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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품의서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2 12:06:31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

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

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

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

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

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

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

«▲»

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

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

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

‘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

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손목시계를 봤다.

8시 40분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

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

“일찍 왔네요.”

“서류 확인하러 왔어요.”

“네.”

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

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

『품의서』

『건명: 혼인.』

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

‘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

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

나는 종이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었다.

『신청인: 우시환.』

『사유: 3월 3일 사직서 사유와 같음.』

『비고: 결재 기한 없음. 반려 가능.』

맨 아래에는 결재란이 있었다.

신청인 칸에는 시환의 서명이 끝나 있었다. 내 칸만 비어 있었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시환을 봤다.

“사유를 이렇게 쓰시면 제가 알아서 해석해야 하는데요.”

“이미 읽었습니다.”

“제 사직서를요?”

“네.”

“그때도요?”

“그때도요.”

나는 결재판 모서리를 잡았다.

사직서를 내밀었던 날에는 이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책상 아래로 감추고 싶었고, 빨리 대표실을 나가고 싶었다.

오늘은 종이를 다시 들었다.

“수리하고 사유에도 동의하셨죠.”

“네.”

“그럼 이건 새 서류가 아니라 후속 서류네요.”

“맞습니다.”

대답이 너무 빨라서 웃음이 났다.

시환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다 멈췄다. 결재판을 든 내가 웃고 있어서인지, 아직 읽는 중이라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비고부터 확인할게요.”

“말씀하세요.”

“기한 없음.”

“네.”

“반려 가능.”

“네.”

“수정 요청도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나는 결재판을 책상에 놓았다.

“신청인은 그대로요.”

“네.”

“건명도 그대로.”

시환의 손이 책상 가장자리에서 떨어졌다.

나는 서랍을 열었다. 계약서 확인할 때 쓰는 빨간 인덱스 탭을 꺼내 사유 줄 옆에 붙였다.

얇은 탭 끝이 종이 밖으로 조금 나왔다.

“사유도 그대로요.”

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결재란에 내 이름을 썼다. 늘 하던 서명이었다. 마지막 획을 끝내고 나서 종이를 조금 돌려 시환 쪽으로 밀었다.

“결재 완료입니다.”

시환이 결재란을 봤다.

눈길이 내 이름 끝에서 잠깐 멈췄다.

“승인 사유는요.”

“같은 사유요.”

나는 탭을 붙인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대표님.”

시환이 나를 봤다.

“그때는 퇴사 사유였고요.”

나는 빈 서랍을 닫았다.

“지금은 같이 살고 싶은 사유예요.”

시환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가 닫혔다.

‘확인. 저 사람도 말이 안 나올 때가 있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신청인이 다음 절차 진행하시면 됩니다.”

“네.”

시환이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를 여는 손이 평소 서류를 넘길 때보다 느렸다.

반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먼저 왼손을 내밀었다.

시환은 내 손을 받치고 반지를 끼웠다. 손가락 마디를 지나갈 때는 조금 멈췄다가 천천히 밀었다.

반지가 자리를 잡자 시환의 엄지가 그 아래를 가볍게 쓸었다.

“맞네요.”

“네.”

“언제 확인했어요?”

“지난번에 지유 씨가 알려 줬습니다.”

생각났다. 손에 맞지 않던 액세서리를 빼면서, 내 치수를 혼잣말처럼 말한 적이 있었다.

“그걸 기억했어요?”

“네.”

“일정 외우는 건 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시환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건 외웠습니다.”

나는 잡힌 손을 조금 당겼다.

시환이 가까이 왔다. 내가 고개를 들자 시환의 손이 내 볼 옆에서 멈췄다.

나는 그 손에 뺨을 가볍게 댔다.

입맞춤은 짧았다.

떨어지고 나서도 시환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반지를 내려다봤다가 결재판을 봤다.

“원본은 제가 가져갈게요.”

“네.”

“신청인 보관용 사본 필요하세요?”

“필요합니다.”

“그럼 복사해 드릴게요.”

복사기로 향하려는데 시환이 손을 놓았다.

나는 바로 멈췄다.

“이동할 때는 잡고 있어도 돼요.”

시환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복사기까지 몇 걸음 안 됐다. 굳이 나란히 걸으니 책상 모서리에서 한 번씩 몸을 비켜야 했다.

‘아니. 동선이 안 좋네. 그래도 이대로.’

덮개를 열고 품의서를 올렸다.

유리 위로 빨간 탭 끝이 조금 들렸다. 나는 손끝으로 종이를 펴고 복사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시환이 물었다.

“아침 먹었습니까?”

“아직요.”

“먹으러 갑시다.”

“일정표 있어요?”

“오늘은 없습니다.”

나는 복사된 종이를 받아 시환에게 건넸다.

