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
“네.”
“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
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
“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
‘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
“그럴 예정입니다.”
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
“이건 꽂아 둡니까?”
“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
“알겠습니다.”
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
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
다음 주 수요일.
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
«▲»
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
“팀장님. 잠깐만요.”
“뭐 묻었어요?”
“실이요.”
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
“됐어요.”
“고마워요.”
“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
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
‘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
“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
“출고표는 저쪽인데요.”
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
“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
“상자 치우려고요?”
“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
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
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
“이건 안 지워지네.”
“그대로 계셔도 돼요.”
“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
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
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이 있었다.
“도착하셨습니다.”
나는 출고표를 내려놓았다.
엘리베이터도, 안내 방송도 없는 건물이었다. 아래층 문 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찬영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이쪽입니다, 회장님.”
채 대표가 나를 보며 작게 물었다.
“내가 먼저 내려가죠?”
“같이 가요.”
계단을 내려가자 우광호 회장이 1층 입구에 서 있었다.
온빛타워에서 봤을 때와 같은 짙은 외투였다. 시환보다 어깨가 조금 더 넓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나는 한 발 앞으로 나갔다.
“어서 오세요, 회장님.”
회장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재킷으로,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잘 지냈소?”
“네. 종이달 브랜드팀장 원지유입니다.”
입에 익은 비서라는 말 대신 팀장이라고 말했다.
회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 대표가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채보경입니다. 손에 잉크가 조금 남아서요.”
회장은 그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다.
“회사 잘 보고 가겠소.”
채 대표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
창고 안에서는 포장용 테이프를 끊는 소리가 났다.
규민이 작업대에서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회장은 답례하고 출고를 기다리는 상자 앞에 섰다.
나는 상자에 붙은 배송지를 가리켰다.
“직거래처 재주문 물량입니다. 매장별로 나눠 보내고 있어요.”
회장은 옆 상자를 봤다.
“이쪽은?”
“글벗문구 납품분입니다. 주문서 기준으로 분리했습니다.”
상자마다 수량과 배송지가 붙어 있었다. 회장은 허리를 조금 숙여 이름표를 읽었다. 찬영이 가까이 다가갔다가 회장의 손짓을 보고 멈췄다.
“반품도 여기서 받소?”
“네. 파손이나 오배송은 저쪽에서 먼저 확인합니다. 정상 재고하고 섞이지 않게 두고요.”
회장이 내가 가리킨 자리를 봤다.
말이 없었다.
‘아니. 침묵도 질문 같네. 추가 설명 금지. 물으면 답하자.’
채 대표가 내 옆에서 손수건을 접었다 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때 규민이 작업대 끝에 걸친 상자를 안쪽으로 당겼다. 테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가장 가까이 있던 회장이 먼저 주웠다.
규민이 급히 손을 내밀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회장은 테이프를 건네고 작업대에서 한 발 떨어졌다.
“하던 일 하시오. 우리가 길을 막았구먼.”
나는 채 대표와 함께 옆으로 비켰다. 찬영도 통로 끝으로 물러났다.
규민은 송장과 상자 이름을 다시 맞춘 뒤 테이프를 붙였다. 회장은 그 손을 끝까지 보고 나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환이 내 옆을 지나며 작게 말했다.
“설명 잘했습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여기까지도요.”
‘확인. 중간 평가 아니다. 그냥 들으면 된다.’
나는 출고표를 규민에게 돌려주고 계단으로 향했다.
«▲»
2층에 올라온 회장은 사무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인사했다. 회장이 손을 들어 답하고 안쪽을 둘러봤다.
은채 책상 옆에는 엄마의 주문 메모를 넣은 액자가 놓여 있었다. 주소와 연락처를 가린 자리에는 종이달 이름이 작게 들어갔다.
회장은 액자 앞에 서서 글을 읽었다.
『우리 딸 회사 거』
은채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온빛몰 첫 주문 고객님 메모예요.”
“직원 어머니시오?”
“네. 팀장님 어머님이요. 허락받고 넣었습니다.”
회장이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이 열린 날 기다렸다가 사셨대요.”
“좋은 자리 두셨구먼.”
은채가 액자를 아주 조금 돌렸다. 어느 자리에서든 글이 잘 보이게 놓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회장은 채 대표 책상 옆으로 걸어갔다.
큰 토마토 화분에는 열매가 없었다. 채 대표가 마른 잎을 정리한 뒤라 줄기와 지지대가 잘 보였다.
“이것도 키우시오?”
“네. 직원들이랑 나눠 먹고, 마지막 건 잼으로 만들었어요.”
“저쪽도 같은 건가?”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켰다.
시환이 대답했다.
