토마토 화분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잼 병을 놓았던 둥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시환이 내 가방을 가리켰다.

“이제 퇴근합니까?”

“네. 오늘 결재할 건 다 올렸어요.”

“그럼 갑시다.”

나는 잼 병을 가방 안쪽에 넣었다. 시환은 내가 지퍼를 닫은 뒤에 손을 놓았다.

«▲»

다음 날 아침, 휴대폰로 어젯밤 채 대표가 보낸 잼 보관 안내를 확인하다가 손을 멈췄다.

그 위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있었다.

『우시환(종이달 토마토 담당)』

나는 화면을 가까이 가져왔다.

‘아니. 의장은 어디 가고. 토마토는 다 땄는데.’

이름 옆의 사진은 그대로였다. 늘 보던 얼굴 아래에 새 업무가 붙어 있었다.

나는 웃다가 어젯밤 마지막으로 받은 알림을 다시 열었다. 그때는 병을 냉장고에 넣느라 답을 못 했다.

바뀐 이름 아래, 마지막으로 남은 예전 이름의 메시지가 보였다.

『우시환 대표이사: 공개했으니 이 메신저 이름은 오늘로 끝입니다.』

(3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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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 퇴사 사유: 대표님   37화. 재인쇄 발주서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 퇴사 사유: 대표님   36화. 송년 행사 기획안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 퇴사 사유: 대표님   35화. 완판 보고서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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