“그럼 제가 정할게요. 밥 먹고 조금 걸어요.”

“좋습니다.”

시환은 사본을 반으로 접지 않고 그대로 들었다.

나는 원본을 가방에 넣었다. 서류가 구겨지지 않게 다이어리 사이에 끼우고 지퍼를 닫았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시환이 내 외투를 들어 줬다. 소매에 손을 넣는데 반지가 안감에 잠깐 걸렸다.

나는 손을 빼서 다시 넣었다.

시환이 웃었다.

“왜요.”

“확인하는 것 같아서요.”

“맞아요. 자꾸 확인하게 되네요.”

나는 외투 단추를 잠그고 왼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시환이 바로 잡았다.

«▲»

월요일 아침, 은채는 내 손보다 결재판을 먼저 봤다.

내가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다가 원본까지 함께 내려놓은 탓이었다.

“팀장님, 이거 새 양식이에요?”

“아니요.”

“건명이…….”

은채가 말을 멈췄다. 종이를 보던 눈이 내 왼손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나는 품의서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개인 서류예요.”

“개인 서류도 결재를 하시는구나.”

“어쩌다 보니요.”

채 대표가 작업복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가왔다.

“무슨 결재?”

은채가 내 얼굴을 봤다. 나는 손을 치웠다.

채 대표는 종이를 읽고 입을 가렸다.

“어떡해.”

“반려 안 했어요, 대표님.”

“그건 봤어. 이름이 이렇게 크게 있는데.”

내 서명이 평소보다 조금 컸다.

그걸 이제 알았다.

은채는 내 허락을 받고 기념으로 한 부만 복사하겠다며 복사기로 갔다. 나는 거래처 주문서를 펼쳤다.

새로 들어온 수량을 확인하고 있는데 은채가 복사본을 들고 게시판으로 향했다.

“은채 씨.”

“여기 빈자리 있어요.”

“복사만 한다면서요.”

“복사했고요. 보관하려고요.”

채 대표가 은채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이건 내가 액자 한다.”

“대표님.”

내가 부르자 채 대표가 종이를 등 뒤로 숨겼다.

“내 자리 옆에만 놓을게.”

“회사 서류 아니에요.”

“알아. 그래서 매출 보고서 옆에 안 놓을 거야.”

‘아니. 위치 문제가 아닌데.’

그때 계단에서 올라오던 찬영이 멈췄다.

은채가 빈손으로 복사기를 가리켰다.

“안 비서님. 결재된 원본은 어디 보관해요?”

찬영은 상황을 확인하듯 내 손과 채 대표 뒤에 들린 종이를 봤다.

“원본은 인사 기록에 보관해야 합니다.”

“어느 회사 인사 기록이요?”

내가 묻자 채 대표와 은채도 찬영을 봤다.

찬영의 눈이 창가 책상으로 갔다.

시환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짧게 말했다.

“개인 보관입니다.”

“확인했습니다.”

“혼인도 온빛 인사팀에서 처리해요?”

은채가 묻자 찬영의 귀가 빨개졌다.

“그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가방에 원본을 넣고 지퍼를 닫았다.

“원본은 제가 보관할게요. 사본은 신청인한테 있고요.”

채 대표가 종이를 앞으로 가져왔다.

“이건?”

“액자까지는 안 돼요.”

“그럼 오늘만 볼게.”

은채는 휴대폰를 들었다가 내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사진은요?”

“찍어도 돼요. 보내는 건 저한테만요.”

“네.”

은채가 종이를 평평하게 펴려 하자 찬영이 한쪽 모서리를 잡아 줬다. 은채는 화면으로 위치를 확인하고 반대쪽을 조금 옮겼다.

“거기 그대로요.”

“네.”

사진을 찍는 동안 찬영은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둘을 보다가 주문서로 눈을 돌렸다.

“오늘 출고는 평소대로예요. 다들 자기 일 해요.”

“팀장님도요?”

“저도요.”

나는 왼손으로 주문서를 잡았다.

종이가 밀리지 않게 누르자 반지가 책상 위에서 작게 닿았다. 시환이 그 소리를 듣고 이쪽을 봤다.

나는 주문서 위로 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시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책상에 앉았다.

«▲»

봄이 되자 채 대표는 빈 화분을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았다.

토마토 모종 두 개가 화분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올해는 처음부터 둘 다 창가에 놓자.”

은채는 바닥에 깔 종이를 펴고, 규민은 흙 봉지를 옮겼다. 규민의 품에 있던 도담이 봉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기가 앉을 자리를 흙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여기서 감독해.”

도담은 내 손가락을 잡았다.

반지가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손을 조금 돌렸다. 도담은 놓지 않았다.

규민이 웃으며 아기의 손을 살살 폈다.