“곁가지입니다. 여기서 받은 겁니다.”
회장은 큰 화분과 작은 화분을 차례로 봤다.
“저건 네가 돌보나?”
“네.”
“잘 자랐군.”
채 대표가 얼른 덧붙였다.
“토마토도 났어요. 작은 데서도.”
시환이 작은 화분 아래 받침을 바로 맞췄다. 회장은 더 묻지 않고 사무실 안쪽으로 갔다.
나는 3층 회의실을 안내하려고 계단 쪽을 봤다. 회장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도 되겠소?”
“네.”
채 대표가 의자에 놓인 견본을 치웠다. 나는 내 책상 맞은편 의자를 당겼다.
온빛에서는 회장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앉는 순서도, 서류를 놓는 방향도 알았다.
여기서는 내 출고표를 옆으로 밀고 자리를 만들었다.
회장은 외투 단추를 풀고 앉았다.
“발표는 필요 없다고 했지?”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서류가 있소.”
나는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다봤다.
“이건 제가 보던 출고표예요.”
회장의 시선이 종이에서 내 얼굴로 올라왔다.
“그럼 계속 보시오. 내가 잠깐 말을 보태겠소.”
나는 출고표를 책상 한쪽에 놓았다.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채 대표는 찬영에게 견본을 보여 주러 자기 자리로 갔다. 은채도 출력물을 챙겨 자리를 비웠다.
시환은 내 책상 옆에 서 있었다.
회장이 시환을 한 번 보고 내게 말했다.
“우리 집사람 만났다면서.”
“네. 차 끓이는 법도 배웠어요.”
“손이 빠르지.”
“제가 따라가려니까 자꾸 놓쳤어요.”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가 조금 움직였지만 웃지는 않았다.
나는 책상 아래에서 재킷 자락을 폈다.
회장은 그런 내 손을 잠깐 보고 시선을 올렸다.
“우리 집사람이 30년 들은 말을 아가씨가 듣지 않게 하는 게 저 녀석 일이오.”
옆에 선 시환을 가리켰다.
“못 하면 나한테 말하시오.”
나는 손을 멈췄다.
남란희가 차를 끓이던 손이 떠올랐다. 비서 출신 사모님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젖은 그릇부터 정리하던 손이었다.
시환이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회장을 보고 말했다.
“제가 한 일은 제 이름으로 남기고 싶어요.”
“그렇게 해야지.”
“혹시 다른 말이 나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회장은 내 책상 옆에 꽂힌 보고서 파일을 봤다.
“아가씨가 자기 일을 못 할 거라고 한 말은 아니오.”
“네.”
“저 녀석이 할 몫을 아가씨한테 넘기지 말라는 말이지.”
시환이 내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
“넘기지 않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라서 나는 시환을 봤다.
짧은 말 뒤에 덧붙는 설명은 없었다. 회장도 더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놓인 출고표 모서리를 맞췄다. 손끝에 걸려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회장이 그 종이를 보다가 말했다.
“버릇도 하나 물었다면서.”
손이 다시 멈췄다.
‘아니. 면담 순서에 있었구나. 내 질문도.’
시환이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놓치지 않고 말했다.
“서류 모서리를 두 번 두드리세요. 예전부터요.”
“그렇지.”
“어디서 생긴 버릇인지 물었어요.”
회장은 시환을 봤다.
“저 녀석, 서류 모서리 두 번 치는 거. 아가씨가 5년 동안 대표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고 하더군.”
나는 종이에서 손을 뗐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런다고.”
사무실 뒤쪽에서 출력기가 돌아갔다.
종이가 나오는 소리까지 또렷했다. 나는 회장 앞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대표실 문 앞에서는 늘 두 번 두드렸다.
서류를 들고 한 번.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일정을 확인했다. 문밖에서 들리는 대답은 대부분 짧았다.
들어오세요.
네.
놓고 가세요.
그 뒤에 저런 말이 있었던 것은 몰랐다.
나는 시환을 봤다.
시환은 창가로 가지 않았다. 내 책상 옆에 그대로 서서 셔츠 소매 끝을 만지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네.”
“언제 회장님께 말씀하셨어요?”
“왜 자꾸 두드리느냐고 물으셨을 때입니다.”
회장이 덧붙였다.
“내 앞에서도 그러기에 서류가 마음에 안 드느냐고 했지.”
시환이 손을 내렸다.
“그것과는 상관없었습니다.”
나는 내 출고표를 내려다봤다.
두 번.
머릿속에서 소리만 먼저 떠올랐다. 결재가 밀린 날에도, 내가 퇴근 인사를 하고 문을 닫을 때도 책상 쪽에서 들리던 소리였다.
‘아니. 나는 재촉인 줄 알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회장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기다렸다.
나는 종이 모서리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두드리려다가 그냥 손바닥을 펴서 눌렀다.
시환의 손이 책상 가까이 왔다.
내가 그 손 위에 손끝을 얹자 시환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떼기 전까지 그대로 두었다.
회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물건 좀 봅시다.”
나는 급히 손을 거두고 일어났다.
‘확인. 물건. 다이어리. 말할 수 있는 분야.’
그런데 제품명을 말하려던 입에서 먼저 다른 말이 나왔다.
“지금도 두 번 두드려요.”
시환이 나를 봤다.
“압니다.”
«▲»
은채는 견본을 가져오면서 내 얼굴을 한 번 봤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 펼친 다이어리를 조금 더 가까이 밀어 줬다. 내가 보여 드릴 페이지를 바로 찾을 수 있게 했다.
나는 손끝으로 월간표를 짚었다.
“이쪽은 한 달 일정이고, 뒤에는 주간표가 이어집니다.”
회장은 안경을 꺼내 쓰고 속지를 넘겼다. 종이를 몇 장 넘긴 다음 표지를 닫았다.
“20권 주시오.”
채 대표가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나는 먼저 수량을 확인했다.
“20권 모두 이 제품으로 드릴까요?”
“그렇게 합시다. 온빛 비서실 직원들 줄 거요.”
찬영이 서류 가방을 열다가 멈췄다.
“제가 수령하겠습니다.”
“차에 실어 줘요.”
“네.”
은채가 계산기를 가져왔다. 나는 규민에게 포장된 제품을 부탁했다.
한 권에 2만 8천 원.
20권, 56만 원.
은채가 합계를 확인하고 회장에게 말했다.
“56만 원입니다.”
회장은 외투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현금을 세어 책상 위에 놓았다.
은채는 돈을 받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 영수증을 출력하면서 말했다.
“회장님, 직원 할인은 없습니다.”
내 손이 견본 위에서 멈췄다.
‘아니. 직원은 아닌데. 그렇다고 가족 할인도 아닌데.’
은채가 말을 덧붙였다.
“의장님도 여기서 개인적으로 사실 때 같은 가격이에요.”
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회장이 은채를 봤다.
그날 처음으로 웃었다.
“잘 알겠소. 영수증도 주시오.”
은채가 두 손으로 영수증을 건넸다.
“수량 확인하실 수 있게 박스에도 붙여 드릴게요.”
“고맙소.”
채 대표는 떨어뜨린 손수건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규민이 가져온 상자를 찬영이 받았다. 은채는 제품명과 수량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마지막으로 영수증을 확인했다.
나는 판매 내역을 기록했다.
회장님 방문.
개인 구매 20권.
적다가 잠깐 멈췄다. 개인 구매 앞에 붙일 말은 없었다. 할인도, 별도 조건도 없었다.
그대로 저장했다.
«▲»
차가 떠날 때까지 우리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회장은 창문을 조금 내리고 채 대표에게 인사했다.
“잘 보고 갑니다.”
“다음에도 편하게 오세요.”
회장은 내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차가 솔숲길 끝으로 빠져나간 뒤 채 대표가 먼저 계단으로 들어갔다.
“어떡해. 나 아까 손수건 떨어뜨린 거 다 봤죠?”
은채가 따라가며 대답했다.
“돈 세느라 못 봤어요.”
규민은 출고 차량을 확인하러 창고로 돌아갔다.
나는 시환과 문 앞에 남았다.
찬 공기가 재킷 안으로 들어왔다. 시환이 문을 열어 줬지만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제가 두 번 두드려서 확인하러 오신 줄 알았어요.”
“무슨 확인입니까?”
“일 잘하고 있나. 불편한 일은 없나.”
“그것도 궁금하셨을 겁니다.”
시환은 열린 문을 잡은 채 나를 봤다.
“오늘은 조금 달랐고요.”
나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알겠어요.”
시환의 눈이 내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시환이 뒤따라와 문을 닫았다.
2층으로 올라오니 내 책상에 출고표가 그대로 있었다. 시환이 옆에 섰고, 나는 종이 끝을 맞추려다 손을 멈췄다.
시환도 그 손을 봤다.
“이제 버릇 보면 다른 생각 하겠네요.”
“무슨 생각입니까?”
“직접 말씀하시면 일을 못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요.”
시환이 잠깐 조용했다.
나는 가방을 책상 옆에 걸었다. 손목시계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시환이 물었다.
“11월 20일, 연차 냈죠?”
“냈어요.”
“나도 냈습니다. 3년 만의 연차.”
(38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