“팀장님 결재권까지 가져가려고?”

“그건 아직 안 돼요. 출고 일정부터 배워야 해요.”

주연이 문구점에서 가져온 빈 상자를 내려놓다가 웃었다.

“너 아기한테도 업무 순서 알려 주니?”

“중요하니까.”

나는 상자를 받아 화분 받침으로 쓸 만한 것을 골랐다. 모덕규 사장은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화분 밑을 살폈다.

“물 새면 아래 책상 젖어. 받침부터 제대로 놔야지.”

찬영이 가방을 내려놓고 화분을 들었다. 은채는 그 밑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

“조금만 왼쪽이요.”

“이만큼입니까?”

“네. 딱 좋아요.”

모덕규 사장이 손을 털었다.

“여기는 문구 회사가 토마토도 키우네.”

채 대표가 모종 잎을 살폈다.

“작년에 잘 먹었잖아요.”

“올해도 내 몫 있어요?”

“화분 옮겨 주셨으니까 있어요.”

나는 모종을 하나씩 화분에 넣었다. 시환은 내 옆에서 흙을 받쳐 줬다.

소매가 올라가고 손목에 흙이 조금 묻었다.

“의장님, 거기 조금만 더요.”

내가 말하자 시환이 흙을 더 담았다.

채 대표가 물뿌리개를 들고 왔다.

“이제 됐다. 담당자한테 맡기자.”

시환이 물뿌리개를 받았다.

은채는 창가 책상을 한 칸씩 가리켰다.

“본업 자리 여기. 토마토 업무 여기.”

“확인했습니다.”

시환은 흙이 넘치지 않게 물을 조금씩 부었다. 나는 화분 밖으로 떨어진 흙을 모았다.

주연이 내 책상 위에 놓인 거래처 주문서를 보고 물었다.

“우리 것도 들어왔지?”

“응. 수량 확인했어. 나가기 전에 표지 견본 보고 가.”

“그럼 화분보다 그거 먼저.”

나는 주문서에서 주연문구를 찾아 표시했다. 글벗문구 출고 날짜도 확인하고, 온빛몰에 보낼 파일을 열었다.

채 대표가 손을 씻고 내 자리로 왔다.

“팀장님. 그건 내일.”

“견본만 보여 줄게요.”

“그럼 나도 볼래.”

주연과 채 대표가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은채는 손에 묻은 흙을 털고 새 표지를 가져왔다.

도담이 소리를 내자 규민이 아기를 안아 올렸다.

누가 떨어뜨린 흙 봉지를 찬영이 묶었고, 모덕규 사장은 남은 흙을 계단 아래로 가져가겠다고 들었다.

시환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화분의 방향을 조금 돌렸다.

두 모종의 잎이 창가 쪽을 향했다.

나는 표지 견본을 주연 앞으로 밀었다.

“이쪽은 매장에 세워 놨을 때 글씨가 잘 보일 거야.”

주연이 고개를 숙여 표지를 살폈다.

내 왼손 옆으로 채 대표의 손이 나란히 놓였다. 잉크 묻은 손끝이 다른 표지를 짚었다.

“우리 거 예쁘잖아.”

“예쁘죠. 납기도 맞춰야 하고요.”

“알았어, 팀장님.”

창가에서 시환이 작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견본을 펼쳤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먼저 출근했다.

책상 위에 오늘 보낼 출시 일정표를 펼쳤다. 직거래점에서 온 주문을 확인하고, 채 대표가 결재할 서류를 따로 놓았다.

창가에는 어제 심은 모종 두 개가 있었다.

나는 화분 아래 받침을 손끝으로 확인했다. 물이 새지 않았다.

내 자리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다.

품의서는 다이어리 사이에 들어 있었다. 빨간 인덱스 탭이 붙은 사유 줄만 조금 내다보였다.

종이를 꺼내지는 않았다.

나는 서랍을 닫고 일정표의 빠진 칸을 채웠다. 손목시계를 보는 척할 필요도 없었다. 컴퓨터 화면 아래 시간이 보였다.

8시 40분.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시환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막 닫은 문을 잡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

“좋은 아침이에요, 의장님.”

시환은 창가 책상에 가방을 놓았다. 화분 두 개를 먼저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거래처에 보낼 파일을 저장했다.

잠깐 뒤, 화면 아래에 작은 알림이 떴다.

창가 쪽을 보자 시환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종이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답을 썼다.

『우시환(종이달 토마토 담당): 출근했습니다. 결재자님.』

『원지유: 결재 완료.』

(40화 끝 ·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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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 퇴사 사유: 대표님   37화. 재인쇄 발주서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 퇴사 사유: 대표님   36화. 송년 행사 기획안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 퇴사 사유: 대표님   35화. 완판 보고서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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